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그림자들은 생각했다.
‘여긴 지옥이다.’
아니면 덫이라고 해야 할까.
가는 길목마다 알 수 없는 함정이 숨어있었고, 함정을 피해 도망가려하면 뒤통수에 무언가가 날아와 꽂혔다.
‘이건 꼭 고양이에게 쫓기는 쥐로군.’
개중 한 명이 이를 갈았다.
항상 사냥꾼의 입장에서 목표를 암살하던 그림자들에게 사냥감이 되어 쫓기는 것은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이대로 당해줄 순 없어.’
가만히 있어봐야 남는 것은 비참한 죽음뿐이다.
이제 남은 그림자의 수는 셋.
무언가 결단을 내려야했다.
‘함정이건 뭐건 최대한 빨리 돌파해야 해.’
어차피 도망가지 못한다는 것은 진작 깨닫고 있었다.
그렇다면, 뭐라도 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토끼처럼 몰이당하다 개처럼 죽는 것은 그림자에 어울리는 최후가 아니었으니까.
끄덕
순식간에 눈빛을 교환한 셋이 방향을 반대로 돌려 달려갔다.
이미 생명을 반쯤 포기한 이상, 그들에겐 거칠 것이 없었다.
드르르르르륵
그림자들을 노린 정체불명의 무언가가 다시 불을 뿜었다.
풍덩
개중 한 명이 적의 공격에 정통으로 얻어맞은 채 수로에 풍덩 빠졌다.
하지만 한 명의 희생을 대가로 남은 그림자들은 적에게 접근할 기회를 얻었다.
파파팟
똑같은 공격에 여러 번 당한 그림자들은 이미 패턴을 읽은 상태.
남은 두 그림자가 각자 산개한 채로 빠르게 이동했다.
드륵 드르륵
적의 공격이 쏟아졌지만 눈으로 따라가기도 힘들 만큼 빠르게 움직이는 그림자를 맞추지는 못했다.
그림자들의 마음 한 구석에 희망이 생겨났다.
‘좋아, 이대로 놈에게 접근한다.’
접근만 한다면.
그래서 저 이상한 공격이 더 이상 소용없게 된다면, 숫자가 많은 자신들의 승리다.
타타탓
우웅
단 한 가지 가능성을 발견한 그림자들의 뜀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그들이 손에 쥔 무기에서 무색의 오러가 길게 뿜어져 나왔다. 두 자루의 도와 창이 적의 심장을 꿰뚫을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응?’
희망이 파멸을 막아주지는 못했다.
‘무슨?’
바닥에 박혀있는, 마치 도시락 통만 한 철통.
그것을 본 그림자들이 의문을 떠올린 순간.
콰앙
폭발과 함께 뿜어져 나온 수 백 개의 쇠구슬.
그것이 그림자들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
[자칫하면 수로가 무너질 수도 있었다. 지나친 위력이었다.]
M18A1 클레이모어, 속칭 크레모아.
기왓장 하나 크기의 철통이 만들어 낸 끔찍한 광경 앞에서 미미르의 사자머리가 고개를 저었다.
“반대로 말하면, 이 정도는 돼야 녀석들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거 아니겠어?”
HK416을 들고 쓰러진 적들을 향해 다가가던 이안이 미미르에게 답했다.
물론 쓰러졌다기보다는 박살났다에 가까운 몰골이었지만.
초음속으로 날아드는 수백 개의 쇠구슬을 맞고도 멀쩡할 수 있는 사람은 사실상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오러의 힘이 대단하긴 한 것 같다만.’
산산이 부서졌어야할 적들의 형태가 그나마 온전히 남아있다는 것만으로도, 놈들의 경지가 얼마나 높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상대가 이안이 아니었다면, 산산조각이 난 것은 이들이 아니라 검은 사자단이었을 것이다.
‘페르소나를 좀 편하게 운용할 수 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이안도 화약병기를 전적으로 사용할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신기의 힘은 그만큼 강력하니까. 적절한 수준이라면 마력수급에 큰 문제는 생기지 않을 것이다.]
이안의 반응에 미미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이 흡수한 것은 신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찌꺼기였지만, 고작 찌꺼기를 흡수한 이안의 마력은 두 배 가까이 늘어났다.
이미 이안의 마력은 환수급의 페르소나를 다루기에도 충분한 수준에 도달했으니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조만간 섬을 한 번 들려야겠어.’
이번 일을 모두 끝내고, 어느 정도 여유를 찾는다면 말이다.
결국 싸움으로 얼룩진 이 세상에서 이안의 삶을 지키기 위해선 힘이 필요했으니까.
“여기 있군.”
시체가 된 두 그림자를 지나친 이안은 오염된 물속에서 간신히 숨만 쉬고 있는 사내를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끅, 끄윽.”
심한 내상을 입었는지 사내의 얼굴에 뒤집어쓴 회색 복면은 피로 범벅되어있었다.
쓰러진 사내를 바라보는 이안의 눈이 스산하게 빛났다.
“너, 살고 싶지?”
이미 반쯤 정신을 잃은 사내였지만, 이안의 말을 들은 그는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야 한다.’
평생 죽음의 위기를 겪을 일이 없었던 그였지만, 막상 죽음이 눈앞에 닥치니 잊고 있었던 삶에 대한 욕구가 솟아났다.
“좋아.”
스윽
사내가 승낙하는 것을 확인한 이안은 그림자 팔을 꺼내 물 속에서 반쯤 죽어가는 사내를 꺼내들었다.
“대신, 일 하나만 해줘야겠어.”
이안은 흐리멍텅한 상대의 눈을 마주봤다.
***
“어떻게 할 거지, 하캄?”
알자스의 가장 높은 곳.
첨탑에 모인 트로이카의 세 수장 중 하나, 신드라가 하캄을 매섭게 노려봤다.
“뭘 말하는 건지 모르겠군.”
신드라의 말에 하캄은 유들유들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의 속내는 새카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그림자 놈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검은 맹약까지 사용해가며 그림자들을 보낸 지 벌써 사흘이 넘었다.
하사신의 전력 절반 이상을 내다버리는 짓을 각오했음에도 돌아오는 것은 감감무소식뿐이었으니 어찌 속이 타지 않을까.
“그 사자 놈들이라면 하사신의 그림자들만으로 처리할 수 있다. 남을 추궁하기 전에 인내심을 갖는 게 어떨까, 신드라?”
하지만 그 사실을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다.
그림자들이 행방불명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그의 입지는 위태로워질 것이 분명했으니까.
하지만 하캄의 변명을 들은 신드라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하, 아직도 상황파악이 안 되는 모양이군.”
싸늘한 그녀의 표정을 본 하캄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뭔가가 있어.’
하지만 드러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캄은 애써 표정을 풀었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 나 역시 트로이카의 수장 중 하나란 걸 잊지 말라고. 아무리 네 미모가 쓸 만하다지만 슬슬 불쾌해지고 있으니까.”
말을 마친 하캄이 눈살을 살짝 찌푸렸지만 신드라는 멈추지 않았다.
“그래? 어디, 이걸 보고도 그 혓바닥이 계속 움직이는 지, 볼까.”
“그게 무슨…”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에 하캄이 되물으려는 순간.
지잉
신드라의 품에서 나온 수정구슬에서 영상이 떠올랐다.
어딘지 알 수 없는 어두운 방 한 가운데에 사내가 묶여있는 영상.
“저, 저자식이 저긴 왜!”
그가 선 곳이 어딘지도 잊은 채, 영상에 나온 사내를 확인한 하캄이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나는 말론드.]
피 묻은 회색 복면을 쓴 사내는.
[하사신의 그림자 중 하나, 그리고 유일한 생존자다.]
그가 사흘 전 보낸 그림자들 중 하나였으니까.
[우리는 장주의 명령에 따라 어두운 하수도에 투입되었다….]
영상 속 사내는 손에 든 대본에 따라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어떤 명령을 받았는지. 어떤 방식으로 침투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당했는지.
담담한 목소리로 대본을 읽어 내리는 사내를 보던 하캄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어갔다.
‘위험해.’
그림자들이 모두 당했다는 것은 이미 기정사실이다.
자신 또한 강한 힘을 가진 암살자라지만, 그가 트로이카에서 한 축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도시의 어둠을 주름잡던 그림자와 부하들 덕분이었으니까.
반대로 말하면.
‘이제 쓸모가 없어졌군.’
쓸모가 없어진 사냥개는 삶아진다.
그림자를 보내 수많은 사냥개들을 삶아냈던 하캄이 그 최후를 떠올리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일단은 빠져나간다.’
살아남아야 후일을 도모할 수 있다.
하캄은 이때를 대비해 준비해 둔 마법스크롤을 품에서 꺼내들었다.
제국 어딘가의 지정된 장소로 이동할 수 있는 순간이동 마법이 부여된 스크롤.
‘상황을 본 다음, 제국에서 다시 세력을 키워나가면 돼. 암살자를 고용할 필요가 없는 나라는 없으니까.’
성 하나 값은 하고도 남는 비싼 스크롤이었지만, 돈은 다시 벌면 된다.
부욱
하캄은 다른 수장들이 눈치 채기 전, 재빨리 스크롤을 찢었다.
파앗
반 토막 난 마법진에서 시퍼런 빛이 뿜어져 나왔다.
마법이 제대로 가동되고 있다는 증거를 확인한 하캄의 입꼬리가 부르르 떨었다.
‘두고 보자. 트로이카건 용종이건, 밤을 지배하는 것은 나다!’
푸른빛에 휩싸인 채로 하캄은 다짐했다. 곧 사라지기 전, 그의 눈이 빌어먹을 년, 신드라를 향했다.
그리고.
‘웃고, 있어?’
싸늘한 눈으로 입꼬리를 비튼 신드라의 표정.
그것이, 하캄이 본 마지막 광경이었다.
콰득
섬뜩한 소리와 함께 하캄이 서 있던 자리가 피로 물들었다.
“감히 내 앞에서 마법을 쓸 생각을 하다니.”
한 줌 핏물이 되어버린 하사신의 장주를 보곤, 검은 탑의 주인인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멍청한 건지, 배짱이 좋은 건지.”
그녀가 한 일은 아주 사소한 것이었다.
하캄이 마법스크롤을 찢기 직전, 마력을 보내 마법진의 내용을 살짝 고쳤을 뿐이니까.
그 결과가 조금 끔찍했을 뿐.
“이제 트로이카라는 이름은 못 쓰겠는데. 듀오라고 불러아 합니까?”
하지만 그의 옆에 선 또다른 수장, 다이거는 별 생각이 없어보였다.
애당초, 일곱 용에 대해 알지도 못하는 하사신의 장주 따위는 그의 입장에선 외부자일 뿐이었으니까.
“그래. 이제 어쩔 겁니까, 누님? 놈들의 세력이 생각보다 커진 것 같은데.”
그의 말대로, 이미 검은 사자단의 세력은 트로이카와 비등할 수준까지 성장해있었다.
거기다, 놈들이 아슈타르와 관련된 것이라면 더이상 가만히 두고볼 수는 없었다.
“다른 방법이 없겠지.”
신드라는 다이거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마치 해답이 그에게 있는 것처럼.
“아, 결국 귀찮은 건 이 동생 몫이다, 그 말입니까?”
다이거 역시 무슨 말인지 알아들은 눈치였지만, 귀찮기라도 한 듯 볼멘소리를 냈다.
“그만큼 효과도 확실하지. 이미 계획은 많이 어그러졌으니, 지금부터라도 복구해야 해.”
이미 세 축 중 하나를 잃어버린 이상, 그녀의 계획 역시 존망의 기로에 서있었으니까.
“예이, 예이. 알겠습니다요.”
검투사들의 왕, 다이거가 신드라의 말에 장난스레 고개를 숙였다.
***
“공자님.”
지하에 돌아온 도노반이 종이 한 장을 이안에게 건넸다.
“알고 있어.”
하지만 이안은 이미 전단의 내용을 확인한 상태였다.
[특별 경기: 트로이카 VS 검은 사자단!]
“대단하군.”
이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전단지를 도시 전체에 뿌림으로써, 절대로 벗어나지 못할 무대를 만들어 준 셈이었으니까.
“놈들의 전형적인 수법이야. 이 도시의 유일한 투기장이 트로이카의 소유거든.”
“자신들의 홈에서 박살내버리겠단 거군.”
베티의 말을 들은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들이 왜 진작 이런 방법을 쓰지 않았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으니까.
도시민들이 보는 앞에서 압도적인 힘으로 찍어 누른다.
도시의 진정한 지배자가 누군지 보여주기에 딱 적절한 방법이 아닌가.
“미리 말해두지만, 승산은 높지 않아. 놈들에겐 환수급 페르소나가 둘이나 있어.”
베티가 걱정스런 눈빛으로 이안을 바라봤다.
환수급 페르소나의 힘은 라비린토스에서 똑똑히 경험했었으니까.
‘아무리 아슈타르라도….’
고작 병기급 페르소나로는 한계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참가한다.”
이안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결정했다.
‘해 볼만 해.’
그의 눈엔 승리로 가는 길이 보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