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혀, 혈마법…”
마족의 일파, 혈마족 뱀파이어들이 사용하는 피의 마법.
알테어 프리마가 이미 악마를 넘어 마족으로 진화해간다는 증거.
그것을 깨달은 세리아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하지만 이안은 동요하지 않았다.
“세리아.”
이안의 무미건조한 한마디에 그녀는 정신을 차렸다.
이안이 신성부여를 원한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는 다시금 기도하기 시작했다.
“빛의 신 마르콘이여…”
[그렇겐 안 됩니다.]
알테어의 손짓과 함께, 수십의 피의 촉수가 뭉쳐들었다.
통나무만한 굵기의 촉수가 마치 성문을 부수는 충차처럼 세리아의 복부를 강타했다.
“끄, 끄헉…”
생전 처음 당해보는 고통.
신관은 눈이 허옇게 뒤집어진 채 쓰러졌다. 이안의 표정이 굳어졌다.
‘신성력은 불가. 페르소나를 개방하기엔 아직 마력이 부족해. 그렇다하더라도 그건 아직 위험한데…’
세리아가 쓰러진 순간, 이안의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가용한 수단, 적의 전력, 그리고 그것을 조합한 작전.
하지만 이안이 미처 생각을 다 끝내기도 전.
“흐아압!”
에반이 검을 든 채 혈인에게 돌진했다.
소년의 검에서 불꽃처럼 피어오르는 것은 오러 유저의 상징이자 전부인 오러.
신성력과 융합된 것만은 못할지언정, 마력이 정제된 오러 역시 마족을 제거하는 데에는 뛰어난 효과를 발휘했으니까.
수많은 촉수가 에반을 향해 짓쳐들었지만, 소년은 검을 가로로 휘둘렀다.
일섬(一閃)
초대 신검공이 창안한 아슈타르 표준검법의 제 일초식.
십 년을 검과 함께 살아온 소년의 검에서 한 줄기 섬광이 허공을 갈랐다.
제식 검법이니 위력이 강하다 할 순 없었지만, 영웅이 만들어낸 검식의 위력은 수십의 촉수들을 베어내기엔 충분했다. 두 동강난 촉수들은 바닥에 닿자마자 핏물로 화했다.
그럼에도.
에반의 표정은 굳어있었다.
[그 정도로 저를 막을 순 없을 겁니다.]
숨 한 번 돌릴 사이, 피로 이루어진 촉수들은 본래의 형태를 갖추었다.
[적은 희생으로, 더 많은 희생을 막는 대업을 막지 마십시오!]
고함과 함께 수십의 촉수가 날아든다.
에반의 오러가 촉수들을 갈라버렸지만, 다시금 재생된 촉수의 파도가 이안과 에반을 덮쳐왔다.
하지만.
“과부하.”
모든 계산을 마친 이안은 주저 없이 명령어를 외쳤다.
기이잉
기계음과 함께 권총의 슬라이드가 위로 들리며 총열을 드러낸다. 수일간의 충전을 통해 가득 찬 마력이 총열을 확장시킨다.
‘기회는 단 한 번.’
이안은 총을 휘감은 거대한 마력을 제어하기 시작했다.
곧, 언밸런스하게 확장된 총열 안에 마력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탄환이 자리를 잡았다.
‘.700 Nitro Express.’
달려드는 코끼리도 일격에 즉사시킬 수 있는, 충격력에 관해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탄환.
거대한 육상동물을 잡기 위해 고안된 엘리펀트 건(Elephant Gun)에나 장착될 괴물이, 고작해야 손바닥보다 조금 큰 권총의 확장된 총열에 억지로 끼워졌다.
이안은 녀석을 붉은 악마에게 겨누었다.
[아직도 깨닫지 못하셨습니까? 그런 공격은 제게 아무런 소용도 없습니다!]
이안의 페르소나를 보고선, 피로 만들어진 괴물이 괴소를 흘리기 시작했다.
전 고위마법사, 현 악마의 눈에 상대의 마력은 수준 이하.
고작 그 정도의 마력으로, 액체로 이루어져 어지간한 공격은 모두 흡수할 수 있는 자신을 어찌할 수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누구나 말은 그렇게 하지.”
악마의 말에 코웃음을 친 이안은.
“쳐맞기 전에는.”
방아쇠를 힘주어 당겼다.
투캉-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
미미르의 총구에서 화염과 동시에 괴물이 음속의 두 배로 쏘아져나갔다.
눈 한번 깜빡이기도 전, 녀석은 악마의 붉은 몸뚱이에 내리꽂혔다.
콰앙-
육체를 이루던 핏덩이와 촉수들이 충격에 산산조각난다.
20,000J의 운동에너지.
수 톤의 몸뚱이를 끌고 달려드는 코끼리도 일격에 멈춰 세울 수 있는 상식 밖의 병기 앞에서.
[내… 내… 몸이…]
고작해야 핏덩이로 이루어진 가짜 마족 따위가 버텨낼 재간은 없었다.
핏덩이들을 걷어낸 다음 보인 것은 불길한 기운을 내뿜는 보랏빛 보석.
“꼬마!”
이안의 외침에 에반은 곧장 검을 휘둘렀다.
목표는, 놈의 몸뚱이 중앙에 박혀있었던 보랏빛 돌.
마석.
서걱
에반의 검날을 따라 타오르는 오러가 그대로 마기의 정수를 갈라버렸다.
끼에에에에-
끔찍한 비명소리와 함께 반으로 쪼개진 마석이 오러를 견디지 못하고 불타올랐다.
[내 꿈, 내 꿈이…]
마석에 남은 사념이 둘의 귀를 찔러댔지만, 그것도 잠시.
곧 검은 잿가루가 피의 연못 위로 후두둑 떨어졌다.
“허억, 허억.”
일격에 마석을 베어버린 에반은 한달음에 뒤로 물러났다. 숨을 헐떡이는 소년의 몸은 다른 자들의 피와 땀으로 얼룩져있었다.
“끝인가?”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마석을 파괴당한 마족은 영혼까지 소멸해버리니까요.”
에반의 말을 듣고서야, 이안은 약간의 긴장을 놓을 수 있었다.
“아아, 죽겠네, 젠장.”
양팔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이안이 눈썹을 찡그렸다.
아무리 마력으로 구현된 총탄인들, 그 반동은 진짜였으니까.
체내의 마력으로 신체를 강화했다지만, 온 몸으로 받아내도 모자랄까 말까한 탄환의 반동을 고작 두 팔로 받아냈으니, 양 팔의 인대가 늘어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리라.
이안은 아직 오른손에 쥐어진 권총, 미미르를 바라봤다.
슈우우
미미르의 상태는 영 좋지 않았다. 제 몸을 드러낸 총열에선 뜨거운 김이 쉬지 않고 뿜어져 나왔고, 젖혀진 슬라이드 사이로 보이는 노리쇠에선 그 힘을 다한 듯 마력의 푸른빛이 깜빡였다.
이안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유증은 어쩔 수 없군.’
과부하.
페르소나를 제작할 당시, 페르소나의 진체(眞體)를 개방할 최소한의 마력도 없던 이안이 고심 끝에 생각해낸 방법이다.
‘홀스터에 새긴 마력흡입진을 이용해 충전한 마력을 개방해서, 페르소나의 구현능력을 발동시킨다.’
그로써 만들어진 것은, 단 일격이지만 마기를 다루는 악마조차 격살할 수 있는 필살의 병기.
하지만 한 번 사용하려면 온 몸의 마력을 전부 짜내어도 모자랐으니, 정말로 위급한 상황이 아니면 사용하기엔 애로사항이 많았다.
‘이 꼴 안 보려면, 마력이나 열심히 모아야지 뭐.’
마력이 임계치를 넘어선다면, 이런 편법을 쓰지 않더라도 미미르의 힘을 온전히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지만, 몸뚱이를 부숴가며 단련한 이안에게 노력이란 일상생활의 일부일 뿐이었다.
그 때.
“쿨럭, 쿨럭!”
정신을 차렸는지, 쓰러져있던 세리아가 피 섞인 기침을 내뱉기 시작했다.
“꼬마, 내 오른쪽 안주머니에 유리병이 있을 거야. 그걸 먹여. 나도 한 병 주고”
팔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이안이 턱짓으로 코트 아래를 가리켰다.
잠시 바닥에 앉아 숨을 고르던 에반은 이안의 품에서 포션 두 병을 꺼내 부었다. 하나는 이안의 팔에, 하나는 세리아의 입에.
포션을 붓자 끊어질 것 같던 팔뚝의 고통이 점차 사라진다. 일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이안의 팔은 정상으로 돌아왔다.
“후우, 후우.”
어느새 정신을 차렸는지, 세리아가 푸르죽죽한 얼굴로 가쁜 숨을 내뱉고 있었다.
“괜찮아?”
이안은 쓰러진 세리아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지금, 악마한테 죽을 뻔 했는데 그런 말이 나와요? 내가 돈만 주면…”
세리아가 성을 내기 시작했다. 하마터면 서른의 고아들을 내버려두고 죽을 뻔 했으니, 그녀의 분노는 나름 정당했다.
이안이 주머니에서 금화 한 움큼을 꺼내 보여주기 전까진.
“…어디든 갈 수 있죠! 암요!”
“당신, 신관 맞지?”
이안의 손아귀에서 새어나오는 황금빛에 세리아의 눈이 뒤집어졌다. 자본주의가 판치는 지구에서나 볼법한 사람이, 왜 이런 곳에 있는 건지.
하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다.
“일단 증거가 될 만 한 건 뭐든 챙기자고. 뭘 숨길지 모르니까.”
다시 자리에서 일어난 이안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가장 좋은 증거는 잿가루가 되어버린 마석의 파편.
원래 형태를 찾을 수 없다 한들, 마석이 가지고 있던 물성과 정보는 어느 정도 남아있을 것이다.
‘피 웅덩이 속에서 퍼가야 한단 걸 빼면 말야.’
이안은 다 쓴 포션병을 들고 피의 연못에 다가갔다. 검은 잿가루들이 핏물 위에서 이리저리 떠다녔다.
이안이 원하는 건 개중 하나뿐. 그는 허리를 숙이곤 포션병을 연못에 갖다대려했다.
그 때.
“웬 놈들이냐!”
이안은 곧장 몸을 뒤로 돌렸다.
이미 검을 뽑아 든 에반, 그리고 그 뒤에서 얼굴이 하얗게 질린 세리아.
그 너머, 수십의 용병들이 시퍼렇게 날이 선 칼을 뽑아들고 있었다.
하지만 이안은 조금도 긴장하지 않았다.
“그러는 너희는 웬 놈들이냐?”
턱을 위로 거만하게 치켜든 이안은 팔짱을 낀 채 맨 앞의 대장처럼 보이는 녀석을 쳐다봤다. 대장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불법 침입자 주제에 뻔뻔하구나. 모두 무기 버려! 어디 고문실에서도 그런 말을 할 수 있나 보자.”
대장의 손짓과 함께, 일행을 포위한 용병들이 한 걸음씩 다가왔다.
에반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탈출할 방법이 있나?’
아무리 오러익스퍼트라 한들, 한 줄기의 마력도 없이, 훈련된 수십의 검사를 상대할 수는 없으니까.
“공자님, 혹시 페르소나를 사용할 수 있으십니까?”
“아니.”
“큰일이군요.”
이안의 답에 에반이 검을 쥔 오른손에 힘을 꽉 쥐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끌려가면 곱게 죽지는 못할 것 같았으므로.
‘돌아갈 거라고 약속했어.’
다가오는 병사들을 보며 에반은 각오를 다졌다.
돌아가, 누나를 만날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아냐.”
이안은 고개를 한 차례 저은 다음 앞으로 나섰다. 용병대장은 코웃음을 쳤다.
“뭐지? 무릎이라도 꿇을 생각이냐? 그런다고 봐줄 거라고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다. 벌써 기분이 더러워졌거든.”
용병대장이 비열한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이안은 동요하지 않았다.
사실 이안도 상대의 공세에 딱히 대항할 방법은 없었다.
페르소나는 당분간 사용할 수 없는데다, 마력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이안이 가진 무기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구슬?’
뜬금없이 이안의 품에서 나온 주먹만 한 구슬에, 용병대장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곧 돌처럼 굳어버렸다.
“백작, 여기 반역을 도모하는 놈들이 있다.”
순간, 다가오던 용병들이 걸음을 멈췄다.
반역.
그 말이 가진 의미는, 자신의 삼족을 형장의 이슬로 보낼 만큼 무거웠으니까.
“바, 반역이라고? 이제 궁지에 몰리니 별 수를 다 쓰는구나! 뭣들 해? 빨리 체포하지…”
무언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용병대장은 서둘러 용병들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예감이 영 좋지 않았다.
펄럭
하지만 이안이 코트자락을 펼치는 순간.
그들은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사, 사자?”
이 땅의 지배자, 아슈타르 공작가의 문장이 이안의 가슴에 박혀있었으니까.
“아슈타르의 사람을 해치는 것은 반역에 해당되니 반역 모의 및 미수, 공무집행 방해, 불법 생체실험…또 뭐 있나?”
이안이 손가락을 하나씩 꼽을 때 마다, 용병들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그들이 이안을 건드린 순간, 그리고 이안이 외부와의 통신수단을 갖춘 순간.
“그러니까 꿇어.”
이미 결과는 정해져있었다.
“곱게 죽고 싶으면.”
손에 수정 구슬을 든 이안이 입꼬리를 뒤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