#64화
미미르의 말에 따라 움직인 이안이 동굴을 발견한 순간, 그의 머릿속에 처음 든 생각은.
‘이게 왜 이런 곳에?’
의문이었다.
드래고니아는 용족 최후의 은신처다.
종족 전체가 드래고니아와 함께 옥쇄(玉碎)할 생각이 아닌 이상, 비상시를 대비한 탈출 통로 한두 개 정도는 만들어 두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최근에 만들어진 동굴이군. 표면이 너무 매끈해.]
동굴을 이리저리 훑어본 미미르 역시 이상한 점을 느꼈는지 고개를 갸웃했다.
[탈출에 대비한 비밀 통로는 아닌 것 같다. 그렇다기엔 딱히 숨겨져 있지도 않아.]
‘그러니까 말이지.’
미미르의 말에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벙커나 은신처의 비밀 통로는 최대한 그 정체를 숨기기 위해 설계할 때부터 많은 신경을 쓴다.
초기 계획에는 있지도 않던 통로를 새로 뚫는다는 것은, 숨기기도 어려울뿐더러 자칫하면 외부에 그 존재를 발각당할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저 녀석들.’
이안의 시선이 미미르를 겨눈 방향으로 향했다.
하나같이 긴 장창을 등에 매거나 손에 쥔 수십의 기사들.
방진도 짜지 않은 채, 3미터는 가볍게 넘길 긴 창을 사용하는 자들은 이 대륙에서 오직 한 집단뿐이다.
‘구스타프 공작가.’
오러와 페르소나를 전제로 만들어진 장창술을 사용하는 유일한 자들.
그들이 이 통로에 갑자기 나타난 것이.
‘과연 우연일까?’
씨익
대강의 상황을 파악한 이안은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그대는 누구요?”
상대, 적발의 청년 클라우는 이안의 웃음을 보곤 얼굴을 굳혔다.
“나는 클라우 구스타프요. 보아하니 인간인 것 같은데, 우리는 지금 공작가의 전통에 따라 성인식을 진행 중이니 길을 비켜주면 고맙겠소.”
상대의 신분을 정확히 알 수 없으니 존대어를 쓰긴 했지만, 숫자와 배경을 믿은 명백한 협박.
‘거기다, 우리는 환수급의 페르소나를 가지고 있다.’
클라우는 옆에 선 베니츠를 흘끗 바라봤다.
구스타프 기사단의 제1 분견대장이자, 공국 전체에서도 그 수가 스물을 넘기지 않는 환수급 페르소나의 주인.
클라우가 정체도 모르는 상대에게 배짱을 부릴 수 있는 이유였다.
하지만.
“야, 귓구멍이 막혔냐?”
“뭐라고?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돌아온 것은 이안의 차가운 눈빛뿐이었다. 폭언을 날린 이안은 오만한 표정으로 당황한 상대를 내려다 봤다.
“내 이름은 이안 아슈타르.”
“이, 이안?”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
이안의 말을 들은 클라우가 필사적으로 기억을 떠올렸다. 이안은 말을 이어나갔다.
“이곳은 오늘부로 알자스 남작령에 편입되었다. 당장 꺼지지 않으면 영주의 권한으로 네놈들을 처분해주지.”
말을 마친 이안은 상대에게 겨눈 권총을 까딱거렸다. 권총은 언제라도 발사할 수 있도록 준비된 상태.
“이안, 이안 아슈타르!”
클라우 역시 이안의 정체를 깨달은 듯,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일이 쉽게 풀릴지도 모르겠군.’
다른 영주의 영지에서 무력을 행사하는 것은 내정간섭이다.
그 누구의 것도 아니었던 작센산맥이 영지에 포함되는가는 논쟁의 여지가 있겠지만, 최소한 이 자리에서 충돌이 일어날 일은 없을 것이다.
연합공국에서 아슈타르의 이름은 그렇게 가볍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이안이 평범한 아슈타르의 사람일 때의 이야기다.
“아슈타르의 폐검! 그 망나니!”
[크하하하하핫!]
일전에도 들어본 이안의 별명을 듣자마자 미미르가 폭소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클라우의 황당해하는 표정을 확인한 이안의 웃음이 썩어들어 갔다.
‘그 빌어먹을 자식, 말하는 건 멀쩡해선 왜 이따위로 살아온 거야?’
꿈속의 환영을 떠올린 이안이 속으로 이를 갈았다.
전 대륙에 널리 퍼진 이안의 시궁창 같은 평판이, 쉽게 넘어갈 일도 쉽게 넘어가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난 또 제법 폼 좀 잡길래 뭐라도 되는 줄 알았더니, 아슈타르의 기생충이었잖아?”
이안의 정체를 깨달은 클라우가 낄낄 웃으며 장창의 끝을 들어 올렸다.
“어차피 네놈 같은 쓰레기는 이런 곳에서 사라져도 아무 관심도 없겠지.”
아니, 오히려 골칫거리를 없애줬다고 감사의 인사를 전해주진 않을까.
상대를 어떻게 처리하건 아무런 뒤탈도 없을 거란 확신이 클라우의 간을 부어오르게 만들고 있었다.
“공자님, 조심하셔야 합니다.”
하지만 그를 수행하던 베니츠는 클라우를 말리려 했다.
그는, 라이덴이 영성의 홀에서 페르소나를 얻고 나온 날을 떠올렸다.
‘아슈타르에, 괴물이 숨어있었어.’
누구에게나, 어느 때나 당당하던 라이덴이 무언가에 질린 듯한 표정을 짓는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으니까.
‘뭔가가 있다.’
베니츠의 직감이 계속 경고음을 보내고 있었다.
여기서 그의 주군이 나선다면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위험신호를.
“공자님, 라이덴 공자님께서 일전에 이안 아슈타르의 이야기를….”
그가 라이덴의 이름을 언급하지만 않았다면, 그의 작은 주군은 베니츠의 조언을 따랐을지도 모른다.
“형님 얘기가 여기서 왜 나와?”
자신의 둘째 형, 라이덴의 이름을 듣자마자 클라우의 표정이 굳었다.
“내 앞에서 다시는 형님 얘기를 꺼내지 말라고 했을 텐데?”
“…죄송합니다.”
클라우의 서슬 퍼런 말에 베니츠가 실수를 깨닫고는 고개를 숙였다.
‘틀렸군.’
현대 참룡공의 여러 자식 중에서도 두각을 드러내는 라이덴 구스타프.
항상 그와 비교당하며 살아왔던 클라우였으니, 베니츠의 말은 역린을 건드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부디, 자비를 베풀어주길 바라는 수밖에.’
고개를 숙인 베니츠가 입술을 깨물며 기도했다.
[적을 앞에 두고 딴짓이라니, 허약한 용들만 상대하니까 정신 상태가 저 꼴이지. 쯧쯧.]
그 모습을 보며 미미르가 혀를 찼다.
이안이 인간이 아니라 마족이었다면 저 시간에 다섯 명은 더 죽어 나갔을 게 불을 보듯 뻔했다.
우우웅
하지만 미미르의 말이 들릴 리 없는 클라우는 자신만만하게 창에 오러를 끌어모았다.
아직 페르소나도, 용혈도 얻지 못했지만, 그는 익스퍼트 중급이다.
파앗
검붉은 색의 오러가 길게 뻗은 창끝을 서서히 물들이기 시작했다. 클라우가 이안을 향해 입꼬리를 올렸다.
“검을 들어라. 설마 죽음을 앞에 두고 검조차 쥐지 못하는 겁쟁이인 거냐? 최소한 창을 휘두르는 보람 정도는….”
자신의 운명을 아직 깨닫지 못한 애송이가 입을 나불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개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
드르륵
이안의 권총이 불을 뿜었다.
퍼퍼퍽
탄피가 하늘에 흩날림과 동시에 9mm 파라블럼탄이 애송이의 몸뚱이를 파고들었다.
“!”
챙그랑
생전 처음 느껴보는 격통이 전신으로 퍼지자 클라우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손에서 놓친 장창이 동굴바닥을 제멋대로 굴렀다.
“거, 가만히 있으려니까 역겨워서 원.”
철컥
이안은 똥 씹은 표정으로 글록의 빈 탄창을 채워 넣었다.
“아니, 페르소나도 없는 주제에 저딴 소리가 입에서 나온다고? 도대체 날 얼마나 호구로 본 거야?”
자신보다 못하다고 생각되는 자가 무시하는 것이 기분 좋을 리 없다.
이안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바닥에 널브러진 클라우를 노려봤다.
“페, 페르소나!”
“상대가 페르소나를 가지고 있다!”
난리가 난 것은 구스타프 진영이었다.
이안이 작은 주군을 공격한 것이 페르소나라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환수급의 페르소나를 보유한 베니츠가 재빨리 쓰러진 주군의 앞을 가로막았다.
‘빌어먹을, 그러게 왜 나서서는….’
베니츠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고작 성인식 따위에 구스타프의 후계자 중 하나가 부상을 입다니.
성에 돌아간다면 공작에게 문책을 받을 것이 뻔하다.
‘그래도, 공자님이 죽는 것보단 낫겠지.’
혹여나 그의 작은 주군이 죽기라도 한다면, 그 후폭풍은 상상할 수도 없을 것이다.
감히 자신의 목숨 따위로는 대신할 수 없을 정도로.
우웅
베니츠가 마력을 끌어올렸다. 푸른빛의 마력이 그의 페르소나, 흑창을 향해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상대는 페르소나를 얻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고작해야 병기급일 터.’
잘못된 판단이었지만, 베니츠는 확신했다.
그 정도라면 자신이 가진 환수급 페르소나의 힘으로 충분히 이안을 제압할 자신이 있었다.
“오라….”
베니츠가 재빨리 시동어를 읊었다.
고대의 신화가 그의 마력과 페르소나를 통해 현세에 재현되려던 순간.
“그 입을 멈추지 않으면, 네 주군이 죽게 될걸?”
이안의 협박을 듣자마자 시동어를 외치려던 베니츠의 입이 일순 다물어졌다.
그의 머리가 필사적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헛소리다. 병기급의 페르소나 따위로 나를 뚫고 주군에게 위해를 가할 순 없어.’
페르소나의 등급은 그만큼 절대적이다.
최소한, 정면에서 병기급 페르소나가 환수급 페르소나를 상대할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뭔가가 있다.’
이안의 자신만만한 표정에서 베니츠는 뭔가를 읽었다. 그의 눈이 쓰러진 주군 쪽을 곁눈질했다.
그리고.
“이, 이런!”
사태를 파악한 베니츠는 당황해 소리쳤다.
스으으
팔.
그림자에서 솟아난 검은 팔이, 공자를 쓰러트린 바로 그 무기를 작은 주군에게 겨누고 있었으니까.
‘자칫 잘못하면….’
죽는다.
무기의 정체는 알 수 없어도, 저 검은 팔이 쥔 무기가 주군의 목숨을 위협하기에 충분하단 사실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꺼져, 너희 공자님 대가리를 날려버리기 전에.”
베니츠는 이안의 협박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
[저들을 살려 보낸 것은 현명한 선택이었다.]
“글쎄, 과연 그럴까?”
홀로 남은 통로 안에서 미미르의 말을 들은 이안이 고개를 갸웃했다. 미미르가 말을 이었다.
[저들을 죽였다면 구스타프 공작가 전체가 네놈의 목을 원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네 무기는 정체를 들키기 너무 쉬우니까.]
“지금도 썩 다르진 않은 것 같은데.”
이안은 생각이 조금 달랐다.
자신이 구스타프 공작가의 행사를 방해한 것은 사실이 아닌가.
지금이라도 놈들을 쫓아가서 마무리를 지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안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목숨을 빼앗지는 않았으니,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항의 정도는 할 수도 있겠지만, 네 목숨을 위협하지는 않을 것이다.]
미미르는 호언장담했지만, 이안은 찝찝함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찝찝함을 채 지우기도 전.
타타타탓
뒤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알리시온인가?’
이안은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드래고니아 쪽이니, 상대는 분명 용족일 터.
자신과 함께했던 일행이 아니라면, 이곳에 등장할만한 자는 통로를 만들어낸 자뿐이다.
그 말인 즉.
‘내통자겠군.’
생각을 마친 이안은 천천히 권총을 들었다.
들켜서는 안 될 비밀을 외부인에게 들켰으니, 상대는 분명 자신을 입막음하려 할 것이 뻔했으니까.
하지만 이안도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이 있었다.
“호오, 어떤 쥐새낀가 했더니 필멸자 놈이었군?”
그 내통자가, 용들이 수호자의 위치를 되찾아야 한다 주장하는 전룡회의 수장, 말레이우스라는 사실이었다.
“알리시온님과 벨라크론님을 속여 놓고 뒤로는 개구멍을 파놓다니, 목숨이 아깝지 않은 모양이로구나.”
용들에게 둘러싸인 말레이우스가 이안을 향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