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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 막내는 원샷원킬-36화 (37/224)

#36화

“무슨 짓이냐, 아슈타르.”

“무슨 짓이냐니?”

황자를 따라 천천히 미궁을 가로지르던 이안은 속삭임을 듣곤 고개를 돌렸다.

랄프의 표정이 휴지통 속 쓰레기처럼 구겨져있었다.

“베티에게 들었다. 나와 데인을 구해주는 조건으로 널 도와달라고 했다고.”

“잘 알고 있는 걸?”

“약속이 다르잖아.”

이안이 장난 투로 받아치자 랄프의 눈이 활활 타올랐다.

“구하러 왔다면, 당연히 이 지옥 같은 라비린토스에서 우릴 끄집어내야할 거 아냐. 그런데, 저 미친 황자를 따라가겠다고?”

아슈타르의 피를 이은 자식 따위에게 목숨을 구함 받는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친우를 생각해 참았다.

그런데, 이 자식은….

“당장 우리를 지상으로 보내. 그렇지 않으면, 저 황자에게 네 정체를 까발릴 테니까.”

랄프가 낮게 으르렁댔다.

앞선 황제와 점점 가까워지는 것이, 여차하면 진짜로 황자에게 이안의 정체를 폭로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맘대로.”

이안은 눈썹 하나 꿈틀하지 않았다.

“…내 말이 농담으로 들리냐?”

오히려, 무표정한 그의 시선에 랄프가 조금 당황했다가, 이내 으름장을 놓았다.

“농담이건, 아니건 상관없어.”

이안은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의 손가락이 뒤에서 따라오던 베티와 데인을 가리켰다. 랄프의 표정이 굳었다.

“무슨 의미냐, 이 개자식아.”

이안은 한 쪽 입꼬리를 올렸다.

“네 행동의 결과가, 설마 네 친구들에게 아무런 영향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 말에 랄프가 죽일 듯 노려봤지만, 이안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개자식.”

결국, 랄프는 협박하기를 포기했다. 혼자라면 모를까, 친우들의 안위까지 걸 수는 없었으니까.

“최소한, 너희를 위협에 빠트리지는 않는다 약속하지. 나 역시 황자를 이용할 뿐이니까.”

이안은 랄프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이며 생각했다.

‘탈출한 이후를 생각해야 해.’

이안이 알자스에 온 목적은 확고했다.

알자스를 그의 영향력 하에 두는 것.

신기는 이안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힘 중 하나였다.

아무 정보도 없을 때라면 모를까, 살아있는 열쇠가 알아서 신기를 찾아주겠다며 길을 안내하는데 그걸 거부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그 뿐만이 아냐.’

신기를 얻건, 얻지 못하건, 제국의 황자와 함께하는 것은 분명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되리라.

‘최소한, 이 지하에서 안전은 보장받을 수 있겠지.’

지금 이 순간에도, 황자 덕에 편안하게 움직이고 있으니 말이다.

랄프를 돌려보낸 이안은 황자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래, 아인 경. 어쩐 일인가?”

인기척을 느낀 황자는 고개를 돌려 이안을 바라봤다. 그 와중에도 그의 발은 멈추지 않고 계속 움직였다.

‘놀랍군.’

이안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그들이 걷고 있는 곳은, 수많은 마수들이 먹이를 찾아 헤매는 지하 감옥.

키에에에-

서걱

끼이이-

푸욱

이안에게 고개를 돌린 와중에도, 황자의 검은 쉬지 않고 앞길을 막는 마수들을 도륙 냈다.

마치 도살기계라도 된 양, 규칙적으로 검을 휘두르는 황자의 안색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자질만으로는 칠영웅의 피에 크게 밀리지 않는군. 용종과 붙어먹는 녀석들 치고는 제법 쓸 만해졌어.]

미미르가 흥미로운 눈으로 황자, 알론소를 바라봤다.

신검 레온하르트로부터 받아낸 800년간의 기록에는, 마르센 제국에 대한 것도 있었으니까.

이안은 황자를 향해 고개를 슬쩍 숙였다.

“전하, 그만 쉬시는 것은 어떠하신지요. 행여 건강이라도 상하실까 염려됩니다.”

말을 건네며 이안은 황자의 몸을 유심히 살폈다.

‘왼발이 앞으로 나가는 버릇이 있군. 먼저 적을 쫓기보다는 제자리에서 받아치는 스타일이야.’

상대는 못해도 익스퍼트 상급에 오른 실력자.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상대의 기술이나 전투습관 따위를 알아볼 필요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속셈을 알지 못하는 황자는 이안을 보곤 고개를 저었다.

“경의 걱정은 고맙게 받아들이겠네만, 과인은 아무렇지도 않다네. 이건 신께서 과인을 위해 내리는 시련이니, 과인이 헤쳐 나가야 할 업보인게지.”

그 와중에도 마수 세 마리를 동강낸 황자는 이안을 향해 씨익 웃었다.

마치 돈키호테의 그 것처럼 순수한 웃음.

“곧 경의 도움을 받을 때가 올 걸세. 그 때까지만 참게나.”

“알겠습니다, 전하.”

하지만 웃음만으로 닳고 닳은 이안의 마음을 움직이기엔 무리가 있었다.

‘원거리에서 상대하면 쉽겠군.’

이안은 아무 말 없이 물러나 마수들을 도살하는 황자를 가만히 지켜봤다.

[뭔가 이상하군.]

이안의 옆에 둥둥 떠 있던 사자머리, 미미르가 갑자기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소리야?’

[이 지하 감옥에 존재하는 마력의 분포가 변화하고 있다.]

이안의 물음에 사자머리가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분포변화의 패턴을 봤을 때, 특정지점을 중심으로 마력이 집중되고 있다. 마법과 같은 인위적 현상일 확률 82.9%. 그리고 위치는….]

말을 멈춘 사자머리의 시선이, 마수를 도륙하는 황자의 등을 향했다.

‘좋지 않은데.’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깨달은 이안의 표정이 굳었다.

미미르의 말대로라면, 신기가 있는 방향에서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다는 말이었으니까.

어쩌면, 눈앞의 중2병 황자는 지금 판도라의 상자를 열려는 지도 몰랐다.

[내 생각도 그렇다. 가능하면 마법이 발동되기 전 이 곳을 탈출할 것을 권고한다.]

‘그 정도야?’

[재수 없으면, 신기의 힘을 그대로 뒤집어쓸지도 모른다.]

여느 때라면 킬킬 웃어댈 법도 했지만, 정색한 미미르의 입은 굳게 다물어져있었다. 이안은 미미르가 진심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일단 막아야 해.’

무슨 변명을 해야 할 지는 나중에. 우선은 파죽지세로 나아가는 황자를 멈춰 세워야했다.

이안은 황자를 향해 다가갔다.

하지만.

[이안, 마력이 움직인다!]

너무 늦었다.

구우우웅

정체모를 울림이 거미줄처럼 뚫린 미궁의 동굴을 따라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뭐, 뭐죠 방금?”

우뚝 멈춰선 세리아가 불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일행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게 무슨 소리지?”

선두에서 마수들을 처치하던 알론소가 피 묻은 검을 내리곤 주변을 천천히 살폈다.

익스퍼트 중급의 경지에 이른 그의 인간을 초월한 감각이 끊임없이 위험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곧, 그는 위화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림자?”

그림자를 모아 찰흙처럼 빚어낸다면 이런 모습일까.

인간의 입체적인 형태를 갖춘 그림자들이 알론소의 앞에 나타났다.

보통의 그림자는 아니었다.

[---]

그림자로 만들어진 옷과 무기를 걸친 녀석들에게선, 분명한 적의가 느껴졌다.

“뭐, 뭐야 이 녀석들은?”

“그림자다!”

갑자기 배후에서 나타난 그림자에, 뒤에서 따라오던 일행이 무기를 뽑아들곤 천천히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미미르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쉐도우베인이다.]

“뭐?”

[저 그림자들. 저 녀석들이 바로 쉐도우베인이 담고 있는 잊혀진 그림자신의 힘이다.]

그림자신의 능력은 2차원의 그림자를 3차원의 세계로 불러들이는 것.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해방된 그림자신의 힘이 제 멋대로 폭주하고 있었다.

[방금 전의 마법은 놈의 봉인을 깨는 술식인 모양이군. 빌어먹을.]

말을 마친 미미르의 풍성한 갈기가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처음 보는 녀석의 반응이 무엇인지, 이안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두려워한다고? 미미르가?’

해방된 신기의 힘을 목도한 미미르는, 명백히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왜지?’

이안은 이해할 수 없었다.

미미르 자신이 말한 대로, 페르소나 자체가 신기의 일종이지 않은가.

거기에 녀석의 본신은 검 중의 검, 신검 레온하르트.

지금은 아닐지라도, 같은 신기에서 갈라져 나온 녀석이 어째서 이렇게 두려워한단 말인가.

[직접 보면 알거다.]

미미르가 불안한 기색으로 황자가 서 있던 방향을 바라봤다.

그와 거의 동시에.

“사라져라, 잊혀진 신의 피조물들이여.”

후웅

황자가 검을 휘둘렀다.

서걱

섬뜩한 소리와 함께 칼의 범위에 걸쳐있던 그림자들이 사라졌다.

서걱

알론소는 쉬지 않았다.

제국검술의 근간을 이루는 중검(重劍)의 묘리에 따라 황자의 검이 천천히, 묵직하게 놈들을 베어나가기 시작했다.

마치 훈련장의 허수아비마냥, 그림자들은 오러를 내뿜는 검 앞에서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다.

이대로라면 알론소의 낙승.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음?”

지금까지와는 다른 둔탁한 감각에 알론소가 눈썹을 꿈틀댔다.

막혔다.

허수아비처럼 제 몸을 던질 줄만 알던 그림자의 검이, 한 번이지만 그의 검을 막아냈다.

다섯의 검이 모여 하나의 검을 막아냈다지만, 지금까지의 그림자들을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

서걱

곧 힘을 실은 알론소의 이격이 그림자를 두 동강 냈지만, 그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이십년을 제국의 검과 함께 살아왔던 그는, 상대가 무엇을 하고 있는 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제국검술….’

그의 앞에 줄 지어 선 수백의 그림자들은.

모두 제국검술의 기수식을 취하고 있었으니까.

***

[녀석들, 아니 녀석은 상대의 움직임을 그대로 복사한다. 겉모습뿐만이 아니라 마력의 움직임까지도.]

‘한계는?’

미미르의 말에, 이안은 배후의 그림자들을 심각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없다. 녀석들이 상대의 공격법에 익숙해지고 나면, 곧 파훼법을 찾아낼 거다. 그러고 나면 파멸이지.]

사자는 고개를 저었다.

그 말인즉슨, 저 멀리서 홀로 그림자들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황자의 운명은 정해져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란 이야기였다.

‘탈출하거나, 놈을 멈추거나.’

방법은 둘 중 하나.

무엇이 낫다고는 할 수 없었다.

전자는 탈출이 가능한지 부터가 미지수였고, 후자는 상대해야 할 신기의 능력이 어디까지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이안은 황제를 바라봤다.

“익, 이익….”

황자의 상황은 꽤 난처해보였다.

처음에는 허수아비처럼 손쉽게 벨 수 있었던 그림자들은, 적응에 적응을 거듭해 이제는 오러를 뿜어낼 만큼 강해졌다.

챙 채챙

“이, 그림자 주제에! 감히 제국의 검을 휘두르려 하느냐!”

제법 검술을 흉내 내는 그림자들 여럿이 합공을 가하니, 제 아무리 황자라 할지라도 버틸 재간이 없었다.

‘곧 끝나겠군.’

얼마 지나지 않아 황자는 자신의 검술에 의해 무너질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때야 말로 이안이 나설 때였다.

“오라.”

권총을 손에 쥔 이안의 입에서.

“미미르.”

이계의 힘을 불러내는 주문이 흘러나왔다.

[페르소나를 개방한다.]

파아아앗

권총을 쥔 이안이 시동어를 외자, 여러 부위로 나뉜 미미르가 푸른 마력을 내뿜기 시작했다.

곧.

철컥 철커덕

전투조끼, 헬멧, 고글.

이안의 전신을 감싼 마력이 제각기 지구의 병사들이 사용하는 무구의 모습을 갖추었다.

‘오랜만이야.’

마력으로 만들어진 환상이었지만, 오랜만에 만지는 익숙한 무구들이 이안의 마음을 고요하게 가라앉혔다.

철컥

가볍게 슬라이드를 당겨 장전한 이안은.

드르르르륵

망설임 없이 글록의 방아쇠를 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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