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이안 아슈타르.
폐검, 망나니, 공작가의 수치.
온갖 부정적인 수식어로 점철된 아슈타르 공작가의 삼남.
그 몸속에 든 영혼이 이계의 강민혁이란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그 자신뿐이었다.
아니, 그렇게 알고 있었다.
이안이 이 책을 보기 전까지는.
[이안, 이 글을 읽을 수 있는 거냐? 이런 형태의 문자는 신검의 기억 속에도 없거늘….]
이안의 말을 들은 미미르가 놀란 듯 눈을 치켜떴다.
당연한 이야기다.
한글은 다른 세계인 지구의 문자. 그중에서도 극히 소수의 국가만이 사용하는 문자니까.
미미르가 한글에 대해 알고 있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말해.”
여태껏 숨겨왔던, 아무도 모를 거라 생각해온 사실이 드러나자 권총을 쥔 민혁의 손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두려움은 아니었다.
‘결국, 여기서도 이용당한 건가?’
그것보다는, 배신감에 가까웠다.
자신을 이용한 국가의 손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이안 아슈타르의 몸에 빙의한 것조차 누군가의 의도에 놀아난 것일지 모른다.
‘어쩌면, 꿈에 나온 그 이안 아슈타르의 환영도…’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이안의 입에서 비릿한 피맛이 맴돌았다.
“나도 아는 건 없네.”
하지만 벨라크론은 고개를 저었다.
“이 책에 자네의 이름이 실려 있단 사실도 지금 자네의 입으로 처음 들었으니까. 나는 그저 제작자 녀석의 유지를 전해줄 뿐이야. 내가 아는 것이라곤.”
척
“이 책자가 자네에게 도움이 될 것이란 것뿐이지. 녀석이 그렇게 말했으니 틀림없을 걸세.”
문제의 책을 집어 든 노룡이 고개를 저었다.
녀석.
벨라크론이 지칭하는 것은 분명 페르소나 시스템을 만들어 낸 제작자이리라.
‘어떻게 한글을 쓰고, 내 이름을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알아내기 위해선 눈앞의 노룡이 손에 든 책자를 이안의 손에 넣어야 한다.
어차피 노룡의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이었던 이안이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받아들이지. 하지만 부족해.”
그 선택지 안에서, 최대한 이득을 취할 방법을 찾을 뿐.
“드래고니아는 알자스 남작령에 정식으로 편입된다. 용족은 그 영지민으로서 영지민의 의무를 다해야 할 것이다.”
단순한 보호자가 아닌, 용족의 실질적인 지배자.
불쾌했지만, 이안은 꿈속 환영의 말대로 용을 자신의 휘하에 들일 생각이었다.
“후우.”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이안의 제안을 듣자마자 벨라크론은 체념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하지만 선택지가 없는 것은 그에게도 마찬가지.
“제안을 받아들여 줘서 고맙네.”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는 벨라크론을 이안은 굳은 표정으로 바라봤다.
***
거래, 혹은 계약이 끝나고.
“자네와의 약속을 깰 생각은 없네만, 조금만 시간을 주게. 아직 용족 중에도 현실을 깨닫지 못하는 이들이 있으니까.”
벨라크론은 조금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현실?”
“과거에 취해버린 아이들이지.”
이안이 되묻자 벨라크론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이안은 그들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좀 전에 만났던 용들인가 보군.”
전룡회라던가.
드래고니아에 들어선 자신들을 가로막은 한 무리의 용들.
이안의 말에 노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관리자의 영적 패턴을 느끼고 내가 먼저 나서지 않았다면, 분명 큰 사달이 났겠지.”
[다른 건 몰라도 사달이 날 쪽이 어디였는진 확실하군.]
벨라크론의 말을 듣고 미미르가 코웃음 쳤다.
환수급의 페르소나 둘은 절대 무시할 만한 전력이 아니었으니까.
아마 그곳에서 싸움이 벌어졌더라면, 십중팔구는 이안의 승리로 끝났을 것이다.
“그들에게 설명하고 이해시킬 시간이 필요하네. 어차피 용혈을 깨우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하니, 조금만 이곳에서 기다려주게. 지낼 곳은 마련해줌세.”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벨라크론은 아쉬운 표정으로 이안에게 부탁했다.
“일부러 시간을 끈다면, 나 역시 약속을 지킬 수 없을 거야.”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짐짓 으름장을 놓았다.
어차피 자신의 밑으로 들어올 것이라면 지금부터 상하관계를 확실히 인식시켜주는 편이 서로를 위해 나았으니까.
“자네, 생각보다 보통이 아니군.”
“그런 말은 자주 듣는 편이지.”
이안의 의도를 깨달은 벨라크론이 쓴웃음을 지었지만, 달리 방도는 없었다.
용의 멸족을 막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는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으니까.
“자네를 안내할 사람을 불러주겠네. 잠시만 기다려주게.”
말을 마친 노룡이 뭐라 중얼거리더니, 허공을 향해 입을 뻐끔거렸다. 통신마법을 사용한 모양이었다.
곧.
누군가가 거처의 문을 열고 나타났다.
산맥에서 이안에게 죽을 뻔한 엘더급의 블랙 드래곤.
미케론이였다.
“벨라크론님, 부르셨습니까? 어쩐 일로…, 너는?”
노룡을 향해 반가운 얼굴로 달려온 그의 표정은, 이안을 보자마자 차갑게 식었다.
자신에게 죽음의 공포를 맛보여준 장본인을 보고 어찌 아무렇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래 미케론, 잘 왔네. 앞으로 자네가 이 자를 안내하게.”
“예?”
벨라크론의 말을 들은 미케론의 표정이 구겨졌다.
***
“여기서 묵으면 된다.”
이안을 숙소까지 안내한 미케론이 마땅찮은 눈빛으로 말했다. 이안은 숙소를 슬쩍 훑어봤다.
‘용들의 거처인가.’
본래 용들이 살았다 전해지는 레어가 자연동굴 따위이기 때문일까.
지하도시를 지탱하는 암반에 위치한 숙소는 그저 뻥 뚫린 동굴의 형태였다.
동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아름다운 석문이 입구에 달려있다는 게 조금 다른 점일 뿐이었다.
“혹시라도 허튼짓을 했다간 네놈의 목숨은 없는 줄 알아라. 이 동굴 밖으로 한 발짝이라도 나가고 싶다면 내 허락을 받아야 할 것이다.”
말을 마친 미케론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이안을 쳐다봤다. 흑룡과 눈을 마주친 이안이 고개를 갸웃, 했다.
“손님 대접이 영 아닌데? 아까 전 할아범 말이랑은 다르잖아.”
“그건 벨라크론님께서 너희 필멸자들에게 자비를 베푸신 것뿐이다. 설마, 필멸자들이 드래고니아를 맘대로 활개 치도록 내버려 둘 줄 알았나?”
이안이 묻자 미케론이 단호하게 답했다. 녀석의 태도는 마치 죄수를 바라보는 간수와도 같았다.
하지만.
철컥
“그럼, 내가 나가려고 하면 막을 수는 있고?”
“그, 그건…”
권총을 겨눈 이안의 말에 미케론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조금 전, 이안이 날린 포탄에 죽기 직전까지 얻어맞던 일이 떠오른 탓이다.
‘만약, 이 필멸자가 거처에서 빠져나오고자 한다면…’
자신은 그것을 막을 수 있는가.
‘두렵다.’
공포.
용족 중에서도 고작 다섯뿐인 엘더 드래곤 중 하나인 자신이 할 만한 생각은 아니었지만.
그가 이안에게 느끼는 것은 분명 두려움이었다.
그 순간.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안절부절못하는 강아지 같은 흑룡을 보던 이안은 돌연 피식 웃고는 권총을 집어넣었다.
“됐고, 연락수단이나 하나 줘. 나도 여기까지 와서 깽판을 칠 생각은 없으니까.”
조만간 이들은 자신의 영지민이 될 것이다.
품에 안아야 할 자들을 상대로 굳이 분란을 일으킬 이유는 없지 않은가.
이안이 먼저 손을 내밀자 미케론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그렇다면, 이걸 받아라.”
그가 금속으로 만들어진 조그마한 표식을 내밀었다.
당장이라도 앞으로 달려갈 것 같은 검은 용의 형태를 띤 브로치에선 약간의 마력이 느껴졌다.
“이 브로치에 마력을 불어넣어라. 침입자만 없다면 금방 달려오지. 우리 일족의 문양이니 절대로 훼손해선 안 된다.”
미케론의 말을 들은 이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곤 바지 주머니에 표식을 쑤셔 넣었다. 그 모습을 본 미케론이 몸을 돌려 나서려 했다.
그때.
“아, 부탁하고 싶은 게 하나 더 있는데.”
“뭐지?”
이안의 말에 미케론이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이안이 입을 열었다.
“혹시 공터나 훈련장 같은 건 없어? 기왕이면 연습 상대도 있으면 좋겠는데.”
어차피 여기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면, 뭐라도 유용한 일을 하는 게 좋지 않겠는가.
말을 마친 이안이 씨익 웃었다.
***
“생각보단 시설이 괜찮네. 용 전용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야.”
미케론이 안내해준 곳을 둘러본 이안이 휘파람을 불었다.
당연히 용의 본신을 기준으로 만들어졌을 거라 생각한 것과는 달리, 훈련장은 인간의 기준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수백의 약품과 수천의 무기, 수만의 마법서가 마치 백화점의 쇼윈도처럼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거기에 온갖 형태로 만들어진 마법 표적까지.
[아슈타르의 것보다 낫군. 용들이 오랫동안 준비한 느낌이야.]
상태를 살핀 미미르가 휘파람을 불었다.
“본신의 형태로 수련하는 곳은 따로 존재한다. 이곳은 주로 마법 따위를 수련하는 곳이지. 마법을 수련할 때는 몸의 형태가 크게 중요하지 않으니까.”
이안의 반응을 살핀 미케론이 우쭐댔다.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여기부턴 내가 알아서 할게.”
“알았다. 거처로 돌아갈 거라면 연락을 주면 된다.”
이안의 존재 자체가 불편했는지, 그 말에 반색하며 고개를 끄덕인 미케론은 입을 달싹대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곧, 드넓은 수련장에 홀로 남은 이안은 천천히 권총을 뽑아 들었다.
[무슨 수련을 하려는 거냐.]
미미르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네 페르소나가 수련으로 강해지는 유형의 힘이 아니란 사실은 이미 알고 있다. 차라리 마력을 늘리는 쪽에 집중하는 게 나을 것이라는 판단이 드는군.]
이안은 온갖 종류의 병기를 소환해 싸운다.
물론 소환하는 병기의 위력 자체는 막강하지만, 그 위력이 수련에 따라 변화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힘에 적응할 필요가 있어.”
미미르의 말을 들은 이안은 짤막하게 답했다. 그러곤 시동어를 외쳤다.
“오라, 미미르.”
동시에 마력의 푸른빛이 이안을 휘감았다. 순식간에, 이안은 완전무장한 지구의 군인으로 변모했다.
“후우, 후우.”
이안은 천천히 심호흡했다. 조심스럽게 끌어올려 진 마력이 이안의 온몸을 휘돌고는 페르소나를 향해 모여들었다.
그 순간.
스으윽
아무것도 없던 바닥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는 바닥에 납작 엎드려있던 그림자였다.
스으으윽
제멋대로 꼼지락거리던 그림자가 점차 자라나며 인간의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이윽고 나타난 것은.
[이안, 결국 성공했군.]
그림자의 신이 부리던 그림자 병사.
되살아난 그림자 병사를 본 미미르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하지만.
“뭔 소리야, 아직 시작도 안했는데.”
우웅
핀잔을 준 이안이 다시금 손에 마력을 집중했다.
손에서 새롭게 나타난 것은, 이안의 페르소나와 완전히 동일한 글록18C.
휙
이안은 손에 들린 자동권총을 그림자에게 던졌다.
아직은 조작이 어려운지, 약간은 어색한 동작으로 권총을 낚아챈 그림자는.
철컥
권총의 슬라이드를 당기곤. 이안을 향해 겨누었다.
[호오.]
그제야 이안의 속셈을 깨달은 미미르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자기 자신과 싸우는 것만큼 자신의 힘을 파악할 수 있는 훈련이 또 있을까.
“그럼, 시작해볼까.”
그림자를 향해 권총을 겨눈 이안이 씨익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