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흐응, 꽤나 귀한 몸이시네.”
도시 바깥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바르바토스는 입술을 비틀었다.
그녀가 풀어놓은 마족들이 도시에서 신나게 날뛰고 있었지만, 그녀의 마음에는 차지 않았다
그녀, 그리고 메피스토의 목적은 하나.
시스템의 권한을 가진 자를 찾는 것.
“여기가 아닌 건가? 그럴 리가 없는데…”
그녀만의 결론이 아니었다.
-여기도 마찬가지야.
-여기도.
-여기도 없어!
연합공국의 각 영지로 퍼져나간 그녀의 여섯 분신이 함께 내린 결론.
애당초 시스템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저주받을 일곱 연놈들의 자손, 혹은 놈들에게 인정받은 것들뿐이다.
자신들의 터전이 마족과 마수들에게 공격당하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지 않은가.
“찾아야 하는데….”
바르바토스는 붉은 입술을 깨물었다.
시스템의 존재, 그리고 페르소나는 마족에게 있어 종족의 흥망을 좌우하는 존재다.
칠영웅의 피와 지식을 이어받아 압도적인 재능을 지닌 인간들, 그리고 그들이 손에 쥔 대 마족병기가 없었더라면 물질계는 진즉에 마족의 터전이 되었을 터.
반대로, 페르소나를 제작하는 시스템의 효율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그것을 상대하는 마족의 입지는 좁아질 것이다.
태어났을 때부터 물질계의 존재들에 대한 증오가 본능처럼 각인된 마족들에겐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될 끔찍한 일.
“그래, 좋아. 언젠가는 튀어나오겠지.”
이맛살을 찌푸린 마왕, 바르바토스가 도시를 향해 손을 내뻗었다.
그녀의 손에서 뿜어져나간 것은 정순한 마기 다섯 줄기.
한 줌도 안 되는 양일지언정, 마왕만이 맛볼 수 있는 순수한 마기의 줄기가 사방에 퍼져있는 마족들을 향해 뻗어나갔다.
구구궁
곧, 새롭게 힘을 충전한 마족들은 더욱 신나게 날뛰기 시작했다.
“나와라, 쥐새끼야.”
무너지는 건물들을 보며, 그녀가 입술을 비틀었다.
***
건물이 무너지고 비명이 퍼져나간다.
마족이 뿜어내는 마기에 침식당한 대지가 검게 물든다.
산 자는 죽고, 죽은 자는 언데드로 되살아나는 인세의 지옥이 아슈타르 공작령의 수도에 강림하려 하고 있었다.
이안은 다리에 마력을 모아 도약했다. 광장 근처의 건물 지붕 위에 착지한 그는 재빨리 상황을 파악했다.
‘현재 전력으로 상대가 가능한가?’
이안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현재 도시에서 날뛰고 있는 마족의 수는 다섯.
개중 인간의 형태를 지닌 하급 마족의 숫자는 하나.
상대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시간의 문제지.’
하급의 마족이라면 마기뿐만 아니라 제 나름의 권능도 있을 터.
시간이 오래 걸리면 걸릴수록, 피해도 커진다.
현재, 영지에서 페르소나를 사용할 수 있는 자는 신검공을 포함해 마흔이 넘는다.
하지만, 그들 중 대부분을 차지하는 근위대원들은 전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오직 공작의 명령에만 움직이는 근위대원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건.
‘공작의 명령이다.’
어떤 명령인지는 모르겠지만, 근위대원들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그 것 뿐이었다.
이대로 기다리기만 한다면, 도시와 영지민은 모두 마기에 침식당해버리리라.
‘더는 미룰 수 없어.’
이안은 홀스터를 잠궈 놓은 고리를 풀었다.
그러자 검은 색으로 도색된 자동권총, 미미르가 모습을 드러냈다.
권총을 뽑아들자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손잡이의 미지근한 감촉이 그의 감각을 일깨웠다.
그때.
파앗
검은 거인이 있던 방향에서 백광이 뿜어져 나왔다.
단순한 빛이 아닌, 바라보는 자에게 편안함과 따스함을 안겨주는 힘.
이안은 그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신성력?’
개중에서도, 빛의 색과 밝기를 고려한다면 분명 태양의 신 마르콘의 것이 틀림없었다.
‘마르콘의 사제라면 흔한 편이긴 하지만, 어지간한 사제의 힘으론 막아내기 힘들 텐데.’
페르소나에 의해 증폭된 신성력이 아니라면, 하급 마족을 홀로 막아내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순간.
‘저긴.’
이안은 신성력이 뿜어져 나오는 곳에 무엇이 있는 지 떠올렸다.
그가 이 세계에 온 이후, 딱 한 번 방문했던 곳.
그리고, 그의 전우 중 한 사람이 있는 곳.
‘시간이 없어.’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타타탓
이안은 지붕을 뛰어넘으며 검은 거인을 향해 달려 나갔다. 달리던 이안이 시동어를 외기 시작했다.
“오라.”
그가 부르는 것은, 전생의 문명이자 과학의 신화.
검과 마법이 횡행하는 세계에서 그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병기.
“미미르.”
이안이 나지막이 이름을 부르자.
파앗
지혜의 샘을 지키던 거인이 눈을 떴다.
***
마족이 처음부터 자아를 가지고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악마 혹은 마수가 마기를 축적해 임계치에 도달하는 순간, 마기가 육체를 완전히 장악하면서 이전에 존재하고 있던 의식을 날려버리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최하급의 격에 해당하는 마족들은 기본적인 생존욕구와 본능적으로 깨달은 마기의 운용법만을 가진 채 마경을 배회한다.
그들이 새로운 자아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다른 마족을 잡아먹거나 마경 이곳저곳에 흩어진 마기를 흡수해 마기의 총량을 늘리는 것뿐.
[반항하지 마라, 인간. 얌전히 죽음을 맞이해라.]
검은 거인 또한, 그러한 과정을 통해 간신히 하급의 격과 자아를 손에 움켜쥔 존재.
그에게 신성력을 뿜어내는 인간 여자란 가시만 없으면 밟아버릴 수 있는 고슴도치와도 같았다.
하지만 고슴도치의 입장은 달랐다.
“…태양의 힘이 온 대지에 머물 것을 믿나이다. 신성한 빛에 닿은 모든 사특한 것들이….”
기도문을 암송하는 그녀, 세리아 필라스의 몸에서 태양의 신을 상징하는 백광이 희미하게 뿜어져 나왔다.
콰과광
어딘가에서 폭음이 들려왔지만 무릎 꿇은 그녀는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폭음을 들은 그녀의 암송이 더욱 빨라졌다.
불타오르는 도시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광경.
하지만, 그녀에겐 기도를 올려야 할 이유가 있었다.
“흐아아앙….”
“그만 울어! 사제님께서 그렇게 가르쳤어?”
“그치만, 그치마안….”
“뚝! 조금만 있으면 사제님께서 저 마족을 무찌르실 거라니깐?”
고아원, 그리고 고아원의 가족들.
사제의 등 뒤에는 지켜야 할 존재들이 있었으니까.
‘조금만, 조금만 더….’
그녀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고아원을 세울 때부터 새겨놓은 신성결계가 마기의 침입을 틀어막고는 있었지만, 결계를 유지해야 할 신성력은 온전히 그녀에게서 나오는 것.
신성한 빛을 뿜어내면 뿜어낼수록 그녀의 정신과 영혼이 받아야 할 부담은 점점 커져갔다.
세리아는 기도문을 암송하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
검은 거인이 그녀를 가소롭다는 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경에서 성직자를 상대해본 경험이 있었던 거인은 잘 알고 있었다.
당장은 가시 때문에 손대기 꺼려지지만, 가시만 없다면 얼마든지 짓이겨버릴 수 있는 존재라는 걸.
그리고, 그 가시는 곧 사라질 거라는 걸.
“흐윽…”
입술을 짓씹은 신관의 입에서 참지 못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사제의 정신과 영혼을 짓누르는 것은 다름 아닌 그녀가 모시는 신, 마르콘.
그녀의 역할은 단순히 신의 힘 일부를 지상에 전파하는 통로일 뿐이지만, 그 일부가 신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신의 영혼이 가진 무게를 고작 인간 하나의 힘으로 견뎌내고 있던 그녀의 정신이 조금씩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이대론 안 돼.’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 버텨봐야 다가올 죽음을 조금 뒤로 미룰 뿐, 결과는 달라질 것이 없었다.
아직까지는 고아원을 중심으로 펼쳐진 신성결계가 눈앞의 마족, 그리고 놈이 뿜어내는 마기를 안으로 들이지 않고 있었지만, 그나마도 곧 한계에 다다른다.
그녀가 더 이상 마르콘의 빛을 불러오지 못하게 된다면.
‘안 돼.’
세리아는 결심했다.
파앗
순간, 세리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순백의 빛이 더욱 강해졌다.
빛은 그녀가 유지하고 있던 신성결계의 경계를 넘어, 마족에게까지 이르렀다.
[이, 이 빌어먹을 년이…!]
마기를 지닌 존재에게 신성력은 독.
신성한 빛이 주변의 마기를 흩어버리자 검은 거인이 고통스러워하며 한 발짝 물러섰다.
고작해야 하급의 격을 지닌 마족에게 만신전의 신들 중에서도 상위에 위치한 마르콘의 빛은 견디기 어려울 정도였으니까.
그녀가 이대로 계속 신성력을 뿜어낸다면, 어쩌면 저 마족을 이곳에서 몰아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몸이….’
하지만 세리아의 상태는 급속도로 악화되어가고 있었다.
온 몸은 식은땀에 축축히 젖어들었고, 금빛 머리칼은 점차 하얗게 새어갔다.
아직 강신을 경험하지 못한 그녀가, 격에 맞지 않는 힘을 사용한 대가.
이대로 신성력을 계속 내뿜는다면, 오래지 않아 그녀의 혼은 마르콘의 영압에 못 이겨 신과 동화될 것이다.
‘상관없어.’
하지만 그녀의 의지는 확고했다.
“마르콘이시여, 당신의 신성한 빛으로 이 자리의 어린 양들을 지켜주소서…”
그것이, 그녀가 해야 할 일이었으니까.
‘부디, 기적을.’
사제는 눈을 감았다.
평범한 사제의 몸으로 기적을 일으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모든 것.
영혼의 주도권을 놓아버리는 순간, 그녀의 혼은 빛의 연료가 되어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삶을 놓으려던 순간.
투타타타타타
[끄아아악! 어떤 녀석이냐!]
기적이 일어났다.
***
[각 발사체 모두 목표에서 1.89m 빗나갔다. 이 정도 공격으로는 적을 무력화시킬 수 없다.]
“이만하면 됐지 뭘 바래, 새끼야. 반마력은 독이니까 대충 쏴도 된다며?”
[하급 이상의 마족은 핵을 적중시켜야만 완벽히 제압이 가능하다고도 설명했다.]
“그래, 너 잘났다 아주. 도대체 이런 자식이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머릿속에서 들려온 딱딱한 목소리에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분명 그가 처음 페르소나를 설계할 당시엔, 훈수 두는 사자머리 따위는 염두에 둔 적도 없었으니까.
그러니, 이것은 분명.
‘새로운 특성, 보조인격이겠지.’
[나는 신검을 다룰 자격을 가진 자를 성장시키기 위해 레온하르트의 에고가 설계한….]
마침 미미르가 자신의 내력에 대해 일장연설을 하려했지만, 이안은 녀석의 말을 들어줄 만큼 한가롭지 않았다.
“닥쳐, 아직 안 끝났으니까. 장비교체.”
욕지거리를 내뱉은 이안이 특성의 시동어를 외치자, 바닥에 거치한 K6가 푸른빛과 함께 사라졌다.
중기관총의 화력은 남 부럽지 않았지만, 들고 쏘기엔 이안의 마력수준이 부족했다.
그 대신 등장한 것은 검게 도색된 자동소총, HK416.
그 순간.
[네놈, 죽음이 두렵지 않은 게냐!]
이안이 올라타 있던 지붕을 향해, 검은 거인의 주먹이 날아왔다.
콰앙
거인의 거대한 주먹이 이층집을 단숨에 관통했다.
우르르르
거인의 상상을 초월한 질량이 담긴 펀치는 집을 무너뜨리는 것으로도 모자라 주변의 땅거죽까지 뒤집어놓았다.
하지만.
이안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느려, 이 새끼야.”
투타타타
옆 건물로 옮겨간 이안이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거인에게 방아쇠를 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