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흐응.”
마경을 지배하는 열한 군주 중 하나, 바르바토스는 마땅찮은 눈빛으로 반파된 도시를 훑어봤다.
마족과 마수들은 그녀의 생각보다 더 충실하게 도시를 때려부쉈다.
숫자도 숫자였지만, 그녀의 생각 외로 도시의 저항이 약했던 탓이다.
“뭐어…이만하면 메피스토한테 할 말은 있겠네.”
하지만 마왕은 그 사실에 아무런 감흥도 없었다.
그녀의 목적은 고작 건물 몇 개를 때려 부수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러기엔 다섯의 마족과 수백의 마수, 그리고 자칭 물질계의 방패라는 인간 놈들의 적의라는 대가가 너무 컸다.
“도대체 어떤 놈인지 모르겠단 말야….”
바르바토스의 시야가 수 킬로미터 밖을 향했다.
인간의 눈으로는 그 풍경이나 간신히 가늠할 수 있을까 싶은 거리였지만, 마족의 정점인 마왕에겐 큰 장애물이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가 찾는 목표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래, 그렇게 쉽게 나오진 않을 거란 말이지?”
그녀는 가쁜 호흡을 내뱉었다.
당장이라도 달려들고 싶었다.
드넓은 도시 안으로 파고 들어서, 페르소나라는 이름을 가진 저주받은 병기를 다루는 녀석들을 하나하나 확인한 다음 갈기갈기 찢어발기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 혼자서 고양이들의 왕과 저주받을 병기들을 상대하는 것은 자살행위란 사실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저 쥐새끼들만 아니어도….”
눈앞의 거대한 성에서, 그녀를 향한 거대한 적의가 언제라도 그녀를 찌르기 위해 기회를 엿보고 있었으니까.
미련을 버린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후우, 그래도 뭐라도 들고 가긴 해야지.”
그래야 메피스토에게 무어라도 받아낼 수 있을테니까.
바르바토스는 도시를 꼼꼼히 살피기 시작했다. 혹시나, 시스템을 움직일 수 있는 녀석이 있을까 싶어서.
“일단…저 놈은 아니야. 시스템의 선택을 받았다기엔 마력이 너무 적어.”
개중엔, 금발머리의 이안도 있었다.
***
본래 전투는 전투 그 자체만큼이나 이후의 뒷수습도 어려운 법이다.
“이봐, 조심해! 잘못 닿으면 곧장 지옥행이란 말야!”
“그래, 거기도 싹 파버려! 전부 신관님들께 보낼 거야!”
“아이고, 내, 내 건물이….”
그것이 마족과의 전투라면 더더욱.
“어휴, 냄새. 뭔 놈의 재가 산처럼 쌓였대?”
“저게 바로 마기에 오염된 흙이란 거 아닌가. 위험하니까 몸에 안 닿게 조심하라구.”
마족은 그 존재만으로 주변을 침식시킨다.
그들에게 침식당한 흙은 마치 방사능마냥 마기를 머금은 채 주변에 해악을 끼치니, 재만 남은 언데드의 시체와 함께 파내어 정화해야 했다.
하지만, 생각보다는 적은 피해였다.
“그나마 사람이 안 죽은 게 어딘가. 이게 다 만신들과 공작전하의 덕택이지.”
다섯의 마족과 수많은 마수들이 침공했음에도 다쳤을지언정 죽은 자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은, 기적이라는 말 외에 달리 표현할 방도가 없었다.
그중에서도 평사제 홀로 마족에 맞서 고아원을 지켜낸 ‘마르콘의 기적’은 고작 하루 사이에 온 도시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힘들 때일수록 사람들은 영웅을 찾는 법이었으니까.
그리고.
“이봐, 그거 들었나? 글쎄….”
“뭐? 그 망나니가?”
개중에는 공작가의 망나니 삼공자, 이안에 대한 소문 또한 섞여있었다.
“글쎄, 이번 마족들을 불러온 것이 그 망나니 공자님이라더구만.”
“사실 기사님들이랑 마법사님들을 잡아 가둔 것도 그 때문이라던데?”
“정말인가? 그, 그럼 그건 반….”
“쉬, 쉿! 이 사람이 큰일 내려고!”
단지, 그 소문이 매우 악의적일 뿐이었지만.
십 년 넘게 망나니라는 딱지를 붙여왔던 이안이 갑자기 개과천선하여 영웅이 되었다는 이야기보단, 망나니가 드디어 일을 치렀다는 이야기가 대중과 호사가들의 입맛에는 더 구미가 당겼다.
이안이 지난 한달 간 극적으로 변화했다는 사실은 성에서 일하는 몇 안 되는 하인들 중에서도 일부만이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 작금의 소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슈타르성의 심장, 공작의 집무실 의자에 몸을 기댄 에드너가 이안을 향해 묘한 미소를 지었다.
“개소립니다.”
아버지의 말에 대강 답한 이안은 귀를 후비적거렸다.
“이안, 아버지 앞에서 예의를 갖추거라!”
둘째 형, 요제프가 호통을 쳤다.
“그럼, 개소리를 개소리라 하지 뭐라 하겠습니까? 이 자리에 있는 분들은 모두 그 소문의 진위를 알고 있을 텐데 말입니다.”
하지만 이안의 말은 멈추지 않았다.
이안의 시선이 집무실에 모인 오베르트와 요제프, 칼리번과 파비안, 마탑의 임시탑주와 비행단장, 근위대장을 지나 신검공에게 멈췄다.
“오늘 보고 드린 대로, 저는 마족의 침공을 피해 없이 막아냈습니다. 더 이상 뭘 해야 하는 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안은 불쾌했다.
정확히 말하면, 그의 전 주인이 갖고 있던 악업이 생각보다 진하고 끈적하게 달라붙어있었다는 것이 불쾌했다.
‘아니, 망나니가 좀 개과천선 해보겠다는 게 그렇게 이상해?’
아슈타르의 배후에 숨어든 진짜 반역자들을 찾기 위해, 그리고 마족에 맞서기 위해 죽어라 달려온 이안의 입장에선 기가 찰 노릇이었다.
“크흠.”
“흠.”
넷은 그 말에 헛기침했고, 요제프는 이안을 노려봤다. 신경조차 쓰지 않는 건 오직 벽에 기대선 오베르트뿐.
그리고.
“필요했지.”
이 자리의 주인만은 아무 거리낌 없이 이안을 질타했다.
“정확히 말하면, 과거의 네가 저지를 나태와 탐욕을 지울만한 행적과 시간이 말이다.”
신검공이 이안을 향해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
“억울할지도 모르겠다만, 이 역시 네 녀석의 업보다.”
정확히는, 한 달 전까지의 이안이 쌓아둔 업보.
“네가 노력하는 척을 시작한 지 고작 한 달도 되지 않았거늘, 그 정도로 십 년의 업보를 지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게냐?”
에드너의 혀가 제 상대를 만난 듯 신랄하게 움직였다.
이안은 아비의 질책을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누군가 공작을 펼친 것이 사실이라 해도, 그 원인을 제공한 것은 결국 이 몸뚱이의 전 주인이었으니까.
“이제 어떻게 할 테냐? 영지민들을 만족시킬 거라면 여기서 칼이라도 뽑아드는 게 좋겠다만.”
에드너의 손가락이 이안을 가리켰다.
이안은 잠시 침묵했다.
‘시험이야.’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것이 그를 시험하는 것이란 사실은 씰룩이는 신검공의 입매만 보더라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도대체 뭘 원하는 거지?’
이안이 원했던 것은 그저 전 주인이 가진 악명을 지우고 세상에 얽매이지 않는 삶을 사는 것뿐.
하지만 에드너는 그를 가만히 놓아둘 생각이 없어보였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무엇을 원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안은 짐짓 모르는 체 했다. 자신의 패를 까기 전에, 상대의 패를 먼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게냐? 그야 당연히, 업보를 지울 위업을 달성해야지.”
순간 김빠진 표정을 지은 에드너는 책상 위에 놓인 서류중 하나를 꺼내 인장을 찍었다. 곧, 그는 둘둘 만 종이뭉치를 이안에게 던졌다.
“이건….”
화살처럼 날아간 서류를 가볍게 받아낸 이안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의 직감이 좋지 않은 쪽으로 반응했다.
곧, 이안은 서류를 펼쳐 첫 마디를 읽었다.
[봉작서]
그 곳엔 이안이 전혀 상상치도 못했던 내용이 적혀있었다.
“칠영웅의 이름을 이어받은 나 신검공 에드너 폰 아슈타르의 뜻에 따라, 이 시간부로 이안 아슈타르를 알자스의 남작에 봉한다. 이안 아슈타르는 앞으로 나오라.”
‘똥 밟았다.’
아버지, 에드너의 선언을 들은 순간, 이안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알자스가 어디인지, 뭐 하는 곳인지는 관심도 없었고 알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의 손에 쥔 종이쪼가리가 그를 얽맬 족쇄란 사실은 제반지식을 몰라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도시에 묶어둘 셈인 건가?’
곤란한 일이었다.
이안이 원하는 것은 무시당하지 않을 힘과 자유이지, 어딘가에 쳐박혀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고, 공작 전하! 그 곳은….”
“여태껏 전례가 없던 일입니다! 앞으로 큰 문제가 될 수도….”
주변의 반응은 이안의 생각보다 격렬했다. 그 자리에 선 모두가 신검공의 말에 놀라 대경실색했다.
거기에.
“아버지, 지금 진심이신 겁니까?”
제 아비, 에드너를 향해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지은 대공자 오베르트까지.
‘뭔가 이상해.’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불길한 기운이 집무실 안에 진동했다.
“전례는 깨지 않았기 때문에 전례인 것이다. 이제 깰 필요가 생겼을 뿐이지.”
에드너는 손을 휘저어 좌중을 조용하게 만든 다음, 이안을 향해 손짓했다.
‘이 자리에서 도로 물리긴 글렀다.’
그러기엔 이안을 바라보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거절하면 거절하는 대로 좋지 않게 흘러갈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싫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가만히 앉아서 주는 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왜, 별로 맘에 들지 않는게냐?”
“전 여기가 좋습니다.”
진심이었다.
남들은 망나니 주제에 제법 괜찮은 자리를 꿰찼다 하겠지만, 이번 생만큼은 자유롭게 살고 싶었던 이안에겐 달갑잖은 족쇄일 뿐이다.
어디에 붙어있는지도 알 수 없는 도시보다는, 영지의 중심에 있는 것이 자신을 보호해줄 강력한 세력을 손에 넣기에도, 수련하기에도 훨씬 좋은 것이 사실.
이안이 거부하자 에드너가 언짢은 눈빛으로 이안을 바라봤다.
“네 게으름이 자초한 결과다. 십 년은 넘게 지난 일에 아직도 심력을 쏟으니 아직도 이 모양 이 꼴로….”
“아버지.”
벽에 기댄 대공자, 오베르트가 에드너의 말을 끊었다.
그러자.
‘뭐지?’
수상했다.
에드너가 급히 평정을 가장했지만, 이안은 당황한 아버지의 얼굴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으니까.
‘십 년 전이라고?’
이안은 전 주인의 기억창고를 열어 십 년 전의 기억을 뒤져봤다.
하지만 그 곳엔 어떤 이상한 기억도, 정보도 들어있지 않았다.
‘없어.’
마치 누군가가 지우개로 지워버린 것처럼, 어느 순간 기억의 필름이 끊어져있었다. 이안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래, 좋다.”
그 모습에 에드너가 안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곤, 말을 이어나갔다.
“내 제안을 수락한다면, 일이 끝난 다음 네게 자격을 주마.”
자격?
“아, 아버지!”
이안이 의문을 가질 새도 없이, 둘째 형 요제프가 소리를 꽥꽥 질러대기 시작했다.
“제겐 그런 말씀도 없으셨잖습니까! 어떻게, 어떻게 저런 망나니 같은 놈이 저보다 먼저….”
하지만 아무도 그의 고함소리에 신경 쓰지 않았다. 이안은 신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무슨 자격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가 아직 얻어내지 못한 권리지.”
이안의 물음에 에드너는 그가 앉은 의자의 손잡이를 툭툭 쳤다.
“이 자리에 도전할 자격.”
아슈타르의 지배자가 되어, 신검의 이름을 이어받아 새로운 칠영웅 중 하나가 될 자격.
하지만.
‘또 다른 족쇄일 뿐이지.’
이안은 속으로 조소했다.
이 영지의 지배자가 되는 것은 남들에겐 필생의 목표로 삼을만한 일이겠지만, 그에겐 아니었으니까.
그가 필요한 것은 남에게 방해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 수 있는 힘.
“그것보다는.”
그것을 위해, 지금의 이안에게 필요한 자격은 하나뿐이었다.
“아직, 이틀 남았습니다만.”
신검, 레온하르트가 가진 권위를 휘두를 자격.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채, 이안은 아무렇지 않게 손가락으로 아버지의 손에 들린 신검을 가리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