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본녀는 마르세니아 제국의 1황녀, 루미너스 폰 마르세니아에요. 그대는 누구죠?”
제법 몸에 잘 맞는 제복-아마도 제국군의-을 입은 붉은 머리의 여인이 전차장석에서 기관총을 쥔 이안과 눈을 마주했다.
‘황녀라.’
하지만 이안은 그녀를 조금 한심하게 바라봤다.
‘제법 귀한 신분인데,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건가?’
그녀가 평범한 신분이었다면 칭찬할만한 태도였겠지만, 인질로서의 가치가 높은 제국의 황녀가 취할만한 태도는 아니었다.
‘군인 티는 나는 것 같지만.’
제법 숙련된 마술(馬術), 절도 있는 언행과 자세.
그리고.
‘익스퍼트 중급이라.’
아직 서른도 되어 보이지 않는 황녀였지만, 그녀에게서는 제법 강력한 오러가 느껴졌다.
[여인의 몸으로 군인이라니, 그것도 꽤 뛰어난 자로군.]
황녀의 차림새를 스윽 살펴본 미미르는 제법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래?’
[어깨에 달린 금색 견장은 제국군의 장군에게만 허락되는 물건이다. 직계황족이기 때문도 있겠지만, 황녀에게 장군의 직위를 주었다는 건 그만큼 군사적인 능력이 있다는 것이겠지.]
‘생각보다 거물이었잖아?’
장군이라니.
그렇다면 더더욱 이 자리에 나서서는 안 되었다.
지휘관을 잃은 군대는 머리 잃은 몸뚱이나 다름없으니까.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 자리에 나온 것인지, 이안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어째서 답이 없는 것이죠? 용의 피를 이어받은 본녀를 능멸하려는 겁니까?”
이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상대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루미너스가 이안을 노려봤다.
“이안 아슈타르.”
이안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자.
“이안?”
그 이름을 들은 그녀는 살짝 놀랐다.
연합공국의 일곱 공작가 중 하나, 아슈타르가 전면에 나섰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대가 정말로 아슈타르의 폐검, 이안이라고요?”
“뭐?”
이안의 이름은 이미 제국에서도 유명했으니까.
폐검.
신검공의 아들이지만 도저히 써먹지도 못할 인간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별명.
[푸하하핫! 폐검이라니, 제국 놈들의 작명 솜씨가 조금 늘었구만!]
‘닥쳐.’
이안은 옆에서 배꼽이 빠져라 웃어대는 사자머리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빌어먹을 몸뚱이의 전 주인이 가진 명성은, 이미 대륙으로 뻗어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황녀가 놀란 것은 그 때문이 아니었다.
“분명, 그대는 가문의 모든 공식적인 지위와 권한을 부여받지 못했다 들었는데….”
반쯤 적국인 제국에서도 폐검이라 조롱받던 이안이.
‘어떻게 이런 힘을 지금까지 숨겨온 거지?’
변경백의 병사들을 어떻게 도살했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봤으니까.
연합공국, 그중에서도 신검공 아슈타르 공작령과 국경을 마주한 제국의 입장에선 너무나 좋지 않은 소식이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찾아온 거야? 항복이라도 하러 온 거라면 백기는 들고 왔어야지.”
대강 상대의 속셈을 파악하고 있었지만, 이안은 짐짓 모르는 체했다.
이안의 말에 루미너스가 이를 갈았다.
“항복이라니! 제국은 패배하지 않았어요. 단지 서로 간에 불필요한 피를 흘릴 필요가 없었을 뿐이죠.”
“그래, 우리 피는 아직 한 방울도 안 나온 것 같지만.”
이안이 비꼬자 황녀의 얼굴이 달군 쇠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그녀는 분노를 터뜨리는 대신 말을 이어나갔다.
“지금은 그렇겠지만, 제국군의 힘은 무한해요. 그대가 진정으로 제국과 아슈타르의 전쟁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면 본녀의 말을 귀담아듣는 게 좋을걸요?”
그녀는 이안의 말을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큰 피해를 본 것은 사실이었지만, 아직 패배가 확정된 것은 아니었다.
패배했다는 사실을 상대 앞에서 인정하는 순간, 이 협상은 그녀의 손을 떠날 것이 분명했다.
‘그러면 곤란해.’
그러고 나면, 이 전투의 모든 책임은 패배를 인정한 루미너스에게 돌아갈 것이었으니까.
[이거, 누가 승자고 누가 패자인지 모르겠는걸? 역시 위아래도 모르는 마르세니아 놈들이야.]
패자가 승자를 상대로 협박이라니.
황녀의 그 모순적인 태도에 미미르가 코웃음을 쳤다. 이안 역시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원한다면?”
“무, 무슨 소리에요?”
“우리가 전쟁을 원한다면, 그땐 어떻게 할 거지?”
이안이 말을 마침과 동시에.
키이이잉
강철 괴물이 고개를 돌리기 시작했다.
곧, 기사의 마창을 연상케 하는 긴 주포의 끝이 말 위에 올라탄 황녀에게 향했다.
“무슨 짓이에요!”
제국의 신병기, 거신 기가스를 단 일격에 무릎 꿇린 병기다.
피와 살로 이루어진 사람이 맞는다면 설사 오러를 다루는 자라 하더라도 시체조차 찾을 수 없으리라.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심연처럼 어두운 포구와 마주한 루미너스의 달아오른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기 시작했다.
“정말로 패배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면, 이 자리에서 다시 싸워보자고. 누가 먼저 죽을지는 모르겠지만.”
“….”
이안의 말에 루미너스는 침묵했다.
전쟁이 무서운 것은 아니다.
500년 전, 일곱 반역자가 제국에 선언한 뒤로 역대 제국의 황제들은 언제나 반역도들을 토벌하고 고토를 되찾기를 염원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냐.’
마르센 제국의 힘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마르센은 아직 전쟁을 벌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
전쟁에서 이기건 지건, 그녀가 아버지인 황제의 눈 밖에 나는 것은 필연이리라.
“…본녀는 전쟁이 아니라 협상을 하러 왔어요.”
루미너스는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럼 여기선 곤란하지.”
꼬리 내린 황녀를 향해 이안이 손짓했다.
“타라.”
“타라고요?”
타라니.
설마, 저 강철 괴물에 올라타라는 말인가?
이안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그녀가 가만히 눈을 끔뻑이자.
“싫으면 말고.”
쿠르르릉
이안은 망설임 없이 전차의 시동을 걸었다.
“자, 잠깐!”
뒤에서 루미너스가 이안을 급히 불렀지만.
쿠구구구
그녀의 목소리는 시속 60킬로미터로 전력 질주하는 전차의 엔진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
“늦었네?”
“그대가 본녀를 내버려 두고 제멋대로 떠났기 때문이지 않습니까!”
이안을 따라 뒤늦게 알자스 성에 도착한 루미너스가 성을 내기 시작했다.
[얼굴이 완전히 새까매졌는데? 누가 보면 마족이라도 온 줄 알겠어. 흐흐흐.]
온통 검댕을 뒤집어쓴 1황녀의 꼴을 보고 미미르가 낄낄 웃어댔다.
명마로 이름난 황실의 군마가 전력을 다해 달려도 그녀가 마주칠 수 있는 것은 이안의 전차 뒤꽁무니에서 나온 매연뿐이었으니, 그것을 뒤집어쓴 루미너스의 꼴이 멀쩡할 리 없었다.
“어찌 감히 마르세니아의 이름을 가진 자에게 이런 모욕을….”
지독한 매연을 맞고 신경이 날카로워진 그녀가 눈을 부라리려 했다.
하지만 그녀가 분노를 터뜨리려던 순간.
“누님?”
익숙한 목소리에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목소리만큼이나 익숙한 얼굴의 사내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황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알론소?”
예상치 못한 동생의 등장에 그녀는 화를 내는 대신 당황했다.
아슈타르의 자식과 만나야 할 시점에서, 왜 돌연 녀석이 튀어나온단 말인가.
‘설마, 저 아슈타르 놈과?’
실종된 알론소가 알자스 성에서 갑자기 튀어나왔을 때, 동생 역시 신기를 노리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그녀도 경쟁자인 동생을 제거하려 했던 것이고.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동생아, 이젠 반역도 놈들의 힘을 빌릴 생각이더냐?’
아니, 동생의 생각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황위를 얻기 위해서라면 반역도가 아니라 마족의 힘이라도 빌리고 싶어 하는 놈들은 널리고 널렸으니까.
하지만 지금까지와 다른 점이라면.
‘연합공국이 뻗어 나오려 한다.’
마족 말고는 아무런 관심도 없던 저 반역도 놈들이, 갑자기 대륙을 향해 눈길을 보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알론소가 이 자리에 있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오랜만에 뵙습니다, 누님.”
“그, 그래. 오랜만이구나.”
‘왜 여기서지? 무슨 의도지?’
떨떠름한 표정으로 동생의 인사를 받으며, 그녀의 머리가 바쁘게 회전했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
“자, 무슨 협상을 하러 온 거지?”
이안이 대뜸 던진 한마디에 그녀의 상념은 깨졌다. 그녀는 본래 생각한 요구조건을 제시했다.
“기가스를 조종한 마법사와 기가스를 돌려주세요. 그렇게 해준다면 본녀의 이름을 걸고 즉시 군을 물리겠어요.”
“기가스?”
처음 듣는 말에 이안이 되묻자 그녀가 재차 설명했다.
“그대가 쓰러트린 거신병을 말하는 거예요.”
“아아.”
그제야 이안은 깨달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 밖의 고철 덩어리 말이지?”
“고, 고철….”
제국의 미래를 책임질 병기에게 감히 고철이라니.
이안의 말을 들은 루미너스는 다시금 차오르려는 분노를 간신히 참아냈다.
어찌 되었건 그녀는 기가스를 회수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까.
으득
[하, 약이 단단히 올랐군. 더 건드리면 눈이 완전히 돌아버리겠는데 말이야.]
‘그러면 나야 좋지 뭘.’
감정에 휘둘리는 사람만큼 뜯어내기 좋은 사람도 없지 않은가.
애당초 이 모든 것이 황녀의 심지를 흔들기 위한 이안의 안배였다.
이안은 황녀를 향해 코웃음을 쳤다.
“고철값으론 좀 모자란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게 무슨 말이죠?”
“무슨 말이긴, 저 고철이 어떻게 되건 너희는 이 땅에서 꺼져야 한다는 말이지. 그게 싫다면.”
철컥
“다시 붙어보던가.”
말을 마친 이안은 황녀를 향해 권총을 겨누었다. 그만큼 이안은 자신이 있었다.
‘애초에 싸울 생각이었다면 여기까지 올 일도 없었겠지.’
그녀가 어떠한 말로 상황을 꾸며내건, 이안과 아슈타르가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변하지 않았으니까.
결국.
“…원하는 게 뭡니까.”
황녀는 절대로 하고 싶지 않았던 말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이안은 손가락을 폈다.
“불가침, 비밀유지, 알자스에 대한 지배권 인정. 그리고.”
손가락을 하나씩 꼽던 이안은.
“소정의 배상금.”
말을 마치곤 남은 손가락 하나를 까딱였다.
***
말과 기사가 성벽 너머로 사라진다.
반쯤 무너진 성 위에서, 이안은 자신의 진영으로 되돌아가는 황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국은 당분간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군.]
“이 종이가 있는 한은 말이지.”
미미르의 말에 이안이 손에 들린 협정서를 흔들어 보였다.
그녀가 자신의 몸에 쌓아둔 오러와 생명을 포기하지 않는 한, 이 협정은 깨지지 않으리라.
“고철값으로 이 정도면 제법 쏠쏠하지 않아?”
십 년간의 불가침과 짭짤한 배상금.
제국군에겐 아니지만,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얻어낸 보상치고는 넉넉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냐?]
미미르가 묻자, 이안은 손으로 턱을 괴었다.
“우선 이 땅을 좀 정리해야겠지.”
제국의 위협은 해결했다지만, 애당초 범죄자들의 망명지로 쓰이던 땅이다.
일반적인 영지와는 구성원도, 형태도 완전히 다른 곳.
물론 대부분의 일은 베티에게 맡길 생각이었지만.
“영주로서 얼굴 한 번쯤은 비추는 게 좋겠지.”
생각을 마친 이안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