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트로이카의 주인, 신드라와의 전투는 벼락처럼 끝났다.
끼익
이안은 전차 지붕의 큐폴라를 열고 상체를 내밀었다. 머리 잃은 오우거의 시신이 차가운 돌바닥에 쓰러져있었다.
‘끝이군.’
푸른 빛을 내뿜으며 줄어드는 오우거의 사체를 보며, 이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동시에.
파앗
마력을 모두 소진한 이안의 페르소나가 다시 원래의 권총 형태로 돌아왔다.
[아슬아슬했군. 하마터면 한 방 먹이기도 전에 끝날 뻔 했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은 사자머리의 미미르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안이 이곳에서 죽어버렸다면, 선대 신검공의 안배 역시 함께 사라져 버렸을 테니까.
이안은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 온 여성의 머리 잃은 시신을 확인했다.
“저게 신드라가 맞나?”
[잘 모르겠군. 얼굴을 아는 녀석이 있다 할지라도 모를 것 같긴 하다만.]
얼굴을 알면 무엇 하겠는가.
이미 그녀의 머리는 포탄과 함께 날아가 버린 것을.
어지간히 알고 지내던 자가 아니라면, 그녀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럼 남은 건 저것뿐이군.”
이안의 시선이 주검과 함께 나타난 건틀렛으로 향했다.
시신의 손에서 한참 떨어져있는 건틀렛 한 쌍 사이를, 금속의 막대기 같은 것이 연결하고 있었다.
[페르소나로군. 저것들에게서 두 개의 서로 상반된 기운이 느껴진다.]
“그럼, 원래는 두 개란 건가?”
미미르의 말에 이안은 의구심을 품었다.
본디 페르소나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은 구현의방에서 자신의 페르소나를 제작한 자격자 본인뿐이다.
‘한 사람이 두 개의 페르소나를 쓸 수 있다니.’
그런 말은 누구에게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만약 그게 가능하단 걸 알았다면, 이안의 몸뚱이엔 지금쯤 온갖 모양의 페르소나들이 칭칭 감겨있었을 터.
천천히 다가가 건틀렛을 주워든 이안은 건틀렛을 자세히 살폈다.
달칵
이안이 살짝 손을 대자, 한 쌍의 건틀렛을 연결하고 있던 쇠막대가 분리되었다.
[지팡이로군. 마법사들은 보통 구슬형태의 페르소나를 많이 사용할 텐데 말야.]
“아마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만든 것이겠지.”
지팡이와 건틀렛을 이리저리 살피던 이안의 표정은 자못 심각했다.
페르소나는 구현의 방에 도착한 순간 뚝딱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두 개를 하나로 이을 수 있는 전설을 찾아 익히고, 어떻게 두 개의 페르소나를 연결할지 미리 계획을 짜두어야 한다.
‘못해도 십 년 인가?’
그것은, 아슈타르가 알자스를 탐내기 전부터 이미 계획된 일이란 말과 같았으니까.
아니, 어쩌면 아슈타르가 알자스를 탐낸 것 자체가 이들의 목적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음?’
건틀렛을 이리저리 돌려보던 이안은 건틀렛 안쪽에 아주 작게 새겨진 문양을 발견했다.
‘무지개…용인가?’
새끼손톱만한 크기로 새긴, 무지개 빛을 내뿜는 용.
이안이 기억창고를 뒤져봤지만, 당연히 이런 게 전 주인의 머리 안에 남아있을 리 없었다.
“미미르?”
[나도 처음 보는 문장이다. 무지개 용이라니, 촌스러워서 원.]
이안의 물음에 미미르가 콧방귀를 뀌었다. 유심히 보지 않는다면 찾기조차 힘든 그 문장을, 이안은 유심히 살폈다.
‘왜 이런 곳에 새겼을까.’
가문의 문장은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어떤 신분을 가졌는지 알리는 기능을 한다.
당연히, 그런 종류의 문장이라면 잘 보이는 곳에 대놓고 박아놨을 것이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일부러 잘 보이지 않게 문장을 새겼다면.
‘남들은 알아서는 안 되는, 아는 사람들만이 확인할 수 있는 것.’
전생에서 쌓아온 이안의 경험에 따르면 그랬다.
그것도, 500년간 쌓아온 레온하르트의 지식을 가진 미미르도 모를 정도라면 가능성은 아마도 두 가지.
‘생긴 지 얼마 안 되었거나.’
아니면 그 오랜 세월동안 한 번도 바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비밀결사거나.
이안은 급히 지팡이를 확인했다. 지팡이 역시, 손잡이의 끝에 동일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일단은 가지고 있어야겠어.’
이안은 조심스럽게 지팡이를 품에 넣었다.
[이안, 그 페르소나의 마력을 나에게 흡수시킨다면 나와 네 능력은 더욱 강해질 것이다. 어쩌면 그림자들로 병사를 만들어낼 수도….]
미미르가 꿍얼거렸지만 이안은 미미르의 말을 무시한 채 지팡이를 넣은 코트의 옷깃을 잘 여몄다.
그 때.
두두두두
뒤에서 수십, 수백의 발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철컥
이안은 급히 무너진 벽 뒤에 몸을 숨기곤 권총의 슬라이드를 당겼다.
[약 서른 명. 앞으로 150M다.]
‘아래쪽인가?’
미미르의 경고에 이안이 권총을 벽 너머로 겨누었다.
내성은 주변보다 높게 지어지는 법이니, 분명 저들은 아래쪽에서 올라오는 것이 확실했다.
‘파이톤에게 검은 사자문양을 보면 곧장 데려오라곤 했지만.’
만약 이 곳에 올라온 것이 아군이 아니라 적이라면, 또 한 번의 전투를 치러야한다.
“후우, 후우.”
이안은 숨을 고르며 긴장을 조금 풀었다.
적진 한 복판에서 홀로 싸운 경험은 한 두 번이 아니었지만, 혼자 남았다는 공포와 앞으로 벌어질 전투에 대한 두근거림은 아무리 강해지더라도 익숙해지는 종류가 아니었으니까.
호흡을 조절하며 그가 방아쇠울에 손가락을 집어넣은 순간.
“이안! 여기 데려왔어!”
“공자님, 무사하십니까!”
“어이, 아슈타르! 어디…저거 신드라 아냐?”
이안의 귀에 들려온 낯익은 목소리들.
[일단 적은 아니로군. 다행이야.]
“후우.”
언덕 밑에서 올라오는 파이톤과 도노반, 베티의 얼굴을 확인한 이안은 총구를 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뒤처리는 제법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트로이카를 이끌던 수장 셋이 모두 죽은 순간부터.
아니, 도노반이 투기장에서 그랜드 오러마스터가 된 순간부터 그들은 이미 무너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모래알처럼 조각난 트로이카의 시체를 수습하는 것은 현관의 먼지청소만큼 쉬운 일이었다.
그보다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난 못해.”
이안의 말을 들은 베티가 인상을 찡그렸다.
“왜 난데? 아니, 기왕 얼굴마담 시킬 거면 저기 할아범도 있잖아. 그랜드 오러 마스터라며?”
“그, 베티 경. 그건 단지 연극일….”
“나한테 경이라고 하지 마요, 할아범. 그 호칭 들을 때마다 소름이 돋으니까.”
“험, 험.”
뿔난 베티의 일갈에 뻘쭘해진 도노반이 헛기침을 날렸다. 잠시 노기사를 노려보던 베티는 이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무튼, 난 안해. 잠깐 도와줬으면 됐지, 이제 바지영주까지 하라고? 하.”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베티를 이안은 아무 말 없이 바라보았다.
“네게도 나쁜 조건은 아닐 텐데?”
하지만 이안 역시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한 도시의 주인으로 대접받으며 사는 게 네 생각만큼 별 거 아닌 일은 아니니까 말이지.”
이안이 별 탈 없이 알자스를 얻음과 동시에, 영주의 의무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었으니까.
‘베티라면 제법 잘 해내겠지.’
알자스와 알자스의 사람들에 대해 잘 알고, 경영능력도 출중하니 여차하면 영지의 전반적인 행정업무를 맡겨도 좋으리라.
‘정 안된다면 다른 사람을 구해야겠지만.’
제국과의 알력 때문에 전면에 나설 수 없는 이안에겐 베티를 세우는 것이 가장 모양새가 좋았으니까.
하지만 이안의 말에 베티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이 범죄자들로 우글거리는 도시에서 왕으로 군림하려면 필요한 게 뭔지 알아?”
스릉
말을 마친 베티가 자신의 허리춤에 걸린 단검을 뽑아들었다.
“힘. 이게 없으면 아무리 높은 자리에 올라봤자 다음 날이면 성벽 위에 매달려있을걸? 트로이카의 세 수장들도 그만한 힘이 있어서 오 년을 정상에서 버틸 수 있었던 거였고. 근데 난?”
휙
말을 마친 베티가 별안간 단검을 집어던졌다.
이안의 옆으로 스쳐지나간 단검은.
퍽
성이 반쯤 무너진 와중에도 멀쩡히 살아남은 흑색 옥좌에 박혀들었다. 그녀가 이안을 보며 피식 웃었다.
“네 생각에는 내가 저 자리에서 며칠이나 버틸 거 같아? 난 여섯 시간에 금화 한 닢 정돈 걸 수 있을 거 같은데.”
팅
이윽고, 베티는 언제 꺼냈는지 모를 금화를 튕겼다.
날아오는 금화를 낚아챈 이안이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이제 누군가한테 놀아나는 건 지긋지긋해. 이만큼 도와줬으면 좀 놔달라고.”
말을 마친 그녀의 눈빛이, 그간의 고생을 떠올린 것인지 처연하게 가라앉았다.
[힘들어 보이는데. 차라리 그녀의 말대로 네 기사를 앞세우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군.]
그녀의 상태를 보곤 미미르가 사자갈기를 휘날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만약 힘을 줄 수 있다면?”
하지만 이안은 포기하지 않았다.
“뭐?”
“남들에게 휘둘리지 않을 힘을 줄 수 있다면, 할 수 있겠냐고 물었어.”
이안의 물음에 그녀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남에게 휘둘리지 않고 살 수 있을 정도로 강한 힘.
그런 걸 가질 수 있다면, 분명 그녀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으리라.
하지만.
“결국, 그 힘을 주는 건 너잖아? 내가 널 어떻게 믿지?”
남에게서 힘을 받는다면, 결국 그 힘을 받은 자는 힘을 내려준 자에게 종속된다.
그녀는 당연한 이치를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힘을 주는 건 내가 아니야.”
“그게 무슨….”
“페르소나.”
“고, 공자님!”
이안의 입에서 그 네 글자가 나온 순간.
도노반과 베티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내가 주는 건 기회일 뿐이야. 나머진 네가 만들어내는 거고. 원한다면 마력계약서라도 써주지.”
그녀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안의 제안은 거침이 없었다.
아무리 자신의 대행이라 한들, 그녀에게 중범죄자들을 짓누를 무력이 없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었으니까.
“으, 음….”
베티는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페르소나를, 저렇게 마음대로 줄 수 있다고? 아무리 놈이 아슈타르의 공자라고는 하지만….’
페르소나는 신검공도 아닌, 고작해야 공자 따위가 마음대로 주고 말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 년에 한 번, 각 공작령에서 가장 기대 받는 자만이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아닌가.
‘하지만….’
이안의 제안에 마음이 동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슈타르에서 나고 자란 그녀만큼, 페르소나의 강력함을 잘 아는 사람도 없었으니까.
“…계약의 내용은?”
결국, 그녀는 미끼를 물어버렸다.
“알자스의 시장 자리에 앉는 것을 대가로, 구현의 방에 들어설 기회를 주지.”
“좋아. 계약서는?”
“구하는 대로. 지금은 좀 어렵겠지만.”
“시원시원해서 좋네.”
이안의 대답에 베티가 고개를 끄덕이곤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고개를 돌렸다.
[생각보다 쉽게 해결됐군.]
옆에서 미미르가 둘을 흥미롭게 지켜볼 때 즈음.
타타타탓
“이안!”
누군가가 무너진 성의 홀 안으로 급히 뛰어들었다. 셋의 시선이 한 곳으로 쏠렸다.
“큰일이야! 지금 밖에….”
파이톤이었다.
‘뭔가 터졌어.’
소년의 심각한 표정을 본 순간, 이안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곧.
“제국군이, 제국군이 몰려오고 있어!”
무언가의 정체가 낱낱이 드러난 순간.
“…이거, 계약서를 작성할 필요도 없을 거 같은데?”
굳은 얼굴로 묵묵히 서 있는 이안을 향해 베티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