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예상은 했다.’
상대는 아슈타르로부터 버려진 자.
그 공로를 인정받기는커녕 존재조차 지워져 잊혀진 요원이다.
자신의 존재를 말살한 것이나 다름없는 자의 아들을 만났는데 반가운 기분이 든다면 그건 애국심이 아니라 세뇌당한 것이다.
[첫 단추부터 어긋났군. 계획을 수정할 필요가 있겠어.]
면전에 욕이 박힌 이안의 눈앞에서 사자머리가 묘하게 기분 나쁜 표정으로 실실대고 있었다.
‘그 대가리 좀 치워봐, 안 보이니까.’
[그런다고 해결책이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기분 나쁜 웃음을 실실 흘리며 사자머리 미미르가 옆으로 움직였다. 간신히 표정을 관리한 이안은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우선 아슈타르에 대한 적대감부터 해소한다.’
도움은커녕, 그녀의 원한에 발목을 잡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 작업은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녹록치 않았다.
“이, 이 빌어먹을 새끼가! 쳐라!”
고함소리에 이안은 뒤로 돌았다.
“형님의 원수를 갚아라!”
“저 연놈들을 죽여!”
부장으로 보이는 건달을 중심으로, 한 무리의 건달들이 흉폭한 기세를 뿜어대며 이안에게 달려들었다.
각기 몽둥이나 단검을 하나씩 꼬나쥔 자세가 제법 그럴듯한 것이, 그들이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라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전사들이란 것을 말해주었다.
하지만 이안과 일행 역시 평범하지는 않았다.
“도, 도련님!”
도노반과 에반이 곧장 이안을 지키기 위해 검을 뽑아 든 채 달려들었다.
하지만 저 멀리 떨어져있던 그들에겐 접근할 시간이 필요했다.
이안에게도 말이다.
이안은 오른 손을 아래로 뻗었다.
‘귀환’
이안이 명령어를 외자, 건달대장의 아랫도리를 박살낸 군용 대검이 이안의 손에 되돌아왔다. 손잡이의 가죽은 이미 피로 축축해져 있었다.
이안은 버릇처럼 숨을 골랐다.
‘열다섯, 아니 여섯.’
오러를 쓴다 한들, 혼자서 상대하기엔 제법 많은 숫자다. 그들이 제법 훈련된 전사인데다 손에 든 흉기들을 감안한다면 더 더욱.
‘해볼 만하다.’
혼자가 아닌 것은 이안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좌측, 우측, 우측, 정면.]
상대의 공격을 예측한 미미르가 이안의 눈앞에 예상되는 적의 투로를 선의 형태로 보여주었다.
전투의 정답지를 두 눈으로 확인한 순간.
파앗
오러를 끌어 모은 이안은 망설임 없이 투로의 빈 공간 사이로 돌진했다.
부웅
온갖 병기들이 이안을 향해 휘둘러졌지만 이안의 몸에 닿는 것은 없었다.
오러까지 사용했는데도 눈앞에 뻔히 보이는 공격을 피하지 못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뭐, 뭐해!”
‘우선 부두목부터.’
푸욱
순식간에 적의 대열 깊숙이 파고든 이안은 당황해 소리치는 부장의 뱃가죽에 대검을 쑤셔 박았다.
“끄, 끄윽…”
부장은 건달들 중 몇 안 되는 오러유저였지만, 그것만으로 이안의 공격을 막을 수는 없었다.
놈은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한 채 눈을 까뒤집었다.
“형님!”
“저, 저 새끼 죽여!”
대장에 이어 부장까지 이안의 손에 쓰러지자, 분노한 건달들이 앞뒤 가리지 않고 이안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안 대신 그들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익숙한 얼굴이었다.
“머, 멈춰!”
“부장이다!”
인질로 사로잡힌 부장 앞에서, 이안을 난도질하려던 건달들은 강제로 순한 양이 될 수밖에 없었다.
“무기 버리고 무릎 꿇어. 안 그러면 너희 대장과 부장의 목숨은 없다.”
이안은 한쪽 발로 쓰러져 꿈틀대는 건달 대장의 목을 밟은 채, 오른 손으론 배에서 피를 줄줄 흘리고 있는 부장의 목에 칼을 들이댔다.
‘총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지.’
제 아무리 총기가 강력한들, 상대방이 그 위력에 대해 알지 못한다면 위협용으로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
그에 반해, 날카로운 칼날이 목을 꿰뚫어버릴 수 있단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지 않은가.
수많은 적을 앞에 둔 이안의 입가에 비릿한 웃음이 걸렸다.
“공, 도련님?”
“아, 아니…”
건달을 상대로 인질극을 벌이는 신검공의 자식.
상상도 못한 전개에 이안을 지키기 위해 달려들던 두 사내가 당황해 눈을 끔뻑였다.
그것은 건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이런 미친놈이!”
“당장 풀어주지 못해? 이런 개 같은…”
난처한 상황에 처한 건달들이 이안을 향해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은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다가서면 그들의 대장이 죽게 생겼고, 도망간다면 두목이 배신의 죄를 물어 그들을 처형할 것이 분명했으니까.
그렇다한들, 범죄자들의 도시 알자스에서 구를 대로 구른 건달들을 상대로 인질을 잡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결국 그들이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이, 인질을 잡다니 이 비열한 놈!”
“사내라면 인질 없이 정정당당하게 일 대 일로 붙어보자!”
“뭐래, 이 미친 새끼들이?”
갑자기 공명정대한 기사로 돌변한 건달들의 개소리에 이안이 헛웃음을 쳤다.
[틀린 말은 아니로군. 기사 중의 기사라 불리는 신검공 아슈타르 공작의 자식이 건달을 상대로 인질극이라니. 지나가던 개가 웃겠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미미르가 크르릉 소리를 내며 마구 웃어댔다.
“정정당당은 개뿔이. 다구리가 정정당당이냐? 이건 정당방위라고.”
건달들을 향해 잠시 으르렁대던 이안이 시선을 잠시 돌렸다.
그가 이곳에 온 본 목적은 건달들을 제압하는 게 아니었으니까.
십 년 동안 범죄자들의 도시에 버려진 아슈타르의 요원.
이안의 눈동자가 그녀를 찾아 바쁘게 움직였다.
그리고.
“미친.”
그녀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단 걸 깨달은 이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
“도련님, 어떻게 할까요?”
블랙스완의 은신처. 아니 은신처였던 오두막.
제압한 건달들을 비엔나소시지처럼 엮어 쳐박아 놓은 도노반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이안의 명을 기다렸다.
“원하신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읍! 읍!”
노기사가 허리춤의 검 손잡이에 손을 얹자, 분위기를 눈치 챈 건달들이 몸을 꿈틀거렸다.
“아냐. 아직은.”
하지만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시체는 시체일 뿐이지만, 산 사람은 그 이상의 가치가 있었으니까. 분명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될 것이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어디로 갔을까.’
이안은 오두막 안쪽을 눈으로 훑었다.
작은 솥에는 먹다 남은 수프가 고여 있었고, 그 아래의 화덕엔 아직까지도 불씨가 남아있었다.
얼마 전, 그러니까 오늘까지만 하더라도 사람이 거주했었다는 증거였다.
‘수가 많지는 않은 모양이군. 많아야, 셋?’
남은 요원들의 규모를 짐작한 이안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충분해.’
당장 무언갈 할 수 있는 인원은 아니었지만, 정보를 얻어내기엔 충분했다.
이제 남은 건 그들을 찾아내는 것 뿐.
이안은 줄줄이 묶인 채 바닥에 쓰러진 건달들 중 하나에게 다가가 재갈을 풀었다.
“커, 커헉! 이런 개놈의 자식이! 내가 누군지 알아 이 호로….”
재갈이 풀리자마자 건달들의 대장의 입에서 걸쭉한 욕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피로 번들거리는 대검이 눈앞에 다가오기 전까진.
“이거, 뭔지 기억하지?”
두 손가락으로 든 대검의 끝이 대장의 아랫도리 위를 향했다.
“어, 어어…”
순간, 밖에서의 끔찍한 고통을 떠올린 대장의 얼굴에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도련님. 꼭 이래야겠어요? 아무리 악당이라지만 이건….”
조금 전 대장을 치료했던 세리아가 이안을 이상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신법의 치료능력을 고문에 쓴다는 것 자체가, 사제인 그녀가 받아들이기엔 영 내키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신전.”
“뭐 해요? 당장 시작하지 않고.”
이안의 한 마디에 그녀는 두 팔을 걷어붙였다.
[그 사자에 그 사제군. 쯔쯔.]
이안의 뒤에서 미미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 잠깐만! 기다려! 뭘 원하는 거냐!”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시실을 깨달은 대장이 다급히 외쳤다.
하지만 이안은 멈추는 대신, 손가락에 힘을 풀었다.
“으, 으아아악!”
날카로운 대검이 자유낙하를 시작했다.
“으아아아아악!”
곧 다가올 끔찍한 고통을 예감한 대장은 겁에 질린 채 돼지처럼 꽥꽥 울어댔다.
“으아악! 으악! 으아아악…?”
하지만 그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대검이 파고든 지 시간이 제법 지난 것 같음에도, 아무런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그는 힘겹게 고개를 숙여 제 아랫도리를 확인했다.
“허, 빗나갔네? 운도 좋아.”
피식거리는 웃음과 함께, 이안은 정확히 건달의 다리 사이 틈을 파고든 대검을 뽑아들었다.
당연하지만, 다분히 의도적인 실수였다.
다시 대검을 두 손가락으로 집어든 이안은 씨익 웃었다. 사내의 얼굴이 양피지처럼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자, 이번에는 제대로 꽂아줄게. 하나….”
“자, 잘못했습니다! 제발! 아는 건 다 말할 테니 제발 하지 말아주세요….”
급기야, 공포에 질린 건달이 울먹이기 시작했다.
순간, 이안의 미소가 사라졌다. 더 이상의 쇼는 필요 없었으니까.
“좀 전에 만났던 여자에 대한 모든 것. 그리고 네가 아는 것 전부.”
심문을 시작한 이안의 눈이 싸늘하게 빛났다.
***
“젠장, 젠장.”
블랙스완, 아니 베티는 급히 발을 놀렸다.
오늘 하루는 정말로 최악이었으니까.
자릿세 정도로 끝낼 수 있었던 일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커져버렸다.
“빌어먹을 아슈타르의 개새끼가….”
빠득
그녀가 이를 갈았다.
이미 한 번 버려진 그녀와 동료들이었다.
쓰레기처럼 버리고 잊어버린 것도 모자라, 필요해지니 다시 자신들을 찾아온 파렴치한들.
“기사 중의 기사? 엿이나 먹으라지. 개새끼들.”
놈들의 변덕 덕분에, 그녀는 간신히 만들어낸 일상을 잃었다.
당장 동료들과 함께 아무도 찾지 못할 곳으로 숨어들지 않는다면 목숨 하나 건지기도 힘들 터.
“데인부터. 그 다음엔 랄프에게 간다.”
우선순위를 정한 그녀는 알자스의 미로처럼 뻗은 뒷골목을 헤집기 시작했다.
곧 그녀는 목적한 집에 도착했다. 하지만.
‘문이 왜?’
활짝 열려있었다.
수상한 낌새를 눈치 챈 그녀의 얼굴이 대번에 굳어버렸다. 그녀의 손이 재빨리 품에 숨겨놓은 단검으로 향했다.
그 때.
“그만.”
뒷목의 서늘한 감촉을 느낀 그녀의 몸이 뱀 만난 개구리마냥 굳어버렸다.
“살고 싶으면 가만히 있는 게 좋을 거야.”
목 뒤에 칼을 들이댄 사내의 쥐새끼 같은 목소리가 그녀의 귀를 긁어댔다.
‘한 명이 아냐.’
수많은 발소리들이 옴짝달싹 못하는 그녀의 귀를 어지럽혔다.
못해도 다섯, 많으면 열.
기습을 당한 것으로도 모자라, 수적으로도 불리하다. 그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누구냐. 데인은 어디에 있지?”
“주인께서 네년을 찾으신다. 잠자코 따라오는 게 좋을 거야.”
베티가 물었지만 사내는 그 말에 따로 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사내의 배후를 짐작하기에는 충분했다.
“트로이카군.”
트로이카.
범죄자들의 도시를 지배하는 삼대 조직의 연합체.
알자스에는 수많은 건달들의 모임과 조직이 있었지만, 자신들의 보스를 주인이라 칭하는 광신도들은 그들이 유일했으니까.
“자미르? 이반? 아니면 신드라인가?”
“입 닥쳐. 네년의 더러운 입에 오르내릴 분이 아니시다.”
목 뒤를 파고드는 따끔한 칼날.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벗어나야 해.’
그녀는 눈알을 굴려대며 기회를 엿봤다. 칼까지 들이대며 자신을 끌고 가려는 녀석들이 좋은 의도를 가졌을 리 만무하지 않은가.
하지만 벗어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십 년 전이었다면….’
전성기의 그녀였다면 이 정도는 능히 혼자서 돌파할 수 있었을 터.
하지만 십 년의 세월동안 천천히 녹슨 그녀의 육체는 과거와 같이 움직이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끌려갈 판.
‘데인은 이미 당한 것 같고, 랄프라도 빠져나가야 할 텐데….’
마지막까지 곁에 남은 두 친우들을 떠올린 그녀가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그 때.
“웬 놈이냐?”
뒤에서 들린 쥐새끼의 다급한 목소리.
분명, 누군가 찾아온 것이 틀림없었다.
‘혹시, 랄프인가?’
랄프라면, 그가 빠져나왔다면 분명 그녀나 데인을 구하기 위해 무슨 조치를 취했으리라.
그녀의 눈동자가 친우를 찾기 위해 다급히 움직였다.
하지만.
‘어, 어떻게?’
불청객의 정체를 확인한 그녀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깜빡였다.
“또 만났네, 그치?”
그녀의 앞에 나타난 것은, 다름 아닌 아슈타르의 개자식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