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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 막내는 원샷원킬-58화 (59/224)

#58화

사실.

민혁은 자신이 빙의한 몸의 원래 주인, 이안 아슈타르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아니,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을 만큼 기억창고 속 이안에 대한 기억은 너무나 명확했다.

나태한 돼지. 천하의 망나니.

되살아난 민혁이 이안 아슈타르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생각은 딱 이 정도 수준이었다.

하지만.

“정말 독특해. 다른 세계 사람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온통 대리석으로 도배된 건물이라니. 무슨 거울도 아니고 말이야.”

상대를 바라본 민혁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뒤룩뒤룩 살찌지도, 망나니처럼 제멋대로 굴지도 않지만.

자신과 똑같이 생긴 눈앞의 녀석이야말로.

‘진짜 이안 아슈타르로군.’

수십 년간 머물러온 영혼을 몸이 기억하기라도 하는 걸까.

이안 아슈타르. 현재의 자신과 똑같은 생김새를 한 상대에게서 알 수 없는 유대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안을 바라보는 민혁의 표정은 싸늘했다.

“어떻게 여기 있는 거지? 넌 죽은 게 아니었나?”

눈앞의 상대는 이미 죽은 지 오래였으니까.

제아무리 고도의 마법과 신법을 동원하더라도 이미 죽은 자를 다시 되살릴 수는 없다.

그런데 어떻게, 이미 죽어버린 자가 멀쩡히 서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내가 어떻게 다른 세계 사람이란 걸 안 거지?”

지구와 강민혁이라는 존재를 아는 것은 이 대륙에서 오직 민혁 자신뿐.

‘내가 꿈이라도 꾸는 건가?’

이 세계의 신비에 제법 익숙해져 있던 민혁이었지만, 그렇지 않고선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미안, 시간이 없어.”

하지만 상대는 대답 대신 뜻 모를 미소만을 입가에 머금었다. 민혁은 당황스러웠다.

‘원래 이런 녀석이었다고?’

폐검, 아슈타르의 수치라 불린 망나니라기엔 너무나 차분하고 정중한 태도.

곧, 미소를 지운 본래의 이안이 입을 열었다.

“용을 찾아. 그들을 네 것으로 만들어.”

“용?”

상대의 말을 들을 때마다 민혁의 의문은 쌓여만 갔다.

용이라니.

“녀석들을 왜?”

과거에는 대륙의 수호자였지만, 지금은 힘을 잃은 쇠퇴한 종족.

그들의 힘은 고작해야 연합공국, 아니 아슈타르 공작가 단 하나에도 미치지 못한다.

심지어 참룡공의 피를 이은 자들은 성인식을 치르기 위해 용족의 목을 가져오지 않던가.

“그게 내가 널 불러온 이유 중 하나니까.”

“자꾸 아까부터 무슨 개소리야?”

맥락이라곤 존재하지도 않는 상대의 말에 민혁이 얼굴을 구기며 총구를 흔들었다.

하지만 상대는 민혁의 물음을 해결해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 대신.

“시간이 다 됐어. 빨리 따라와.”

짤막한 통보와 함께 이안은 날 듯이 건물 안쪽으로 사라졌다.

“뭐? 아까부터 자꾸 무슨 개소리를…기다려!”

이안이 갑자기 움직이자, 민혁은 다급히 상대를 쫓아 국정원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내가 알기론 이런 복도가 없을 텐데.’

원래의 형태와는 달리, 대리석으로 장식된 로비는 끝없이 앞으로 이어져 있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여기야.”

로비의 막다른 곳에 다다른 이안이, 자리에 멈춰 뒤따라오는 민혁을 바라봤다.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것을 바라본 민혁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문이었다.

알 수 없는 나무로 만들어진 문에는 손잡이 대신 거대한 문양 하나가 새겨져 있었다.

“무한?”

문에 새겨진 거대한 뫼비우스의 띠를 본 민혁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눈으로 이안을 바라봤다.

“이 문짝이 네가 보여주려던 거라고?”

“설마, 그럴 리가.”

그 말에 작게 고개를 저은 이안은 정확히 ∞의 가운데를 기점으로 나뉜 나무문의 한 가운데에 섰다.

문의 양쪽 손잡이를 잡은 이안은.

“잊지 마. 이건.”

뒤에 선 민혁을 흘끗 쳐다보고는.

“너와 나의 미래니까.”

끼리리릭

거대한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문 너머에서, 민혁은 볼 수 있었다.

화르르륵

불길 속에서 용암처럼 녹아내리는 성과 도시들.

그리고.

콰우우우-

그 위에서 포효하는 검은 짐승을.

***

‘공자님? 공자님!’

[이안! 괜찮은 거냐?]

익숙한 목소리들이 들려온다.

마치 꿈처럼 아련한 메아리들과, 침대처럼 푹신한….

‘침대?’

“허억!”

순간, 이안의 정신이 또렷해졌다.

그는 재빨리 몸을 일으킨 다음 주변을 둘러봤다.

‘침실이야.’

검은 짐승도, 국정원도, 이안 아슈타르도 없다.

‘꿈이었나?’

이안은 알자스 성에 있는 자신의 방에 누워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가, 곧 인상을 찌푸렸다.

‘몸 상태가 말이 아니야.’

머리는 깨질 듯 아파왔고 몸은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몸에 마력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걸 보면, 아마도 마력탈진이리라.

이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신관을 바라봤다.

“세리아?”

“아니, 갑자기 쓰러지시면 어떡해요? 아직 신전 부지도 못 정했는데.”

“뭐?”

“농담이에요, 농담.”

이안은 진담인지 농담인지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는 세리아를 미친 사람 보듯 쳐다봤다.

그 옆에서 사자머리 역시 숨을 몰아쉬었다.

[다행이야. 하마터면 새로운 적임자를 구해야 할 뻔했어.]

이안의 생각과는 핀트가 좀 엇나간 것 같긴 하지만.

무거운 몸을 이리저리 확인하며 이안이 물었다.

“아니, 그보다 내 몸이 왜 이런 거야?”

세리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모르겠어요. 쓰러지신 다음 갑자기 몸속의 마력이 사라지기 시작했으니까요. 마치 고급 마법이나 페르소나라도 발동한 것처럼요. 혹시 뭐 잘못 드신 거라도 있어요?”

“없는데.”

이안이 고개를 젓자 세리아가 한숨을 내쉬며 눈을 흘겼다.

“영주님이 워낙 제멋대로여야 말이죠. 그나마 제가 있어서 망정이지, 조금만 늦었어도 마력통로가 박살 났을 거예요. 그러면 마력을 영원히 못 쓰게 된다고요.”

말을 마친 그녀가 이안에게 물이 담긴 잔을 건넸다. 보통 물이 아니라 성수였던 건지, 한 모금 머금자 따뜻한 기운이 온몸으로 퍼져나간다.

‘혹시….’

성수를 천천히 목으로 넘기며, 이안은 조금 전 꾸었던 꿈을 떠올렸다.

‘그냥 꿈이 아니었나?’

이상하리만치 선명한 꿈.

그 꿈 말고는 이안의 몸에 생긴 이상을 설명할 방법이 딱히 없었다.

‘그렇다면, 그 꿈에 나온 광경도?’

멸망한 대륙과 검은 짐승.

분명, 꿈에 나온 진짜 이안은 눈앞의 광경이 우리의 미래라 말했다.

‘그게 꿈이란 게 문제지.’

당연하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꿈과 현실을 혼동할 정도로 이안은 멍청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순히 꿈이라 치부하기엔 이 세계의 법칙이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애당초 이안, 그러니까 강민혁의 존재부터가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않은가.

결국, 확인할 방법은 하나뿐이다.

“그러니까 적당히 무리하세요. 신전이 지어지기도 전에 영주가 사라지면….”

“세리아.”

“네?”

“알론소를 불러와 줘. 할 얘기가 있으니까.”

“아니, 지금은 쉬셔야 한다니까요? 마력탈진이 회복도 안 됐는데….”

“신전.”

“잠깐만요.”

타타탓

이안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세리아는 바람처럼 뛰쳐나갔다.

텅 빈 방 안에서 이안은 욱신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분명 용을 찾아가라 했지.’

꿈에서, 원래 몸뚱이의 주인이 했던 말.

‘그렇다면, 찾아가 주지.’

찾아가서, 꿈의 진위를 확인할 것이다.

원래 주인을 떠올리던 이안의 눈이 빛났다.

***

작센산맥.

알자스의 북쪽을 커튼처럼 가로막은 이 산맥에는 오래전부터 멸망해가는 용들이 숨어 산다 전해져 오고 있었다.

알론소가 용을 만나기 위해 이곳을 수색하기로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게 용을 찾는 방법이라고?”

산을 오르던 이안은 인상을 썼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냥 걷는 거잖아?”

산맥에 들어선 지 사흘째.

그동안 그들은 계속 산을 오르기만 할 뿐,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니까.

이미 대륙의 주류에서 밀려나 누구에게도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용족들이다.

고작 걷는 것만으로 찾을 수 있다니, 이안은 그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렇게 쉽게 찾을 수 있을 정도라면 용들은 진작 멸종했겠는데. 남은 뼈라도 찾으러 가는 거야?”

“당연히 아니다.”

이안이 빈정대자 옆에서 함께 산을 오르던 알론소가 발끈했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용을 찾는 게 아니니까.”

“그럼?”

“용이 우리를 찾는 거지.”

말을 마친 알론소가 손가락으로 이안을 가리켰다.

“네 몸에서 풍겨 나오는 신기의 힘이라면, 용족을 자극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용들은 본능적으로 신기를 탐내니까.”

“그거 좀 위험하게 들리는데.”

설명을 들은 이안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알론소의 말대로라면, 이안은 용을 불러내기 위한 미끼 용도라는 말이 아닌가.

“그대의 생각처럼은 되지 않을 것이다. 용들은 욕망을 절제할만한 합리적인 이성을 갖고 있으니.”

“이성을 잃으면?”

“글쎄.”

이안의 말에 알론소는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함께 따라온 파이톤이 피식 웃었다.

“이안, 설마 용 따위한테 겁먹은 거야? 칠 영웅 중 하나인 신검공의 직계후손이? 실망인걸.”

연구대상인 이안을 좇아 따라온 파이톤이 옆에서 피식 웃었다.

“어차피 도움도 안 될 용은 뭣 하러 보러 가는 건지 모르겠지만, 나만 믿으라고. 용 따위는 내 마법 한 방이면….”

“그건 안 된다, 반마족. 용들과는 최대한 우호적으로….”

“뭐, 인간. 아, 너는 용의 피가 섞였댔지? 반용이라서 기분이라도 나쁜 거야?”

“황족을 모욕하지 마라.”

[이안, 굳이 용을 찾으러 갈 필요가 있나?]

둘이 티격태격 싸우는 동안, 미미르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안을 바라봤다.

[용은 사실상 멸망한 종족이다. 고룡들이 남아있다면 모를까, 신마전쟁 때 모든 고룡들을 잃은 용들은 조금 똑똑한 도마뱀일 뿐이지.]

나면서부터 불멸자이자 대륙의 조정자라 자칭하는 용들이지만, 용들의 힘은 결국 그들이 등에 지고 살아온 세월에 비례한다.

만년 단위의 시간 동안 버려낸 힘을 손에 쥔 에인션트 드래곤들이 모두 사라진 이상, 그와 비견될 존재들이 등장하려면 앞으로 오천 년은 더 기다려야 하리라.

당연히, 그때가 되면 이안은 흙으로 돌아가 있을 것이다.

하물며 참룡공의 후손들은 성인으로 인정받기 위해 새끼 용들을 사냥하지 않던가.

그런 용들이 과연 이안에게 무슨 도움이 될까.

하지만.

“나도 몰라.”

이안은 미미르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애당초, 이안이 용들을 찾으러 나선 것은 알론소 때문이 아니었으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이안의 말에 미미르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 순간.

구구구궁

땅거죽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거세게 흔들리는 대지.

“용이다.”

“용?”

이안의 물음에 알론소가 확신에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은 망설임 없이 다리에 오러를 불어넣었다.

철컥

단단하게 다리를 지면에 고정한 이안은 혹시나 모를 상황에 대비해 허리춤의 권총을 뽑아 들어 정면을 향해 겨눴다.

쩌저적

땅거죽이 반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갈라진 틈 사이로 보이는 것은.

‘비늘?’

윤기 나는 검은 색의 비늘이 흙더미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곧.

쿠르르르

쏟아지는 흙더미와 함께, 상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용이다.]

미미르의 말이 없어도, 이안은 상대가 용이란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온몸이 검은 비늘로 둘러싸인, 어지간한 대형 마수에 버금가는 거대한 덩치의 도마뱀.

하지만.

-칠영웅의 찌꺼기들이로군.

녀석의 반응은 알론소의 반응과는 판이했다.

-목숨이 아깝다면 이쯤에서 사라져라, 필멸자들아.

“뭐?”

이안의 얼굴이 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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