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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 막내는 원샷원킬-51화 (52/224)

#51화

범죄자들의 도시, 알자스를 감싸는 회색의 성벽 위.

“연대급인가.”

쌍안경에서 눈을 뗀 이안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바라보는 방향에서, 수천의 인마(人馬)가 일정한 오와 열을 갖추어 달려들고 있었다.

“연대급?”

“그러니까, 천 단위는 되어 보인다는 말이지.”

파이톤의 물음에 대강 대답한 이안이 상대의 전력을 계산해보기 시작했다.

“창병 약 일천, 검병 오백, 궁병 오백, 기병은 이백.”

“…전쟁이군요.”

이안의 말을 들은 도노반이 표정을 굳혔다.

단순히 숫자만 많은 것이 아니라, 실제로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 병력을 구성했다는 의미였으니까.

걷는 모양새로 보아 오러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자들인 게 분명했지만, 그 숫자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그리고, 두 가지 더.’

이들의 지휘관으로 보이는, 화려한 마갑과 갑옷을 걸친 노기사와 비슷한 복장의 기사들.

‘그리고 저 뒤의 수레는…뭐지?’

거대한 석상이라도 실려 있는 듯, 스무 마리 남짓 되는 말들이 끄는 수레가 하나.

‘어느 정도 준비는 해야겠는데.’

단순히 창칼 든 보병과 기병만이라면 이안 혼자서도 처리할 수 있겠지만, 저 뒤에서 적들이 끌고 오는 수레가 못내 마음에 걸렸다.

“이안, 도와줄까?”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이안은 고개를 돌렸다. 파이톤이 이안을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마력도 제법 충전됐고, 저 정도 병력은 나 혼자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틀린 말은 아니었다.

4급 마법을 부릴 수 있는 고위마법사란, 대규모 전투에서는 신과도 같은 존재였으니까.

물론 제국군도 마법사를 대동했을 것이지만, 그들에게는 페르소나가 없을 것이다.

“물론.”

하지만.

“이건 내 개인이 아니라, 탈마공의 이름으로 도움을 주는 것이지만.”

“결국, 안 도와주겠단 거군.”

파이톤의 말을 들은 이안이 쓴웃음을 지었다.

탈마공의 이름으로 돕겠다는 것은, 언젠가 아슈타르가 그 도움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한다는 의미였으니까.

“아무리 계약을 했다지만, 저 정도 규모의 군대와 싸우는 건 나 혼자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봐봐, 그래서 계약서도 얌전히 있잖아?”

그가 품에서 꺼낸 마력계약서까지 흔들어보이자, 이안은 더 할 말이 없었다.

“과인이 가겠다.”

대신 도움의 손을 내뻗은 것은 다른 사람이었다.

“…네가?”

하지만 이안은 영 달갑지 않아하는 표정이었다.

“이 일에 과인보다 더한 적임자는 없을 것 이라 생각한다. 과인과 그대의 협력관계를 생각해도 말이지.”

알론소 폰 마르세니아.

마르센 제국의 5황자가 굳은 얼굴로 이안을 향해 말을 이었다.

“과인 역시 제국의 황족이니, 과인이 직접 나서 저들에게 군사를 물리라 명한다면 저들 역시 더는 함부로 이 성을 침범하지 못할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할 건데?”

이안의 물음에 알론소는 가슴을 쭉 편 채 손을 내밀었다.

“말을 한 필 다오. 내 저들에게 곧장 달려갈 터이니.”

“…뭐?”

순간, 이안은 황자가 정신이 나간 것은 아닌지 생각했다.

하지만 알론소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황가의 문장이 새겨진 깃발을 들고 간다면 저들도 과인을 공격하지는 않을 터.”

“글쎄, 난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은데.”

이안이 인상을 찌푸렸지만 알론소는 자신의 의견을 물리지 않았다.

“이곳까지 달려올 군사들이라면 필시 황가에 충성을 바치는 알레시온 변경백의 군사일 터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과인을 믿어보게.”

말을 마친 알론소가 자신을 믿으라는 듯 당당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저 정도라면 뭐라도 한 수가 있는 것이겠지.]

‘동감이야.’

이안은 미미르의 말에 동의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저렇게 자신만만하게 사지로 들어가겠다는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여차하면 곧장 전투에 들어가도 되고 말야.’

분명, 피를 흘리지 않을 가능성이 있단 점에서 나쁜 방법은 아니었다.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도노반 경과 함께 내려가. 나머진 네게 맡기지.”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과인이 보증하지.”

정말로 자신의 계책이 성공할 것이라 믿는 듯, 알론소가 오른 손으로 가슴을 텅텅 치고는 도노반과 함께 성벽 아래로 내려갔다.

“아슈타르, 정말 성공할거라 생각하는 거야?”

대화를 듣던 베티가 의구심 가득한 표정으로 이안을 향해 물었다.

“알 수 없지.”

이안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가 제국의 5황자와 밀약을 맺은 까닭 중에는, 분명 이런 상황을 무마하기 위함도 있었으니까.

물론.

“잘 안 된다 하더라도.”

철컥

“저들 맘대로 되지는 않겠지만.”

권총의 슬라이드를 당겨 장전한 이안의 눈이 번쩍 빛났다.

***

“작은 도시군.”

말 위에서 알자스의 성벽을 바라보던 노기사가 코웃음을 쳤다.

물론, 사내가 그리 말할 만큼 알자스는 작은 도시가 아니다.

범죄자들의 도시라고는 하지만, 그 안에서 사는 인구는 도시라는 단어를 붙이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변경백 각하, 곧 적성의 앞에 도달합니다. 어떻게 할까요?”

제국의 서부국경을 수호하는 몽쉐르 알레시온 변경백에겐 자신의 내성보다도 작은 성일뿐이었다.

옆에서 따라오던 젊은 기사가 묻자 변경백이 인상을 썼다.

“뭘 묻는 겐가? 내가 자네를 그렇게 가르쳤나?”

“아, 아닙니다. 바로 전투를 준비토록 하겠습니다.”

히히히힝

변경백의 불호령에 혼쭐난 기사가 급히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말을 달렸다.

“에잉, 멍청한 놈. 그런 하찮은 일은 종자들을 쓸 일이지.”

순식간에 사라진 기사의 꽁무니를 보며 변경백은 혀를 끌끌 찼다.

저러다 갑자기 적이라도 나타난다면 어떻게 대응하란 말인가.

“이래서 내가 진작부터 폐하께 마법통신에 힘을 써야한다고 했거늘. 에잉.”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변경백의 시선이 다시 알자스 성을 향했다.

무너진 첨탑과 내성에 뚫린 구멍만 보더라도, 이 작은 성에서 얼마나 치열한 전투가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거의 주워 먹기로군.”

물론 변경백 본인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트로이카인지 뭔지 하는 범죄자들이 가진 페르소나와 감히 제국에 합류하지 않는 공국의 반역도들만 없다면, 이런 범죄소굴은 일개 기사단만으로도 쓸어버릴 수 있었으니까.

“이게 다, 폐하께서 각하의 충심을 알아보시고 공을 세울 기회를 주시는 게 아니겠습니까.”

“맞습니다, 각하. 고작 범죄자들이 가지기에는 너무 아까운 땅이었지요. 이토록 쉽게 알자스를 얻는다면 각하의 명성 또한 온 대륙에 퍼지지 않겠습니까?”

변경백을 둘러싼 기사들이 그의 말을 듣고는 아첨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멍청한 놈들.”

돌아온 것은 변경백의 냉소였다.

“예?”

“너희는 고작 땅덩어리 하나 얻자고 제국이 이런 위험부담을 떠안을 거라 생각하는게냐?”

싸늘한 말에 휘하기사들이 당황했지만, 변경백은 신경 쓰지 않았다.

‘이런 저주받은 땅 따위는 필요 없다. 중요한 건 신기지.’

얼마 전.

변경백은 직접 황제를 알현하러 갔을 때 받은 밀명을 떠올렸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신기를 회수해오게. 이건 황명일세.’

어째서 범죄자들의 소굴 따위에 잊혀진 신의 신기가 굴러다니는 지는 알 수 없었지만, 황명을 받은 이상 변경백은 명을 수행해야했다.

그리고.

‘마침 때가 맞았어.’

기회가 왔다.

알자스를 지배하던 트로이카가 무너지고, 공국의 병력이 마경과 접한 서쪽으로 이동한다는 첩보를 받은 순간.

변경백은 망설이지 않고 출병을 선언했다.

‘굳이 저걸 쓰진 않아도 될 터.’

변경백의 고개가 진형 뒤로 따라오는 거대한 수레로 향했다.

연합공국이 독점하다시피 한 마법병기, 페르소나에 대항하기 위한 제국의 새로운 무기.

‘영 미덥지 않단 말이지.’

본디 군문에 속한 자들은 새로운 것보단 익숙한 것을 선호하는 법. 그 사실은 변경백 또한 다르지 않았다.

‘쓸 일이 없었으면 좋겠군.’

변경백이 시선을 거두던 그 때.

“가, 각하!”

조금 전 제대에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달려 나간 기사가, 말을 몰고 급히 달려왔다.

“무슨 일이냐.”

변경백은 그 꼬라지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병사들을 지휘해야 할 기사가 당황한 기색을 보이다니, 당연히 사기에 영향이 가지 않겠는가.

하지만.

“5황자 전하께서 오고 계십니다!”

“뭐라고?”

상상도 못한 일 앞에선 천하의 변경백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5황자 전하께서…여기에?”

실종된 지 제법 되었다고 들었다.

황실이 온 힘을 쏟아도 찾지 못한 5황자가.

어째서, 하필 이곳에서 나타났다는 말인가.

‘설마, 신기를 노리고?’

그것 말고는, 사라진 제국의 황자가 이런 변방에서 나타날 이유가 없었다.

“가, 각하.”

상념에서 깨어난 변경백은 기사들을 바라봤다. 자신에게 무언가 답을 요구하는 표정.

“황자전하를 모셔….”

변경백은 명을 내리려했다.

그 순간.

“저게 황자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죠, 변경백? 난 잘 안 보이는데.”

차가운 여성의 목소리에, 변경백은 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금색과 흑색이 조화를 이룬 제국군의 정복을 입은 여인이 두 손으로 햇빛을 가리며 눈을 찡그렸다. 변경백이 한숨을 내쉬었다.

“…황녀 전하, 제국의 군법에 의하면 본디 전장에 나선 장수는 황제 폐하와 동격의 권위를 지닌다는 것을 부디 기억해주셨으면 합니다.”

변경백이 고압적인 투로 말했다.

그의 입장에서야, 휘하 기사들이 보는 앞에서 끼어든 황녀가 곱게 보일 리 없었다.

하지만.

“하지만, 그렇잖아요? 이 거리에서 저 깃발만 보고 어떻게 내 동생인지, 아니면 황가를 사칭하는 역도인지 알 수 있냐고요.”

제국의 유력한 황위 후보 중 하나.

1황녀 루미러스 폰 마르세니아가 가진 권세는 일만의 병력을 가진 변경백도 함부로 무시할 성질이 못되었다.

“황녀전하께선, 어떤 것을 바라시는 겁니까?”

황녀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크게 중요치 않았다.

그보다 중요한 건 황녀의 의중.

변경백의 물음에 그녀는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제가 볼 때는, 저자는 분명 역도에요. 보세요, 어떻게 황자가 자신의 문장기도 가지고 있지 않을 수 있겠어요?”

황녀는 달려오는 기수가 쥔, 백색 천에 그려진 황가의 문장을 가리켰다.

‘억지로군.’

변경백은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실종된 5황자가 황가의 문장기를 가지고 있었다면, 애초에 황실기사와 마법사들이 찾지 못할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저 역도를 죽이세요, 당장.”

황가에서 반쯤 잊혀진 것이나 다름없는 5황자를 지키기 위해서 장차 황제가 될 지도 모르는 1황녀의 말을 거스르기엔, 정치적 부담이 너무 컸다.

“…저는 관여하지 않겠습니다. 기사와 병사들을 알아서 추려 데려가시지요.”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고개를 돌려 현실을 외면하는 것뿐이었다.

***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데.]

“실패한 모양이지.”

미미르의 말에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의 황자를 모시러 오는 기사들이 검에 오러를 줄기줄기 피우고 있을 리 없지 않은가.

무언가 잘못된 것이 틀림없었다.

[그럼, 저대로 내버려 둘 텐가?]

“그건 아니지.”

이렇게 쓰고 버리기에는 황자의 가치가 너무 높았다.

거기다, 이안은 굳이 위험부담을 감수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철컥

성벽 위에 걸친 M48A2 바렛의 노리쇠를 당겨 장전한 이안의 눈이 스코프너머의 적을 조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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