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알자스를 지배하는 대륙 제일의 범죄조직, 트로이카를 상징하는 것은 삼두룡이다.
세 조직이 합쳐져 정점에 올라선 트로이카를 상징하기엔 이만한 상징도 없을 터.
이를 잘 알고 있는 트로이카에서는 도시의 주요시설 곳곳에 자신들의 상징을 박아 넣었다.
그리고.
쿠르르르
그중 하나가 지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돌과 약간의 석회로 세워진 시계탑은 61mm박격포의 화력을 간신히 견뎌냈지만, 시계탑 위에 뾰족하게 세워진 첨탑과 삼두룡의 석상은 아니었으니까.
콰직
광장 바닥에 내리꽂힌 세 마리 용이 섬뜩한 소리와 함께 박살났다.
“이런 개자식….”
하사신의 장주, 하캄의 평정심도 함께.
급히 건물 밖으로 나온 하캄의 눈앞에 박살난 석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석상의 목 위에 달려있던 세 개의 용대가리는 간신히 형체만 알아볼 수 있을 정도.
“감히, 비겁하게 숨어서 뒤통수를 쳐?”
반쯤 가루가 된 석상을 본 하캄은 이를 갈았다.
청부살인을 주업으로 삼는 하사신의 장주가 할 말은 아니었지만, 하캄의 자존심은 깊은 상처를 입었다.
어둠속에서 은밀하게 살아가던 하사신의 본거지를 대낮에 공격하는 미친놈이 있을 거라 누가 생각이나 했겠냐마는.
“쪽이란 쪽은 다 팔게 생겼군.”
분명 신드라나 다이거가 이를 알게 된다면 그를 비웃을 게 틀림없었다. 어쩌면 트로이카에서 그의 입지가 줄어들 우려도 있었다.
당장 놈들에게 발각된 본거지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했으니, 유·무형적 손실을 감안한다면 허황된 생각만은 아닐 터.
그 전에, 보충할 필요가 있었다.
“그림자들을 불러야겠어.”
하캄은 주머니에서 자신이 가진 최고의 방책을 꺼내들었다.
파삭
검은 색의 마력이 담긴 열 개의 구슬들을 단숨에 손으로 으스러뜨리자 주먹 사이로 검은 마력이 연기처럼 뿜어져 나왔다.
뭉쳐진 검은 연기 앞에 선 하캄이 스산한 눈을 빛냈다.
“검은 사자단을 찾아라. 찾아서 내게 그 위치를 알려라.”
그리고 죽여라. 라는 말은 굳이 뒤에 덧붙이지 않았다.
평생을 암살자로만 살아온 그림자들에게 자비 따위가 있을 리 없잖은가.
“트로이카의 어둠이 얼마나 깊은지 너희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허공에 흩어지는 검은 마력을 보며 하캄은 이를 갈았다.
***
“분위기는 제법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어.”
베티의 말에 구석에 앉아 마력을 보충하고 있던 이안이 고개를 돌렸다.
“정확히.”
“제법 이름 있는 조직 중 절반이 우리를 지지하고 있어.”
이안의 물음에 베티가 미소를 지었다.
처음 그녀가 이 도시에 파견되었을 때의 어려움을 생각한다면, 지금은 모든 일이 술술 풀려갔으니까.
“이름도 없는 잡범들이야 모르겠지만, 이 정도면 트로이카를 제외하곤 최대 규모야.”
“관리는 어떻게 되고 있지?”
“우선은 기존 조직들의 체계를 그대로 유지하는 방향으로. 사실 우리 숫자로 그 많은 조직들을 전부 관리할 순 없잖아?”
그녀의 말대로, 고작 열 남짓한 인원으로 전부를 통제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숫자였으니까.
“문제가 될 것 같은 애들만 우리가 본보기로 처리하는 게 유일한 방법이지. 마침 사제님도 돌아다니면서 도움을 주고 있고.”
“세리아가?”
의외의 말을 들은 이안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 모습을 본 베티가 피식 웃었다.
“조직원들 중에 마르콘의 신자가 제법 있더라고. 범죄자 주제에 태양의 신을 섬긴다니, 웃기지 않아?”
말을 마친 그녀가 숨을 들이마셨다.
이안에게 자신이 해온 일을 설명하는 베티의 표정은 어딘가 모르게 후련해보였다.
“제법 기분이 좋아 보이는데.”
그녀의 표정을 본 이안은 의구심이 들었다.
분명 처음 만날 때만 하더라도 이안에게 저주를 퍼붓던 그녀가 언제부터 이렇게 변했단 말인가.
“오랜만에 살아있는 기분이라니까. 나나 랄프나 데인이나 지난 몇 년 동안은 죽은 듯이 살아왔거든.”
“그게 아슈타르의 일일지라도?”
“아슈타르보다는, 너 때문이지.”
“뭐?”
베티의 말을 들은 이안의 눈이 급히 베티의 전신을 훑었다.
[호오, 증오하던 사람과의 사랑이라니.]
베티의 말에 이안 옆의 사자머리가 이안을 게슴츠레하게 쳐다봤다.
‘그런 거 아냐, 인마.’
하지만 그녀의 표정과 행동을 확인한 이안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온몸으로 표출하는 감정은, 사랑이라기 보단 다른 것이었으니까.
“최소한 너는 다른 아슈타르 놈들과는 달랐잖아?”
신뢰.
“너는, 최소한 우리를 전우로 여기는 놈이니까. 장기 말처럼 버리고 가는 녀석들이랑은 다르게.”
그녀는 이안을 깊이 신뢰하고 있었다.
“그렇게 봐주면 나야 좋지만.”
이안은 어깨를 으쓱하곤 벽의 지도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의 얼굴이 제법 두껍다고는 하지만, 바로 앞에서 금칠을 하는데 버틸 재간이 있겠는가.
“이제 몇 군데 안 남았군.”
지도 이곳저곳에 쳐진 가위표를 확인한 이안이 턱을 괴었다.
테러, 혹은 파괴공작이라 해야 할까.
이안은 정확히 정오가 될 때마다 놈들의 주요한 시설과 상징물들을 파괴했다.
당연히 트로이카에선 이안을 잡기 위해 도시 전역에 경비태세를 유지했지만, 수 킬로미터 밖에서 포탄을 날려대곤 그림자와 함께 사라지는 이안을 잡을 방법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이대로 가면 알아서 무너질지도 몰라. 트로이카가 예전만 못하다는 소문이 알자스 전역에 돌고 있으니까.”
“신드라가 아무것도 없는 머저리라면 그렇겠지.”
베티가 자신 있게 말했지만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전생의 경험에 따르면, 무너지기 직전의 테러조직들은 마치 짜고 치는 것 마냥 정해진 패턴대로 행동했으니까.
“아마 둘 중 하나일거야.”
후일을 노리고 아무도 찾을 수 없는 지하로 숨어들거나.
삐익 삐익
“아니면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기 전에 승부를 걸거나.”
이안의 말과 거의 동시에, 세리아가 설치해 둔 결계에서 경보음이 울려 퍼졌다. 베티와 그의 얼굴이 동시에 굳었다.
“호랑이도 말만 하면 온다더니.”
“무슨 소리지, 그게?”
이안이 지구의 속담을 읊자 베티가 굳은 얼굴로 묻었다.
이안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마침 잘 됐단 거지.”
적의 발악을 짓밟는 순간, 승리는 넘어온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스윽
등 뒤에서 그림자의 힘을 끌어올린 이안이 눈을 빛냈다.
***
열 명의 인영이 하수도를 소리 없이 파고들었다.
그들의 덩치와 차림새는 모두 달랐다.
검을 쥔 놈, 도를 등에 맨 놈, 심지어 어떻게 움직이는지는 모르겠지만 중갑옷에 접이식 장창을 매고 다니는 놈까지.
하지만 그들에겐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에 진회색의 복면을 뒤집어썼다는 것.
스스슥
그 복면이야말로, 그들이 하사신의 수많은 암살자들 중에서도 정점에 달한 열 명의 그림자라는 증표였다.
‘내가 여기 왜 있는지 모르겠군.’
그 중 하나, 아르킨의 속내는 불만으로 가득했다.
아니, 그 뿐만이 아니라 이 자리의 모두가 불만을 가지고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림자들이 열 명이나 몰려있다니.’
어지간한 의뢰가 아니면 둘도 움직이지 않는 것이 하사신의 그림자들이다.
그들이 그만큼 실력이 뛰어나기 때문도 있지만, 그 뛰어난 실력만큼의 자존심이 다른 이와의 협업을 거부했으니까.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달랐다.
‘설마, 장주가 검은 맹약을 꺼내 쓸 줄이야.’
단 한 번, 그림자들의 자유를 대가로 어떤 명령이든 내릴 수 있는 장주의 고유권한.
그 절대적인 권한을 하나도 아니고 그림자 열 모두에게 사용할 일이 일어날 것이라곤 그림자인 아르킨조차도 생각해보지 못했다.
‘황제라도 암살하는 거라면 모를까.’
하지만 그들이 들어가는 곳은 황궁이 아니라 알자스의 더러운 하수도였고, 그림자들의 목표는 황제가 아니라 검은 사자단이라는 웃기지도 않는 조직의 두목이다.
‘빨리 끝내고 정착할 자리나 찾아봐야겠어.’
붙어있기만 해도 불쾌한 그림자들과 함께 일을 하는 것은 영 내키지 않았지만, 평생 바라마지 않던 은퇴의 기회가 아닌가.
‘돈은 제법 모았으니 외딴 곳에서 검술사범 노릇이나 해볼까.’
이번 임무에 별 의미를 두지 않았던 그는 벌써부터 은퇴 이후의 편안한 삶을 생각하고 있었다.
갈림길 앞에서 검은 팔이 자신을 노리는 줄도 모르고.
드르르르륵
연속된 폭음과 함께 검은 팔이 쥔 9mm 파라블럼탄이 적들을 향해 쏘아져나갔다.
푸푸푹
예고도 없이 날아온 총탄에 몸이 꿰뚫린 그림자 둘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파파팟
예상치 못한 기습.
침묵 속에서, 남은 그림자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사방으로 산개했다.
이미 상대에게 위치를 발각당한 상황에서 뭉쳐있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으니까.
운 좋게 목숨을 부지한 아르킨 역시 그 중 하나.
‘어디지?’
오염된 수로에 숨어든 그의 눈이 적의 위치를 찾아 바쁘게 움직였다.
드륵 드르륵
‘저기군.’
굉음과 함께 들려오는 화염을 확인한 그는, 적의 위치를 확신하곤 허리춤의 단검을 꺼내들었다.
우웅
그림자들만이 다룰 수 있는 무색의 오러가 단검 위를 코팅하듯 감쌌다.
드륵 드르륵
풍덩
그 와중에도, 쏟아져나가는 무언가에 맞은 그림자 하나가 천장에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죽어라.’
휙
아르킨은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불꽃을 향해 단검을 힘껏 던졌다.
퍽
‘맞았다.’
파육음과 함께 불꽃이 멎은 것을 확인한 아르킨이 복면 뒤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피했다면 모를까, 강철도 두부처럼 베어버리는 오러가 가득 실린 검에 맞았다면 못해도 중상일 게 뻔했으니까.
하지만 아르킨은 곧장 잡은 사냥감에게 달려드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그들이 잡은 게 놈들의 두목이란 걸 확인하기 전까진 이 의뢰는 끝난 게 아니었으니까.
‘제발 두목이었으면 좋겠는데.’
십여 분의 정적.
그리고 정적 속에서 수많은 의견을 그림자들과 교환한 아르킨은 적의 시신을 확인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섰다.
‘죽은 건가?’
그가 단검을 던진 곳에는 누군가의 몸뚱이처럼 보이는 무언가가 바닥에 쓰러져있었다.
‘이 녀석이군.’
아르킨은 확신했다.
녀석의 몸뚱이 한 복판에 그의 단검이 박혀있었으니까.
‘멍청한 놈들, 그림자란 이름을 달고 기습에 당하다니.’
이미 죽어버린 그림자들을 비웃고는, 아르킨은 조심스럽게 시신을 향해 다가갔다.
하지만.
‘응?’
어둠에 가려진 시신이 점점 모습을 드러낼수록, 그는 의문에 휩싸였다.
‘사람이 아니잖아?’
단검을 맞고 쓰러진 것은, 사람이 아니라 옷을 뒤집어쓴 허수아비였으니까.
이상함을 느낀 아르킨이 뒤로 빠지려던 순간.
툭
그의 발에 걸린 무언가가 끊어졌다.
***
콰앙
굉음과 함께 하수도가 진동했다.
‘걸렸군.’
미리 설치해둔 부비트랩이 폭발한 것을 귀로 확인한 이안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단 쉬울 것 같은데.’
조금 전 놈들의 대처를 확인한 이안의 태도에는 제법 여유가 있었다.
‘설마, 자신들이 덫에 들어왔다곤 생각지도 못하겠지.’
고도의 훈련을 받은 녀석들임에는 분명하지만, 자신들이 사냥 당하는 상황에는 익숙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으니까.
‘천천히, 하나씩 상대한다.’
그렇다 해서 놈들을 봐줄 생각 따위는 전혀 없었지만.
[이런 녀석이 신검공의 피를 이었다니, 초대 신검공이 봤다면 혀 깨물고 자살했겠어.]
다음 부비트랩으로 이동하는 이안을 본 미미르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