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가는 곳마다 싸움이군. 성장을 위해선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게 말이야. 빌어먹을. 이렇게만 하면 오러마스터도 금방이겠어.”
미미르의 말에 이안이 비꼬듯 말했다.
건달들로부터 요원, 블랙스완이 있을법한 장소에 대한 정보를 얻어낸 이안은 곧장 그녀가 갔을법한 곳으로 이동했고, 금세 그녀를 찾을 수 있었다.
그녀의 뒤에 칼을 들이댄 쥐새끼들만 없었다면 더욱 좋았을 것이다.
“운이 없구나.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좀 더 오래 살 수 있었을 것을.”
붉은 옷의 사내가 이안을 향해 쥐새끼처럼 입꼬리를 뒤틀었다. 검을 쥐지 않은 그의 손가락이 이안을 가리켰다.
“처리해라.”
검은 복면을 뒤집어쓴 사내들이 천천히 다가왔다.
‘썩 좋은 상황은 아닌데.’
이안은 짜증스런 표정을 지었다.
목표인 요원은 인질로 잡힌 상태였고, 그의 일행은 건달들을 관리하기 위해 은신처에 두고 왔다.
눈앞의 적을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이안 혼자뿐.
딱히 다른 수가 없었다.
“미안한데, 운은 네가 없는 것 같다.”
“뭐?”
쥐새끼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저 애송이가 뭘 잘못 먹기라도 한 것일까. 아니면 겁에 질려 정신이 나가기라도 한 것일까.
“허, 그게 무슨 개소리냐?”
이안의 어처구니없는 말에 열이 뻗친 사내가 이안에게 말을 걸었다.
‘미친놈. 어차피 살려줄 생각은 없었지만, 곱게 죽이진 않을 것이다.’
거리는 충분.
초급이나마 오러 익스퍼트의 경지에 오른 그는 상대가 무슨 공격을 해오건 충분히 피해낼 자신이 있었다.
쥐 얼굴의 사내는 편안한 얼굴로 이안의 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타타탕
대답 대신 돌아온 것은 세 발의 납탄이었다.
푹 푸푹
가슴에 두 발, 머리에 한 발.
모잠비크 드릴(Mozambique Drill)에 당한 쥐새끼는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지금!”
제압된 것을 확인한 이안은 자유의 몸이 된 그녀에게 외쳤다.
물론, 그녀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를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서걱
“끄아아악!”
블랙스완의 품에서 나온 두 개의 단검이 적들을 사정없이 유린했다.
전성기에 비하면 부족했지만, 훤히 등을 내보인 적들에게 칼날을 박아 넣을 힘과 기술 정도는 남아있었다.
“뒤, 뒤다! 저 년이 풀려났어!”
“빨리 잡아! 못 잡으면 끝장인 거 몰라?”
이안을 처리하려고 다가가던 복면의 사내들은 곧 이상함을 느끼고 그녀를 막으려 했다.
혹여 여인을 놓치기라도 한다면 그들의 모가지는 내일 이맘때쯤 성문 위에 걸려있을 테니까.
하지만 이안 역시 놀고만 있지는 않았다.
짤그락
이안은 허리춤의 검은 주머니에서 기다란 탄창과 개머리판을 꺼낸 다음, 재빨리 손에 쥔 미미르에 갖다 댔다.
그러자.
철커덕
마치 원래부터 한 몸이었던 것처럼, 두 개의 악세사리가 마력에 의해 저절로 미미르와 한 몸이 되었다.
곧, 슬라이드 끝의 조정간을 만진 이안은 개머리판을 어깨에 갖다 대었다.
‘교정하고 나선 첫 시험상대군.’
견착한 이안의 총구가 이리저리 날뛰는 적들을 향했다.
구현의 방에서 페르소나를 새롭게 교정할 때, 이안이 새로운 미미르의 모델로 정한 것은 Glock 18C.
이전 모델인 Glock 19보다 크기가 커지긴 했지만, 이전의 미미르와 크게 다른 점은 없었다.
하나를 제외하면.
드르르륵
굉음과 함께 초당 20발의 속도로 발사된 총탄이 적을 향해 흩뿌려졌다.
“끄아아악!”
“뭐, 뭐… 커헉!”
음속으로 날아가는 새끼손가락 크기의 탄환은 오러를 다루는 자들이라 해도 쉽게 눈치 챌 수 없다.
하물며, 그런 탄환 수십 발이 일시에 날아간다면.
“끄아악!”
“저, 저 자식이다! 저 자식이 뒤에서, 끄윽…”
오러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자들이 피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이제는 놀랍지도 않군.]
미미르가 어처구니없단 표정을 지었다. 그 동안에도 이안의 손은 재장전과 사격을 반복했다.
드르륵 드륵 드드륵
‘33, 66, 99…’
탄환을 쏘아내고 재장전할 때마다 이안은 숫자를 세어나갔다.
‘그래도 전투 자체는 편하군.’
이안은 방아쇠를 당기며 생각했다.
미미르가 마치 FPS게임의 핵처럼 적의 예상경로와 거리, 탄환의 궤적까지 눈앞에 그려주었으니.
‘이건 맞추기 싫어도 맞출 수밖에 없잖아?’
드르륵
제 멋대로 움직이는 요원의 동선을 피해가며 정확히 그녀의 뒤를 노리는 적만 쓰러트리는 이안의 사격술은 신기에 가까웠다.
‘165.’
곧 이안은 뜨거워진 총구를 아래로 내렸다.
이제 거리 위에 멀쩡히 선 자는 그와 요원, 블랙스완 뿐이었으니까.
“헉, 허억. 너, 뭐야. 이 개새끼야…”
그녀는 오랜만의 실전에 숨을 헐떡이며 이안을 노려봤다.
‘어째서, 아슈타르의 개새끼가…’
“그런 말 할 때가 아닌 것 같은데?”
하지만 이안은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의 등 뒤를 가리켰다.
[200M 밖, 인간형 개체 스물 하나 접근 중.]
이안의 시야에, 벽 너머에서 꿈틀거리는 붉은 점들이 들어왔다.
“증원이다. 설마 놈들에게 다시 잡히고 싶은 건 아니겠지, 블랙스완?”
이안의 손가락을 따라 그녀가 고개를 돌렸지만, 보이는 것은 벽뿐.
“아무것도 없는데 증원이라고?”
그녀가 이안을 미친놈 보듯 바라봤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믿기 싫으면 믿지 않으면 된다. 보아하니 네 동료들도 끌려간 것 같은데.”
“…네놈 짓이냐?”
이안의 지적에 그녀가 쌍심지를 돋웠다. 하지만 이안은 웃으며 손에 쥔 권총을 빙글, 돌렸다.
“아까 건달 친구들에게 들었지. 칼 몇 번 휘두르니까 금방 친해지던데.”
“건달?”
그제야 베티는 아까 전, 홀로 스물의 건달 사이로 뛰어들던 눈앞의 미친놈을 떠올렸다.
‘거기서 살아남다니, 아무리 아슈타르의 피를 이어받았다지만…’
동네 건달들처럼 보였지만, 그녀는 그들 모두가 오러 유저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중범죄자들로 우글거리는 알자스에서 건달로 살아가기 위해선 마력 정도는 다룰 수 있어야 했으니까.
영웅도 뒤에서 칼을 맞으면 죽는 법인데, 눈앞의 애송이는 도대체 어떻게 살아있는 것일까.
그녀의 상식선에선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한가로이 생각에 잠길 시간 따위는 없었다.
“이봐 블랙스완, 언제까지 여기 있을 셈이야? 시간이 얼마 없어.”
이안은 그녀를 재촉했다. 빈 말이 아니라, 놈들이 다가오기 전까지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으니까.
결국, 그녀는 선택해야만 했다.
“…잘 따라와라. 지름길로 가야 하니까.”
“얼마든지.”
그녀의 허락에 이안은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리고.”
“음?”
말을 멈춘 블랙스완이 고개를 돌려 이안을 노려봤다.
“내 이름은 베티다.”
다시는 그 뭣 같은 암호명으로 날 부르지 마.
그녀가 으르렁대자, 이안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괜히 알자스에서 십 년을 살아온 것이 아니었던 걸까.
그녀의 도주경로는 복잡하면서도 치밀했다.
지붕, 골목, 마당. 심지어 지하의 하수도까지.
같은 곳을 두 번 도는 것은 기본이었고, 이런 곳에 길이 있을까 싶은 곳으로만 다니며 추적자를 최대한 혼란스럽게 했다.
‘나쁘지 않아.’
베티를 뒤따르던 이안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안정적인 도주로를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은 도시에 대한 정보가 충분히 쌓여야 하는 것이니까.
그들은 곧 은신처로 통하는 지하통로의 출구에 도달했다.
“도련님!”
뜬금없이 밑에서 튀어나온 이안을 본 셋이 놀라 일어섰다.
“괘, 괜찮아요? 무슨 냄새가….”
“아, 괜찮아. 하수도에 잠깐 들렸거든.”
말과 함께 이안은 어깨에 묻은 새까만 오물을 대충 털어냈다.
“우, 우욱! 세상을 비추는 전능한 마르콘이여….”
그 역겨운 모습과 냄새에 세리아가 헛구역질을 하며 기도문을 외웠다. 곧, 정화의 신성력이 둘의 몸에 묻어있던 오물을 말끔하게 걷어냈다.
“고마워, 세리아.”
역시 신성력이 최고야.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베티를 바라봤다.
이안을 노려보는 그녀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내게 뭘 원하는 거지?”
이안은 피식 웃었다.
“말했지 않나? 능력에 비해선 기억력이 영 별론 거 같은데.”
“그럼, 지금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는 소리냐? 작전권을 넘기라고?”
이안의 말에 그녀가 으르렁댔다.
온기 하나 없는 오두막은 제법 쌀쌀했지만, 표독스런 그녀의 표정에 비하면 난로나 다름없었다.
“작전이 실패한 지 오 년이 넘었어. 그런데 이제 와서 다시 시작하겠다고? 신검공이 벌써 노망이라도 온 모양이지?”
“안타깝게도 아직 정정하신 편이야. 오십 년은 더 사실 것 같던데.그리고.”
말을 마친 이안은 베티와 눈을 마주쳤다.
“내게 농담할 여유 따윈 없어.”
싸늘한 침묵이 흘렀다. 고요 사이로, 서로의 마음을 꿰뚫어보려는 둘의 눈동자가 정면으로 충돌했다.
침묵은 길지 않았다.
“…미친놈.”
베티는 질린 표정으로 이안을 바라봤다.
눈앞의 애송이는, 진심으로 범죄자들의 도시 알자스를 뒤집어엎을 생각이었으니까.
그녀의 욕지거리에 이안은 어깨를 으쓱했다.
“칭찬 고마워.”
“도와줄 순 있지만, 조건이 있어.”
이안의 계획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한 번 버림받은 그녀가, 무슨 미련이나 호감이 있어 사자 놈들을 돕겠는가.
“내 동료들을 구해줘.”
그저 원하는 것이 있었을 뿐이다.
“그럴 줄 알았지. 선수끼리 돌려 말하지 말고 본론만 가자고.”
하지만 이안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동료들이라면 계획에 참여했던 요원들일 터.
그렇다면 분명 이안에게도 필요한 자들이 아닌가.
“선수?”
이해할 수 없는 단어에 베티의 눈썹이 휘어졌다. 이안은 손을 내저었다.
“아, 그건 됐고. 그래서, 어디로 가야 하는 건데?”
이안이 물었다.
그녀는 대답 대신, 오두막에 난 조그마한 창을 가리켰다.
“가장 확률이 높은 곳은 저기야.”
이안과 일행의 시선이 창문을 향했다.
그곳엔, 도시의 중앙에 자리 잡은 성 하나가 서 있었다.
“알자스 성이군.”
“아니, 그 아래야.”
이안의 말에 베티가 고개를 젓고는 손으로 성의 바닥을 가리켰다.
“알자스의 지하 감옥 라비린토스. 들어가면 절대 나올 수 없는 곳이지.”
말을 마친 그녀가 쓴웃음을 지었다.
***
여명이 뜨기 직전.
하루 중 가장 어두운 시간에 한 병사가 성의 순찰을 돌고 있었다.
“흐아아암…”
피곤에 못이긴 병사가 늘어져라 하품을 했다.
병사라곤 하지만, 중범죄자의 소굴인 알자스의 병사가 제대로 된 병사일 리 없었다.
교대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병사의 눈은 이미 반쯤 감겨있었다.
그것이 그의 불운이었다.
우두둑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병사가 바닥에 널브러졌다.
소음이 나지 않도록 조심스레 병사의 시신을 구석에 숨긴 이안이 말없이 손짓하자,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일행들이 앞으로 나왔다.
곧, 베티가 성벽의 이곳저곳을 만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쿠르르릉
벽 안에 숨어있던 비밀통로가 열렸다. 일행은 아무 말 없이 베티를 따라 어두운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얼마나 내려갔을까, 그들은 계단의 끝에 도달했다. 주머니에서 플래시를 꺼낸 이안이 앞을 비추었다.
“지하 감옥이라고? 이게?”
이안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감옥이라면 으레 가지고 있어야 할 철창이나 간수는 찾을래야 찾을 수 없었으니까.
그 대신, 개미굴처럼 뚫린 수많은 동굴들의 입구가 눈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정확히는, 트로이카의 사육장이지.”
“사육장이요?”
사육장이라니.
지하 감옥과 언뜻 연결되지 않는 단어에 세리아가 물었다.
“놈들은 이곳에서 무언가를 키우고 있어. 추방자와 마수들을 사료삼아서 말이지.”
“뭐, 뭐라고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사료.
근본적인 무언가가 비틀려있는 단어에 세리아는 본능적으로 역겨움을 느꼈다.
“이봐 아가씨, 마력을 늘리는 제일 쉬운 방법이 뭔지 알아?”
베티는 자신의 심장어림을 가리켰다.
“먹는 거야.”
“머, 먹다니요. 사람을 말입니까?”
베티의 말에 대경실색한 에반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옆에 선 도노반 역시 마찬가지였다.
“역겹군.”
이안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인간을 마력을 모으는 도구로 삼다니.
범죄자들의 도시라고는 들었지만, 이건 선을 넘어도 한참 넘지 않았는가.
“알자스는 원래 그런 곳이니까.”
말을 마친 베티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방금 그녀가 한 말은, 결국 아래로 끌려온 그녀의 동료들이 겪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이안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빨리 이동하지. 시간도 없는 것 같은데. 찾을 방법은 있겠지?”
“이걸 따라가면 돼.”
품에서 구슬 하나를 꺼낸 베티가 오러를 불어넣었다. 그러자 구슬로부터 나온 두 줄기의 금빛 선이 정면을 향해 쏘아져나갔다.
“좋아, 그럼 이동하자고.”
시간이 많지 않았다.
시간을 지체한다면, 그녀의 말대로 두 요원의 운명은 장담할 수 없었다.
그 때.
[느껴진다.]
미미르가 입을 열었다.
‘뭔 소리야?’
뜬금없는 미미르의 말에 이안이 속으로 물었다.
[익숙한 기운이다. 그것도 매우 강대한.]
‘똑바로 말해.’
뭐가 익숙한 기운이고, 뭐가 강대하단 말인가.
이안의 재촉에 미미르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신기일 확률이 98.2%다.]
“신기?”
생전 처음 들어보는 단어에 이안이 눈을 끔뻑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