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수많은 범죄자들과 범죄조직들로 가득한 알자스의 정점에 선 자들은 누가 뭐라 해도 트로이카다.
하지만 그 정점에서 군림하는 트로이카는 몇몇 주요 사업을 제외하면 알자스의 각종 이권사업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 덕분에, 알자스의 군소조직들은 트로이카가 남긴 뼈다귀를 주워 먹으며 근근이 연명해왔다.
“그리고 우린 그 개뼈다귀 다툼에 끼어 든 거고. 이제 왜 여기 있나 알겠지, 황자?”
“날 그따위로 부르지 마라. 그리고 별로 궁금한 일도 아니고.”
빙글빙글 웃고 있는 베티에게 일갈한 알론소는 얼굴에 쓴 검은 복면을 위로 치켜 올렸다.
그가 지금 하려는 일은 명예로운 일은 아니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황실의 명예에 누가 되는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알론소가 이토록 위험한 일에 참여한 이유는 단 하나.
‘아슈타르의 힘으로 황제의 자리를 얻어낼 수 있을까, 없을까?’
“빌어먹을 아슈타르 놈들.”
감히 존귀한 황제를 업신여긴 이안을 떠올린 알론소가 까득 이를 갈았다.
하지만 신검공과 아슈타르의 지원이, 세력 하나 없는 5황자에겐 꽤나 매력적이란 것 역시 사실.
아무리 정의와 명예를 노래한다곤 하지만, 그 역시 제국의 권좌를 원하는 야심가일 뿐이었다.
“예이, 예이. 알겠습니다요, 황자 나으리. 어서 앞으로 나서시지요.”
그 사실을 대강 알고 있는 베티는 장난스레 받아친 다음, 알론소와 함께 앞으로 성큼 나아갔다.
눈앞에 있는 것은 3층 정도 될까싶은 석조건물.
그 입구에, 호랑이 문양을 새긴 옷을 입은 자들이 한 데 모여 경비를 서고 있었다.
“웬 놈이냐?”
스릉
검은 복면에 검은 옷. 누가 봐도 수상한 둘의 복장을 본 그들이 무기를 뽑아들었다.
“난 너희랑은 볼 일 없어. 볼 일이 있는 건 너희 두목이지.”
혹시나 정체가 드러날까 입을 꾹 다문 알론소 대신 베티가 입을 열었다.
“하, 우리 두목이 왜 너 따위 계집년을 만나야하지?”
“흐흐, 그러게 말이야. 우리랑 노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이긴 한데…”
하지만 녀석들은 길을 여는 것보다는 다른 것에 더 관심이 있어보였다. 졸개들이 음침한 웃음을 짓자 베티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 좋아.”
하지만 그녀는 당황하지 않았다. 이런 시선을 받는 것도 오늘로 벌써 세 번째였으니까.
그녀는 당황하는 대신.
“너희가 흑사자의 심기를 거슬렀으니, 그 대가 역시 너희가 치를 것이다.”
미리 준비한 말을 또박또박 읊었다.
“야, 지금 뭐래냐?”
“글쎄, 잘 못 들었는데? 좀 더 가까이서 말해보지 그래? 크흐흐흐.”
당연히 졸개들은 그녀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흑사자라니,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놈들의 말을 이 거리를 주름잡는 타르킨이 들을 리가 없지 않은가.
“흠.”
이미 이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던 베티는 오른편의 알론소를 슬쩍 흘겨봤다.
“후우.”
스릉
그녀의 재촉을 받은 알론소가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지으며 검을 뽑았다.
그리고 십 분 뒤.
“워, 원하는 게 뭐냐?”
건물 3층.
근방 거리를 주름잡는 소규모 조직, 타르킨의 두목이 사색이 된 채 뒤로 기어갔다.
두목이라기에는 그 태도가 영 없어보였지만, 타오르는 오러에 3층 건물이 반쯤 쪼개진 것을 보고도 태연할 수 있다면 이미 잡범들의 두목 따위는 되지 않았을 터.
“원하는 것?”
“그래, 돈이라면 돈을 주고, 노예라면 노예를 주마. 우리가 줄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
“아, 좋아.”
그 말에 베티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렇게 말한다면야, 뭐.”
바닥을 가리켰다.
“너희 조직을 내놔.”
“뭐, 뭐라고? 그런 말도 안 되는…”
베티의 말에 두목이 반발했다.
그다지 큰 조직은 아닐지언정, 타르킨은 알자스에서 그가 평생에 걸쳐 일궈낸 조직이다.
말 그대로 피땀 흘려 키운 것을 홀랑 넘기라니,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
하지만.
“혹시 불만이라도 있어?”
우우웅
“아, 아니다. 얼마든지…”
활활 타오르는 알론소의 오러 앞에서 두목은 고개를 떨궜다.
***
알자스의 가장 높은 곳.
“젠장, 젠장할….”
알자스성의 첨탑 위에서, 신드라는 자신의 손톱을 짓씹었다.
그 원인은 다른 곳에 있지 않았다.
“도대체 어떤 놈들이 신기를….”
신기.
그녀의 가문이 근 백년간 보관해온 신기가 하루아침에 사라진 탓이다.
“사흘, 고작 사흘이면 실험을 완료할 수 있었는데…!”
사라졌다.
그냥 사라진 것이 아니라 정체를 알 수 없는 도둑들이 신기를 들고 도망쳐버렸다.
도둑들을 놓쳐버린 멍청한 놈, 다이거에게 신기를 가져오라 명하긴 했지만 아직까지 이렇다 할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그 기약 없음이 그녀를 더욱 미치게 했다.
그녀가 애꿎은 손톱만 물어뜯고 있을 때.
뚜벅뚜벅
“주인님.”
그녀의 심복이자, 신드라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첨탑에 오를 수 있는 자.
청의를 입은 사내가 그녀의 앞에 부복했다.
“내가 분명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했을 텐데, 아라곤.”
신드라가 표독스런 눈으로 사내를 바라보자 사내가 급히 고개를 떨궜다.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는 것은 죽기 딱 좋은 방법이었으므로.
하지만 그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꼭 올라와야 할 이유가 있었다.
“주인님께서 꼭 아셔야 할 일입니다.”
“뭐지? 설마 신기만큼 중요한 일이라고는 하지 않겠지.”
그녀의 몸에서 그 끝을 알 수 없는 마력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자신을 짓누르는 무형의 압력에 사내가 이를 악물었다.
“알자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범죄자들이 무슨 작당을 하건 나랑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는데. 네놈이 진정 죽고 싶은 게냐?”
우우웅
그녀의 몸에서 마력이 한층 더 강하게 뿜어져 나왔다. 이를 악문 아라곤의 잇몸에서 피가 배어나왔다.
하지만 그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사자입니다.”
“뭐?”
사자.
그 단어를 듣고서야 신드라는 마력을 거두었다.
사자의 문장을 쓰는 수많은 귀족과 왕가가 있었지만, 개중 알자스와 가장 가까운 것은 오직 하나 뿐이었으므로.
“쿨럭, 쿨럭.”
갑작스레 사라진 압력에 아라곤이 피 섞인 기침을 내뱉었다.
“말해. 어째서 사자가 내 영지를 돌아다니는 거지?”
하지만 신드라는 기다려줄 생각이 없었다.
그녀가 자리에 오른 이후로 금해왔던 사자의 이름이 왜 다시 나왔는지, 그녀는 알아야 했다.
“자신을 검은 사자단이라 칭하는 녀석들이 알자스의 조직들을 하나씩 흡수하고 있습니다.”
목을 애써 가다듬은 아라곤이 쉰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아직은 규모가 크지 않습니다만, 성장세가 무섭습니다. 이대로 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대부분의 조직을 흡수할 것으로 보입니다.”
아라곤의 말을 들은 신드라는 물어뜯던 손으로 턱을 괴었다.
“놈들이 아슈타르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은?”
“조직원 중 하나가, 놈들 중 오러 익스퍼트 상급이 섞여있다 말했습니다. 고작 범죄자 따위가 이르기엔.”
“너무 높은 경지지. 빌어먹을.”
신드라가 얼굴을 찡그리며 윗입술을 깨물었다.
아슈타르가 개입한 것이 정말로 사실이라면, 신기가 사라진 것만큼의 위협이 분명했으니까.
그녀는 결단을 내렸다.
“하캄에게 연락해.”
“하사신 말씀입니까? 주인님, 그들은 분명 많은 것을 요구할 것입니다. 하캄이 주인님을 어떤 눈으로 보는지…”
“아르곤.”
신드라는 반발하는 사내를 싸늘하게 내려다보았다.
“그 정도는 감당할 수 있다. 너까지 나를 업신여길 셈이냐?”
“…준비하겠습니다.”
신드라의 서릿발 같은 목소리에 아르곤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놈들의 두목은 살려놓으라 전해라. 어떤 녀석인지 직접 봐야겠으니까.”
곱게 살려두지는 않으리라.
그녀는 윗입술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삼키며 맹세했다.
***
“생각해 본적은 있지만, 이게 진짜로 먹힐 줄이야. 쯔쯧.”
손에 들린 조직 현황표를 보며 베티가 혀를 찼다.
하지만 근 십년 만에 할 일을 찾은 그녀의 눈은 오랜만에 생기로 빛나고 있었다.
“생각해봤다면 왜 시도하지 않았지?”
“우리에겐 익스퍼트 상급과 페르소나가 없었으니까?”
피식 웃는 이안의 말을 되받아친 그녀가 다시 서류를 향해 눈을 돌렸다.
[마치 제 일인 것처럼 하고 있군. 버림받았다고 하지 않았나? 다른 두 친구도 생각보다 괜찮아 보이더군.]
열정적으로 계획에 참여하는 베티를 미미르가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이안은 어깨를 으쓱였다.
‘정확히는, 버림받았다가 다시 구원받은 셈이지.’
이안은 그녀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슈타르에 대한 앙금이 풀어졌기 때문은 아니다.
그것보다는, 십 년 전 실패로 끝난 일을 다시 시도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그녀에겐 나름의 활력소이리라.
‘물론, 내가 빚을 지워둔 것도 마음 속 어딘가에 있겠지만.’
어쨌거나 자발적으로 계획에 참여해주니 이안으로서는 고마울 따름이었다.
“이대로 가면 목표치까지는 얼마나 걸리지?”
“짧으면 한 달. 길면 세 달은 잡아야겠지.”
“좀 더 당기고 싶은데.”
베티의 말을 들은 이안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물론, 도시 전체의 조직을 하나로 규합하는데 한 달도 빠른 것이란 사실은 이안도 잘 알고 있었다.
‘그건 맞지만, 시간이 부족하단 말이지.’
마족과의 전쟁이 벌어지기까지 앞으로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
최소한 그 전에는 알자스를 제국으로부터 완전히 떨어뜨려놔야 후방을 지킬 수 있지 않겠는가.
다른 방책이 필요했다.
“우리가 먼저 움직여야겠어.”
“움직이겠다고? 설마, 트로이카와 정면으로 승부하겠단 건 아니겠지?”
이안의 말에 베티의 눈썹이 꿈틀했다.
“아무리 너라도, 그들 모두와 정면승부 하는 건 불가능해.”
이안이 강하다는 것은 그녀도 인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강한 개인만으로는 조직과 정면으로 부딪쳐 이길 수 없다.
사람과 사람으로 엮어진 조직의 힘은 일개 개인을 뛰어넘으니까.
“조금만 기다리면 얻을 수 있는 걸 굳이 어그러뜨릴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그러니 베티의 조언은 나름 이치에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미쳤어? 누가 정면승부를 한다 그래?”
“어?”
이안이 자신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자 베티는 당황했다.
‘아니, 그러면 세력은 왜 모은 건데?’
지금까지 그녀는 이안이 군소조직들을 흡수하는 것이 정면승부를 위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럼, 어떻게 하려고?”
그녀의 물음에 이안은 가볍게 말했다.
“공포를 줘야지.”
공포.
그것이야말로 이안이 가장 자신있어하는 것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