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말도 안 되는 핑계 대지 말고. 약속대로 내 앞에선 검술 얘기 꺼내지 마.”
이안의 말에 칼리번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공자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어찌되었건, 아슈타르의 기사단장인 그가 검도 잡을 줄도 모르는 애송이에게 패배한 것은 사실이지 않은가.
“…알겠습니다. 하지만 마력운용법과 오러 정제법은 반드시 익히셔야 합니다.”
“그건 배우지 말라고 해도 찾아가서 배울 거니까 그런 줄 알아.”
이안의 손을 붙잡고 일어선 칼리번은 영 마땅찮은 표정을 지었지만, 약속은 약속이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칼리번과의 대화를 끝낸 이안은 사제를 바라봤다.
망나니라는 소문을 들어서 인지 여전히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었지만, 다른 하인이나 하녀들처럼 뒷걸음질을 치지는 않았다.
“그쪽, 이름이 뭐지?”
“아, 저, 저는… 마르콘을 모시는 종, 세리아 필라스라고 합니다.”
“흠, 그래. 수고했어.”
“네?”
이안의 말에 세리아의 은색 눈이 토끼처럼 커졌다. 이안은 손을 내저었다.
“수고했으니까, 가보라고. 보아하니 더는 신법을 부리지 못할 것 같은데 신전에 돌아가서 좀 쉬고.”
말을 마친 이안은 등을 돌렸다.
그녀가 이안의 끔찍한 훈련을 지켜볼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고, 신법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신관을 굳이 곁에 둘 필요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 그럴 수는 없어요!”
뒤에서 들려온 외침에 이안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시선의 끝엔 애처로운 표정으로 두 손을 모은 신관이 있었다.
“저, 저에겐 고아원의 아이들이 있어요. 제발, 기회라도 주세요. 이 일이라도 없으면…아이들이….”
다시 축객령을 내리려던 이안은 세리아의 말에 순간 움직임을 멈췄다.
고아원. 아이들.
이안의 마음을 울리는 단어였다.
정부의 눈에 띄기 전까지, 지구의 강민혁은 천애고아로 태어나 고아원에서 생활했으니까.
분명, 그녀는 이안이 천하의 개망나니라는 소문을 들었음에 틀림없다. 지금도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는 몸뚱이가 그 증거겠지.
하지만, 그럼에도 이안을 찾아왔다는 건….
“다섯 번.”
“네?”
“하루에 치료계 성법 다섯 번은 쓸 수 있어야 할 거야. 못하겠다면 지금 포기해.”
이안은 담담하게 읊조렸다.
그럼에도, 그 말을 들은 세리아는 연신 고개를 숙였다.
“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희망을 얻은 그녀의 볼에서 한줄기 눈물이 흘렀다. 이안은 그녀의 시선을 애써 피했다.
‘민혁아…’
눈물 흘리는 그녀의 모습에, 누군가의 얼굴이 겹쳐보였으니까.
***
다음 날.
이안은 일어나자마자 어딘가로 향했다. 손에는 자신의 팔뚝만한 종이뭉치들을 든 채.
‘이, 이안 공자님…’
‘피해, 피해.’
“에잉.”
어딘가에서 속삭이는 하인과 하녀들의 말을 들은 이안은 눈살을 찌푸렸다.
마력에 의해 강화된 청력은 굳이 알 필요가 없는 정보까지 전달해주었다. 적응이 되려면 한참은 걸릴 게 분명했다.
사용인들의 쑥덕임을 한참이나 들은 끝에, 이안은 성내를 이동하는 원반에 올라탔다.
위잉
원반 위로 불룩 솟은 구슬에 정해진 패턴의 마력을 주입하자 원반은 목적지를 향해 출발했다.
몇 번의 상승과 하강. 원반은 내성을 벗어나 광장으로 향했다. 곧 이안의 강화된 후각이 고약한 냄새를 맡았다.
‘제대로 오긴 했나본데.’
예상하고 있었던 이안은 당황하지 않고 코를 틀어막았다.
본래 무두질을 하는 곳에선 악취가 진동하는 법이었으니까.
원반이 멈춘 곳은 허름한 창고 앞. 이안은 망설임 없이 창고의 문을 열어젖혔다.
이미 만들어진 가죽을 가공하는 곳이기 때문일까. 내부는 바깥보다는 냄새가 덜했다. 그는 홀로 앉아 가죽을 만지던 무두장이에게 다가갔다.
“아니, 내가 작업 중에는 들어오지 말라고 몇 번을…, 이안 공자님?”
인상을 찌푸리며 욕을 냅다 갈기려던 무두장이는, 이안의 정체를 알아보곤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래. 몇 번을, 다음은 뭐?”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공자님. 이런 누추한 곳까진 어쩐 일로…”
재빨리 태세를 변환한 노인이 허리를 숙였다. 이안은 이를 굳이 책잡지 않았다.
눈앞의 심술궂게 생긴 노인은, 가죽처리와 부여마법 실력만으로 명예기사 작위를 받은 아슈타르성 최고의 무두장이이자 인첸터였으니까.
툭
이안은 대답 대신 가져온 종이뭉치를 작업대 위에 던져놓았다.
장인은 종이뭉치 하나를 펼쳐 살피더니, 천천히 턱수염을 쓸어 넘겼다.
“이건… 흠…”
“만들 수 있겠어?”
“어렵진 않을 것 같습니다. 구조가 조금 복잡하기는 하지만, 결국 끈과 끈을 연결하는 것뿐이니까요. 적어주신 마력운용법도 매우 기초적인 수준이로군요.”
말을 마친 장인은 인상을 찌푸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데… 이건 도대체 어떤 물건인지요?”
평생을 가죽과 함께 살아온 그였지만, 이안이 가져온 설계도의 물품은 생전 처음 보는 형태의 것이었다. 주머니라고도, 검집이라고도 할 수 없는 이상한 물건.
“아, 그거?”
부여술사의 물음에 이안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곤 답했다.
“홀스터라고 해.”
“홀스터… 말입니까?”
“그래,”
노인의 되물음에 이안은 씨익 웃었다.
“이 녀석의 집이지.”
말을 마친 이안은 허리춤에 꽂은 권총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홀스터는 그의 페르소나를 담아두기 위한 집.
동시에, 지난번 전투에 대한 이안의 솔루션이었다.
***
아슈타르성의 연무장은 여섯 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 기사단이나 마법사단이 훈련을 갖더라도, 다른 이들의 훈련에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중 하나의 연무장에는, 오직 세 사람만이 서 있었다.
아니, 한 사람은 바닥에 나동그라져 있었다.
“허억, 허억.”
근육이 끊어지는 고통을 참아가며, 이안은 제 멋대로 움직이는 허파를 통제했다. 숨을 너무 들이마셔서 과호흡 상태가 되면 곤란했으니까.
“세상을 비추는 전능한 마르콘이여, 이 미천한 종의 기도를 들어 주소서…”
곧, 여성의 맑은 목소리와 함께 이안의 몸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끊어진 근섬유가 다시 이어 붙고, 헐떡이던 심장과 폐가 안정을 되찾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안은 엉덩이를 툭툭 털며 일어났다. 그의 시선이 얼굴이 하얗게 질린 신관, 세리아에게로 향했다.
“이봐, 신관 아가씨. 괜찮은 거 맞아? 힘들면 그냥 돌아가.”
“아, 아닙니다. 아직 다섯 번은 더 쓸 수 있어요!”
세리아는 식은땀을 줄줄 흘리면서도 고개를 필사적으로 저었다. 애써 태연한 척 허리를 펴는 것이 못내 안쓰러워 보일 정도.
“뭐… 그럼 더 하던가.”
이안은 굳이 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첫 날, 억지로 다섯 번의 신법을 쓰고는 게거품을 문 채 까무러쳤던 것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양반이었다.
‘마르콘, 치료.’
이안은 영성의 홀에서 만난 다니엘을 떠올렸다.
‘역시, 그 녀석은 미친놈이었어.’
굳이 녀석과 반쯤 죽어가는 신관의 관계를 따지자면 원청과 하청의 하청 정도였으니, 힘의 차이가 나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공자님, 굳이 이런 수련을 반복하셔야하겠습니까? 이렇게 무리하지 않으셔도 신체의 특성에 맞게 적절히 휴식해가며 단련하시다보면…”
옆에서 이안의 자기파괴적인 단련을 지켜보던 칼리번이 걱정스레 이안을 쳐다봤다.
하지만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그럼, 이것보다 더 빠르게 몸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있어?”
“…없습니다.”
“그러면 아무 말도 하지 마.”
단 두 마디로 기사단장의 입을 다물게 만든 이안은 옆에 놓인 거울을 향해 다가갔다.
“흠.”
거울 너머에는 돼지 대신, 약간 통통하지만 그래도 사람이라곤 불러줄 수 있을만한 자가 서 있었다.
영성의 홀에서의 이안과 비교한다면 장족의 발전.
채 빠지지 않은 덧살들이 몸 여기저기에 달라붙어 있었지만, 그 아래로 제법 형태를 갖춘 근육이 몸뚱이를 채워나가고 있었다.
‘대충, 40% 정도는 되려나?’
진행상황을 확인한 이안은 씨익 미소를 지었다.
이대로 가면, 예상보다 빨리 전생의 육체를 되찾을 것이다.
아니, 키와 골격은 오히려 이 몸뚱이가 더 크고 튼튼하니 어쩌면 전생보다 더 강한 몸을 가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저게, 정말 이안 공자님이 맞단 말인가?’
일련의 행동을 지켜보던 칼리번은 눈만 끔뻑였다.
근육이 파열되고, 관절이 부서지는 고통 속에서도 멈추지 않는 불굴의 의지. 그리고 그 미친 단련을 실행으로 옮길 수 있는 추진력.
불과 몇 주일 전의 돼지와 동일인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분명 이안이 칠영웅 중 하나인 신검공의 피를 타고 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것만으로 이렇게 극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수는 없다.
‘마치 공작전하를 보는 것 같군…’
순간 그런 생각이 떠올랐지만, 기사단장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봐야 아직 뱃살도 제대로 빠지지 않은 철부지가 아닌가.
“공자님, 신체단련이 끝나셨다면 이제 마력운용법을 배워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아, 바라던 바야. 어서 시작하자고.”
칼리번의 말을 들은 이안의 눈이 빛났다.
기초적인 마력운용법만으로 만들어진 페르소나의 위력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해선, 당연히 더 높은 수준의 마력운용법이 필요했으니까.
“공자님, 그럼 시작하시겠습니까?”
“당연하지. 하나라도 빼먹으면 큰일 날 줄 알아.”
다시 자리에 앉은 이안이 눈빛을 불태웠다.
***
이안의 학습속도는 제법 빨랐다.
가문의 마력운용법에 따라 마력을 움직이는 규칙을 만들어내고, 그 규칙을 차곡차곡 쌓아 페르소나를 설계하는 것은 마치 프로그래밍과 유사했으니까.
고작 며칠 만에, 이안은 아슈타르의 마력운용법을 제법 흉내 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와, 벌써 세 시간째 아니에요?”
며칠 보고 나니 두려움을 잊은 걸까.
눈을 감은 이안을 바라보는 세리아의 표정에 놀람이 깃들었다.
그건 칼리번 역시 마찬가지였다.
‘말도 안 돼. 어찌 사람이…’
마력을 오랜 시간 동안 움직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마치 손으로는 저글링을 하면서 발로는 공굴리기를 하는 것처럼, 극도의 멀티태스킹이 요구되는 고난도의 작업이다.
평범한 기사나 마법사라면 한 시간도 유지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집중도를 요구하는 작업.
하지만, 이안은 벌써 세 시간째 집중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초인적인 정신력.
‘그동안 능력을 숨겨 오신건가? 일부러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욕망에 미쳐 살던 돼지가 하루아침에 강철같은 정신력과 불굴의 의지를 얻었다는 것보단, 그쪽이 더 가능성이 높지 않은가.
‘설마, 그 때 이후로…’
눈을 감은 이안을 바라보던 칼리번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그러고도 30분은 더 지났을 때.
이안은 연산을 멈추고 눈을 떴다.
‘정보’
[이안 아슈타르]
[페르소나명: 미미르]
[등급: 병기]
[마력: 700]
[개방 필요마력: 1,000]
[증폭률: 500%]
[특성]
[장비교체][장전][과부하]
정보창을 읽는 이안의 입가에는 미미한 미소가 깃들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