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라비린토스.
범죄자들의 도시 알자스에서, 죄를 지은 자들을 가두어놓는 지하 감옥.
하지만 이 거대한 지하 감옥에서는 움직이는 것조차 어려웠다.
“진짜, 빌어먹을!”
가슴에 칼날이 틀어박힌 오크를 발로 밀어 넘어뜨리며 에반이 악을 썼다.
“도대체 몇 번째야?”
몇 마리를 베어 넘겼는지도 잘 모르겠다.
사람보다 오크를 더 많이 만나고 나니, 에반은 이곳이 지하 감옥인지 마족의 던전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에반, 공자님께서 보고 계신다!”
검날에 가득 피워낸 오러로 오크를 반토막낸 도노반이 에반을 꾸짖었다.
오러를 반 이상 사용한 탓인지, 숨을 헐떡이는 노기사의 검에 맺힌 오러가 불안정하게 깜빡였다.
“…마르콘이여, 자비를 베푸시어 당신의 종을 치유하소서.”
곧, 세리아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신성력이 둘의 지친 몸을 치유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은 멀었다.
“이봐, 그 친구들 살아있는 건 맞아?”
“이 빛이 꺼질 때까진, 아마도.”
이안이 퉁명스럽게 묻자, 베티가 불안한 눈빛으로 금색의 선들을 바라보았다.
처음 라비린토스에 들어왔을 당시 꽤 굵었던 선은, 언제 그랬냐는 듯 실처럼 가늘어져 있었다.
그것은 친우들의 상태가 점점 악화되고 있다는 의미였으니까.
‘더 늦기라도 한다면….’
애써 부정하고는 있었지만, 그녀는 무의식중에 이미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있었다.
마수와 범죄자중의 범죄자, 식인종들로 우글거리는 인세의 지옥에서 그들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으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마음속으로 절망이 스멀스멀 기어들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좋아. 그러면 속도를 내야겠는데?”
이안은 아니었다.
철컥
절망하는 대신, 그는 허리춤의 미미르를 뽑아들었다.
미지근한 플라스틱의 감촉이 이안의 손바닥을 자극했다.
“이 빛만 따라가면 되는 거지?”
“어, 어?”
이안은 베티의 손에 들려있던 구슬을 빼앗다시피 챙기곤, 곧바로 코트 안주머니에 쑤셔 박았다.
“똑바로 따라와.”
어느새 품에서 꺼낸 파츠들을 미미르에 붙인 이안은 곧장 앞으로 달려 나갔다.
“고, 공자님!”
“아니, 혼자 어딜 가는 거야!”
당황한 일행의 목소리가 등 뒤로 멀어졌지만 이안은 멈추지 않았다.
‘이미 너무 늦었어.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 해.’
예상보다 많은 마수들 때문에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더 이상 시간을 끈다면 구출은커녕 이 지옥에서 탈출하는 것조차 어려우리라.
그리고.
[신기가 점점 가까워져오고 있다. 가능하다면 회수하는 것을 추천한다.]
신기, 신기. 그놈의 신기.
“도대체 신기가 뭔데?”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던 이안은 미미르에게 물었다.
[만신전의 신들이 제각기 가진 힘을 담아낸 물건이다. 신검 레온하르트 같은 물건이라고 하면 쉽겠군.]
“레온하르트라고?”
달리던 이안은 미미르의 말에 조금 놀랐다.
이 음습한 지하 어딘가에, 아슈타르의 신물인 레온하르트에 비견될만한 물건이 숨겨져 있다는 말이었으니까.
[그렇다. 페르소나도 어찌 보면 신기에 속한다 할 수 있지.]
이안의 반응에 제법 만족한 것일까, 사자머리가 낮게 그르릉댔다.
“그래서?”
[녀석을 흡수할 수 있다면, 나뿐만 아니라 네게도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미미르는 자신의 욕망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나중에.”
[어, 어째서냐!]
이안은 단칼에 거절했다. 미미르의 사자머리가 으르렁대기 시작했다.
[신기를 흡수한다면 분명 더 강력한 힘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내가 머물고 있는 이 페르소나가 환수급에 도달할 지도 모르지!]
환수급의 페르소나는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최소한 세 번은 구현의 방이 위치한 리아나에 찾아가야만 만들어낼 수 있었으니까.
이미 페르소나를 가진 자격자들 중에서도 특출 난 재능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기회조차 받을 수 없었다.
이안 역시, 환수급 페르소나의 가치에 대해선 잘 알고 있었다.
단지.
“당장 없다고 죽는 건 아니잖아?”
우선순위의 차이였을 뿐이다.
지금의 이안에게, 가장 급한 것은 베티의 동료를 구하는 것이었으니까.
[뭐, 뭐라고….]
이안의 말에 미미르가 뭐라 대답하려는 찰나.
마수들이 나타났다.
키이이-
오크.
수많은 종류의 마수 중 인간과 제일 유사하게 생긴 족속들.
그리고 인간을 가장 증오하는 마수.
시뻘겋게 녹슨 놈들의 양날도끼에서, 누구의 것인지 모를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분명, 녀석들의 다음 목표는 눈앞에 나타난 금발의 인간 애송이.
키에에-
다섯의 오크가 곧 벌어질 만찬에 괴소를 흘렸다.
하지만.
“꺼져.”
이안은 상대해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드르륵
이안은 몸에 바람구멍이 숭숭 난 오크들을 그대로 스쳐지나갔다.
키에에-
드륵
그으-
드르륵
끼이이-
드르르르륵
이후로 나타난 마수들 역시 비슷한 최후를 맞이했다. 달리는 이안이 방아쇠를 당길 때마다 마수들이 하나씩 쓰러졌다.
이윽고 이안의 손에 죽은 마수가 마흔을 넘어섰을 때 즈음.
‘찾았다.’
이안은 확신했다.
이안의 코트자락을 뚫고 뻗어나간 금빛 선이 두 명의 사내에게 닿아있었으니까.
부웅
단지, 그들의 현 상황이 썩 좋지 않았을 뿐.
콰앙
부웅 날아간 사내가 동굴 벽에 쳐박혀 꿈틀거렸다.
“랄프!”
다른 사내가 외쳤지만 정신을 잃은 사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안은 사내를 날려버린 마수를 바라봤다.
[오크 투사로군.]
미미르는 곧장 녀석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오크 투사?”
[마수 중에서도 드물게 마력을 다룰 수 있는 개체지. 인간으로 치면 오러 익스퍼트의 경지라고 봐도 될 정도다. 밖에서도 보기 희귀한 개체가 여기에 있다니, 신기하군.]
미미르의 말에 이안은 놈을 자세히 살폈다.
보통 오크보다 머리 두 개는 더 커다란 몸뚱이를 가진 거대한 오크.
놈의 몸뚱이에서 푸른빛의 마력이 제 멋대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콰오오-
오크 투사가 천장을 향해 포효했다. 놈의 투기가 동굴을 가득 메웠다.
기회였다.
‘지금.’
미미르가 불을 뿜었다.
드르르르륵
굉음과 함께 수십의 총탄이 일시에 쏘아졌다.
콩알만 한 납탄들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놈을 향해 날아들었다.
보통의 오크였다면 수십 발의 총탄에 두들겨 맞아 뇌가 곤죽이 되어버렸으리라.
하지만 놈은 오크들의 기사, 오크 투사였다.
티티티팅
‘팅?’
이안은 귀를 의심했다.
전차의 장갑이 총알을 튕겨낼 때나 들을법한 소리가, 놈의 두개골에서 들려왔으니까.
[오러를 쓸 줄 아는 녀석이야. 마력을 오러로 변환시켜서 신체강도를 높였어.]
미미르는 곧 어떻게 된 상황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
오러가 일정 농도 이상으로 깃든 몸의 강도는 어지간한 강철수준.
하지만, 미미르의 분석이 이안에게 위안을 주지는 못했다.
“빌어먹을.”
콰아아아-
분노한 오크 투사가 오러를 줄기줄기 뽑아내며 달려오고 있었으니까.
***
알자스에서 가장 높은 건물은, 당연하겠지만 알자스 성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첨탑에서, 한 여인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신드라 메이런트.
한낱 여인의 몸으로 범죄자들의 도시 알자스의 정점에 오른 자였다.
하지만 오늘따라 그녀의 심기는 좋지 않았다.
“다시 말해봐.”
“…청룡의 소식이 끊겼습니다.”
퍽
부복한 사내의 답에 여인이 몸을 돌려 들고 있던 피리를 집어던졌다.
금속으로 만들어진 피리가 사내의 머리를 강타하자, 부복한 사내가 잠시 휘청였다.
하지만 사내는 보고를 멈추지 않았다.
“이미 확인된 사실입니다. 정보원에 따르면, 이미 아슈타르에서 마족들이 움직이기 전 사망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내의 머리에서 피가 줄기줄기 흘러내렸지만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여기서 그녀의 화를 더 돋궜다간 피 대신 생명을 흘려야 할 것이었으므로.
“후욱, 후욱….”
채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한 여인이 숨을 골랐다. 실핏줄이 터진 그녀의 눈은 붉게 물들어있었다.
“그래…키르케가 죽었다, 이 말이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동지 중 가장 나약한 녀석이었지만, 그 역시 대의를 위해 움직이는 동지였으니까.
곧 계획을 실행할 수 있다며 자신만만해하던 녀석이, 그렇게 쉽게 당하다니.
“누구의 소행인지는 알아냈나?”
“아슈타르의 삼공자라는 소문이 있습니다. 반역의 죄를 저질렀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만….”
“아슈타르.”
까득
저주받을 일곱 가문 중 하나의 이름이 나오자, 그녀가 이를 갈았다.
곧, 신드라의 입이 열렸다.
“실험의 속도를 올려라.”
“주인님, 그건….”
신드라의 말에 놀란 사내가 입을 열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니면, 너도 놈의 먹이가 되고 싶은게냐?”
사내에게 목숨을 걸면서까지 주인의 말을 거스를 깜냥은 없었다.
“…언제부터 준비하면 되겠습니까?”
“내일.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더 이상 시간 낭비할 때가 아냐.”
말을 마친 그녀가 첨탑의 한쪽 벽을 바라봤다.
그녀의 시선 끝에, 날개를 펼친 일곱 색깔의 용이 새겨져있었다.
***
마법이 정밀한 수식과 계산으로 만들어진다면, 오러는 올곧은 의지와 직관으로 만들어진다.
굳건한 의지는 제 멋대로 움직이는 마력을 일점에 집중시키고, 일점에 집중된 마력은 오러가 되어 의지에 따른다.
그리고, 이안이 상대하는 오크 투사는 오러 익스퍼트에 이른 숙련된 전사였다.
티티팅 티티티팅
[위력이 부족하다.]
“나도 알아!”
오크 투사의 주먹을 간발의 차로 피한 이안이 미미르의 말에 소리 쳤다.
‘한 방이라도 맞으면 끝이다.’
분명, 오크 투사는 강했다.
[놈의 공격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다.]
놈의 단순한 공격패턴과 투로를 눈앞에 보여주는 미미르, 그리고 이안의 신체능력을 강화시켜주는 오러가 아니었다면 진즉에 피떡이 되었으리라.
콰우우-
마치 미꾸라지처럼 맞을 듯 안 맞을 듯 빠져나가는 이안이 짜증났는지, 놈이 이안을 향해 으르렁댔다.
‘패턴을 읽어야 해.’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적의 공격을 피해나가면서도, 이안의 눈은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일격을 먹일 단 한 번의 기회뿐.
그러기 위해선 어떻게든 적과의 거리를 벌려야했다.
‘보인다.’
어느 순간, 이안의 눈에 상대의 공격 패턴이 보이기 시작했다.
살육에 미쳐 마구잡이로 주먹과 발을 휘두르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안에는 분명 어떠한 순서가 존재했다.
콰우-
후웅
상대의 공격에 본능적으로 목을 뒤로 젖혔다. 미처 피하지 못한 앞머리 몇 가닥이 놈의 주먹에 잘려나갔다. 조금이라도 가까웠다면 분명 머리가 날아갔을 터.
하지만.
이안은 웃었다.
‘지금.’
이안은 이미, 상대가 공격 도중 멈칫하는 습관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쿵
마력을 가득 머금은 이안의 다리가 바닥을 구른다. 그의 몸뚱이가 그 반동에 하늘을 갈랐다.
곧, 그와 오크투사 사이에 잠깐이지만 간격이 생겨났다.
타앗
단 한 번의 발구름으로 거리를 벌린 이안은 허리춤에서 손가락만한 유리병 하나를 뽑아들었다.
아슈타르 최고의 부여술사, 카르밀에게 의뢰해 만들어낸 물건.
휙
이안은 망설임 없이 유리병을 던졌다.
쨍그랑
유리병은 정확히 놈의 얼굴에 맞았다.
하지만.
콰우?
아무 일도 없었다.
깨진 유리병 안의 하얀 액체가 놈의 얼굴을 적셨지만, 오러로 보호받고 있는 놈의 얼굴거죽에는 생채기 하나 남지 않았다.
콰우우
회심의 수단이 허무하게 막혔다는 사실을 깨달은 오크가 이안을 향해 비웃음을 날렸다.
그럼에도 이안은 포기하지 않았다.
‘셋, 둘.’
모두 계획된 일이었으니까.
‘하나.’
숫자를 센 이안은 입고 있던 코트로 두 눈을 가렸다.
그와 동시에.
파앗
빛.
어마어마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캄캄했던 동굴이 일순간 대낮처럼 밝아졌다.
태양처럼 밝은 빛의 광원(光源)은 오크투사의 눈앞에 뿌려진 하얀 액체.
콰오오-
당연히, 오크투사는 그 빛을 눈앞에서 받을 수밖에 없었다.
콰우우우-
쿵 쿵
빛은 곧 가라앉았지만, 강한 빛에 순간적으로 시력을 상실한 오크 투사가 괴성을 지르며 조금 전 이안이 있던 자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휘익
“어딜!”
하지만 눈 먼 마수에게 당할 정도로 이안의 실력이 형편없지는 않았다.
타앗
직선으로 돌진해오는 오크투사를 옆으로 손쉽게 피한 이안은 시동어를 외웠다.
“과부하.”
시동어에 따라 축적된 마력이 미미르의 형태를 뜯어고치기 시작했다.
곧 미미르의 총구가 해적의 나팔총 마냥 확장되었다. 나팔총의 앞부분엔 어느새 아이 주먹만 한 탄환이 꽂혀있었다.
콰아아아-
이안의 목소리를 들은 오크가 다시 이안에게 돌진했다.
눈이 먼 순간 광기에 휩싸인 놈의 살기가 이안에게 직격했지만.
“뒤져, 새끼야.”
피부가 따끔거리는 살기 속에서, 이안은 웃었다.
퉁
방아쇠를 당기자, 둔탁한 소리와 함께 탄환이 달려오는 오크투사를 향해 쏘아졌다.
콰우우-
오크는 멈추거나 피하지 않았다.
눈이 멀기는 했지만, 저 인간에게는 내 피륙을 뚫어낼 힘이 없다.
지금까지의 경험에 따라 판단을 끝낸 오크의 돌진에는 아무런 망설임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번엔 달랐지만.
쐐애애액
40mm 대전차고폭탄.
인간의 갑옷과는 비교할 수 없이 두꺼운, 장갑차량의 장갑을 뚫어낸다는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탄환이.
콰아아앙
그대로 오크의 머리통을 관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