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휘유.”
탁
단숨에 서류 전체를 훑어본 이안의 입에서 휘파람이 새어나왔다.
‘제법 괜찮은 계획 같은데.’
다른 세계였긴 하지만, 동종 업계에 오래 종사해 본 이안이 보기에도 계획은 제법 깔끔했다.
“역시, 경밖에 없어.”
“과찬이십니다.”
가만히 고개를 숙이는 도노반을 향해 이안이 만족스런 웃음을 지었다.
이안의 말은 절대로 과찬이 아니었다.
0에서 시작하는 것과, 1에서 시작하는 것은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가 있었으니까.
심지어 도노반이 가져다준 계획서는 숫자로 친다면 1이 아니라 5정도는 될법한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아직도 이 꼴인걸 보면 실패한 것 같다만.’
실패의 원인을 알아낼 수만 있다면, 분명 이안이 영지를 찾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찾아봐야겠어.’
공식적으로 작전은 끝나지 않았으니, 죽지 않았다면 분명 알자스 어딘가에 이 계획의 입안자가 살아있을 것이다.
“경, 이 작전과 관련된 사람들을 찾아봐줘. 힘들겠지만.”
“아슈타르의 뜻대로.”
“아, 그리고.”
말을 마친 이안의 고개가 세리아를 향해 돌아갔다.
“이번에도, 어때? 마침 신관이 필요하던 참인데.”
“그거, 좀 위험한 일 아니에요? 저는 애들도 봐야하고, 좀…”
어느새 기도를 끝낸 세리아가 고개를 저으며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이번에는, 이번에는 안 돼!’
이안에게 목숨을 빚지긴 했지만, 지금까지 이안과 엮이면서 겪은 온갖 고생을 생각하면 밑지는 장사인 것이 불 보듯 뻔했으니까.
그녀는 다짐, 또 다짐했다.
하지만.
“아, 이번에 영지에 들어가면 신전을 하나 지으려고.”
“…신전이요?”
그녀의 결심을 흔드는 데엔 고작해야 한 마디면 충분했다.
‘예상대로야.’
세리아의 반응에 이안은 속으로 콧노래를 불렀다.
“그래. 마르콘의 은총으로 영지를 되찾았으니, 마땅히 봉헌이라도 하나 해야 하지 않겠어?”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신들이 실재하는 기적을 일으키는 대륙에서, 그들을 모시는 신전은 신들에게 바칠 제물로 적절했으니까.
그리고.
“근데 마침 맡아줄 사제가 없을 것 같단 말이지.”
그 신전의 사제를 뽑을 권한은, 신전을 봉헌한 영주에게 있었다.
잠시나마 마족을 막아낼 수 있을 정도의 신성력을 가질 사제라면 신전을 가질 자격은 충분했으니까.
꿀꺽.
그녀의 목울대가 꿀렁댔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어대기 시작했다.
‘신전, 내가 신전을?’
대륙에 힘을 행사하는 신의 수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았지만, 신전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신도의 수가 많기로 이름난 태양의 신, 마르콘을 모시는 신전도 각 영지에 하나 정도가 고작.
그러니 신을 모시는 사제로서 자신의 신전을 가진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영광이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평생 운영비 걱정 따윈 안 해도 돼.’
정기적으로 들어오는 막대한 헌금.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그래도 공자님께서 부르시면 가야하지 않겠어요? 뭐, 신전 때문은 아니고….”
[욕망에 솔직한 성직자군. 과연 그 신에 그 사제야.]
세리아의 타오르는 욕망에 질색한 미미르의 사자머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알자스의 겨울바람은 매섭다.
대륙에서 험준하기로는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작센산맥의 자락을 따라 내려오는 한기는 흐르는 강을 꽁꽁 얼려버릴 정도였으니까.
그리고, 그 얼어붙은 린 강을 한 대의 마차가 건너고 있었다.
“으아아아! 지금 강으로 가고 있잖아? 미쳤어요? 마차 빨리 세워!”
“공자님!”
강이 얼어붙는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던 세리아와 에반의 얼굴이 시퍼래졌다.
“거, 참. 시끄럽게. 강 처음 건너봐? 그리고, 공자님이란 말 다시는 쓰지 마.”
가만히 눈을 감고 있던 이안은 귓구멍을 후비적거렸다.
그의 옷은 평소의 옷차림과는 조금 달랐다.
아슈타르의 사자문장을 일부러 떼어낸 흑색의 코트 아래로 보이는 검은 조끼와 마법진이 새겨진 홀스터, 그리고 허리에 찬 정체불명의 검은 주머니 하나.
[페르소나의 봉인형태를 이따위로 만들어 낸 사례는 800년간 단 한 건도 없었다. 위력이 특별히 나아지지도 않았는데 제어하기만 어려워지지 않았는가.]
“그거야 네가 멍청하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거고.”
“네?”
“아냐, 아냐.”
이안은 마부석에서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도노반에게 손을 내저었다.
마차는 곧 성에 당도했다. 무법지대라 하면 떠올리는 무질서와는 달리, 경비병으로 보이는 자들이 제법 깨끗하게 관리된 성문을 지키고 있었다.
“이봐, 여기는 신드라님의 영역이다. 들어오고 싶으면 통행료를 내는 게 신상에 좋을 거야.”
“얼마를 내면 되겠소?”
경비병보다는 산적에 가까운 자들이었지만.
“재산의 절반.”
말을 마친 경비병은 씨익 웃었다. 도노반이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농담하는 거요?”
순간.
“농담이라고? 어이 할아범, 지금 우리가 농담이나 할 정도로 한가해 보여?”
농담이란 말에 산적, 아니 경비병의 기도가 변했다.
“여긴 신드라님의 땅이고, 통행료는 그분의 법이다. 이 땅에 들어오고 싶다면 얌전히 재산의 절반을 바쳐.”
조금 전과는 완연히 달라진 분위기.
고작 경비병일 뿐이었지만, 내뿜는 오러는 예사로운 수준이 아니었다.
‘위험하다.’
상대의 적의를 느낀 도노반의 손이 저절로 허리춤의 검을 향해 옮겨져 갔다.
그 때.
“할아범, 그냥 잠자코 내려.”
“공… 도련님?”
“우리가 지금 찬 밥 더운 밥 가릴 땐 아니잖아, 안 그래?”
이안은 도노반에게 눈치를 주곤 마차에서 내렸다.
“대신 마차를 주지. 우리의 신분에 어울리는 거처를 알려준다면. 아무 여관에서나 잘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이안은 철저히 연기했다.
성에 도달한 순간부터, 그는 신검공의 아들이 아니라 영지전에 패해 몰락한 제국 영주의 후계자였으니까.
하지만 경비병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마차라고? 젠장, 그건 너무 많은데…”
머리를 짜증스레 긁적이던 경비병이 품에서 금화 몇 개를 꺼내 이안에게 튕겼다.
“신드라님의 규율에 따라 나머지 절반은 돌려주지. 성의 중앙으로 간다면 괜찮은 숙소가 있을 거야.”
“신의 이름으로 감사를 표하지. 뭐하나? 여태 안 내리고.”
제법 예법을 그럴듯하게 흉내 낸 이안은 마차에 타고 있던 에반과 세리아에게 손짓했다. 아직 적응이 되지 않았는지, 둘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마차에서 내렸다.
“그럼, 이제 들어가도 되겠나?”
“물론. 규율만 잘 지키면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예상보다 이안이 순순히 따라서일까, 경비병은 성으로 들어가는 이안 일행에게 손까지 흔들어줬다.
도노반이 영 마땅찮은 표정으로 속삭였다.
“공자님.”
“도련님.”
도노반의 말에 이안은 호칭을 정정했다.
“아, 네. 도련님, 마차까지 내주신 건 너무 과한 것 같습니다. 말 값만 하더라도….”
“계획된 일이었잖아? 어차피 이 도시에서 나가기 전엔 마차건 말이건 필요도 없고. 덕분에 의심의 눈초리도 피했지.”
도노반의 말에 이안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긴 합니다만….”
“그럼 된 거지, 안 그래? 잔말 말고 다음 계획으로 넘어가자고.”
“다음 계획이요?”
세리아가 물었지만, 이안은 대답 대신 발걸음을 옮기며 주변을 살폈다.
‘생각보단 치안이 잘 잡혀있어.’
무질서할거란 예상과는 정 반대였다.
고성이 오가긴 했지만 칼부림이 날 정도는 아니었고, 거지들이 종종 눈에 띄었지만 굶어죽지는 않았다.
이곳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이 반역죄나 그에 버금가는 죄를 저지른 중범죄자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완벽에 가까운 치안이었다.
하지만 이안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곤란한데.’
그것은, 이안의 계획을 실행하는 것이 예상보다 더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의미였으니까.
일행은 성의 뒷골목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그곳에, 이안이 찾는 사람이 있었다.
‘버려진 요원이라니.’
그 단어가 주는 불쾌함에 이안의 얼굴이 절로 구겨졌다.
‘뻐꾸기 계획의 잔존요원이라 했던가.’
알자스는 제국과 아슈타르 공작령 사이의 완충지대다.
대외적으로는 둘 모두에게 간섭받지 않는 무법지대였지만, 눈앞에 멀쩡히 살아있는 땅을 공작령과 제국이 내버려둘 리 없지 않은가.
뻐꾸기 계획은 알자스에 대한 영향력을 손에 쥐려는 아슈타르의 계책이었다.
직접통치가 아닌, 대외적으로는 공작령과 관련 없는 자를 내세워 알자스를 통치하려던 계획.
하지만 계획이 성공했다면 이안이 알자스로 향할 이유도 없었으리라.
‘실패를 인정하는 것보다 요원 몇 버리는 게 체면치레하기 좋은 것이겠지.’
정확히는 버려졌다기보단 현지에 남아 임무를 계속 수행하라는 명령이었지만, 이안에겐 거기서 거기였다.
도노반이 오래된 서류에서 그 존재를 찾아내지 못했다면, 이 작전에 투입된 요원들은 영영 잊혀 졌을 것이 분명했다.
‘덕분에 방법 하나가 생기긴 했지만.’
최소한 그 요원이 아직까지 작전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현지에 작전을 위한 기반을 어느 정도는 갖춰놓았을 터.
그 인프라를 확보한다면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저 여자가 맞아?”
“네, 수집한 정보대로라면….”
“좋은 상황은 아니군.”
눈앞의 현실에 이안은 눈살을 찌푸렸다.
“돈을 빌렸으면 갚아야 할 거 아냐! 노예상인한테 팔려가고 싶어?”
“퉤. 꺼져, 이 미친놈들아. 내가 돈을 빌리긴 언제 빌렸다고 그래? 제발 도와달라고 할 땐 언제고.”
성의 뒷골목으로 한참 들어오자 나타난 오두막 하나.
그 앞에서, 손에 몽둥이 하나씩을 쥔 사내들과 검은 옷의 여인이 서로를 향해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공자님, 어찌할까요?”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광경에 도노반이 앞으로 나서려했지만, 이안이 손으로 가로막았다.
“내가 다녀오지. 잠깐 기다리고 있으라고.”
이안의 말과 함께 일행이 천천히 앞으로 다가갔다.
***
베티.
올해로 알자스에 정착한 지 십 년 째인 그녀는 오늘도 평범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뭐, 이 년아? 여기 이렇게 떡하니 차용증이 있는데도 발뺌을 하려고?”
그러니까, 듣도 보도 못한 건달들이 빌리지도 않은 빚을 갚으라 윽박지르는 일상을.
‘이 자식들은 밥벌이할 게 이런 것 밖에 없나?’
그녀는 이를 갈았다.
이 도시를 지배하는 것은 대륙 제일의 범죄조직 트로이카.
하지만.
본디 거대한 똥 주변엔 파리와 구더기가 득실대지 않는가.
그녀의 눈앞에서 윽박지르는 이들 역시 똥에 들러붙은 구더기 중 하나였다.
‘한번 혼내준다고 갈 놈들도 아니고…’
한번 잡는다고 구더기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물리치면 더 큰 구더기가, 그 큰 구더기를 물리치면 더 큰 녀석이 올 뿐이었으니까.
‘그냥 주고 끝내자. 후우….’
이건 말하자면, 그녀가 이 범죄자로 우글거리는 도시에서 생활하기 위해 겪어야하는 재해 같은 것이다.
‘그때 그 일만 아니었더라도….’
이 지옥 같은 도시에서 평생을 살게 되진 않았으리라.
속으로 이를 갈면서도, 그녀는 품에서 미리 준비해 둔 동전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이대로 적당히 기 싸움 좀 하다 적당히 입에 물려주는 것이 그냥 주는 것보단 구더기들을 쫓아내는 데 효과적이었으니까.
그러고 나면, 오늘 하루일과도 적당히 마무리될 것이다.
하지만.
‘응?’
오늘 하루는 지금까지의 하루와는 달랐다.
“뭐? 진짜 이 년이 맞아야 정신을… 니넨 또 뭐야? 맞기 전에 저리 안 꺼져?”
그녀의 면전에서 욕을 퍼붓던 건달이 무언가를 발견하곤 눈을 부라렸다. 자연히 그녀의 시선 역시 그쪽으로 돌아갔다.
‘뭐야, 저 놈은?’
그녀의 시선 끝에, 검은 코트를 입은 금발 사내가 서 있었다.
***
“이 형님들 볼일 보는 거 안 보이냐?”
다가오는 이안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사내가 몽둥이를 치켜 올렸다. 하지만 이안은 그 말을 무시한 채 여인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이안의 입이 열렸다.
“블랙스완.”
순간, 그녀가 순식간에 몇 걸음 뒷걸음질 쳤다. 그녀의 얼굴은 당황으로 물들어있었다.
“…누구냐.”
블랙스완.
그녀가 공작원으로 활동할 때 아슈타르로부터 받은 코드네임.
근 오 년 만에 처음 듣는 그 이름에, 그녀의 시선이 싸늘하게 빛났다.
하지만 이 자리엔 둘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니, 이 새끼가 진짜!”
이안이 끝끝내 자신의 말을 무시하자, 화가 난 거한이 치켜든 몽둥이를 그대로 내리쳤다. 몽둥이에 실린 흉험한 기세가 이안의 머리를 당장이라도 수박처럼 부숴버릴 것 같았다.
검은 주머니에서 나온 이안의 손이 더 빠르지 않았다면, 그랬을 것이다.
퍽
“끄, 끄어어헉….”
“혀, 형님!”
파편화된 페르소나 중 하나, 군용 대검이 급소에 박힌 거한은 그대로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굴렀다.
국부에서 느껴지는 끔찍한 고통에 그의 눈코입에서 온갖 액체가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젠장, 더러워 죽겠군.]
몸 일부가 불쾌한 곳에 꽂힌 미미르의 사자얼굴이 썩어 들어갔다.
하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블랙스완에게 다가간 이안은 흑사자가 그려진 패를 그녀에게 보였다.
“이, 이건…”
그 패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는 그녀의 눈가가 가늘게 떨려왔다.
명을 받아 알자스에 잠입한 지 올 해로 십 년.
자신을 버린 줄 알았던 공국에서 진짜로 사람이 찾아왔으니까.
하지만 자신을 찾아온 상대의 정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가까이 다가간 이안은 그녀에게 선언했다.
“이안 아슈타르다. 아슈타르의 권한에 따라 귀 요원의 지휘권을 인계받겠다.”
신검공의 성을 쓸 수 있는, 아슈타르 공작가의 직계혈족.
‘아슈타르?’
지난 십 년 동안, 이 순간만을 기다려왔던 그녀의 놀란 눈이 토끼눈처럼 커졌다.
하지만 그 감정이 반가움이나 그리움 따위는 결코 아니었다.
“여긴 무슨 낯짝으로 온 거냐, 이 개새끼야.”
그것은 오히려 자신을 버린 아슈타르에 대한 증오에 가까웠다.
“당장 꺼져. 안 그러면 아랫도리를 네 갈래로 쪼개버릴 테니까.”
면전에서 육두문자를 얻어맞은 이안은 순간 입을 다물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