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사건은 빠르게 처리됐다.
순식간에 들이닥친 은사자 기사단의 기사들이 용병들을 소시지처럼 엮어 끌고 갔고, 실험이 진행됐던 내부는 증거를 훼손할 수 없도록 철통같은 보안을 유지했다.
“저놈들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채 식지 않은 권총을 홀스터에 꽂아 넣은 이안이 팔짱을 낀 채 연구소를 둘러싼 기사들을 노려봤다.
못해도 마탑의 간부급, 혹은 근위대나 더 위까지 연결되어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마기 연구라는 미친 짓을 태연히 할 수 있을 리 없으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죠?”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에반이 되물었다.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냐. 그보다.”
소년의 눈을 바라보는 공자의 눈빛은 심상치 않았다.
“너, 익스퍼트의 경지에는 어떻게 올라간 거지?”
이안은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에반을 바라봤다.
“성도 없는 걸 보아하니 칠영웅의 피가 섞인 건 아닌 거 같은데.”
오러를 병기에 실을 수 있는 익스퍼트의 경지에 오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무리 에반의 경지가 저열하다고는 하나, 그 저열한 경지에라도 오르기 위해선 혈통, 혹은 뛰어난 스승의 인도가 필요하다.
느낄 수 없는 마력을 느끼고, 형체가 없는 오러를 내 몸처럼 다루기 위해선 그만한 재능과 수련이 요구되었으므로.
하지만.
“당연히 수련이죠.”
에반은 무슨 그런 것을 물어보냐는 표정을 지었다.
“수련?”
“매일 아침마다 영지민들에게 주어지는 표준검술교본을 보며 검을 휘둘렀습니다. 십 년 정도? 그러고 나니 검에 오러가 실렸습니다.”
“야.”
그 말을 듣자마자, 이안은 에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 밑으로 와라.”
“네?”
“보수는 적당히 챙겨줄 거고, 성내에 남는 방 하나 정돈 주지. 원한다면 검술 스승도.”
생각지도 못한 이안의 제안.
에반의 숨소리가 미미하게 떨려왔다.
“어째서, 그런 제안을 하시는 겁니까?”
“뭐?”
“혹시, 이걸 빌미삼아 제 누나를 노리시는 거라면…”
“뭐라는 거야, 정신 나갔냐?”
이안은 경멸에 찬 눈으로 에반을 노려봤다. 당황한 에반은 두 눈을 깜빡였다.
“그럼 왜…”
“네 자질.”
이안은 소년이 생각보다 더 가치 있는 존재란 것을 단번에 깨달았다.
신검의 피를 잇지 않은 자가 어린 나이에 독학으로 오러를 뿜어낼 수 있다는 사실은, 검에 문외한인 이안의 눈으로도 칠영웅의 피에 비견될 만큼 놀라운 재능이었으니까.
“그리고 눈빛.”
에반과 눈을 마주친 이안은 훈련소 시절을 떠올렸다.
‘어린 녀석이 눈빛은 꽤 쓸 만한데?’
‘사람 한 둘은 그냥 잡겠어.’
에반의 눈빛은 어릴 적 자신의 눈빛과 닮아있었다.
중요한 순간, 자신의 적을 찌를 비수가 될 만한 자질은 충분했다.
마치, 지구의 강민혁처럼.
그리고.
“네가 쳐먹은 포션값.”
이안은 아직 포션값을 받지 못했다.
“아…”
“생각 있으면 성에 내 이름만 대. 얘기는 해 놓을 테니까.”
말을 마친 이안은 고민에 빠진 에반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 때.
“공자님, 저는 뭐 없나요?”
“뭐?”
이안의 눈길이 마르콘의 신관, 세리아를 향했다.
“그러니까, 원래 약속하셨던 거나… 그 보석이라던가…”
“자.”
순간 당황한 세리아가 말을 더듬었지만, 곧 그녀는 얼떨결에 이안이 던진 작은 주머니를 낚아챘다.
“와, 우와, 와…”
주머니를 열자 뿜어져 나온 광채에 입을 다물지 못하는 그녀를 내버려둔 채, 이안은 그대로 몸을 돌려 어디론가 걸어갔다.
“공자님, 어디가십니까?”
에반의 물음에, 이안은 고개를 돌리곤 짧게 말했다.
“투기장.”
“네?”
이안의 말을 이해 못한 소년의 표정이 아리달송해졌다.
***
“무슨 일이냐.”
당일 아침.
다짜고짜 집무실에 쳐들어 온 이안을 흘긋 바라본 신검공, 에드너 폰 아슈타르는 책상 밑에서 모래시계를 꺼내들었다.
이안은 대답 대신 품에서 유리병 하나를 꺼내 에드너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역겨운 냄새구나.”
붉은 액체 속에 떠다니는 검은 무언가를 바라보던 에드너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단순히, 눈앞의 유리병에서 나는 혈향 때문은 아니었다.
“영지 전체에 역겨운 냄새가 진동하고 있어.”
그 말을 들은 이안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슈타르의 지배자가 어제의 일을 듣지 못했을 리 없지만, 집무실 의자에 앉아서 도출해낸 결과는 직접 현장을 목도한 이안의 것과 동일했으니까.
“그래, 무슨 일이냐? 대충 짐작은 간다만.”
에드너는 다 안다는 표정으로 이안을 바라봤다.
그렇다면 시간 끌 것 없겠지.
이안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안이 채 말을 꺼내기도 전.
“아, 아버지! 이 문제는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그러니 기회를… 넌?”
기별도 없이 집무실 문을 박차고 들어온 청록색 로브의 사내가, 이안을 보고는 순간 굳었다.
“네, 네가 왜 여기서 나와?”
당황한 표정으로 사내가 이안에게 삿대질했지만, 이안은 상대를 차분하게 바라봤다.
‘요제프 아슈타르.’
이안의 둘째 형이자, 혈사자 마탑의 지부장.
그리고.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사자는 말도 안하고 오는군.’
이안이 물어뜯을 다음 상대였다.
***
“네, 네가 왜 여기서 나와?”
집무실 안에서 이안을 발견한 요제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녀석이 여기 있으면 곤란한데.’
간밤에 발생한 사건에 대한 정보는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다.
특히, 저 싸가지 없는 동생이 알면 매우 곤란한 이야기였으니까.
“그러는 형님은, 왜 여기까지 나오신 겁니까?”
하지만 당연히, 이안은 집무실에서 한 발자국도 나갈 생각이 없었다.
요제프가 무슨 생각으로 여길 왔는지 뻔히 알고 있다면 더더욱.
“아버지께 드릴 중요한 말이 있다. 별 일 아니면 나가줬으면 좋겠는데.”
요제프는 불편한 표정으로 이안을 바라봤다.
혹여 그럴 일이야 없겠지만, 아버지께서 쓸데없는 소리라도 입 밖으로 내뱉었다간 그의 입장이 난처해질 수 있었으니까.
‘저 녀석을 일단 내보내야 해.’
그래야만, 그의 계획이 순탄하게 흘러갈 것이다.
하지만 이안은 어깨를 으쓱했다.
“아, 저도 마침 아버지께 드릴 말이 있어서요.”
이안은 공작의 눈을 살폈다.
지난 번 가족식사 때처럼, 아슈타르의 지배자는 둘을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자기가 진짜 사자라도 되는 줄 아는 건지, 원.’
마치 자식이 아니라 검투장의 노예를 보는 듯한 눈빛. 이안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하지만 저런 생물학적 아버지의 태도가 이안에겐 더할 나위 없는 도움이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아버지, 지난 밤 마탑의 지하연구실에서 있었던 사고에 대한 조사를 맡고 싶습니다.”
이 말을 꺼낼 기회조차 없었을테니까.
“뭐, 뭐라고? 네가 그걸 어떻게…”
이안의 말에 요제프의 동공이 확장됐다.
가문의 중심에서 진즉에 밀려난 녀석이, 어떻게 극비 중에서도 극비정보를 알고 있단 말인가.
‘하여간, 이 바닥엔 입 조심 하는 놈들이 없어.’
하지만 곧 요제프는 제 나름대로 납득했다.
도대체 어디서 주워 들었는 지는 모르겠지만, 그러지 않고서야 놈이 알아낼 방법은 없었으니까.
대강 판단을 끝낸 요제프가 이안을 향해 검지를 놀렸다.
“아니 그보다, 네가 무슨 자격으로 그 사건의 조사를 맡겠단 거지? 어디서 주워 들었는 지는 모르겠지만, 너는 여기서 빠지는 게 너를 위해서도 좋을 거다.”
세력도, 권세도, 명분도 없는 이안이 무슨 수로 이 거대한 사건을 조사한단 말인가.
그제야 조금 마음을 놓은 요제프는 거만한 표정으로 이안을 올려다봤다.
하지만.
“형님.”
최소한, 이안은 개중 한 가지를 가지고 있었다.
이안은 집무실 책상 한 구석을 가리켰다.
“저게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
뜬구름 잡는 소리에 이안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본 요제프는 말을 더듬었다.
“저게 왜, 여기에?”
선혈과 검은 재.
새벽에 현장을 목도한 그가 봤던 연못이 유리병 안에 담겨있었다.
하지만 이안은 대답 대신 에드너를 바라봤다.
“아버지, 최소한 제가 맡아야 할 명분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틀린 말은 아니군. 네 녀석이 아니었다면 그 악마 녀석에게 온 영지가 썩어문드러졌겠지.”
“그, 그게 무슨…설마?”
아버지와 동생의 대화를 이해하지 못하고 눈만 껌뻑이던 요제프의 머릿속에, 한 가지 스쳐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아슈타르의 사람이 감사라며 찾아왔답니다. 매우 강하다고도….’
휘하 마법사의 보고.
요제프는 당연히 그 대상이 형인 오베르트 일거라 생각했다. 애초에 형 말고는 자신을 막을 자가 없었으니까. 멍청한 동생 따위는 처음부터 안중에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대화대로라면….
위험하다.
“아, 아버지! 설마, 이안이 정말로 이 일을 맡아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저 녀석은….”
“방법은?”
하지만 에드너는 요제프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온전히 이안에게 집중되어있었다.
“마탑과 근위대, 그리고 기사단과 완전히 독립된 전력을 사용할 겁니다. 지금 상황으론 어디까지 썩어있는지 알 수 없으니까요.”
“나쁘지 않은 생각이야. 그런 전력이 네 손에 있다면 말이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전권을 부여하신다면 쉽게 해결될 일입니다.”
이안은 한 쪽 입꼬리를 비틀었다. 에드너의 눈썹이 기분 좋게 휘었다.
“좋아.”
고개를 끄덕인 에드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큰 거구의 중년은 벽에 걸린 검을 집어 들었다. 공작의 덩치에는 어울리지 않게 작은 검.
신검공은 손에 쥔 검을 이안에게 넘겼다.
“이건….”
양 손으로 검을 받아 든 이안의 숨이 잠시 멎었다.
수많은 룬어와 마법진으로 장식된 검신. 그 아래 금으로 장식된 칼날받이에 돋을새김된 포효하는 사자.
누가 보더라도 평범한 검이 아님을 대번에 알 수 있으리라.
‘신검, 레온하르트.’
페르소나가 만들어지기 전, 초대 아슈타르공이 사용했다는 특급 마법검.
그리고, 신검공의 권위를 상징하는 신물.
“아버지, 어째서 저런 녀석에게 그걸!”
요제프가 놀라 소리쳤다. 저 검은 단순히 좀 더 날카로운 검이 아니었으니까.
저건, 과장하면 쥔 순간 신검공이 될 수 있는 귀물이다.
그만큼 어마어마한 의미를 지닌 신검이 여태껏 돼지처럼 인생을 낭비하던 동생에게 쥐어지다니.
‘이건….’
요제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너무 쓰신 것 아닙니까?”
마치 제 몸이었던 것처럼 손아귀에 착 달라붙은 검을 훑어보며 이안이 말했다.
“일주일 주겠다.”
대답 대신, 에드너는 선언했다.
“일주일 동안 아슈타르의 모든 구성원은 레온하르트 아래 고개를 조아릴 것이다.”
말을 마친 에드너가 이안을 바라봤다.
에드너와 이안의 눈이 마주친 순간.
‘무슨….’
이안은 그 눈에서 광기를 느꼈다.
“과정에 대해선 신경 쓰지 않겠다. 어떤 방법을 쓰건, 누구와 작당을 하건 네 자유다. 하지만.”
무언가에 미친 듯이 몰두하는 자에게만 느낄 수 있는 광기가.
“내가 만족할만한 결과를 내놓아야 할 것이다.”
말을 마친 신검공이 입술을 비틀었다. 비틀어진 입술 사이 빈 공간에서 끈적한 아우라가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안은 씨익 웃었다.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손에 들린 신물.
신검 레온하르트를 쥔 채로.
***
집무실을 벗어난 이안은 곧장 호위기사인 도노반을 찾아갔다.
“공자님, 이건…?”
이안의 등 뒤에 맨 신검을 알아본 도노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검을 뽑아 든 이안은 씨익 웃으며 손가락으로 칼날받이의 사자문양을 가리켰다.
“아, 소개할게. 공작 자유이용권이야.”
이안이 천연덕스럽게 공작모독죄를 저지르자 도노반의 얼굴이 머리칼처럼 하얗게 질렸다.
“고, 공자님. 제발 그런 말씀은 작게 하십시오. 혹시 누군가 엿듣기라도 하면…”
“뭐, 어때? 듣는다고 딱히 달라질 건 없잖아. 설마 나한테 와서 욕이라도 하려고?”
하지만 이안은 당당했다.
최소한, 이 검을 쥐고 있는 일주일 동안은 그가 신검공과 동일한 권한과 권위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것보다, 경이 해주어야 할 게 하나 있어.”
“말씀만 하십시오, 공자님. 명령만 내리신다면 목숨이라도…”
“아니,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고.”
이안은 대강 스케치한 몽타주 하나를 호위기사에게 넘겼다. 종이 안의 얼굴을 확인한 도노반은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공자님, 이 자는 누구입니까? 보아하니 제법 어려 보이는데….”
“경의 후임자. 앞으로 자주 보게 될 걸?”
이안이 장난스런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