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이, 이, 어디서 천박한 피를 가진 게…”
“그 천박한 피도 없으신 분께서 할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럼.”
말을 마친 이안은 반쯤 남은 고기를 내버려둔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먹는 것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전 주인 놈이라면 모를까, 입맛 떨어진 상태에서 굳이 식탁에 앉아있을 필요는 없었으니까.
“전 먼저 일어나도록 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이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식당 문을 나섰다. 다섯 중 하나가 자리를 나서자, 빈자리가 더욱 크게 느껴졌다.
“아, 아니. 무슨 저런 녀석이…”
“참으세요, 어머니. 저런 평민 놈의 말은…”
옆에서 요제프가 필사적으로 진정시키려 했지만, 뒷목을 잡은 공작부인의 눈은 거의 뒤집히다시피 했다.
“흠.”
하지만 남편인 신검공은 거기에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자리 왼쪽에 앉은 사내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오베르트.”
오베르트 아슈타르.
신검공 에드너 폰 아슈타르의 장남이자, 채 스물이 되기도 전 오러 익스퍼트의 최상급에 도달한 검의 천재.
“사자입니다.”
이안이 나간 문을 바라보던 그의 푸른 눈이 호선을 그었다.
“자신에 대한 긍지와 대륙을 울리는 기백. 거기에 상대의 전력에 맞는 방법을 택할 수 있는 지략까지.”
자신의 어미가 모욕을 당했지만, 신검공의 장자는 거기에 일견 관심도 주지 않았다.
그의 관심은 오직 하나.
“후계구도를 바꿀 수 있는 존재입니다.”
“흠, 네 경쟁자란 말이군.”
오베르트의 말에 에드너는 아무렇지 않게 수염을 쓰다듬었다.
아비의 반응에 오베르트가 피식 웃었다.
“물론, 제가 이기겠지만요.”
말을 마친 그의 오른손이 허리춤의 검 손잡이를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
칠흑같이 어두운 성.
붉은 피처럼 흐르는 용암 사이에 세워진 성의 중앙 홀에서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사람이 아닐지도 몰랐다.
사람의 머리엔 뿔이 자라있지 않으니까.
“최근 들어 인간들의 활동이 활발해지는 것 같단 말이지.”
홀의 중앙에 자리한 옥좌에 비스듬히 앉은 사내가 턱을 매만졌다. 그러자 기둥에 몸을 기댄 여인이 요사한 미소를 지었다.
“어머, 그래봐야 인간이란 거 몰라? 가만히 내버려두면 자기들끼리 치고받다 자멸할 녀석들이라고. 그 배반자 놈이라면 모를까.”
그녀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당장 마족의 침공을 막아냈던 800년 전의 칠영웅들 마저도, 말년에는 권력욕에 미쳐 자기들끼리 싸워대지 않았던가.
“바르바토스.”
하지만, 사내의 다음 말을 들은 요녀, 바르바토스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시스템이 움직였다.”
“뭐?”
“시스템의 가동시간이 정상치를 넘긴 것을 확인했다.”
순간, 돌기둥에 엉겨 붙은 석상처럼 굳어버린 바르바토스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곤 억지 미소를 지었다.
“아, 알잖아, 메피스토. 시스템을 정상가동 시킬 수 있는 녀석은 이미 800년 전에 죽었….”
말과 함께 바르바토스의 눈이 옥좌에 앉은 사내, 메피스토와 마주쳤다.
순간.
지성체에게서 흘러나오는 사념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그녀는 메피스토의 사념을 읽고 헛웃음을 지었다.
“농담이지?”
“이미 하급마족 일곱을 불한당들의 소굴에 파견한 상태다. 소란을 피워보면 뭐라도 나오겠지. 누가 뭐라 해도 우리의 가장 큰 적은 그 시스템이니까.”
마치 다음 저녁메뉴를 고르듯, 메피스토는 담담하게 인간계로의 침공을 선언했다.
“그래…그렇단 말이지….”
사내의 선언을 들은 11마왕 중 하나, 바르바토스의 미소가 진해졌다.
인간을 구성하는 무언가가 비틀린 것 같은, 소름끼치는 미소였다.
“그럼, 난 뭘 해주면 되지?”
매력적인 육체를 가진 그녀가 관능적인 발걸음으로 천천히 메피스토에게 다가갔다. 메피스토는 여전히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마수를 풀어라. 평소보다는 많지만, 놈들이 의심하지 않을 정도로.”
“너무 쉬운 일인걸?”
“네게 맡길 수 있는 일은 그 정도밖에 없으니까.”
“하, 입만 살아선.”
어느새 메피스토의 코앞에 다가온 그녀가 메피스토의 몸을 천천히 쓸었다.
메피스토는 목석마냥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것이, 자신의 마음을 들끓게 하는 사내의 매력이었으니까.
“그럼, 당신의 뜻대로.”
양 손으로 메피스토의 목을 감은 바르바토스의 입술이 비틀리며 슬쩍 열렸다.
***
“공자님, 마수와 마족의 차이를 아십니까?”
칼리번의 말에 이안은 잠시 고민했다.
기억창고를 뒤져보기도 했지만, 망나니의 기억 속에서 그런 지식 따위는 당연히 찾을 수 없었다.
“크기? 아니면 가지고 있는 힘의 차이겠군.”
이안의 추론에 칼리번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는, 마기의 유무입니다.”
“마기?”
“마족들이 마치 인간의 마력처럼 다루는 기운을 일컫지요.”
“마력은 지능 있는 마수들도 다루지 않아? 오러 마스터급의 마력을 지닌 마수들도 드물지만 나타난다고 들었는데.”
이안의 질문에 기사단장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맞는 말씀입니다. 마력을 잘 다루는 마수 중에는 하급 마족 따위는 일격에 가를 수 있는 개체도 존재하지요. 하지만 마족의 무서운 점은 그게 아닙니다.”
“무슨 말이야?”
두루뭉술한 칼리번의 말에 이안은 눈을 끔뻑였다.
“마족이 내뿜는 마기는 주변을 오염시키거든요.”
대답은 다른 곳에서 나왔다.
갑자기 끼어든 여성의 목소리에 두 사내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
빛의 신, 마르콘을 모시는 신관, 세리아였다.
“아, 아, 죄송해요. 듣다보니 너무 흥미로워서….”
시선이 쏠리자 당황한 세리아의 얼굴이 벌개졌다. 손부채질을 하며 열을 식히는 세리아를 보곤 칼리번이 미소를 지었다.
“하긴, 마족과 관련해선 신관님이 더 전문가이시겠지요. 설명을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음, 그러니까. 마족은 태어날 때부터 마기를 가지고 태어나요. 저희가 숨을 쉬듯 그들은 마기를 몸 밖으로 내뿜죠. 그리고 내뿜은 마기는.”
말을 하다 만 세리아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말씀하셨듯, 주변을 오염시켜요. 정확히는 생물과 무생물의 내부에 파고 들지요. 그리고 내부에 파고 들면, 마족화가 진행돼요.”
“마족화?”
처음 듣는 용어에 이안이 호기심어린 눈으로 세리아를 바라봤다.
“마기를 내부에 받아들인 생물이나 무생물은 마족의 행동양식대로 움직여요. 정확히 말하면, 마기를 내뿜으면서 마족이 아닌 자들을 마족으로 바꾸려하죠.”
‘바이러스를 품은 숙주쯤 되는 건가.’
이안은 자신이 이해하기 쉽게 결론을 내렸다.
세리아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하급이나 최하급 마족이라면, 영적 방어가 없는 시신이나 식물에게 영향을 줄 수 있어요. 그게 흔히 마경에 돌아다니는 언데드, 그리고 마목이죠.”
“그럼, 중급 이상은 생명체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건가?”
“맞아요. 영적 방어력을 넘어서는 진한 마기에 노출된 동물은 마수가 되죠. 마왕급의 마기를 지녔다면 무생물을 고렘(Golem)으로 만들어낼 수도 있고요. 그 정도 수준의 마족이 나타날 일은 거의 없긴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페르소나가 있는 겁니다. 페르소나의 마력장은 뿜어져 나오는 마기를 억제하거든요.”
말을 마친 칼리번은 자랑스럽게 자신의 검을 쓰다듬었다.
그는 아슈타르의 피를 이어받지 않고도 페르소나를 얻어낸 극소수의 사람 중 하나였으니까.
“공자님께서도 페르소나를 얻으셨으니, 언젠가는 마경으로 갈 일이 생기실겁니다. 아슈타르의 모든 사람들은 한 번쯤 마경을 경험하는 법이니까요. 그 때가 되면.”
말을 마친 칼리번은 굳은 표정으로 이안을 바라봤다.
“공자님께서도 칠영웅의 의무가 무엇인지 깨달으실 겁니다.”
“그래, 일단 살부터 빼자고. 그럼 난 이만 가볼게.”
칼리번의 충고를 대충 넘긴 이안은 연무장을 나섰다.
‘의무는 무슨.’
이안은 콧방귀를 뀌었다.
마경의 마족이건, 전장의 적군이건 자신의 적이란 사실은 변치 않는다.
적은 생존을 위한 살육의 대상일 뿐, 의무의 대상이 아니니까.
이안은 천천히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오늘의 일정은 이미 모두 끝이 났으니, 방에 들어가 오늘 칼리번에게 배운 것들을 실험해볼 참이었다.
‘이안 공자님?’
‘이안 공자님이야.’
또다시, 속삭임이 들려온다.
저들은 마력을 몸에 지닌 자들의 감각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모르는 것일까.
원 주인의 평판이 얼마나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는지는 이미 몸으로, 마음으로 실컷 느끼고 있었지만, 이젠 망나니 취급도 신물이 났다.
‘도대체 언제쯤에야 바뀔 런지.’
차라리 혼자라면 모를까, 뒤에서 쑥덕이는 것은 질색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안 공자님, 안녕하십니까.”
“공자님을 뵙습니다.”
“어, 어어. 그래.”
갑작스런 사용인들의 인사에 이안은 눈만 끔뻑였다.
얼굴이라고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던 이전과는 달랐다.
전부는 아닌, 몇몇 하인과 하녀들뿐이었지만 그들은 이안을 피하지 않았다. 조금 두려운 것처럼 보였지만 그뿐.
“갑자기 무슨 바람인지, 원.”
방에 들어선 이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뒤에서 쑥덕거리던 녀석들이, 갑자기 앞에서 친한 척이라니.
이안은 자신의 방을 슥 둘러봤다.
‘허전한데.’
벽에 덕지덕지 쳐발라져 있던 황금과 제멋대로 박혀있던 보석들, 그리고 어울리지도 않던 고급 가구들은 이안의 호주머니로 들어간 지 오래였다.
휑한 방에 남은 것이라곤 옷장과 사람 넷은 드러 누울 법한 대형 침대-휴식을 취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조그마한 테이블-접대를 위해서다-뿐.
옷을 갈아입은 이안은 방의 기물 중 가장 비싼 침대에 몸을 뉘었다.
‘마력과 오러의 변환에 대해 생각해보라고 했지?’
오늘 칼리번에게 배운 것을 떠올린 이안은 누운 채로 천천히 마력을 집중시켰다.
몸을 휘돌던 마력이 이안의 의지에 따라 오러로 정제된다. 정제된 오러가 다시 마력으로 변환된다.
그 과정의 반복 속에서, 체내를 휘돌던 마력이 조금씩 외부의 마력을 안으로 끌어당긴다.
마력의 자기복제.
‘늘어난다.’
마치 눈덩이를 굴려나가듯 조금씩 늘어나는 마력을 보고 있자니, 이안의 마음 한 구석에서 희열이 샘솟아 올랐다.
하지만 희열은 오래가지 않았다.
타타타탓
문 밖에서 들려오는 빠른 발걸음소리에 이안은 눈을 떴다. 그의 손이 바로 옆에 둔 권총, 미미르를 향해 뻗었다. 미지근한 플라스틱의 감촉이 그의 정신을 일깨웠다.
‘적인가?’
이 야밤에 찬밥신세나 다름없는 이안을 찾아올 사람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이안은 양 손으로 총을 쥔 채 언제든 사격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그 때.
“고, 공자님!”
문 밖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이안은 조금 긴장을 늦췄다.
‘카트린?’
이안의 방에서 자살소동을 일으켰던 그 하녀다.
지금이야 처음처럼 이안을 두려워하지는 않았지만, 썩 가깝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저 공자와 하녀의 관계일 뿐.
“공자님,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미처 이안이 말을 꺼내기도 전, 방문이 열림과 동시에 한 인영이 튀어나왔다. 이안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야, 너 무슨…”
뭐라 소리 지르려던 이안은, 순간 멈칫했다.
“고, 공자님. 공자님…”
숨을 헐떡이며 몸을 덜덜 떨던 그녀의 하녀복은 붉은 선혈로 범벅되어있었으니까.
“…무슨 일이야?”
보통 일은 아니다. 권총을 쥔 손에 조금 힘이 들어갔다.
그 때.
이안은 그녀의 등 뒤에 업힌 무언가를 발견했다.
“제발, 제발 제 동생 좀…”
피범벅이 된 채 오열하는 그녀의 뒤로.
마찬가지로 피범벅이 된, 이제 열다섯이나 되었을까 싶은 소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