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드래고니아에 도착한 지 일주일 째.
이안은 생각보다 더 오래 머물러야 했다.
[용이란 종족이 쇠락하긴 했지만, 그래도 대륙의 수호자 역할을 맡던 종족이다. 그 혈통에 잠들어있는 힘을 깨우는 게 그렇게 금방 될 리 없지.]
알론소는 용혈을 깨우러 간다며 벨라크론과 함께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러던 것이 벌써 일주일.
물론 지내기 불편한 점은 없었다.
용의 도시라는 말이 무색하게, 이곳의 모든 시설은 인간을 비롯한 필멸자들의 크기에 맞추어져 있었으니까.
이안의 걱정은 다른 것이었다.
“이대로 자리를 비워두면 영지에 별로 좋진 않을 것 같은데.”
당연한 말이지만, 영주가 영지를 오래 비우는 것이 좋은 일은 아니다.
벌써 일주일이 지났지만 돌아갈 기미도 보이지 않으니, 이안의 걱정이 영 근거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차피 일할 생각은 없지 않았나. 부하들에게 죄다 떠넘겨놨으니 당분간은 문제없을 것이다.]
말을 마친 미미르가 갈기를 떨어대며 코웃음 쳤다.
[그보다, 용의 제안은 정말로 받아들일 셈이냐?]
“이미 결정 난 일이야.”
미미르의 말에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용족을 보호해주게.’
뜬금없는 제안이었다.
명색이 수천, 수만 년을 살 수 있는 불멸자인 용들이 고작해야 백 년 남짓 살아가는 필멸자에게 보호를 요청하다니.
그렇다 해서 용들을 보호함으로써 큰 이득이 있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다른 건 몰라도, 구스타프 공작가와 분쟁이 생기는 것은 피할 수 없겠지.”
참룡공, 구스타프 공작가의 전통에 따라 그 후손들은 용의 목을 베고 권능을 빼앗는다.
이안이 용들의 보호자로 나선다면, 가장 반발할 것이 누구인지는 뻔한 일이지 않은가.
벨라크론이 이안의 과거에 관한 이야기를 알고 있지 않았다면, 그리고 꿈속의 환영이 아니었다면 그는 제안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너도 제법 이성적인 녀석이라고 생각했는데, 고작 이상한 책 쪼가리 하나에 얽매이다니.]
자세한 사정을 알지 못하는 미미르는 이안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보며 고개를 저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들을 받아들인다면 용들이 가진 지식을 이용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미르는 이안의 마음을 돌리는 대신, 용들의 쓸모를 찾아내기 시작했다.
[대부분 소실되었다 하더라도 수만 년을 살 수 있는 존재들이 가진 지식이란 게 만만한 것은 아니니까. 어쩌면 고대의 신기나 마법기가 있을지도 모르지.]
정작 본인들은 능력이 부족해 그 지식과 마법기들을 다루지 못한다는 것이 아이러니하지만.
이안은 몸뚱이의 전 주인을 떠올렸다.
‘이 상황을, 녀석은 미리 생각한 건가?’
도대체 녀석은 어디까지 보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왜 용들을 얻으라 한 것일까.
생각만큼의 이득이 없단 것을 알면서도, 이안이 쉽사리 벨라크론의 제안을 뿌리치지 못하는 이유였다.
결국.
“젠장, 훈련이나 해야지.”
일주일이 지난 오늘도 결론을 내지 못한 이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집 밖으로 나섰다.
어차피 쉽사리 결론이 나지 않을 문제라면 다른 일에 심력을 쏟는 편이 나았으니까.
끼익
집 밖으로 나서자 거대한 동굴 아래로 세워진 지하도시가 한눈에 들어왔다. 이안은 미케론을 부르기 위해 주머니에서 검은 용 모양의 브로치를 꺼내 들었다.
우웅
마력을 불어넣자, 미미한 진동과 함께 마력이 어디론가 내쏘아졌다.
이안은 팔짱을 낀 채 곧 떨떠름한 얼굴로 마주할 흑룡을 기다렸다.
[그나저나, 놀랍군. 페르소나를 실시간으로 교정할 수 있다는 게 이렇게 쓸모 있을 줄이야.]
“당연하지. 내 무기를 전투 스타일에 맞출 수 있다는 의미니까.”
미미르의 말에 이안이 콧방귀를 뀌었다.
드래고니아에서의 일주일을, 이안은 페르소나의 교정과 훈련에 투자했다.
결국, 공격 자체는 화기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이안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능력을 얼마나 적재적소에 쓰느냐 하는 것이었으니까.
미미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전에 비하면 전투방식이 훨씬 부드러워진 느낌이다. 불필요한 힘의 낭비도 상당히 줄어든 것 같고.]
“아직 멀었어.”
하지만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이미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능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그가 상대해야 할 자들 역시 인간을 초월한 것은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때.
“여어, 오늘도 훈련이야?”
기다렸던 것과는 다른 소녀의 목소리에 이안은 고개를 돌렸다. 상대의 정체를 확인한 이안은 의구심에 눈을 좁혔다.
“알리시온?”
용족 전체에서 고작 다섯뿐인, 엘더급에 이른 골드 드래곤.
지난 일주일 동안 제법 친해진 알리시온 이였다.
그녀가 아저씨처럼 손을 번쩍 흔들며 다가왔다.
“필멸자들은 신기하단 말야. 고작해야 일주일밖에 안 됐는데 휙휙 변하는 것도 그렇고, 생전 처음 보는 무기를 다루는 것도 그렇고.”
성큼 다가온 알리시온이 이안이 허리춤에 찬 총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훑었다. 이안이 손을 내저었다.
“왜 네가 온 거지? 미케론은?”
“지금 순찰 나갔어. 어쨌건 너희들을 맡을 수 있는 사람은 우리 중에서도 엘더급뿐이니까. 그리고.”
말을 마치자마자 알리시온이 이안의 뒤에 바짝 붙어 섰다.
“네 훈련도 구경 좀 하고.”
이안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도대체 남의 훈련은 뭐 하러 보는 거야?”
“그냥, 재밌잖아. 필멸자들은 어떻게 싸우나 궁금하기도 하고.”
“맘대로 해라.”
그녀가 어깨를 으쓱이자 이안은 고개를 내저었지만, 딱히 제지는 하지 않았다.
수천 년 먹은 용 치고는 정신연령이 소녀 같긴 했지만, 어차피 훈련장까지 이동하려면 그녀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무슨 무협지에서나 나올 비밀수련도 아니고, 방해만 하지 않는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이안은 그녀와 함께, 천천히 요 일주일 동안 훈련장으로 사용하던 공터를 향해 걸어 나섰다.
“그 꼬맹이는?”
“오늘도 방에서 쉰다더군. 햇빛 때문에 견딜 수가 없다나.”
알리시온의 물음에 이안은 짧게 답했다.
이 지하도시의 모든 광원을 담당하는 선조의 빛.
그 빛에 담긴 신성력이 파이톤에겐 퍽 불편했으리라.
“아, 마족의 피가 섞였댔나? 그럼 어쩔 수 없지 뭐. 불쌍하긴.”
이안의 답에 그녀가 안타깝단 표정으로 혀를 차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은 잊었던 궁금증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까, 그 녀석은?”
“누구?”
“저번 주에 너한테 뭐라고 하던 녀석.”
“아, 말레이우스?”
이안의 설명을 듣고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도 뭐, 어디 순찰 돌고 있겠지. 엘더 드래곤들은 각기 지정된 위치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으니까. 아니면 제 친구들하고 노닥거릴 수도 있고.”
“썩 좋은 관계는 아닌 것 같던데.”
이안은 말레이우스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그가 이안과 알리시온을 노려보는 날카로운 눈빛은, 누가 보더라도 아군보다는 적을 향한 것이었다.
하지만 알리시온은 고개를 저었다.
“좀 꽉 막힌 녀석이긴 해도, 나름 용족을 위해서 하는 말이야.”
그 말을 내뱉는 그녀의 눈엔 안타까운 빛이 가득했다.
“어렸을 적의 찬란했던 과거를 잊지 못하는 불쌍한 아이지. 이젠 필멸자들과 힘을 합해야 한단 걸 모르고 말야.”
“뭐, 그렇다면야.”
이안의 감과는 조금 다른 말이었지만, 그는 과민반응하지 않기로 했다. 뒤로는 몸을 지킬 준비를 해놔야겠지만.
“나와 미케론, 할아버지까지 합치면 엘더급 셋이 너희를 보호하고 있어. 너희가 문제만 일으키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으니까 걱정 말라고.”
“알았어.”
그녀의 말에 대강 대답한 이안은 걷는 속도를 높였다.
하지만 오늘은 훈련을 진행할 수 없었다.
왜애애앵
사이렌.
고막을 찌르는 익숙한 소리에 이안이 급히 주변을 둘러봤다.
갑작스레 울린 사이렌이 도시를 감싼 공동 전체를 울리기 시작했다.
“무슨 소리지?”
“외부 침입이야.”
이안이 고개를 돌리자, 잔뜩 열 받은 표정을 지은 알리시온이 보였다.
“외부 침입이라고? 누가?”
이안은 이해할 수 없었다.
지하에 꼭꼭 숨겨진 이 은신처를, 그것도 용들이 우글거리는 도시에 찾아올 침입자가 누가 있겠는가.
하지만 그녀는 고민조차 하지 않고 씹어뱉듯 말했다.
“구스타프, 그 개자식들이지 누구겠어.”
구스타프.
신창을 다루는 참룡공의 후손들.
그 말을 들은 이안의 표정이 굳었다.
그때.
[이안, 적이 느껴진다. 근데….]
미미르가 입을 열었다.
***
드래고니아의 바깥, 작센산맥 어딘가.
창과 갑옷으로 무장한 일군의 무리가 주변을 경계하며 산을 오르고 있었다.
“공자님.”
개중, 검은 창을 쥔 사내가 옆의 청년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마력으로 강화된 그의 귓가에 앵앵거리는 소리가 모기처럼 맴돌았다.
그가 여럿의 후계자들을 수행하며 산맥을 오를 때마다 몇 번이고 들어온 소리.
“저들이 눈치챘습니다.”
그들의 임무는 홀로 나온 용족을 찾아 용혈을 깨울 후계자에게 인계하는 것.
하지만 그 작업은 대부분 비밀리에 진행된다.
“엘더급의 드래곤들이 달려든다면 위험해집니다. 이쯤에서 철수하고 다음을 기약하는 것이 어떨는지요.”
멸족당한 것이나 다름없는 용들이라지만, 엘더급 이상의 힘을 가진 용들은 나름대로 위협적이었으니까.
공작가의 전력도 아닌, 고작해야 수행원 수준인 그들로서는 엘더급의 용을 막아내기 버거웠다.
하지만.
“아니, 계속 진입한다.”
이제 약관의 나이나 되어 보일까 싶은 적발 청년은 그 말에 고개를 내저었다. 흑창의 사내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클라우 공자님, 공자님의 배포는 인정합니다만 이건 위험합니다. 자칫 둘 이상의 엘더급이 모인다면….”
“걱정 마, 베니츠 경.”
클라우는 베니츠의 말에 고개를 젓고는,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기, 저쪽으로 돌아가지.”
“저곳은….”
클라우의 말에 베니츠는 당황했다.
그도 그럴 것이, 클라우가 가리킨 방향은.
“절벽이지 않습니까?”
능선 아래, 까마득히 깎아내려진 절벽이었으니까.
이곳은 작센산맥의 중턱.
이 높이에서 떨어진다면 오러로 강화된 신체를 지녔다 하더라도 죽음을 면키 어려우리라.
하지만 클라우는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나 역시 크로센 구스타프의 후손이야. 허언은 하지 않아.”
크로센 구스타프.
홀로 다섯의 용을 베면서 참룡공이라는 이명을 얻게 된 칠영웅 중 하나.
그 이름의 무게를 아는 일행의 입이 다물어졌다.
“따라와, 내가 길을 알고 있으니까.”
타앗
그 말을 마친 구스타프는 곧장 절벽 아래로 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다른 호위기사들 역시 난감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 뒤를 따랐다.
얼마나 내려갔을까.
“공자님, 이건….”
눈앞에 나타난 동굴을 본 베니츠의 눈동자가 떨려왔다.
절벽 한가운데에 딱 사람 하나가 들어갈 만한 동굴이 뚫려있다는 사실을, 그의 주군은 어떻게 알고 있었단 말인가.
“비밀통로야. 아는 정보원에게 들었지.”
자신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기사들을 잠시 훑어본 클라우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자, 그럼 들어가자고. 여기라면 아무도 모르게 드래고니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어.”
홀로 순찰하던 불운한 용을 사냥하는 것과는 다르다.
용족 최후의 은신처, 드래고니아는 말 그대로 용이 지천으로 널려있을 터.
그 안에서 용혈을 받아들이는 것은 땅 짚고 헤엄치기보다 쉬운 일일 것이다.
클라우와 일행은 조심스레 동굴 안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그들이 채 몇 발자국을 떼기도 전.
“돌아나가는 게 좋을 거야.”
금발의 사내가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여긴 내 영지니까.”
철컥
수십의 기사들을 향해 미미르를 겨눈 이안이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