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 막내는 원샷원킬-8화 (9/224)

#8화

“오만하군.”

이안의 선언을 들은 라이덴은 입술을 뒤틀었다.

난쟁이들이 300년에 걸쳐 연마했다는 적창 이그니스의 소유자.

그리고 헤츨링 슬레이어인 라이덴 구스타프의 귀에, 돼지처럼 뒤룩뒤룩 살찐 이안의 말은 너무나 오만하게 들렸다.

만병지왕(萬兵之王)이 무엇인가.

이 세상의 모든 병장기들을 줄 세워 늘어놓았을 때, 가장 앞줄에 선 병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던가.

‘제법 근성은 있는 놈 같기는 했다만.’

그것과 이것은 다른 문제다.

“고작해야 처음 얻은 무기 따위에 만병지왕이라는 말을 붙이다니.”

일평생 창에 모든 것을 걸어온 라이덴에게, 이안의 말은 그 자체로 모욕이었으니까.

“열심히 하길래 제법 괜찮은 녀석인 줄 알았더니, 어처구니가 없군. 지방이 뇌까지 차버리기라도 한 거냐?”

“그럼.”

철컥

이안이 왼손을 움직이자 권총의 슬라이드가 앞으로 밀려나갔다. 그는 그대로 총구를 겨누었다.

“시험해보던가. 그 고철덩어리로 말야.”

“이 돼지자식이….”

명백한 도발.

이안의 도발을 정면으로 받은 라이덴은 적창, 이그니스를 꾹 쥐었다.

녀석과의 거리가 멀기는 하지만 오러를 사용하면 지척.

헤츨링의 두터운 비늘에 비하면 놈의 비계 덩어리는 방해조차 되지 못한다.

‘단숨에 꿰뚫는다.’

라이덴의 다리에 미증유의 힘이 깃들었다.

한 발만 떼면, 그의 몸뚱이는 화살처럼 날아가 돼지의 심장을 꿰뚫어 버릴 것이다.

하지만 그는 움직일 수 없었다.

‘뭐지?’

분명 눈앞의 돼지는 가만히 서 있었다. 녀석의 페르소나로 추정되는 이상한 막대기를 겨눈 채.

하지만 이상한 막대기가 그를 겨눈 순간.

‘무슨….’

라이덴의 본능이 위험신호를 내보냈다.

이렇게 먼 데도, 적의 간격 안에 이미 들어온 것 같은 긴장감이 라이덴의 침을 바짝 마르게 했다.

‘저 조그만 막대기가, 활만큼 먼 거리에서 공격이 가능하다고?’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의 본능을 믿어야했다.

순간, 라이덴의 눈이 이안과 마주쳤다.

살기.

용족의 새끼, 헤츨링에게서도 느껴보지 못한 농축된 살기가 이안의 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죽는다.’

객관적인 전력을 비교한다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

하지만 라이덴은 여태껏 수십 번의 위기를 피하게 해준 제 본능을 무시할 수 없었다.

“뭐야,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굴더니?”

제 자리에 얼음처럼 굳어버린 라이덴을 본 이안이 피식, 웃어버렸다.

오랜만에 권총을 당겨볼 기회가 있을까 싶어 기대했지만, 일이 이렇게 되자 조금 김이 새 버렸다.

이안은 겨누고 있던 권총을 아래로 내렸다.

동시에, 라이덴을 압박하던 살기가 거두어졌다.

“크윽….”

하지만 참룡공의 장자는 차마 이안에게 덤빌 엄두를 내지 못한 채 이를 갈았다.

“라이덴이….”

“도대체 어떻게….”

“뭐, 구경났어? 볼일 다 봤으면 집에 가서 발 닦고 잠이나 자라고.”

말을 마친 이안은 발걸음을 옮겼다.

침묵에 잠긴 홀의 내부에는 이안의 발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곧, 이안은 자신의 방으로 사라졌다.

그가 사라질 때까지, 그 누구도 자리에서 감히 움직일 수 없었다.

“생각보다 더 빛나는 아이였잖아?”

혀로 입술을 축이는 차기 신궁과.

“계약을…계약을 연장해야 해.”

눈이 풀려버린 반마족을 제외하고.

***

“공자님, 오셨습니까?”

방으로 돌아온 이안에게 도노반이 예를 표했다. 이안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늦으셨군요. 무슨 일이라도?”

“아니, 아무 일도 없었어.”

도노반은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젓는 이안을 보곤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다.

영성의 홀에서 있었던 일을 알게 된다면 온갖 난리법석을 피웠겠지만, 하루종일 방을 지킨 도노반이 알 수 있는 일은 아니었으니까.

‘응?’

돌아온 이안의 몸을 훑어본 도노반이 눈에 이채를 띄었다.

“공자님, 예전과는 조금 달라지셨군요.”

조금이 아니다.

이안의 몸은 영성의 홀에 오기 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 할 정도로 바뀌었다.

극적으로 줄어든 지방 아래로 조금이나마 늘어난 근육이 형태를 잡아주고 있다.

분명 비만한 몸뚱이임엔 틀림없지만, 제 지방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축 쳐져있던 때보다는 조금 더 탄력 있는 몸매였다.

거기에, 페르소나를 제작할 때 움직였던 마력이 지방을 연소시키면서 신체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지구의 말을 빌리자면, 고도비만에서 경도비만 정도로 내려간 수준이랄까.

‘역시, 칠영웅의 피는 속일 수 없는 것인가….’

칠영웅이 가진 혈통은 그 자체로 평범한 인간을 뛰어넘게 만든다.

그렇지 않았다면, 연합공국은 진작 마족과 제국, 연방 사이에 끼어 소멸했을테니까.

‘하지만, 혈통이 성격을 바꾸는 것은 아닐텐데….’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던 도노반은 더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운동을 조금 했지.”

“조금이 아닌 것 같습니다만. 성과는 있으셨습니까?”

쓴웃음을 지으며 묻는 도노반의 물음에, 이안은 말없이 권총을 들어보였다.

“이건….”

“그러니까, 만병지왕이라고 해야 하나?”

“몸만 좋아지신 줄 알았더니, 허풍도 심해지셨군요.”

이안의 말을 농으로 생각한 도노반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만병지왕이라니.

페르소나가 보통의 무기보다 강력한 것은 사실이지만, 결국 전투는 무기보다는 사람에 의해 결정된다.

모든 병기의 왕이라니, 너무나도 오만하고 자기중심적인 수식어이지 않은가.

“다른 공자님들께 그렇게 말씀하시면 불같이 화를 내실 겁니다. 조심하십시오.”

이안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영성의 홀에서의 일을 생각해보면, 도노반의 말처럼 시비가 붙을 가능성은 충분했으니까.

‘하지만 사실인 걸 어떡해.’

지구가 돈다는 걸 부정할 수 없는 것처럼.

“알았어. 조심할게.”

“좋은 자세입니다, 공자님.”

‘변했어.’

이안의 말을 들은 도노반의 눈빛이 바뀌었다.

도노반이 알던 이안은 자신의 행동을 수정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제 욕망의 흐름에 따라 삶을 결정하는 자. 모든 가치의 판단기준이 자신의 가치가 아닌 자신의 욕망인 자.

그런 자에게 도노반의 충고가 씨알이라도 먹혔을 리 없다.

긍정적인 변화였다. 가문으로서도, 개인으로서도.

“그럼, 이쪽으로 오십시오. 공자님의 짐은 이미 다 챙겨두었습니다.”

도노반의 안내에 따라 이안은 발걸음을 옮겼다. 곧 둘은 건물을 벗어나 섬의 외곽으로 향했다.

“흠, 저건….”

목적지에 세워진 무언가를 바라본 이안의 입에서 신음성이 새어나왔다.

영성의 홀이 위치한 섬, 라이나를 감싼 바다에선 사시사철 소용돌이가 휘몰아친다.

아무리 튼튼한 범선이라도 거대한 소용돌이 앞에선 조금 커다란 널빤지일 뿐이다.

그러니, 이 섬에 들락거릴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뿐.

“1급 비행전열함, 골든 라이온입니다. 공자님께서도 타고 오시지 않았습니까?”

“음, 그랬지.”

이안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의 눈은 허공에 떠 있는 배를 떠나지 못했다.

분명 기억창고 속에는 하늘을 나는 배에 대한 기억이 존재했다.

‘실제로 보니 더 그럴싸한데.’

하지만 그것이, 날개 없이 하늘을 나는 거대한 배에 대한 경외감을 지워주진 못했다.

‘정말 이 세계는, 독특해.’

마력과 신성력에 편중된 기술발전은, 지구와는 전혀 다른 독특한 문명을 일궈내고 있었다.

“충! 이안 아슈타르 공자님의 승함을 환영합니다!”

비행함에 올라타자 함장으로 보이는 옷을 입은 자가 경례를 올려붙였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몸을 떠는 것이 영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

이안은 어설픈 경례로 답한 다음, 함수에 마련된 전용석에 앉아 창밖을 바라봤다.

이안이 탑승하자마자 하늘로 떠오른 비행함은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소용돌이치는 바다 너머, 검게 보이는 땅이 이안의 눈에 들어왔다.

공국의 최남단을 수호하는 신검공의 영역, 아슈타르 공작령.

저 땅에 들어서는 순간, 이안은 새로운 투쟁을 맞이해야 할 것이다.

‘지루할 일은 없겠어.’

그리고 투쟁은 이안이 가장 잘하는 일.

조금씩 가까워져 오는 육지를 바라보던 이안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

비행은 길지 않았다.

30만 갈리움의 마력을 생산해내는 마력엔진의 힘은 그만큼 강력했다.

떠오른 해가 중천에 머물기도 전.

“벌써 도착했다고?”

골든 라이온은 아슈타르 공작령의 수도, 슈바이크에 도착했다.

‘제법 넓은데?’

푹신한 소파에 몸을 묻은 채 아래를 내려다보던 이안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건물의 양식은 영락없는 지구의 중세.

하지만 밀집도와 건물의 규모는 어지간한 한국의 중소도시를 연상케 했다.

‘밭이랑 가축이나 좀 있을 줄 알았는데 말야.’

노예처럼 부려지는 농노와 성에서 하녀를 겁탈하는 악덕영주를 상상했던 이안의 선입견은 이미 산산조각 나버린 상황.

아침부터 활기차게 돌아다니는 주민들과 상인들.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배치된, 엄정한 규율 하에 도시를 수호하는 병사들.

가히 신검공의 격에 어울리는 영지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기이이잉

비행함은 곧 도시의 중심, 아슈타르 성내에 위치한 전용 정거장에 내려앉았다.

착륙의 짧은 진동이 끝나자 비행함 현측의 문이 열렸다.

“자, 어디 고향땅을 밟아보실까?”

내릴 준비를 마친 이안은 고향을 향해 발을 내딛었다.

하지만.

‘뭐지?’

계단을 내려가던 이안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환영 인파 따위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도시를 지배하는 아슈타르 공작가의 삼 공자, 신검공의 아들이 도착했는데도.

‘호위병력이 없다고?’

무언가 이상했다.

“도노반 경.”

“네, 공자님.”

“복귀한 가문의 공자를 호위도 없이 내팽개치는 게 일반적인 일이야? 혹시, 가문의 전통이라도 되는 건가?”

“음, 그건 아닙니다. 어찌 된 일인 지, 저도 영문을 모르겠군요.”

하지만 고개를 제대로 들지 못하는 도노반의 모습을 본 이안은 무언가가 있다고 확신했다.

‘그래, 이런 망나니가 정상적인 평판을 갖고 있을 리 없지.’

이안도 대강 기억창고를 뒤져봐서 알고 있었다.

이 몸의 원 주인은, 구제불능의 망나니란 사실을.

평판이 멀쩡하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생각보다 어려워지겠는데.’

부정적인 평판을 긍정적으로 바꾸는 작업은 그 역보다 수 배는 어려운 일.

앞으로의 고생을 직감한 이안의 눈썹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고.”

그렇다 해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안과 도노반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하지만, 이상한 기운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 이안 공자님….’

‘이안 공자님이다, 조심해!’

자신을 피하는 하인들의 말을 들은 이안의 표정이 점차 굳어가기 시작했다.

몸 안을 휘도는 마력의 영향으로 강화된 감각은, 성 내에 거주하는 하인들의 속삭임을 너무나 선명하게 전해주었다.

‘우선은 방으로 들어가자.’

예상보다 상황이 더 좋지 않은 것 같았다.

방 안에 들어가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할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었다.

곧, 이안은 자신의 방에 도착했다.

“돼지 목에 진주네, 진주야.”

방문을 연 이안의 첫 감상이었다.

벽에는 어울리지도 않는 황금이 마치 벽지처럼 칠해져 있었고, 이름을 부르기도 어려운 온갖 보석들이 황금 사이사이에 꽂혀있었다.

거기에, 격에 맞지도 않는 저 호화로운 가구들과 네 사람은 너끈히 잘만한 침대는 뭐란 말인가.

집 지하에 유전이 터진 졸부도 이렇게 천박하게 꾸미지는 않으리라.

“도노반 경.”

“네?”

“집사에게 일러서 저 벽에 붙은 황금과 보석, 전부 떼어 버려. 이것도, 이것도, 이것도. 다 치워버린 다음 평범해 보이는 물건으로 가져오고.”

“이걸…전부 말씀이십니까?”

여기저기를 가리키는 이안의 손가락을 따라간 도노반은 당황했다. 이안의 말대로라면, 이 방의 거의 모든 가구들과 장식들을 치워버려야 했으니까.

“전부. 팔아서 돈으로 가져와.”

“…알겠습니다, 공자님.”

하지만 이안은 단호했다. 도노반이 방을 나가자, 이안은 거대한 침대 앞에 걸터앉아 생각했다.

‘우선 자금이 생겼군.’

이 분야에 문외한인 이안이었지만, 이 방을 꾸민 귀금속들과 가구들이 적지 않은 가격이란 사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이것을 전부 돈으로 바꾼다면 활동비로 부족함이 없으리라.

그 때.

노크소리가 들렸다.

“공자님,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래.”

아마도 하녀로 짐작되는 여성의 목소리. 이안의 승낙에 곧 문이 열렸다.

“저, 공작전하께서 서신을 보내셨습니다.”

말을 마친 하녀가 손을 덜덜 떨며 이안에게 다가왔다.

‘왜지?’

상대의 작은 행동으로 심리를 파악할 수 있는 기술, 콜드리딩(Cold Reading)을 익힌 이안은 상대의 감정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공포.

공포가 그녀의 전신을 지배하고 있었다.

아무리 이안의 평판이 좋지 않다지만, 이것은 좀 이상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안의 눈빛을 다르게 이해한 것 같았다.

“아, 알겠습니다, 공자님. 잠시만…”

하녀가 다가오다 말고 갑자기 온 몸을 벌벌 떨며 옷을 벗기 시작한 것이다.

“뭐, 뭐 하는 짓이야 지금?”

상상도 못한 행동에 이안은 당황해 소리쳤다.

순간, 이안은 배에서 도시를 바라보며 했던 생각이 떠올랐다.

밭에서 노예처럼 부려지는 농노.

그리고 성에서 하녀를 겁탈하는 악덕 영주.

“죄, 죄송합니다!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제가 모든 처벌을 받을테니, 제발 제 동생만은…”

그리고 웃옷을 벗다 만 하녀가 바닥에 넙죽 엎드려 용서를 빌고 있었다.

‘미친.’

그제야, 이안은 그 악덕 영주가 자신이란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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