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페르소나를 개방할 수도 있겠어.’
아니, 확실했다. 페르소나를 개방하기 위한 최소마력은 이미 확보한 상태니까.
구동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겠지만, 어찌어찌 힘을 개방할 수는 있을 것이다.
페르소나의 업그레이드는 아직 시기상조였으니, 당장은 그 정도로 충분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근데, 보조인격은 뭐지?’
보조인격.
분명, 이안이 페르소나를 설계할 때 만들어낸 것은 아니다. 단어의 의미조차도 불명확한 특성.
‘찝찝한데….’
하지만 당장 고칠 수 있는 부분도 아니다.
어찌되었건 페르소나를 교정하기 위해선 리아나에 있는 구현의 방을 찾아가야 했으니까.
찝찝함을 가라앉힌 이안은 침대 옆 탁자에 놓인 서류를 바라봤다.
지난 3일간의 수사 진행 기록.
‘생각보단 일을 잘 하는데?’
예상외의 준비성에 만족스런 미소를 지은 이안은 누운 채로 서류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다섯의 습격자를 심문, 습격자 중혈사자 마탑주 키르케 모하임이 있는 것을 확인. 현재 수감 중.’
눈으로 대강 내용을 확인한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라면 그 없이도 대강 수사는 완료되리라.
“일단 움직여야지.”
누워서 낭비한 시간만큼, 남은 시간을 알차게 써야했다.
대강 몸을 씻고 옷을 걸친 이안은 방을 나섰다.
그리고, 문을 나선 이안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공자님을 뵙습니다.”
만나는 하인과 하녀들마다 자신을 피하지 않고 인사를 건네는 것이 아닌가.
개중 몇은 도무지 알 수 없는 눈빛까지.
‘뭘 잘못 먹었나?’
아니면 지난 사흘 동안 세상이 바뀌기라도 한 것일까.
이안은 찜찜한 기분을 한 구석에 안고 연무장에 들어섰다.
“공자님!”
들어서자마자 반겨주는 것은 붉은 장발의 사제, 세리아.
피곤에 찌들어 다크서클이 진하게 내려앉았던 지난번과는 달리, 사흘 만에 다시 만난 그녀의 얼굴색은 제법 살아있었다.
“신수가 훤해졌는데? 요즘 좀 살 만 한가봐?”
“그, 그야 제가 열심히 번 덕이죠, 목숨까지 걸었는데!”
“누가 뭐래? 그냥 보기 좋다고.”
애써 당당한 표정을 지으려는 세리아를 본 이안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핏빛 악마에게 거의 죽을 뻔 했으니 목숨을 건 것도 사실이었고, 전투에서 큰 도움을 준 것 역시 사실이었으니까.
그 때.
“오셨군요, 공자님.”
그녀의 뒤에서 울려 퍼진 심기 불편한 목소리에 이안은 시선을 돌렸다.
“단장, 어디 배라도 아픈 거야?”
“배가 아니라 다른 곳이 아프긴 합니다.”
칼리번은 떨떠름한 얼굴로 이안을 바라봤다.
“공자님, 꼭 이러셔야 했습니까?”
“무슨 소리지?”
칼리번의 말에 이안은 딴전을 피웠다. 백작이 한숨을 쉬었다.
“사건 당시에 공자님을 지하에서 구출한 건 저희 은사자들이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가능하다면, 현재 수감된 단원들을 풀어주십시오. 당장 마경에 차출해야 할 2차 파견대 인원도 부족한 지경입니다.”
자신의 부하들을 죄수취급한 장본인에게 부탁해야하는 기사의 표정은 원망과 절박함으로 범벅되었다.
“안 돼. 최소한 나흘 동안은.”
하지만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그 대답에 칼리번은 이를 악물었다.
‘아직은 무리야.’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게 전부라고는 속단할 수 없는 일인 데다가, 배후와 어떻게 연관되어있을지 알 수 없는 용의자들을 석방할 수는 없었으니까.
‘이왕 시작했으면, 확실하게 끝내야지.’
이안이 이 사건에 발을 담근 것은 우연이었지만, 이미 발을 빼기엔 늦은 상황.
아버지 신검공에게, 그리고 영지에 자신의 이름을 제대로 각인시키기 위해서라도 가능한 한 완벽하게 마무리를 지어야 했다.
하지만.
“공자님, 진정 복수를 원하시는 거라면 이런 방식으론 안 됩니다.”
‘복수?’
뜬금없는 단장의 말에 이안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그게 무슨 개소….”
이안이 채 말을 마치기도 전.
“고, 공자님!”
비명처럼 들려온 고함과 함께 병사 하나가 연무장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가죽갑옷, 여러 개의 손쇠뇌와 등의 거대한 쇠뇌. 흑사자 사냥단의 병사였다.
얼마나 먼 곳에서 뛰어온 건지, 병사의 표정은 당장이라도 토할 듯 핼쑥해져 있었다.
‘좋지 않은데.’
직감 상, 이렇게 급하게 달려온 전령이 전해줄 이야기는 좋은 소식보다는 나쁜 소식 쪽이다.
그리고.
“전 마탑주 키르케 모하임이 지하 감옥에서 탈출했습니다!”
자신의 직감이 맞다는 것을 깨달은 이안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
소식을 듣자마자 이안과 칼리번, 세리아는 한달음에 광장의 수사본부까지 내달렸다.
임시로 세워둔 천막 안에선 이미 견장을 찬 수많은 장교들이 정신없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에렌 가 상황은?”
“현재 1개 분대 이동 중입니다.”
“골목까지 확실히 틀어막아! 놈이 도망치면 우리 모두 끝이니까!”
이미 발등에 불이 떨어진 사냥단의 장교들은 뭐 마려운 개 마냥 천막 안팎을 뛰어다녔다. 그야말로 개판 오 분 전.
개중 한 장교의 눈이 이안과 마주쳤다.
“충!”
이안을 알아본 장교가 당황한 표정으로 경례하자, 좌중은 마치 얼어붙은 듯 침묵 속에 잠겼다.
“충. 이안 아슈타르 공자님을 뵙습니다.”
천막 안의 모든 장교들과 함께 경례를 취한 파비안의 낯빛은 어두웠다.
이안이 싸늘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뭐 할 말 없어?”
“송구합니다. 소신의 능력이 부족하여….”
사냥단장, 파비안이 급히 사과했지만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거 말고. 현재 진행상황.”
이안이 굳이 여기까지 급히 달려온 것은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서지 사과를 받기 위함이 아니었으니까.
슬슬 눈치를 보며 이안의 의중을 확인한 파비안은 빠르게 입을 열었다.
“지하 감옥에 수감 중이었던 전 혈사자 마탑의 탑주, 키르케 모하임은 약 35분 전 정체불명의 방법으로 감옥을 탈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정체불명?”
정체불명이라니.
파비안의 말에 이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말 그대로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렸습니다. 현장에서 병사 두 명이 키르케의 앞을 지키고 있었습니다만,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합니다.”
“정신계 마법을 사용했을 가능성은?”
“공자님께서도 알고 계시겠지만, 마력동결형 수감실에선 마력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애초에 그들의 마력 역시 봉인되었고요.”
보고를 들은 이안은 머리를 짚었다.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상대는 4급에 도달한 대마법사.
한 줌의 마력만 있어도 능히 도시 하나쯤은 빠져나갈 수 있는 자다.
아니, 혹여 아슈타르가 자신을 잡아 가둔 것에 앙심을 품고 있다면 복수를 꾀할지도 모르는 일.
“추적할 방법은?”
“현재 혐의가 없는 것으로 판명된 마법사들이 마력탐지진을 통해 찾고 있습니다만….”
파비안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번 실책이 얼마나 큰일인 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처벌은 달게 받겠습니다.”
이안 앞에 선 단장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이안은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마력을 쓰지 않았다. 그러면 마법을 쓰지 않았다는 건데.’
마법을 쓸 때 나타나는 마력의 움직임은 절대로 숨길 수 없다.
마력의 향기를 숨기기 위해 펼치는 마법마저도 마력의 움직임 없이는 발동할 수 없었으니까.
그렇다는 건.
‘마력 없이 빠져나왔다?’
그것이 유일한 답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마치 거미줄처럼 도시 내에 빼곡하게 짜여진 마력탐지의 덫을 빠져나갈 수 있을 리 없으니까.
이안은 그가 빙의하면서 얻은 전 주인의 기억, 그리고 빙의된 이후에 새롭게 익힌 지식들을 제 멋대로 조합했다.
그것이야말로 이안이 가장 잘하는 일.
찰나의 시간동안 수많은 퍼즐조각이 움직이고 끼워 맞춰졌다.
그리고.
“마기는?”
퍼즐이 완성되었다.
“네?”
“마기 측정은, 계속 진행 중인 거 맞아?”
“확인해보겠습니다. 그쪽은 사실 마탑의 전담 분야기 때문에…, 설마?”
멈칫한 파비안의 동공이 희미하게 떨려왔다.
이안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채자마자, 그는 마법사단 본부에 주둔한 병력과 연락을 취했다.
곧.
“그게 말이야? 이 멍청한 것들아! 빨리 잡아오던 만들어오던 해서 재가동시켜!”
신경질적으로 수정구슬의 연결을 끊어버린 파비안은 하얘진 얼굴로 이안에게 고개를 숙였다.
“마기탐지진을 관리하던 마법사 네 명 모두 사망했습니다. 감시하던 병사들도….”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예상하고 있던 일이다.
마력을 다룰 수 없는 마법사가 택할 수 있는 최후의 방법은 마기뿐이었으니까.
물론 마경이 아닌 곳에서 마기를 구하는 것은 매우 어렵지만, 인공적으로 만들어 낸 악마와 관련되어있는 마법사라면 무언가 수를 냈을 것이다.
“저, 공자님.”
누군가의 부름에 이안은 몸을 돌렸다.
“죄송합니다만, 저는 고아원으로 돌아가 봐도 될까요? 아이들이 걱정돼서….”
세리아였다.
마르콘의 상징, 기하학적으로 형상화된 태양이 붙은 신관복 자락을 붙잡은 그녀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위험할 텐데.”
최소 다섯의 마법사가 도주한 상황.
개중 최소한 한 명 이상이 마기를 사용한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마기에 침식된 마법사가 악마나 마족으로 변해버릴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마기라면 신성력으로 충분히 막아낼 수 있으니까요.”
이안은 그녀의 눈을 잠시 바라보더니,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우의 말이라면야.”
잠시나마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전우다. 그 정도 부탁은 들어줄 수 있었다.
“대신 호위 병사를 좀 붙여줄 테니 같이 갔으면 하는데.”
이안의 호의에 세리아는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그녀는 곧 이안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건 제가 감사해야할 일이죠. 감사합니다, 공자님.”
짧게 인사한 세리아는 급히 천막을 나섰다. 이안은 옆에 서 있던 칼리번을 바라봤다.
“경은 곧장 기사단원들을 소집해서 전투준비를 할 수 있도록. 필요하다면 지하 감옥에 수감 중인 기사들을 꺼내도 좋고.”
곧, 이안은 칼리번에게 공작가의 인장을 찍은 위임장을 건넸다.
배후가 확실히 밝혀졌으니, 이제 전투를 준비해야했다.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토록 하겠습니다.”
칼리번은 곧장 고개를 숙인 뒤, 위임장을 받아 나섰다.
‘이제 기다리면 되겠군.’
마기탐지진을 다시 가동한다면 도주한 키르케의 위치를 금방 알아낼 수 있으리라.
천막의 한 쪽 기둥에 기댄 채, 이안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여기서 제 멋대로 나서봐야 해결되는 것은 없었으니까.
기다림의 결과는 곧 돌아왔다.
“공자님, 탐지진의 가동에 성공했습니다. 곧 마법영상을 띄우겠습니다.”
파비안의 외침에 이안은 기둥에서 등을 떼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회의용 책상 위에 설치한 마도구에서 푸른빛이 뿜어져 나왔다.
‘우선 목표의 위치를 확인한 다음, 유격대가 적을 저지하는 동안 기사단들을 투입해 섬멸한다.’
도시 내에만 있다면 충분히 가능한 전술이다. 오러의 힘으로 폭발적인 기동력을 낼 수 있는 초인들이라면 순식간에 놈들을 따라잡을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책상위로 떠오른 마법영상을 마주한 모두는 말을 잊었다.
이안을 제외하곤.
“미쳤군.”
욕지거리를 내뱉은 이안의 표정이 구겨졌다.
푸른 영상에는, 마기를 뜻하는 붉은 점이 온 도시를 뒤덮고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