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젠장.”
황금의 방에 홀로 남은 이안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옷은 왜 벗고 난리야?”
제 멋대로 옷을 벗다가 엎드려 용서를 빌더니, 급기야는 칼-어디서 구했는지는 모르겠다-을 목에 들이민 하녀를 간신히 방 밖으로 쫓아내고 나니 힘이 주욱 빠졌다.
‘도대체 이 미친 새끼는 어디까지 똥을 싸질러 놓은 거야?’
전 주인을 떠올린 이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일이 앞으로도 반복될 거란 것이었다.
“안 돼, 안 돼. 절대 안 돼.”
이안은 고개를 힘차게 저었다.
이런 식으로 가다간 자신만의 세력을 키우긴 커녕, 단순히 영지에서 사는 것조차 어렵다.
만나기만 해도 온몸을 부르르 떠는 사용인과 불편해서 어떻게 지낸단 말인가.
고용인들에게 이런 취급을 받을 정도라면, 기사들과 가문의 구성원들에겐…
“병신 취급을 받을 게 뻔하지.”
앞으로의 일을 잠시 상상한 이안은 두손에 얼굴을 묻고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든 이안에게 박힌 낙인을 지우지 않고선, 정상적인 삶을 사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으니까.
이안은 벌벌 떨던 하녀에게서 뺏듯이 가져온 서신을 바라봤다.
서신 위에 찍힌 봉인은, 아슈타르를 상징하는 사자.
아슈타르 공작령을 채운 일백만의 사람 중, 오직 한 사람만이 사용할 수 있는 문장.
“공작, 아니 아버지지 이젠.”
이안이 묘하게 입술을 뒤틀었다.
영혼이 뒤바뀌긴 했지만, 몸뚱이의 피는 공작으로부터 이어진 것이니, 생물학적 아버지라 해도 큰 무리는 없으리라.
이안은 기억창고에서 신검공에 대한 정보를 떠올렸다.
“에드너 폰 아슈타르. 초대 신검공의 재림이라 불리는 검의 극에 달한 자.”
그리고, 가문을 위해서라면 자기 자식쯤은 내팽개칠 수 있는 냉혈한.
부욱
이안은 서신의 봉인을 뜯었다. 봉투의 안에는 한 장의 편지가 들어있었다. 이안은 편지를 펼쳤다.
“응?”
편지에는, 단 한 줄이 적혀있었다.
‘올라와라.’
“뭐야?”
내용을 확인한 이안의 눈썹이 팔자로 휘었다.
***
아슈타르 공작령의 수도, 브라운 슈바이크.
그 중심에 위치한 아슈타르성은 그 높이만 100미터에 이르는 거성이다. 지구의 고층빌딩과도 비견할 만한 규모.
그리고, 이 성의 주인인 공작의 집무실은 개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당연하지만 이안은 걸어서 올라가지 않았다.
우우웅
원반형의 접시가 이안의 의지에 따라 성의 옥상까지 올라갔다. 마법의 힘으로 작동되는 승강기의 속도는 제법 빨랐다.
하지만 이안의 심기는 불편했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뭐가 무섭다고.’
승강기까지 이동하면서 본 하인과 하녀들은 이안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뒷걸음질을 쳐댔다.
그런 일도 한 두 번이지, 거듭 반복되자 가뜩이나 사람을 부리는 데 익숙하지 않은 이안에게는 꽤나 커다란 스트레스였다.
이안은 그를 가로막은 문을 바라봤다.
은도금을 한 금속문에는 포효하는 사자가 양각으로 생생하게 새겨져있었다.
‘공작의 집무실.’
백만 공민의 지배자.
그리고, 그의 생물학적 아버지가 있는 곳.
이안은 천천히 문을 밀었다. 무거워 보이는 외관과는 다르게, 문은 소리 없이 안으로 열렸다.
방에 들어선 이안의 눈에 집무실 탁자에 앉아 서류를 확인하고 있는 중년 사내가 보였다.
“왔군.”
인기척에 고개를 든 사내, 에드너 폰 아슈타르 공작이 이안을 향해 외알 안경을 빛냈다.
묵직한 기세를 느낀 이안의 몸이 본능적으로 긴장상태에 돌입했다.
“공작 전하를 뵙습니다.”
“답지 않게 무슨 짓이냐? 거기 앉기나 하거라.”
예를 갖춘 이안에게 핀잔을 늘어놓은 에드너가 탁자 앞 소파를 가리켰다. 이안이 자리에 앉자 공작은 품에서 모래시계를 꺼내 탁자에 턱 올려두었다.
“3분 주겠다. 페르소나는 얻었느냐?”
하지만 정작 에드너에게선 어떠한 기대도 보이지 않았다. 외알 안경을 통해 전해지는 무심한 눈빛이.
이안을 자극했다.
“당연한 말씀이시군요, 아버지.”
이안은 허리춤에 대충 꽂아둔 권총을 뽑아들었다. 이안의 행동을 지켜본 아비의 눈에 이채가 깃들었다.
“우리 가문의 것은 아니로구나. 마력의 설계방식도 그렇고. 탈마의 것인가?”
“배우지 않은 것을 쓸 순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스스로 노력하지 않은 주제에, 혀가 길구나.”
“그렇다 해서, 손 놓고 포기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몸뚱이는 이렇지만, 제 몸에도 사자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사자의 피.
어떠한 위협 앞에서도 위엄을 잃지 않고,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긍지를 꺾지 않는 신검공의 혈통.
이안은 기억창고에서 꺼낸 정보를 참고해 대강 지껄여댔다.
하지만.
“크하하하하!”
이안의 말을 들은 순간, 근엄한 표정을 짓던 에드너는 폭소를 터뜨렸다.
‘이게, 그렇게 웃긴 말이었나?’
이안은 순간 당황했다.
아슈타르의 성을 가진 자라면 누구나 하는 말이었으니, 특별히 웃길 구석은 없었으니까.
그 사이에도 에드너는 한참동안이나 폭소를 터뜨렸다. 어찌나 우스웠는 지 허리를 뒤로 제낄 정도.
그의 웃음이, 어느 순간 뚝 멎었다.
“…네 말에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말을 마친 에드너에게서, 신검공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아우라가 피어나오고 있었다.
이안은 동요하지 않았다. 모래시계의 모래는 이미 반쯤 사라졌고, 이안은 아직 할 말이 남아있었으니까.
“말이 나와서 말입니다만,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용돈이라면 집사에게 말하거라. 지금까지처럼 처리하면 된다.”
순간, 에드너의 눈에 실망이 들어찼다.
조금은 달라진 줄 알았더니, 알맹이는 과거와 별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이안의 말을 듣자 생각이 바뀌었다.
“회복계 신법을 사용할 수 있는 신관, 혹은 신체능력을 회복할 수 있는 약물이 필요합니다.”
“왜지?”
“수련을 위해섭니다, 당연히.”
그 말에, 에드너는 이안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의 매서운 눈빛이 이안의 마음속을 샅샅이 파헤치려했다.
하지만.
‘달라.’
죽은 생선마냥 탁했던 아들의 눈이 아니다.
영성의 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안의 눈동자는 이전에 비해 훨씬 쓸 만하게 변해있었다.
마치, 수십 년간 검을 수련한 기사처럼.
피식
“답지 않게….”
“아버지?”
에드너의 중얼거림에 이안이 눈을 끔뻑였지만, 그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집사에게 말하면 알아서 처리해 줄 거다. 포션이건, 신관이건 사용하는 건 네 자유다.”
말을 마친 에드너는 텅 빈 모래시계를 가리켰다.
축객령이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 잘 알고 있는 이안은 예를 갖춘 다음 순순히 방을 떠났다.
문이 닫히고.
에드너는 다시 서류작업에 집중했다. 백만의 영지민을 관리하기 위해선 종이 한 장도 허투루 볼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얼마나 지났을까.
책상에 고개를 파묻고 있던 에드너가 고개를 들었다.
조금 전, 막내아들과의 이야기가 떠오른 탓이다.
“답지 않게…”
내놓은 아들이었다.
기대와는 달리, 음식 욕심, 여자 욕심이나 낼 줄 아는 돼지 녀석.
굳이 쫓아내지 않고 용돈을 줘 가며 성에 묶어둔 것은, 행여나 외부에서 가문을 공격할 빌미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었어.”
혼잣말을 내뱉은 에드너는 책상 한 켠의 수정구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지정된 패턴으로 정렬된 마력을 머금은 수정구가 한 사람의 형체를 만들어냈다.
“그래, 단장. 할 말이 있는데…”
수정구를 통해 명령을 전달하는 에드너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깃들었다.
***
처음 집사를 찾아갔을 때, 이안이 우려하는 것은 단 하나였다.
‘날 병신 취급하면 어쩌지?’
그가 정거장에 처음 내렸을 때의 상황을 생각한다면, 그럴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었다.
이안의 무력을 보인다면 그 정도는 넘어갈 수 있겠지만, 무력으로 형성된 관계가 긍정적일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집사의 반응은 이안의 예상과는 달랐다.
“신전에는 이미 연락을 넣어두었습니다. 원하실 때 연락을 넣으시면 적절한 인물을 소개해줄 겁니다.”
검은 정장을 입은 백발의 노인, 데이브는 그 누구보다 공손하게 이안을 맞았다.
자신만 보면 도망치는 하인들만 만나왔던 이안은 그의 태도가 퍽 어색했다.
“약물은?”
“전시비축창고에 연락을 넣어두었습니다. 당장 오늘부터 사용하실 수 있을 겁니다. 준비해드릴까요?”
“그럼 연무장으로 보내줘. 그리고 신관도 준비되는 대로 연무장으로 보내도록 하고.”
“아슈타르의 뜻대로.”
“…그냥 이렇게 줘도 되는 거야?”
“이 성의 모든 것은 아슈타르의 사람들을 위해 준비된 것입니다. 공자님께서 쓰지 못하실 이유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안의 물음에 집사는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너무나 순조롭게 일이 진행되자 이안은 조금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그럼.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또 말씀해 주십시오, 공자님.”
말을 마친 집사는 곧 어딘가로 사라졌다. 등장할 때처럼 갑작스런 퇴장이 조금 어이없었지만.
“좋은 게 좋은 거지, 뭘.”
긍정적으로 생각한 이안은 연무장으로 향하는 원반에 몸을 실었다. 원반은 수직과 수평으로 몇 번 움직이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목적지에 이안을 내려놓았다.
“크네.”
이안의 감상은 간결했다.
그만큼, 연무장은 이안의 생각보다 넓었다.
“어지간한 헬스장 저리가라잖아?”
천장에 달린 수많은 마법 조명들이 창문 하나 없는 연무장을 밝히고 있었다.
흙과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훈련장을 중심으로 그 외곽에는 목검과 철검, 방어구, 그리고 타격용 허수아비들이 줄을 지어 빼곡히 진열되어있었다.
구석에는 웨이트 트레이닝용으로 보이는 바벨과 덤벨, 그리고 식수를 담은 수통과 집사가 가져다둔 듯한 여러 약병도 보였다.
“돈 좀 깨졌겠는데?”
이안은 휘파람을 불었다.
마력을 사용하는 마법기의 가격은 일반인이 상상하는 그 이상이었으니까.
그런 귀물을 고작 조명으로 쓴다는 사실만으로도, 이안은 아슈타르가 얼마나 부유한 영지인지 알 수 있었다.
퍽 퍽
이안은 허수아비를 주먹으로 가볍게 쳤다.
지푸라기로 대충 엮은 것 같은 외양과는 달리, 알 수 없는 반탄력이 느껴졌다. 이 허수아비 역시 마법기임에 틀림없었다.
“이 정도면 표적으로도 쓸 만 하겠어.”
이안의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그가 이 연무장에서 주로 할 것은 물론 체력단련과 지방연소였지만, 전투에 실제로 필요한 사격술을 새로운 몸에 익히는 것 역시 중요했으니까.
연무장의 상태를 대강 확인한 다음, 이안은 천천히 몸을 풀기 시작했다.
아직 지방이 덕지덕지 붙은 몸으로 하는 스트레칭이라 어설펐지만, 이안은 할 수 있는 최대한 신체의 근육을 이완시켰다.
그 때.
“이안 공자님, 여기 계셨군요.”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이안은 고개를 돌렸다.
키가 이 미터는 넘어 보이는 거구.허리에는 기하학적 문양으로 장식된 검을 찬 사내가 팔짱을 낀 채 이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안은 기억창고를 뒤적였다.
‘은사자 기사단장, 칼리번 만스타인 백작.’
아슈타르에서 검에 대한 조예가 가장 깊다 전해지는 세 자루의 검 중 하나이자 다섯 무력집단 중 하나의 지휘자.
어째서 그가 이안을 찾아왔단 말인가.
“생각보다 신체 상태는 괜찮으시군요. 살이 조금 많이 붙으시긴 하셨지만 근육량이 제법 많아 보이십니다. 마력도…아직 오러로 정제되지는 않았지만 상당한 양이고요.”
“난 등급이 매겨지는 돼지가 아냐. 공무가 바쁘신 기사단장이 여기까지 무슨 일이지?”
품평하듯 말하는 칼리번의 태도에 기분이 나빠진 이안이 툴툴대자, 사내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공작 전하의 명입니다.”
칼리번은 허리춤의 검을 뽑아들었다.
곧게 뻗은 검신 아래로 새겨진 기하학적 무늬는 그가 가진 무기가 평범한 검이 아닌 마법병기라는 증거.
“공자님께선 앞으로 저와 함께 아슈타르에 내려오는 마력운용법과 오러 정제, 그리고 가전검술을 익히실 겁니다. 오늘은 공자님의 실력도 알아볼 겸 가볍게 대련 위주로 가지요.”
검을 뽑아 든 칼리번은 손가락으로 뒤쪽의 철검을 가리켰다.
그제야 이안은 일련의 상황이 농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아슈타르의 마력운용법과 오러 정제법. 분명 탐나는 존재다.
고작해야 탈마공의 마력운용법 중에서도 기초중의 기초만을 알고 있는 이안으로서는, 제대로 된 마력운용법과 체내의 마력을 힘으로 변환할 수 있는 오러 정제법이 필요했으니까.
하지만.
“싫은데?”
익살스런 미소와 함께 내뱉은 이안의 말을 들은 칼리번의 눈썹이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