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저, 저거면 도대체 얼마야…’
이안이 주머니에서 새까만 오팔 하나를 더 꺼내자, 세리아의 머릿속은 온통 보석의 반짝임으로 가득 찼다.
두 보석을 내다 판다면, 못해도 일 년은 아이들에게 매일 고기를 먹일 수 있을테니까.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뭐, 싫다면 할 수 없긴 한데…”
덥썩
이안이 능청스럽게 보석을 주머니에 도로 집어넣으려던 순간.
그녀가 주머니로 들어가려던 손을 꼭 붙잡았다.
“할게요. 마족을 잡으라고 해도 할게요.”
“아… 그래? 그거 잘 됐네.”
아마, 그녀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한 것인지 깨닫지 못했으리라.
반쯤 뒤집어진 눈으로 이안의 손을 붙잡은 세리아의 확답을 들은 이안이 활짝 미소를 지었다.
***
이안 아슈타르.
아슈타르 공작가의 3공자보다는, 아슈타르의 망나니로 더 유명한 사내.
‘처음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야.’
처음, 이안 공자의 훈련을 도와야 한다고 했을 때, 그녀의 머릿속은 온갖 끔찍한 상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만큼 이안 공자의 평판은 밑바닥 중에서도 밑바닥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안은 그녀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사람을 짜낼 수 있는 한계까지 부려먹고, 매사에 냉정하긴 하지만…’
소문처럼 아무 여자나 겁탈해대는 쓰레기는 아니었으니까.
‘아니, 오히려 정 반대지.’
대부분의 일과는 수련뿐. 마약은커녕 술조차 마시지 않는 금욕적인 삶.
거기에, 홀로 고아원을 운영하던 그녀에게 재정적인 도움까지.
좀 부풀려서 말하면, 미래의 신검공이 될 자질을 갖췄다 말해도 되리라.
‘아무리 소문이 진실을 담지 못한다지만…’
이 정도면 선동과 날조의 수준이다.
라고 생각했다.
‘왜, 왜 내가 여기 있는 거야!’
보석을 빌미로 이안에게 끌려 나오기 전까지는.
“마, 말도 안 돼! 어째서 제가 이런 일을, 읍.”
달조차 고개를 돌린 그믐밤.
이안은 제 멋대로 흥분해 떠드는 세리아의 입을 틀어막곤 노려봤다.
“읍, 읍읍.”
“조용.”
이안은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리며, 주머니에서 사파이어와 오팔을 꺼내보였다. 그제야 날뛰던 세리아가 잠잠해졌다.
“이쪽입니다.”
앞에서 길을 뚫던 에반이 작게 속삭였다.
본래 마탑의 비밀연구소에서 근무하던 자였으니, 길잡이 역할로는 제격이었다.
그들은 천천히, 하지만 꾸준히 목표를 향해 다가갔다. 그믐날의 칠흑 같은 어둠은 세 사람을 어둠에 녹아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곧, 그들은 연구소에 도착했다.
“경비가 늘었군요.”
근처 건물 뒤에서 상태를 확인한 에반의 얼굴이 굳었다.
높은 담장과 철로 만들어진 문 사이로, 중무장을 한 경비들이 돌아다니며 감시하고 있었다.
“경비를 늘린 모양이군요. 몰래 들어가는 건 어려워 보입니다. 다음 기회에…”
하지만 이안은 코웃음 쳤다.
“이 정돈 예상했어야지. 다른 건 몰라도 뒤가 구린 놈인 건 확실한데?”
그렇지 않다면 갑자기 경비가 증원될 리 없다. 이안의 촉이 얼추 맞아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렇다면.
‘혼자 하는 건 아니겠지.’
최소 마탑. 아니면 기사단까지도 연결되어있을 것이다.
에반도 그 사실을 눈치 챘을 테니, 파헤치기보다는 도망치는 것을 택했으리라.
“하지만, 저 많은 병력을 뚫고 몰래 들어갈 방법은…”
삼엄한 경계 속에 싸여진 연구소를 본 에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이안은 태평했다.
“몰래? 무슨 소리야,”
“네? 그럼, 정면으로 가시겠단 말씀입니까? 아무리 공자님이라도 저 많은 병력을 뚫을 순 없습니다.”
에반의 눈이 놀라 커졌지만, 이안은 대답 대신 검은 코트 안주머니에서 동그란 유리병 하나를 꺼냈다.
홀스터를 만들 때, 보석 값 대신 부여술사 카르밀에게서 받아낸 물건 중 하나.
이안은 유리병을 쥔 손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유리병 안에 들어있던 투명한 액체가 벌겋게 끓어올랐다.
곧, 이안은 유리병을 힘껏 던졌다.
화르르르르륵
“부, 불이야!”
“젠장, 갑자기 무슨 일이야?”
“일단 빨리 꺼! 이러다가 보수도 못 받으면 큰일이야!”
유리병에서 터져 나온 화염이 담장을 훌쩍 넘어 솟구쳤다. 경비병들이 급히 불을 끄려했지만, 마력의 힘으로도 맹렬히 타오르는 화염은 쉽게 꺼지지 않았다.
덕택에 연구소를 지키던 용병들 대부분이 화재진압을 위해 안으로 사라졌다.
“자, 이제 당당히 들어가자고.”
“공자님은 정말, 상식을 벗어나는 분이시네요. 상식이 있긴 한 거죠?”
이안이 어깨를 으쓱이자 세리아가 욕인지 칭찬인지 모를 말을 내뱉었다.
“우선은 출발하시죠. 공자님 말씀대로, 지금이 기회인 건 맞는 것 같습니다.”
에반은 재빨리 연구소 옆에 숨겨져 있는 비상통로로 일행을 안내했다.
경비가 상대적으로 덜할뿐더러, 비상통로는 내부와 곧장 이어져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런, 이곳에도 경비가…”
에반은 침음성을 흘렸다.
이미 통로는 두 명의 경비병이 지키고 있었다.
“내가 처리할게.”
이안은 앞으로 나섰다. 곧, 이안을 발견한 경비병들이 시퍼런 검을 뽑아들었다.
“여긴 접근통제구역이다. 좋은 말 할 때 돌아가는 게 좋을 거야.”
이안을 향해 검을 들이댄 경비병들이 으르렁댔다. 하지만 이안은 아무렇지 않게 다가갔다.
“야, 내가 누군지 모른다고?”
이안은 검은 코트자락을 옆으로 젖혔다.
안에 입고 있던 정복에 새겨진 것은, 아슈타르의 성을 가진 자들만 사용할 수 있는 사자의 문장.
“아, 아슈타르…”
문장이 의미하는 바를 알고 있는 경비병들이 순간 주춤했다.
“이안 아슈타르다. 연구소 감사차 나왔으니 당장 칼 치우고 길이나 안내해.”
이안은 고압적인 태도로 경비병들을 노려봤다.
그 와중에도, 그의 발은 조금씩 통로를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죄송합니다. 누구도 들이지 말라는 소장님의 명이 있으셨습니다.”
다시금 표정을 굳힌 경비병들이 칼을 들이밀었다. 조금 주저하고는 있었지만, 여차하면 아슈타르에 셋밖에 없는 공자라도 베어버릴 기세였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어, 어?”
“모, 몸이…”
이미 경비병들의 코앞에 도달한 이안의 주먹이 놈들의 턱을 슬쩍 터치하자, 뇌가 진탕되는 충격에 경비병들이 몸뚱이를 가누지 못하고 휘청였다.
이안에겐 딱 좋은 먹잇감.
손을 두어 번 휘젓자 경비 둘은 그대로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다.
“자, 안내해.”
“그, 그렇게 막 때려도 되는 거예요?”
“정당방위야.”
세리아와 이안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에반은 흰색 벽돌 벽에 다가가 손을 꿈지럭댔다.
곧.
“들어가시죠.”
굉음과 함께 열린 통로 앞에서 에반이 손짓했다. 일행은 어두운 통로로 들어갔다.
벽면을 만져본 이안의 손에 미끄덩한 물기가 묻어나왔다.
“습하군. 지하로 내려가는 모양이지?”
“위쪽에 세워진 건물은 위장에 가깝습니다. 실질적인 연구는 지하 연구동에서 이루어지죠.”
이안의 물음에 에반이 긴장한 목소리로 답했다.
한 걸음씩 걸을 때마다, 그가 목도한 공포에 가까워지고 있었으니까.
일행은 끝없이 아래로 내려갔다. 몇 번의 갈림길이 있었지만, 에반은 막힘없이 길을 찾아 내려갔다.
그리곤 곧 어떤 문 앞에 도달했다.
“기분이 더러운데.”
열린지 꽤나 시간이 지난 듯, 먼지투성이의 문 앞에 선 이안의 촉에 끈적끈적하고 소름 돋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경험상, 이런 느낌이 오고나면 그 끝이 좋지 않았다. 이안의 손이 저절로 홀스터를 향했다.
“안을 보고나면 더 더러워질 겁니다.”
긴장한 표정으로 에반이 문고리를 잡았다. 오랫동안 열리지 않은 문이 듣기 싫은 쇳소리를 내며 천천히 열렸다.
순간, 이안의 표정이 굳었다. 권총이 홀스터에서 뽑혀 나왔다.
‘시취로군.’
그것도 상당히 역한 냄새. 시체가 된 지 제법 오래됐단 의미다.
“욱, 우욱!”
역한 냄새를 견디지 못한 세리아가 헛구역질을 해댔지만, 이안과 에반은 문 너머의 광경에 눈을 떼지 못했다.
“허, 마수가 왜 여기서 나와?”
총구를 치켜든 이안의 입에서 헛웃음이 나왔다.
오크, 고블린, 코볼트, 리자드맨…
복도 양 옆으로 배치된 수많은 철창에, 온갖 종류의 마수들이 갇혀있었다.
“실험체들입니다.”
“우욱, 실험체요?”
세리아가 헛구역질을 하며 에반에게 물었다.
마수들을 바라보는 에반이 역겹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확히는, 마수였던 것들이죠.”
“뭐라고요?”
순간, 에반의 말을 이해한 세리아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이안의 눈이 다시금 마수들에게 향했다.
세 팔 달린 고블린, 곱추 리자드맨, 배만 불룩 튀어나온 오크…
“악마화?”
“정확히는 실패작이죠.”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생각해본 이안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었다.
“이거… 아주 미친놈들이었네?”
이안의 입꼬리가 뒤틀렸다.
미친 수준이 아니다.
칠영웅이 모여 세운 칠연공국은 마경에서 넘어오는 마족을 막아내는 인계의 방벽.
그 지하에서 악마를 만들어내는 시험을 한다는 건 공국, 아니 인계 전체의 반역자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생각보다 큰, 아니 공국 전체가 뒤집어질만한 건이다.
등골은 차갑게 식었고, 머리는 맹렬히 회전했다.
하지만 놈들은 이안이 생각하도록 놔두지 않았다.
“후퇴해야 합니다.”
귀를 찌르는 사이렌 소리.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는 에반의 표정이 굳었다.
하지만 이안은 권총의 슬라이드를 한 번 당길 뿐이었다. 그의 촉이 맹렬히 외치고 있었다.
“이미 늦었어.”
이안의 말과 동시에 철창의 문이 열렸다.
그으으-
이미 마기에 잠식돼 생전의 이성을 잃어버린 실험체들이 불편한 몸을 이끌고 천천히 일행을 향해 다가왔다.
놈들의 눈은 벌겋게 달궈져있었고, 헤 벌린 입에선 투명한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그 괴기스런 모습에, 에반과 세리아의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이안은 세리아를 향해 총을 내밀었다.
“세리아.”
“네?”
“부여.”
“부여요?”
“신성부여계 성법. 설마 못 쓴다고 하진 않겠지?”
“아!”
그제야 이안의 말을 깨달은 그녀가 두 손을 맞잡고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몇 초 지나지 않아, 이안이 뽑아 든 권총에서 환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거기 꼬마에게도 걸어주고. 설마 이 상황에 도망칠 생각은 아니지?”
“그럴 리가요.”
이안의 말에 에반은 고개를 저었다. 그의 눈은 어떻게든 살아남겠다는 각오로 가득 차 있었다.
“좋아.”
이안은 신성력이 부여된 미미르의 총구를 겨누었다.
느릿느릿하게 다가오던 실험체들은 어느새 이안의 바로 앞까지 근접했지만, 그는 당황하지 않고 방아쇠를 당겼다.
순간.
타타타탕
굉음과 함께 빛살이 쏘아져나갔다.
9mm 권총탄.
파라블럼(Parabellem)의 의미는 전쟁을 준비하라는 고대 라틴어.
전쟁을 위해 준비된 탄환은 마력으로 제련되어, 신성력을 가득 머금은 채 마수들의 몸뚱이에 파고들었다.
그어어-
무너진다.
이지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마수들의 몸에 파고든 성탄(聖彈)의 신성력이 마수들의 체내를 점령한 마기를 침식하기 시작했다.
마기를 머금은 자들에게 신성력은 극독.
타오르는 소리와 함께 탄환을 맞은 부위가 재처럼 가루가 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안은 손가락을 멈추지 않았다.
그만큼 적의 숫자는 많았으므로.
달칵.
탄환을 모두 토해낸 권총의 슬라이드가 빈 약실을 드러냈다.
‘탄창이 비었군.’
페르소나의 위력을 더욱 강화시키기 위해, 이안이 걸어놓은 제약.
아직 절반의 실험체가 이안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지만.
철컥
이안은 당황하지 않고 끼워진 탄창을 뺀 다음 다시 꽂아 넣었다. 페르소나의 마력이 다시금 탄창에 탄환을 채워 넣었다.
그리고 발사.
그어어-
연속된 굉음과 함께 실험체들의 몸뚱이가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쏘고, 장전하고, 쏜다. 이지도 없는 짐승들에겐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리고, 이안은 혼자가 아니었다.
촤악
그어어어-
신성력이 내뿜는 빛으로 물든 검이 실험체들을 손쉽게 갈라버렸다.
닿은 부위마다 재로 변해버리는 에반의 검을 당해낼 방법은, 최소한 놈들에겐 존재치 않았다.
축성(祝聖)받은 총탄과 검날이 하늘을 갈랐고, 그 때마다 마수들의 몸뚱이는 재로 흩날렸다.
그렇게 마지막 실험체를 잿더미로 만들어버렸을 때.
통로에는 침묵만이 남았다.
“그거, 페르소나입니까? 처음 보는 모양인데…”
그제야 한숨을 돌린 에반이 손에 들린 미미르를 가리켰다.
“최고의 대화수단이지.”
이안은 권총을 손가락에 걸고 가볍게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