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비켜.”
“네, 네. 부디…부디….”
카트린을 옆으로 치워낸 이안의 손은 거침이 없었다.
한 손에 총을 쥔 채, 다른 손으로는 비상용으로 방에 숨겨둔 포션병 두 개를 쥔 이안은 쓰러진 소년을 향해 다가갔다.
‘심각한데.’
거칠게 찢겨나간 가슴팍 사이, 대각선으로 크게 갈라진 상처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장기에 상처를 입은 탓인지 입에선 검은 피를 꿀렁꿀렁 토해내고 있었고, 의식은 진즉에 잃어버린 듯 시체처럼 신음소리 하나 내지 못했다.
지구에서 이런 부상을 당했다면 못해도 1, 2년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할 정도의 흉험한 상태.
‘빨리 치료하지 않으면 곧 죽겠지.’
하지만 여긴 지구가 아니다.
퐁-
입으로 한 포션병의 마개를 뽑아낸 이안은 그대로 안에 들어있던 액체를 소년에게 뿌렸다. 소년의 상처에 닿은 액체가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이안은 남은 하나의 포션을 소년의 입에 조금씩 흘려 넣었다. 내상을 치료하기 위해선 직접 섭취하는 것이 가장 치유속도가 빨랐으니까.
효과는 확실했다.
“쿠, 쿨럭! 쿨럭!”
오 분이 채 지나기 전, 정신을 차린 소년이 피가 섞인 기침을 내뱉었다.
“에반!”
혹시나 동생이 잘못될까, 옆에서 가슴을 졸이던 하녀는 동생이 정신을 차리자마자 달려와 그를 끌어안았다.
“괘, 괜찮은 거야? 도대체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쿨럭, 쿨럭. 누나…”
“잠깐, 이게 무슨 일인지 설명을 해 줘야겠는데.”
두 남매의 감동적인 상봉을 중간에서 끊어낸 이안은 숙녀와 소년을 번갈아가며 노려봤다.
“왜 내 방에 반송장을 데려온 거지? 내가 아는 하녀의 업무와는 조금 다른 것 같은데 말이야.”
“그, 그건…”
이안의 말에 카트린은 말하기를 주저했다. 무언가 켕기는 게 있음이 분명했다.
인상을 구긴 이안은 가장 확실한 방법을 사용했다.
“지금 당장 사실대로 털어놓지 않으면, 내 예전 모습을 보게 될 거야.”
당연히 이안은 그럴 생각이 없었지만, 그 말을 받아들이는 카트린의 입장은 조금 달랐다.
“다 마, 말씀드릴게요! 그러니까…”
순식간에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린 카트린은 횡설수설하며 있는 것 없는 것을 전부 털어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카트린의 말을 듣고 있던 이안의 표정은 점점 구겨졌다.
“그러니까, 나보고 그 말을 믿으라고, 지금?”
이안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카트린의 말은 너무나 현실과 동떨어졌으니까.
“마탑 소속의 마법사가, 자기 호위무사를 이 꼴로 만들었다?”
아슈타르를 수호하는 다섯 무력집단 중 하나인 혈사자 마탑.
마법사의 숫자는 백사장의 모래알처럼 많았지만 개중 혈사자 마탑에 소속될 영광을 누리는 마법사는 고작 백 명.
마법사들 중에서도 명예와 의무를 중시하는 자들만 가려 뽑은 아슈타르의 수호자가, 자신의 부하를 학대하다니.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었다.
“사, 사실이에요! 필요하다면 제 목숨을 걸고서라도 증명할게요. 그러니까…”
추궁당한 카트린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지만, 이안은 멈추지 않았다.
“그래, 그건 그렇다 쳐. 미친놈이 미친놈인 걸 숨기고 마탑에 들어갔을 수도 있으니까. 근데 왜 날 찾아온 거야? 차라리 경비대를 찾아가던가.”
“그, 그건. 그건…”
이안의 지적에 채 반박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카트린. 이안의 의심은 점점 더 짙어져갔다.
그 때.
“누나.”
어느새 회복을 끝낸 카트린의 동생, 에반이 눈물 짓던 카트린을 일으켜 세웠다.
“가자, 여기 더 있어봐야 해결되는 건 없어.”
“자, 잠깐! 기다려. 이분은 소문만큼…”
에반은 자리에서 떠나지 않으려는 카트린의 손을 붙잡았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아.’
그는 누나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천하의 개망나니였던 이안 공자가 그들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라니.
차라리 여기서 조금이라도 빨리 벗어나는 것이 누나를 위한 일이리라.
에반은 이안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이안 공자님, 귀중한 시간을 뺏은 것에 대해 사죄드립니다. 저희는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하?”
신파극을 찍는 두 남매를 보던 이안의 입에서 헛웃음이 절로 새어나왔다.
“야, 너희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이안은 어이가 없었다.
여기가 옹달샘도 아니고, 자기들끼리 멋대로 쳐들어와서는 포션만 먹고 가다니.
“여기가 한밤중에 멋대로 들어왔다가 멋대로 나갈 수 있는 곳인 줄 알아?”
제 멋대로 들어와서 비싼 포션을 두 병이나 쳐먹어 놓고는, 감사하단 인사도 없이 떠나려는 싸가지가 보통이 아니었다.
하지만 에반은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보내주십시오. 사용하신 포션값은 꼭 갚도록 하겠습니다.”
혹여 누나에게 피해가 갈까, 소년의 태도는 대단히 정중했다.
하지만 이안은 이들을 곱게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이 일은 그에게도 제법 중요했으니까.
“싫다면? 한 대 치기라도 할 셈인가?”
한껏 비꼬아댄 이안은 한 쪽 입꼬리를 올렸다.
순간.
소년의 눈이 번뜩였다.
“원하신다면.”
에반의 몸에서 흉험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오랜 시간 단련한 마력이 오러로 바뀌면서 분출되는 날카로운 기세.
그래봐야 기사급도 되지 못하니 그 수준은 낮은 편이었지만, 마력을 다루지 못하는 사람이었다면 곧장 공포에 얼어붙었을 것이다.
‘다시는, 누나를 건들지 못하게 해주지.’
예전부터, 성에서 돌아온 누나가 눈물을 쏟아내던 순간부터, 그를 응징할 때만을 고대하고 있었다.
‘이대론 공작령에 머물러있을 수 없어.’
그의 계획은 누나와 함께 제국으로 탈출하는 것.
누나의 돌발행동 때문에 조금 일이 꼬이긴 했지만, 큰 틀에선 바뀐 게 없었다.
마력도 다루지 못하는 돼지 따위는, 고작 익스퍼트의 초입에 도달한 에반의 오러만으로도 오줌을 지리게 만들 수 있었으니까.
‘빨리 치우고 가야 해.’
한동안은, 그나 카트린의 얼굴만 떠올려도 몸서리를 치게 되리라.
그렇게 생각했다.
“근데 말이야.”
그러니까, 이안이 권총을 들어올리기 전까진.
“난 싫어.”
짧은 부정과 함께 이안은 권총을 겨누었다.
순간.
“무, 무슨!”
이안과 눈을 마주친 에반이 숨을 멈췄다.
마주친 이안의 눈빛에는, 칼날처럼 날카로운 살기가 가득 담겨있었다.
‘어떻게, 사람이 이런 눈빛을…’
마치, 뱀 앞의 개구리처럼 에반의 심장이 얼어붙었다.
“돌겠네. 요즘은 진짜 개나 소나 지가 제일 잘난 줄 안다니까?”
철컥
이안은 권총의 슬라이드를 잡아당겼다. 그의 눈앞에 선 하녀와 검사는 공포에 질려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똑바로 말하는 게 좋을 거야. 안 그러면 내일 밤부턴 지하 감옥에서 지낼 테니까.”
이안의 서슬퍼런 눈이 소년과 마주쳤다. 소년의 목울대가 꿀렁거렸지만, 입은 제대로 열리지 않았다.
순간, 이안은 살기를 갈무리했다.
“헉, 허억.”
“빨리 말해. 오래 안 기다린다.”
어느새 이안은 침대에 걸터앉아 내려놓은 권총을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조금 진정이 되었는지, 어느 정도 혈색이 돌아온 에반은 그대로 자리에 엎드렸다.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제 누나만은…”
“알았으니까 빨리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하라고.”
이안의 거듭된 재촉. 곧, 그는 첫 마디를 내뱉었다.
“악마입니다.”
“…뭐?”
이안이 생각지도 못한 말을.
“혈사자 마탑의 3연구팀장, 알테어 프리마는 악마입니다.”
생각지도 못한 폭탄발언에 이안의 표정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
‘악마입니다.’
“무슨 그런 개소리를…”
다음 날, 마차에 올라탄 이안은 전날의 일을 떠올리곤 인상을 찌푸렸다.
악마.
‘마수가 마기를 임계치 이상 받아들이게 되면 나타나는 마수와 마족의 중간 존재.’
하지만 탈마공의 영지도 아니고 아슈타르의 마법사라면 인간인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인간이 마수화도 아니고, 마수화 다음 단계인 악마화가 될 동안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 없다. 아슈타르는 그 정도로 무능하지 않으니까.
그럼에도.
‘뭔가가 있어.’
이성적 판단과는 다르게, 이안의 촉은 에반의 말이 옳다고 외쳐대고 있었다.
“젠장.”
그것이, 이안이 성 밖으로 나온 이유였다.
마차는 아무런 막힘없이 대로를 질주했다. 평소라면 수많은 사람들과 마차들로 발 디딜 틈도 찾기 힘들었겠지만, 오늘만은 달랐다.
“에라이. 무슨 모세의 기적도 아니고.”
어처구니가 없었던 이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안의 마차에 달린 사자문장, 그리고 그 옆에 쓰인 3이라는 숫자 앞에서 태연히 길을 막고 있을 영지민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이안 공자다. 어서 비켜드려!’
‘인석아, 빨리 고개 숙여! 무슨 치도곤을 당하려고…’
‘우리 지니 빨리 숨겨, 숨겨! 공자님께 들키면 안 돼!’
마차 밖에서 들려오는 수군거림. 이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목적지까지 막히지 않고 갈 수 있으니 좋긴 하다만, 이걸 좋아해야 하는지 아닌지 도저히 판단할 수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차는 곧 목적지에 도착했다.
“공자님, 이제 내리셔도 됩니다.”
호위 명목으로 마차를 몰던 도노반이 뒤돌아 이안을 바라봤다. 고개를 끄덕인 이안은 마차에서 내려 담장에 걸린 간판을 바라봤다.
[마르콘의 햇살]
나무로 대충 깎은 듯 투박한 필체. 건물도 크기는 제법 컸지만 관리가 잘 되지 않았는지 전체적으로 허름한 느낌이었다.
이안이 철문을 밀자 끼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천천히 건물 앞의 마당을 걷자, 곧 담쟁이로 뒤덮인 건물의 정문이 나타났다.
끼익
“누구세요?”
곧, 삐걱대며 열린 문 사이로 꼬맹이 하나가 나타났다.
“여기, 신관님께서 잡상인은 함부로 들이면 안 된다고 했거든요? 우린 뭐 살 돈 없대요. 그러니까 돌아가세요.”
“너, 내가 누군지 모르냐?”
“어… 돼지?”
“아냐.”
당돌한 꼬마소년의 말에 이안은 주먹을 쥐었다 폈다. 아무리 그래도 어린 애에게 손찌검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꼬마와의 대치는 오래 가지 않았다.
“고, 공자님?”
꼬마의 뒤로 활짝 열린 문에서, 그가 기다리던 사람이 나타났으니까.
세리아 필라스.
마르콘의 신관인 그녀가 벌개진 얼굴로 이안을 바라봤다.
***
“죄송해요. 모처럼 방문해 주셨는데 드릴 게 없네요.”
그녀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테이블에 앉은 이안의 앞에는 따뜻한 물 한잔이 전부였으니까.
하지만 이안은 콧방귀를 뀌었다.
“내가 차나 먹으러 여기까지 올 만큼 할 일 없어 보여?”
핀잔을 준 이안은 탁자의 물을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그리고.
‘응?’
이안은 그 물이 평범한 물이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다.
혀에서 감지할 수 있는 모든 맛을 한 모금만으로 느낄 수 있는 물이 평범할 리 없지 않은가.
심지어, 물을 삼키자 뱃속에 따뜻한 기운이 들어찼다.
“딱히 드릴 게 없어서요. 오늘 만든 성수를 조금 데워봤어요.”
“세상에서 제일 귀한 물이었군. 드릴 게 없다는 건 그냥 겸손이었나?”
“아, 아니 그런 건 아니고요!”
퉁명스런 이안의 말에 세리아의 얼굴이 벌개졌다.
하지만 이안은 내심 놀랐다.
‘언제 성수를 만들 수준에 도달한 거지?’
물에 신성력을 부여하는 것은 영혼의 격이 중급에 달해야 사용할 수 있는 제법 높은 수준의 성법.
성법 중에서는 낮은 수준에 속하는 치료계 성법조차 펼치기 힘들어하던 그녀가, 어느새 여기까지 발전했단 말인가.
‘돈의 힘인가?’
사실, 그럴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다.
분명한 목표, 그리고 그것을 실행하고자 하는 의지는 신관의 영혼이 가진 격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고 들었으니까.
잘 된 일이다. 마침 그에겐 뛰어난 신관이 필요했으니까.
피식
하지만 막상 돈을 보고 눈이 돌아간 신관을 생각하자니,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모처럼 성수까지 대접해드렸는데 왜 웃으시는 거예요?”
조금 친하다고 여긴 것일까.
세리아가 골을 냈지만 이안은 대답 대신 다른 걸 내놓았다.
“어…”
“일 하나 같이 하지?”
손가락 두 마디만한 사파이어.
보석이 뿜어내는 황홀한 푸른빛에 세리아의 입이 벌어져 다물어지지 않았다.
“이, 이거면 6개월치 운영비… 잠깐만요. 도대체 무슨 일을 하려는 거죠?”
순간 넘어갈 뻔 했던 세리아가 정신을 차리곤 이안을 노려봤다.
“그건 같이하기로 하면 말해주지. 미리 말하면 재미없잖아?”
“그럼 저도 못해요. 무슨 일을 시키실 줄 알고…”
세리아는 단칼에 거절하려 했다.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덤비기에는 찜찜한 구석이 많았다. 그녀의 뒤엔 지켜야 할 서른의 아이들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탁
이안은 대답 대신 오팔 하나를 더 꺼내 그녀의 눈앞에서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