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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 막내는 원샷원킬-17화 (18/224)

#17화

“아, 그렇군요.”

이안의 말에 에반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수단이니 뭐니, 귀족들이 으레 하는 허풍이나 허세처럼 들린 탓이다.

“자, 아직 끝난 게 아니잖아? 제대로 된 증거를 잡으려면 들어가야지.”

냄새가 났다.

어디까지 연결되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코가 마비되어버릴 만큼 지독한 냄새가.

“저는 여기까지만 가도 될 거 같은데요…”

이안의 말에 세리아가 난색을 표했다.

“오팔, 사파이어.”

“지옥 끝까지 따라가겠습니다.”

하지만 보석 앞에서는 순한 양일 뿐.

일행은 통로를 지나 더욱 안으로 들어섰다.

“여기, 연구소 맞아? 생긴 건 완전히 동굴인데. 던전인가?”

“자연의 마력을 끌어오기 위해 일부러 크게 손을 대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요.”

이안의 말에 에반이 어깨를 으쓱했다.

철창과 벽돌은 어느새 사라지고, 갈색 흙으로 이루어진 동굴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싸늘한데.’

지하로 내려가고 있기 때문일까.

어디선가 올라오는 음기에 이안은 눈살을 찌푸렸다.

단순히 추울 때 느껴지는 한기가 아니라, 차가우면서도 음습하고 끈적이는 기운이었다.

“으, 왜 이렇게 춥죠? 어지러운 것 같기도 하고…”

이안만 느끼는 것이 아닌 듯, 옆에서 따라오던 세리아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마치 마기처럼…’

그 때.

“온다. 준비해.”

이안은 곧장 권총을 뽑아들었다. 에반은 허리춤의 검을 쥐었고, 세리아는 두 손을 맞잡았다.

곧 적이, 아니 적들이 눈앞에 나타났다.

딱딱딱-

“하, 이제 더 걸릴 것도 없단 건가?”

상대를 확인한 이안은 어처구니가 없어 피식 웃었다.

순리를 거스른 역천(逆天)의 존재들.

마기에 의해 다시 생명을 부여받아, 생명을 갈구하는 거짓 생명들.

언데드.

수많은 해골과 시신들의 파도 앞에서.

이안은 또 다시 유리병 하나를 꺼내들었다.

총은 개인병기의 정점에 달한 무기다.

금속을 빠르게 쏘아낼 뿐인 무기지만, 하루만 교육받는다면 어린 소녀도 일격에 수십 년 단련한 기사를 죽일 수 있는 필살의 병기.

하지만 이안이 가진 권총은 마력을 소모한다.

고작해야 500, 아니 총탄을 쏘아댔으니 그보다 적은 마력으로 물경 백에 육박하는 불사자들을 막아낸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

‘그러면, 다른 방법을 써야겠지.’

이안은 왼손에 쥔 유리병에 마력을 흘러 넣었다.

마력과 감응한 유리병 내의 액체가 붉게 달아오른다.

아슈타르 최고의 부여술사가 만들어낸 화염물약.

이안은 그대로 유리병을 파도 속에 던져 넣었다.

콰아아

죽음의 파도 사이로 붉은 홍염이 범람한다.

모든 마기를 닿자마자 태워버리는 성화(聖火)에는 못 미칠지라도, 그에 버금가는 겁화가 살과 뼈를 녹이고 끊어버린다.

물밀 듯이 들어오는 언데드들의 기세를 무너뜨리기엔 충분한 수준이었다.

채 물약이 터지기도 전, 이안은 세리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세리아!”

“빛의 신 마르콘이여, 당신의 종이 간청하옵나이다. 적을 마주한 양들에게 온갖 삿된 것을 태워버릴 빛을…”

이안의 말을 알아들은 그녀가 신을 부르짖었다.

파앗

곧, 이안과 에반의 병장에 파마(破魔)의 힘이 깃들었다.

그 와중에도 언데드들은 천천히 불길을 뚫고 일행을 향해 다가왔다.

화염을 뒤집어 쓴 채 살과 뼈가 녹아들었지만,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언데드들에겐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러니.

“가자.”

“네.”

거짓 숨통을 끊는 것은 둘의 몫이었다.

서걱

적들을 향해 뛰어든 에반의 검이 광휘와 함께 시체를 갈랐다. 아무 저항도 없이 갈라진 시체들이 바닥을 뒹군다.

하지만 일검에 모든 적을 베어낼 수는 없다. 미처 베지 못한 해골과 시체들이 에반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딱딱딱-

뒤로 돌아선 스켈레톤이 백골검을 치켜든 순간.

타타타탕

미미르가 불을 뿜었다.

파사삭

이안의 방아쇠가 쉬지 않고 움직였다.

채 칼을 휘두르기도 전, 수 발의 탄환에 격중 당한 스켈레톤이 한 줌의 재가 되어 사라졌다.

서걱

타타탕

에반의 검격, 그리고 그 사이로 날아드는 납탄 앞에서, 스켈레톤과 좀비들이 짚단처럼 쓰러졌다.

아무리 언데드가 마기에 의해 만들어지는 존재라 한들, 마기를 공급해 줄 마족이 없다면 제 힘 중 하나인 부활의 권능을 쓰지 못한다.

상대가 성스러운 힘을 자유자재로 휘두르는 자들이라면 더더욱.

휘두르고, 베고, 쏘고, 다시 베고. 타오르고.

빠각

푸스스스

이안과 에반, 그리고 세리아의 합격 속에.

불사의 대군이라 불리던 언데드들은 하나 둘 자연의 순리대로 되돌아갔다.

“돌아가면 신발을 바꿔야겠어.”

발목까지 쌓인 언데드들의 잿더미를 밟으며 이안이 이죽거렸다. 간간이 자갈처럼 밟히는 납탄들이 걸리적거렸다.

“불안하군요.”

하지만 에반, 마법사의 호위 기사였던 소년은 이안처럼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무슨 소리지?”

“언데드를 만들어낼 수야 있겠지만, 너무 많지 않습니까.”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해 봐.”

소년의 말에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이안은 입술을 앙 다문 에반을 재촉했다. 에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조금 더 빨리 이동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생각한 게 맞다면…”

“맞다면?”

“이미 늦었을지도 모릅니다.”

에반의 답에 이안과 세리아의 얼굴이 굳었다.

***

“여깁니다.”

동굴을 얼마나 더 파고들어갔을까.

에반은 동굴의 끝에 세워진 쪽문을 가리켰다.

“여기부터는 저도 들어가 본 적이 없습니다. 접근권한을 가진 마법사들 말고는 아무도 출입할 수 없는 곳이었죠. 저도 소문으로만 알고 있는 곳입니다.”

“여기가 진짜란 얘기군.”

이안은 홀스터에 들어간 미미르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대기에서 빨아낸 마력을 주입받은 미미르가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기분이 좋지 않아요. 마치, 신께서 노하신 것 같은 느낌이…”

세리아의 표정은 체하기라도 한 듯 좋지 않았다. 에반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문이 맞다면, 그럴만한 곳이죠.”

“소문?”

이안의 물음에 에반은 대답 대신 쪽문을 당겨 열었다.

“피, 피 냄새가…”

반사적으로 코를 막은 세리아의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녀의 눈은 눈앞의 참상에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래, 이 정돈 별것도 아니지.”

마수실험에 언데드까지 봤는데, 고작 이 정도야.

이안은 무표정한 얼굴로 눈앞에 펼쳐진 지옥도를 바라봤다.

피의 웅덩이.

비유나 과장이 아닌, 문자 그대로 피로 만들어진 연못이 실험실 중앙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시체는 없군. 아까 그 언데드들인가?”

“제 예상이 맞다면, 그럴 겁니다.”

“그럼 이 피는 뭐야? 무슨 집단처형, 그런 건가?”

아니, 그렇다기에도 너무 이상했다.

선혈이 고인 곳은 눈으로만 봐도 다른 곳보다 더 아래로 깊이 파여 있었다. 무언가를 위해 일부러 만들어냈다는 의미.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이 자리의 누구도 연못의 용도를 알 수 없었다.

“혈기입니다.”

연못 너머, 누군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누구냐.”

철컥

이안이 붉은 로브를 걸친 사내를 향해 미미르를 겨누었다.

“사실 마기가 마족 고유의 기운이라고 보는 것이 정설이긴 합니다. 실제로 마족이나 마족화가 진행되는 악마를 제외하면, 마기에 의해 변질된 마수에게도 검출되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적발의 마법사는 이안의 물음에 답하는 대신 자기 할 말만을 계속했다.

“그래서 저는 생각했습니다. 마기를 인공적으로 만들어 낼 방법은 없을까?”

“미친놈.”

그 말에, 이안은 한 마디로 상대의 정신 상태를 표현했다.

마기는 제 기운에 닿는 모든 것을 침식시키는 바이러스와 같다. 물질계의 존재들에게는 말 그대로 재앙과 같은 존재.

마법사는, 제 손으로 재앙을 만들어냈다 떠들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안의 욕지거리에 사내는 히죽 웃고선 계속 입을 놀렸다.

“그러던 중, 마경을 떠돌던 저는 마족의 여러 개체 중 뱀파이어의 권능에 주목했습니다.”

“더 다가오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천천히, 사내가 피 웅덩이를 향해 다가왔다. 이안이 권총으로 위협했지만 사내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뱀파이어의 권능은 아시다시피 흡혈. 그들이 빨아들인 피는 자신의 마기로 전환되지요. 저는 그 놀라운 권능의 매커니즘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말을 이어나가면서, 마법사는 서서히 한 걸음씩 다가왔다. 피의 연못까지는 앞으로 한 걸음.

‘불길해.’

뱀파이어, 피, 마기.

놈이 제 명을 재촉하는 줄도 모르고 쏟아내는 단어들.

이안은 그의 촉을 믿었다.

타타탕

미미르가 수차례 불을 뿜었다. 놈이 입은 붉은 로브의 가슴팍에 바람구멍이 뚫렸다.

풍덩.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제 이야기를 신나게 떠들던 마법사는 몸조차 가누지 못하고 피 웅덩이 속에 잠겨버렸다.

이안은 슬쩍 에반을 향해 눈짓했다.

“저 녀석, 알테어인가 뭔가 하는 놈이 맞지?”

“네, 맞습니다만…”

“니다만?”

“이렇게 쉽게 당할 사람이 아닙니다. 아무리 그래도 5급 마법을 다룰 수 있는 중급 마법사니까요. 분명…”

에반은 의뭉스런 표정을 지었다.

5급 마법을 다룰 수 있는 마법사는 자신이 의식하지 않아도 마법을 펼칠 수 있다.

아무리 이안의 페르소나가 강력하다지만, 5급에 다다른 강력한 마법사를 단숨에 격살시킬 수는 없다.

판단을 내린 에반은 늘어뜨린 검을 다시 치켜 올렸다.

[그리고.]

그 판단은 옳았다.

앞에서, 정확히는 피의 연못 안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이안이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저는 결국 실험에 성공했습니다.]

혈인(血人).

온 몸이 피로 이루어진 인간이 핏물 속에서 부글거리며 솟아났다.

혈인의 몸 이곳저곳에서 촉수가 돋아났다. 이마에서 세 번째 눈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리는 이미 피와 함께 하나로 뭉쳐졌다.

[생명체가 가진 피를 마기로 변환하는 실험을…!]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하지만 그 기저에 자리 잡은 광기를 읽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당신, 정말 미쳤군요. 아슈타르를 수호하는 마탑에 적을 두고선, 어떻게 그런 짓을… 신이 두렵지도 않나요?”

세리아의 표정은 굳어있었다.

알테어 프리마가 저지른 짓은 명백한 역천(逆天).

죽어 그의 영혼은 연옥으로 갈 것이며, 살아서는 성화에 불타오를 운명이 예비 되어 있었다.

하지만.

[신, 신, 신! 신이 이 대륙을 지켜줄 것 같습니까?]

“뭐, 뭐라고요? 당신…”

그 말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는지 세리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지만, 알테어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이미 800년 동안 신들의 의지는 무뎌지고 꺾인 지 오랩니다. 그들에게선 이미 대륙을 수호하고자 하는 의지 따윈 찾아볼 수 없죠.]

말을 마친 혈인, 알테어가 피로 만들어진 주먹을 쥐었다.

촤아악

그러자, 피의 웅덩이에서 수많은 촉수들이 꿈틀대며 솟아났다.

[신조차 버린 이 땅을 지키기 위해선, 마족의 힘이라도 이용할 수밖에요.]

마치 심장이 고동치듯 리듬에 맞추어 흔들리는 촉수들 사이로, 알테어가 광기어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지랄한다.”

이안은 욕설과 함께 방아쇠를 당겼다.

타타타타-

숨 한 번 들이킬 동안, 마력으로 만들어진 열다섯의 초음속 총탄이 굉음과 함께 혈인의 몸을 관통했다.

“듣자 듣자하니 개소리가 따로 없네. 결국 짝퉁마족인 주제에 인간인 척은.”

탄창을 재장전한 이안은 바닥에 침을 퉤-뱉었다.

이안은 전생에서 저런 자들을 자주 만났다.

자신만의 아집에 둘러싸여 세계를 부정하는 정신병자들.

그의 주 임무가, 그런 정신병자들의 머리에 바람구멍을 내주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투투투툭

[당신은 절 막을 수 없습니다. 제 꿈도, 제 미래도요.]

순식간에 재생한 혈인의 몸에서 찌그러진 납탄들이 튀어나왔다.

이안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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