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말레이우스님, 저 필멸자들을 계속 놔두실 셈이십니까?”
드래고니아의 북쪽에 자리 잡은 실버 드래곤의 영역.
그 어딘가에 자리 잡은 전룡회의 회의실에서, 몇몇의 용들이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드래고니아 밖으로 진출해도 부족할 판에 필멸자를 들이다니. 이러다간 드래고니아까지 필멸자들에게 빼앗길 겁니다!”
“필멸자 놈들을 데려온 알리시온님도 문제지만, 벨라크론님께선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필멸자를 머물라 명하신 것인지….”
물론, 대부분은 이안 일행을 드래고니아에 거하게 허락한 알리시온과 벨라크론에 대한 험담이었다.
언젠가 용들이 다시 대륙 전체로 퍼져나가야 한다 주장하는 용들에게, 자신들을 어두컴컴한 지하로 숨어들게 한 필멸자들은 그야말로 눈엣가시였으니까.
하지만.
“그만.”
중앙에 앉은 은발 머리의 사내, 말레이우스가 오른손을 들어 용들을 제지했다.
“두 분도 무언가 생각이 있으신 걸 테지. 누구보다 용족의 부흥을 위해 노력해온 분들이 아니더냐.”
이 자리에 유일하게 자리한 엘더 드래곤이자 전룡회의 리더.
“그건….”
“후우….”
말을 마친 말레이우스가 씁쓸한 표정을 짓자, 불만을 토로하던 용들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말레이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만간 두 분도 우리의 생각을 이해해주실 것이야. 저 필멸자들이 얼마나 악독한 놈들인지 깨닫는다면 말이지. 모두 조금만 참아보세나.”
조금 전, 알리시온과 대립할 때와는 너무도 다른 정중한 태도.
“그럼, 오늘은 이만하세나.”
말을 마친 그가 손을 다시 휘젓자, 자리에 모인 용들이 인사와 함께 뿔뿔이 흩어졌다.
“하.”
홀로 남은 엘더 드래곤, 말레이우스는 피식 웃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웃지 않았다.
“놈들이 겁쟁이였던 거야 하루 이틀이 아니긴 했다만, 필멸자를 여기에 들일 줄이야. 추악한 필멸자의 모습으로 다니고 있으니 정이라도 든 건가?”
용들이 인간을 비롯한 필멸자의 모습을 취한 것은 원해서가 아니다.
좁디좁은 드래고니아에 본신의 형태로 거주한다면 채 일백의 용도 살지 못할 터.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용들을 구해내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말레이우스는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미 용들의 사고방식까지 변화하고 있어. 이대로라면 대륙의 수호자이자 조정자였던 기억은 깡그리 사라지게 된다.”
단체생활을 하는 용이라니.
그 역시 전룡회라는 단체의 수장이었지만, 애당초 드넓은 영역을 가지고 살아온 용에게 단체생활이란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마치 돼지우리처럼, 목숨만을 간신히 이어나가는 삶이 어딜 봐서 대륙의 수호자란 말인가.
“슬슬, 때가 맞아가는군.”
이제, 날개 꺾인 용들에게 새로운 날개를 달아줄 때였다.
“필멸자 놈들, 너희가 이곳에 나타난 것을 후회하게 해주마.”
홀로 남은 말레이우스가 창문을 열고 바깥을 노려봤다.
지하도시 한가운데에 뜬 태양.
선조의 빛을.
***
쪼르르륵
“먹을 수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네. 인간을 대접하는 것도 참 오랜만이라서 말이야.”
한 잔의 액체를 건넨 노인이 입가에 인자한 미소를 띠었다.
잔을 받아든 이안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 말고도 대접한 인간이 있기는 합니까?”
못해도 수천 년은 살아온, 에인션트 드래곤을 바라보는 노룡(老龍)이 인간을 대접할 일이 무에 있단 말인가.
이안의 물음에 그는 조용히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 녀석과 똑같은 말을 하는군. 녀석을 처음 레어에서 봤을 때도 지금과 똑같은 말을 했지.”
“그 녀석이라면…”
“제작자 말일세.”
제작자.
그 단어를 들은 이안의 눈이 빛났다.
500년 전.
구현의 방과 페르소나를 만들어 낸 대륙의 구원자.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는 존재를 처음 만난 이안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안의 반응에 노룡은 껄껄 웃었다.
“자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잘 알겠네. 자네가 생각하는 그 제작자가 맞아. 내가 자네를 관리자라 칭한 것도 우연이 아니고.”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벨라크론의 말을 듣고, 이안은 의문을 지울 수 없었다.
관리자의 권한을 부여받은 이안이었지만, 구현의 방을 제어하는 프레이야 외엔 누구에게도 제작자라는 단어를 듣지 못했으니까.
그러자 노룡이 조금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이안을 바라봤다.
“설마, 제작자 혼자서 그 시스템을 몽땅 만들고 관리까지 하려 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네?”
노룡의 말에 이안은 순간 당황했다.
‘이건 또 무슨 말이야?’
제어 정령인 프레이야의 말과는 사뭇 다른 이야기에, 이안은 저절로 노룡의 이야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마법의 신과 함께 만들었다고 들었습니다. 제작자의 마법 실력이 그만큼 수준급이었다고….”
“그래, 그건 맞는 말이긴 해. 하지만, 그것만으로 수백 년 동안 이 시스템을 유지할 수는 없지. 그것도 필멸자가 말이야.”
꿀꺽꿀꺽
손에 든 뜨거운 찻물을 단숨에 들이켜버린 노룡은 빈 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녀석이 난 놈이긴 했지만 유한한 생명을 지녔다는 것은 변함이 없었네. 결국, 누군가는 남아서 영속적인 관리를 해줘야 했지.”
“그게 용족이란 말씀이십니까?”
“그래. 대륙의 수호자라는 거창한 짐에 고작해야 섬 하나가 더해지는 수준이었으니까. 지키지 못할 이유가 무에 있겠나.”
말을 마친 노인이 아련한 눈으로 천장을 쳐다봤다.
“용족 중 그 임무에 지원한 것은 나 혼자였네. 자네가 관리자의 권한을 가지고 있듯, 나 역시 수호자의 권한을 가지고 있지. 마족과의 전쟁을 피해 나 혼자 이 비루한 목숨을 이어갈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고.”
벨라크론의 말을 잠자코 듣던 이안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데, 용족이 왜 이런 꼴인 겁니까?”
이안은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노룡의 말대로라면, 용족은 칠영웅 들에 비견할 만큼의 공적을 세운 것이 아닌가.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세상은 용족을 또 하나의 영웅이라 칭송할 것이다.
“힘을 너무 잃었어.”
이안의 물음에 노룡이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은 몇몇의 엘더 드래곤들이 수호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만, 당시만 하더라도 나를 제외하면 권능조차 제대로 발휘할 수 없는 어린 용들뿐이었지. 그리고 용의 육체는 필멸자들이 노리는 보물이었고.”
[그래, 그래서 사냥당했지. 지금 연합공국이 누리는 힘의 일부는 용들에게서 비롯된 것이니까.]
용의 말을 잠자코 듣던 미미르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수호자의 역할을 자처할 수 있겠나. 사냥감 신세를 피하기 위해 숨어들 수밖에.”
말을 마친 벨라크론이 쇠락한 동족의 현실을 떠올리곤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그게 절 부른 것과 무슨 상관입니까?”
하지만 이안은 노룡의 말에 개의치 않았다.
손익에 따라 국가와 국가 간에 뒤통수를 치는 것은 흔한 일이다.
이번에는 그 피해자가 용족이었을 뿐이다.
지구에서 온갖 더러운 일들을 보고 행해왔던 이안에게, 노룡의 말은 크게 와 닿지 않았다.
하물며 자신이 그 일을 한 것도 아닌 다음에야.
이안의 말에 벨라크론이 잠시 놀란 눈을 떴다가, 이내 헛웃음을 털어냈다.
“허허, 말하는 것도 어쩌면 녀석을 똑 빼닮았는지.”
옛 기억을 떠올린 벨라크론이 아련한 눈으로 천천히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자네가 누군진 잘 알고 있네. 이안 아슈타르, 신검의 후손.”
말을 마친 벨라크론이 이안과 눈을 마주쳤다.
수천 년을 살아온 고룡의 의지가 이안의 눈 너머로 전해져왔다.
그리고, 그사이에 섞인 무력감과 슬픔도.
“용족을 보호해주게, 이안 아슈타르. 신검과 시스템 관리자의 이름을 걸고.”
노룡이 고개를 숙였다.
후룩
이안은 담담한 표정으로 찻물을 머금었다. 청아한 향이 이안의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해주었다.
곧, 이안의 입이 열렸다.
“그럼 제가 얻을 수 있는 건 뭡니까. 아시다시피, 용족의 보호자란 타이틀이 저에겐 썩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용족의 보호자.
용들이 진정 대륙을 수호해왔던 500년 전이라면 모를까, 모든 고룡들을 잃고 멸족의 위기에 처한 용들은 이안에게 별 쓸모가 없었으니까.
오히려 용들과 사이가 좋지 않은 참룡공가의 견제를 받을 가능성이 더욱 컸다.
물론 꿈에서 나타난 환영 때문에라도 이안은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이었지만, 굳이 그런 사실을 알려줄 필요는 없었다.
이안의 말에 벨라크론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하네. 우리 일족의 위상이 어느 수준인지는 잘 알고 있으니까.”
말을 마친 벨라크론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지?’
이안은 영문 모를 눈빛으로 노룡을 바라봤다.
곧, 벨라크론은 침소의 한쪽 벽 전체를 뒤덮은 책장을 향해 다가가더니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탁
“그러니,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라네.”
노룡의 말에 이안은 내려놓은 물건을 말없이 바라봤다. 미미르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책이로군.]
책이었다.
언제 만들어졌는지도 모를, 겉표지를 감싼 가죽이 너덜너덜해진 낡은 책.
고서를 탁자에 내려놓은 벨라크론이 손가락으로 그 책을 가리켰다.
“펼쳐보게나. 자네에게라면 필시 의미가 있을 테지.”
이안은 책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제목조차 적혀있지 않은, 얇은 두께의 알 수 없는 책이 이안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안은 책이 상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첫 장을 펼쳤다.
[이건…]
첫 장을 훑은 미미르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내용 때문은 아니었다.
[전혀 읽을 수가 없군. 도대체 무슨 문자지?]
대륙 공용어도, 마족어나 요정어, 용언도 아니다.
생전 처음 보는 기상천외한 형태의 글자.
[이건 도대체…]
읽을 수 없는 문자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해석이라도 해주지 않는 이상.
도무지 의도를 알 수 없었던 미미르는 아리송한 표정으로 미소 짓는 노룡을 바라봤다.
하지만.
철컥
“너, 뭐야.”
이안의 반응은 미미르와 전혀 달랐다.
벨라크론을 향해 권총을 들이댄 이안이 노룡을 노려봤다. 그의 얼굴이 마치 한 대 맞은 것처럼 일그러졌다.
“어떻게, 네가 이걸 가지고 있지?”
이안은 당장이라도 쏘아죽일 것 같이 살기를 풀풀 풍겨댔다. 하지만 노룡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역시, 그 친구의 말이 사실이었어.”
눈앞에 들이댄 것이 환수급의 페르소나인 것은 관심조차 없는지, 벨라크론의 놀란 눈이 반짝였다.
“개소리하지 말고 묻는 말에나 답해.”
어금니를 앙다문 이안이 총을 든 오른손을 흔들었다. 방아쇠를 건 검지에 서서히 힘이 들어갔다.
조금이나마 노룡을 존중해주던 이안의 모습은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졌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으니까.
이 세계, 아스텔리아에선 아무도 몰라야 할 정보.
“어째서, 너희들이 내 이름을 알고 있는지.”
[이계에서 온 강민혁을 위한 아스텔리아 안내서]
탁자 위에 올려진 책엔, 강민혁의 이름이 한국어로 적혀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