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알자스성의 중앙 홀.
저번 달까지만 하더라도 트로이카의 간부들이 모여 알자스를 어떻게 지배할지 의논하던 곳이었지만, 트로이카가 몰락한 지금에 와선 쓰일 일이 없던 곳.
그리고 오늘.
“젠장, 지금 장난해? 왜 이리 안 나오는 거야?”
이제는 검은 사자단에 합병된 수많은 지부 중 하나, 붉은 폭풍의 단장인 예레스가 분통을 터뜨렸다.
그도 그럴 것이.
“벌써 두 시간이 넘었다고!”
검은 사자단에 합병되었다지만,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모두가 합병 이전 꽤 거대한 규모의 조직을 움직이던 단장들.
이들을 아무 이유 없이 두 시간이나 기다리게 할 만한 사람이나 조직은 알자스에 없었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참아라, 예레스. 소문의 단장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다지 않나.”
드레이크 해적단의 드레이크가 한쪽 팔에 달린 갈고리로 콧수염을 매만지며 말했다. 하지만 예레스는 멈추지 않았다.
“단장이 뭐 어쨌다고? 트로이카가 지배하던 때에도 승승장구하던 게 이 몸이야. 트로이카가 귀찮게 굴어서 협력하긴 했지만, 내가 허락하지 않으면 녀석들이 내 구역에 발이나 들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헹, 어림도 없지.”
아니, 멈추지 않는 것으로 모자라 검은 사자단을 깎아내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예레스, 지랄하지 마라.”
“뭐? 어떤 개새끼야?”
어딘가에서 들려온 욕지거리에 예레스가 희번덕한 눈으로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단장이 어떤 미친 새낀지도 모르는 주제에 아가리 털지 말라고, 새끼야. 나까지 피해오게 하지 말고.”
검은 늑대의 대장, 알펜이었다. 그의 눈동자 안에는 분노와 두려움이 반쯤 섞여 있었다.
“하, 쫄았냐? 단장한테 아랫도리 좀 찢길 뻔했다고?”
이 자리에 앉은 자들 중 유일하게 단장의 정체를 아는 자였으니까.
그 소문을 대강 들어 알고 있던 예레스가 검은 늑대를 비웃었다.
검은 사자단이 생기기 전부터 단장과 만나 치도곤을 당했다던가.
얼마나 쫄아 버린 건지, 저 녀석과 녀석의 조직원들은 단장의 정체에 대해 입 밖에도 내지 않았다.
“단장은 네가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야. 이쯤에서 그만해라.”
“헹, 웃기지 마.”
알펜의 조언을 콧방귀 하나로 흘려버린 예레스가 귀를 파며 말했다.
“사자인지 고양이인진 모르겠지만, 덤빌 테면 덤벼보라지. 붉은 폭풍의 단장인 이 예레스가 박살을 내 버릴 테니까!”
예레스가 호언장담하던 그때.
“그래?”
“헛!”
기척도 없이 뒤에서 갑작스레 들려온 누군가의 목소리.
예레스는 급히 몸을 돌려 상대를 확인했다.
“너, 넌 누구냐?”
예레스의 등 뒤에는, 생전 처음 보는 사내가 서 있었다.
서른이 채 되어 보이지 않는, 제법 탄탄한 몸을 가진 금발 머리의 청년.
금발 머리 사내의 몸을 감싼 검은 롱코트 옷깃에는 검은 사자단을 상징하는 사자머리가 노랗고 검게 칠해져 있었다.
“다, 단장님!”
“단장이라고?”
이 애송이가?
등 뒤로 들려오는 알펜의 겁먹은 목소리를 들은 예레스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알자스 제일의 범죄조직 트로이카를 무너뜨린 장본인이.
이렇게 새파랗게 어린 애송이일 줄이야.
하지만 놀랄 일은 지금부터였다.
“내 이름은 이안 아슈타르.”
이안이 천천히 자신을 소개했다.
“신검공 에드너 폰 아슈타르 공작의 아들이자, 적법한 절차를 걸쳐 봉작된 알자스의 남작이다.”
소개를 마친 이안이 씨익 웃었다.
“그래, 사자가 뭐?”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사자네 고양이네 하며 떠들고 있던 천둥벌거숭이를 향해.
***
[제법 실력 있는 자들이야.]
미미르가 이안을 놀란 눈으로 쳐다보는 단장들을 훑더니 피식 웃었다.
이 자리에 모인 자들은 모두가 오러, 혹은 마력을 다룰 줄 아는 자들이었으니까.
어찌 보면 한 영지의 기사와 마법사들이 영주를 기다리는 꼴이 아닌가.
‘범죄자란 것만 빼면 말이지.’
분명 붉은 폭풍의 단장이라던가.
이안은 앞에서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던 놈이 경악하는 것을 감상하며 생각했다.
실력과는 별개로, 놈들이 법과 규율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그들을 부려야 할 이안이 짊어져야 할 패널티였으니까.
“뭐해? 박살을 낸다며.”
그러니, 이안이 보여줄 것은 하나뿐이었다.
“덤벼.”
힘.
법과 규율을 쓰레기로 여기는 자들의 멱살을 잡고 끌고 갈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
눈앞의 빨간 머리는 그 사례로 매우 적합했다.
“그, 그….”
아까의 패기는 어디로 간 건지, 예레스는 쉽사리 움직이지 못했다.
단장에 대한 온갖 흉흉한 소문은 그 역시 들어왔으니까.
‘다행히 그랜드마스터라던 노인네는 오지 않은 것 같다만….’
상대는 그랜드마스터를 호위기사로 부리는 자다. 필시 무언가 한 수를 가지고 있을 터.
얼어붙기라도 한 듯 예레스가 움직이지 않자.
“뭐야, 쫄았어?”
피식
비웃음을 날린 이안이 예레스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였다.
뚜둑
순간.
예레스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끊어졌다.
“이 애송이가아!”
우우웅
분노한 그가 오러를 한계치까지 끌어올리자 전신에 입고 있던 갑주에 붉은색의 오러가 덧씌워졌다.
턱걸이긴 했지만, 그는 오러 익스퍼트였다.
체계적인 무술을 배운 것은 아니었지만 갑옷에 오러를 불어넣고 적에게 들이받는 것만으로도 도시의 한 조각을 얻는 데에는 충분했다.
“흐아아압!”
기합과 함께 예레스가 이안을 향해 물소처럼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붉은 폭풍이란 그의 조직 이름처럼, 그의 몸을 감싼 붉은 오러가 마치 폭풍처럼 제멋대로 주변을 장악해나갔다.
공성추와도 같은 맹렬한 돌진.
저 단순하지만 강력한 공격에 제대로 적중한다면, 뼈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의 육체는 형체조차 찾을 수 없게 되리라.
“흐아아아!”
두 눈에 핏발을 세운 그가 온 힘을 다해 이안의 몸뚱이를 부숴버리려던 순간.
드르르르륵
‘크윽?’
귓가를 가득 메우는 천둥소리와 함께, 그의 머릿속이 비명을 내질렀다.
수십 발의 번개가 자신의 몸을 관통하는 듯한 격통이 전신에 퍼지자, 미숙한 그의 오러 컨트롤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순식간에 사라진 붉은 기운.
그리고 수십 발의 번개가 밀어내는 듯한 저지력과 고통을 견디지 못한 그는.
쿵
달리던 모습 그대로 바닥에 볼썽사납게 엎어졌다. 공교롭게도 그가 쓰러진 자리는 이안의 발치였다.
후욱
이안은 탄환을 모두 토해낸 권총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를 한 번 불어내곤, 쓰러진 예레스와 경악한 두목들의 면면을 하나씩 훑었다.
“이 시간부로 검은 사자단을 연합공국 알자스 남작령의 하부조직으로 편입하고, 차후 적절한 훈련을 거쳐 알자스 방위군으로 재편성한다.”
눈앞의 녀석들은 대부분 사형을 세 번쯤 당하고도 부관참시를 당할 극악한 범죄자들.
어차피 풀어놔서는 안 될 녀석들이라면, 차라리 엄격한 통제와 감시 속에서 놈들의 쓸모를 찾는다.
그것이 이안의 답이었다.
당연히 반발이 없을래야 없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불만 있는 사람?”
바닥에 쓰러져 꿈틀대는 예레스를 발로 툭툭 차는 이안의 서슬 퍼런 한 마디에, 그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 단장, 아니 남작님 만세!”
엎어진 예레스 옆에 넙죽 엎드린 검은 늑대의 대장을 빼고는.
***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잖아? 과연 아슈타르야.”
소시지처럼 줄줄이 성 밖의 임시병영-제국군이 버리고 간 천막-으로 향하는 조직원들을 보며 베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극악한 범죄자들을 죄다 군인으로 만들 생각을 하다니.
이 땅을 십 년 동안 지배하고 있던 트로이카조차도 하지 않았던 일이다.
“필요한 일이니까.”
이안은 담담히 말했다.
이 땅을 관리할 생각이 없었던 트로이카에겐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지만, 이안에겐 필요한 일이었다.
이 땅이 유배지가 아니라 정상적인 영지로 기능하기 위해선, 우선 그 구성원부터 바꿔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 나도 동감해. 그게 영지민의 절반이란 게 문제지만.”
먹고, 마시고, 입고.
굳이 병장기의 값을 따지지 않더라도, 아무런 생산 활동도 하지 않는 인간들의 집단을 유지하는 돈이 하늘에서 떨어질 리 없다.
일반적으로 국가가 망하지 않고 유지할 수 있다고 여기는 군사 규모의 최대치는 인구의 10%.
지구와는 사정이 다르다지만, 영지 인구의 절반을 병사로 만들고도 영지의 재정이 버텨줄 리 만무하지 않은가.
벌써 닥쳐오는 것 같은 재정문제에 베티가 눈살을 찌푸리며 이마를 짚었다.
“어차피 영지를 정상적으로 굴리려면 필요한 과정이야. 당분간은 트로이카가 가지고 있던 재물과 제국의 배상금으로 버틸 수 있잖아?”
“그건 그렇지만….”
재물은 충분했다.
트로이카가 긁어모은 불법적인 수입에 제국이 내놓은 배상금을 더하면 가히 천문학적인 수준이었으니까.
파괴된 영지를 복구하고도 몇 달은 세금 없이 영지를 운영할 수 있는 수준.
“나한테 생각이 있으니까 당분간은 그렇게 하자고. 그것보다, 다른 사람들은?”
이안이 되묻자 베티가 손가락을 꼽기 시작했다.
“다들 바쁘지. 데인과 랄프는 남은 영지민들을 추스르고 있고, 영감님과 꼬마는 병영으로. 사제님은 신전 자리를 알아본다던데? 사제님 말고는 이제 나도 얼굴 보기 힘들다고. 지금 이 자리도 간신히 나왔다니까?”
아무도 지배하지 않는 무법의 땅을 관리하던 조직들은 죄다 죽거나 군대로 끌려갔으니, 새롭게 만들어진 영지의 대소사는 자연스레 이안의 주변인들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행정이라는 개념조차 수십 년간 없었던 영지에서, 영지의 이인자로서 새롭게 부서를 꾸리고 관리해야 하는 베티는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흠, 조만간 다 같이 모일 시간을 잡아줘. 앞으로의 방향을 잡아야 하니까.”
“시간이 난다면 말이지. 이제 필요한 건 다 끝난 거지? 난 간다.”
정말로 바쁜 것인지, 베티는 이안의 부탁을 건성으로 듣고는 재빨리 자리를 떴다.
[이안, 너무 한가한 것 아니냐? 참된 영주라면 모름지기 영지의 일에 직접 관여해야 하는 법이다.]
베티가 자리를 나서자, 홀로 남은 이안에게 미미르가 잔소리를 퍼붓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가 왜?”
[왜, 왜라니. 그건 영주로서 당연한….]
“나보다 적임자들이 있는데 굳이 내가 나설 필요는 없잖아?”
영주 자리를 맡긴 했지만, 행정과 관리는 이안이 썩 자신 있어 하는 분야가 아니었으니까.
영 인재가 없다면 모를까, 자신보다 훨씬 경험 많은 인재들을 내버려 두고 굳이 자신이 직접 뛰어다닐 필요는 없지 않은가.
“지금 여기서 내 역할은 필요한 아이디어를 던져주는 정도야. 나머진 실무진들이 알아서 진행하겠지. 그러라고 일을 맡긴 거고.”
어찌 보면 무책임하다 할 수 있었지만, 잘 알지도 못 하는 일에 굳이 참견하기보다는 뒤에서 지켜보기만 하는 것이 낫다는 사실을 이안은 잘 알고 있었다.
[…정말이지, 아슈타르의 피를 이은 게 맞기는 한 건지 모르겠군그래.]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젓는 사자머리를 뒤로하고, 이안은 집무실의 책상 위를 바라봤다.
무지개 용의 문장이 새겨진 건틀렛과 지팡이.
트로이카의 주인, 신드라가 가지고 있던 두 개의 페르소나.
“이걸 흡수하면 더 강해진다는 말이지?”
[그래. 마력이 늘어난 만큼 유지시간과 위력 또한 늘어날 것이다.]
하지만 미미르의 말을 들은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안 돼. 이건 단서야.”
아슈타르에 뿌리박혀있을 배신자들을 찾아낼 단서.
지금 당장 놈들을 찾아낸다면 모를까, 그전까지는 소중히 갖고 있어야 할 물건이었다.
하지만 이안이 생각을 채 마치기도 전.
스윽
건틀렛과 지팡이에 진 그림자가.
소리 없이 페르소나를 통째로 빨아들였다.
“…미미르?”
그림자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은 하나뿐.
이안의 서슬 퍼런 시선이 당황한 사자머리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