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국정원 최고의 블랙 요원 강민혁.
그는 자신이 얻은 새로운 몸뚱이의 성능을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있었다.
‘개쓰레기.’
이 몸뚱이의 문제점은 많아도 너무 많았으니까.
‘폐활량이랑 근지구력은 인간 이하고, 디스크랑 관절도 박살 직전이야. 유연성은 왜 이래?’
달리면서 느껴지는 전신의 고통에 그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확실한 건 하나.’
그는 이 비루먹은 몸에서 몇 안 되는 가능성을 찾았다.
‘덮칠 수만 있으면 충격은 확실하겠어.’
아이러니하게도, 이안의 몸을 얽매고 있는 지방들은 그 자체만으로 썩 쓸 만한 질량병기였으니까.
‘무슨 모래주머니도 아니고.’
지금까지는 몸뚱이에 붙어 신체 능력을 끌어내리고 있던 족쇄.
하지만, 그 족쇄 덕에 이안은 단 한 번의 기회를 얻었다.
‘어디….’
상대를 향해 돌진하던 그의 눈이 까무잡잡한 사내, 발렌 게인워드의 눈으로 향했다.
이안은 상대의 눈빛을 세심하게 읽어냈다.
‘자만하고 있어.’
감히 돼지 따위가 자신을 해할 수는 없을 거라는, 방심과 자만으로 가득한 놈의 눈동자.
‘좋아.’
상대의 방심을 노려야 하는 이안으로서는 불행 중 다행.
스릉
달리면서 검을 뽑아 든 이안의 육중한 팔이 부들거렸다.
고작해야 3킬로그램 남짓한 장검조차도, 초고도비만의 육체에겐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는 물건.
‘이딴 몸으로 싸워야 한다니.’
항상 완벽에 가까운 육체로 적과 맞서왔던 민혁으로선 한숨밖에 나오지 않는 상황.
하지만 딱히 방법이 없었다.
‘여기서 지고 들어가면 끝이다.’
이안은 검을 쥔 오른팔을 최대한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빌어먹을.’
무거웠다.
검을 휘두르는 순간,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손아귀는 검을 놓쳐버리리라.
하지만 이안은 해결책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
‘검을 휘두를 수 없다면.’
그냥 놓아버린다.
“흡!”
휘이익
발렌을 향해 달리던 그는 검을 내리치면서 손아귀의 힘을 풀어버렸다.
“헛!”
멧돼지처럼 달려드는 이안을 가당찮게 바라보던 발렌은 순간 당황했다.
쐐애액
이안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온 검이 그대로 자신을 향해 날아오고 있지 않은가.
‘하, 고작 이런 잔재주를?’
하지만 발렌은 코웃음을 치며 몸을 살짝 틀었다.
씨잉!
곧, 쏘아져 나간 장검이 허공을 갈랐다.
‘멍청하긴.’
제대로 힘도 쓰지 못하는 돼지가 던진 검이다. 피하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
하지만.
촤아악!
발렌은 뒤이어 날아온 모래알까지 피하지는 못했다.
“이, 이런 비겁한!”
방심하던 발렌이 황급히 팔을 들어 모래를 막아내곤 욕을 내뱉었다.
‘칭찬인데?’
그 말을 들은 이안은 입꼬리를 올렸다.
과정보다 목적을 중시하는 직업에 종사했던 그에게, 비겁하다는 말은 적에게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칭찬.
“흐읍!”
발렌과의 거리를 좁힌 이안은 곧장 왼쪽 팔꿈치를 앞으로 내밀었다.
이 쓸모없는 육체가 가진 거의 유일한 무기.
‘아무리 쓰레기 같은 몸뚱이라도 관절부는 단단하니까.’
물론, 이걸 휘두르고도 팔꿈치가 버텨줄 지는 별개의 문제였지만.
‘팔꿈치에 모든 충격을 집중시킨다.’
복도를 걸어오면서 이 몸이 어느 정도의 내구성과 근력을 가졌는지는 대강 파악했다.
그리고.
꾸드득
전신 근육의 완전한 통제는 이안의 장기 중 하나.
꾸드드득!
목표가 사정거리에 들어온 순간, 이안은 온몸의 근육을 일시에 움직였다.
‘한 번뿐이야.’
그 이상은 버틸 수 없다.
비루먹은 몸뚱이의 모든 힘이 이안의 의지에 따라 한 방향으로 쏠렸다.
후웅
순간, 그의 몸이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회전했다.
이안이 휘두른 팔꿈치가 마치 공성추처럼 적의 명치를 때려 부수기 위해 쏘아져 나갔다.
이윽고.
쿠웅
우드득
묵직한 소리가 홀의 돔 모양 지붕을 타고 흘렀다.
‘위력은 나쁘지 않았어.’
공격을 적중시킨 이안은 적의 상태를 확인했다.
이 공격이 급소에 명중한다면 일반인 정도는 일격에 즉사시킬 수 있는 위력.
막아낸다 해도 팔 하나 정도는 부러뜨리기에 부족하지 않으리라.
하지만.
“큭.”
고통으로 얼굴을 찌푸린 것은 이안이었다.
‘약하다, 약하다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의 일격을 막아낸 발렌의 오른팔은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을 뿐더러, 되려 부러진 것은 이안 자신의 팔.
‘이제 어쩔래?’
발렌의 눈이 이렇게 말하며 비웃는 것 같았다.
유일한 공격수단이었던 팔은 부러진 상태.
아무것도 남지 않은 이안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벌레처럼 꿈틀거리며 용서를 비는 것뿐.
‘그래.’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바로 그거야.’
이안이 원하는 대로.
쩌억
이안은 입을 크게 벌렸다.
원체 잘 먹어서 그런 것인지, 보통 사람의 곱절만큼 크게 벌어진 입안에 튼튼한 치아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후웅
그 순간에도 이안의 몸은 육중한 몸의 관성을 이기지 못하고 회전했다.
“끄으.”
부러진 팔이 안으로 말리면서 끔찍한 고통이 뇌를 짓이겼다.
하지만 이안은 눈앞의 목표에 집중했다.
그러니까.
‘목덜미.’
콰득!
“끄아아악!”
목덜미를 물린 폭공의 다섯째 아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인간의 치악력은 동물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한 편.
하지만 그 힘이 치아 일부에만 집중된다면 쉽게 무시할 수 없다.
거기에.
“끄아악! 이 돼지 새끼!”
100킬로그램을 우습게 넘기는 이안의 체중이 실린다면.
으드득
발렌의 목에서 새어 나오는 붉은 피가 구릿빛 피부를 타고 흘러내렸다.
“저리, 저리 안 꺼져?”
“으, 으읍.”
발렌은 어떻게든 이안을 떼어내려 했지만, 이안은 마치 악어라도 된 듯 절대로 턱의 힘을 풀지 않았다.
조금의 시간만 주어진다면, 그의 이빨은 확실하게 상대의 대동맥을 끊어버릴 수 있으리라.
“이, 이 빌어먹을 돼지 새끼가!”
우웅
결국, 생명의 위협을 느낀 발렌은 아끼던 힘을 풀 수밖에 없었다.
쐐애액
발렌의 발이 이안의 비만한 배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여느 인간과는 다르게 비대한 체구를 가진 이안이었지만.
파앙!
그의 육중한 몸이 하늘을 나는 데에는 발차기 한 번으로 충분했다.
“커, 커헉….”
바닥에 나동그라진 이안은 입에서 검은 피를 토해냈다.
부러진 왼팔과 앞니, 그리고 내상까지.
사실상 빈사 상태가 되어버린 이안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쓰러졌다.
하지만.
‘화가 잔뜩 났군.’
이안의 입꼬리가 슬쩍, 치켜 올라갔다.
눈앞의 적이 자신을 향해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었으니까.
“빌어먹을….”
폭권공, 게인워드 공작가의 가훈은 어울리지 않게도 평정(平靜).
주먹만으로 날붙이들을 상대하기 위해선 냉철한 이성과 부동심이 요구되었으니까.
하지만.
“감히….”
지금 이 순간.
“용서 못 해….”
폭권공, 브라움 게인워드의 다섯째 아들인 발렌 게인워드의 평정은 깨져버렸다.
감히, 가문에서 쫓겨난 것이나 마찬가지인 놈이.
“내 오러를 낭비하게 만들어…?”
오러는 인간이 인간을 넘어설 수 있게 만드는, 마력의 변형된 형태.
오러의 재료인 마력은 이곳에서만 제작할 수 있는 대 마족병기, 페르소나를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였으니까.
“이, 이 돼지 새끼… 죽여 버릴 거야….”
조금이라도 더 좋은 성능의 페르소나를 만들어내기 위해 마력을 아끼고 아껴왔던 발렌으로서는 분통이 터질 수밖에.
“후우우….”
발렌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아직 목덜미에 부러진 앞니가 박혀있었지만, 분노에 휩싸인 발렌은 아무런 통증도 느낄 수 없었다.
으드득
살의.
지독한 살의만이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빌어먹을.’
살기로 가득찬 녀석의 눈빛을 마주한 이안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생각보다 강했어.’
팔이 부러질 때까지만 해도 몰랐지만, 녀석에게 걷어차여 하늘로 날아갈 때야 깨달았다.
‘이건 인간의 힘이 아니야.’
마지막 공격으로 녀석을 끝장낼 가능성은 있었지만, 그걸 실행하기엔 상대가 너무 강했다.
그래도.
‘아쉽다.’
조금만, 조금만 더 강했다면.
두 번째 삶을 살 수 있었을 텐데.
“크, 크크크, 쿨럭! 쿨럭!”
입에서 죽은피를 토해내면서도 이안은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새롭게 얻은 삶이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끝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죽여… 죽여 버릴 거야…”
그의 눈에, 목에서 피를 철철 흘리는 사내가 들어왔다.
우웅
발렌의 멀쩡한 왼팔에 순백의 발톱이 덧씌워지기 시작했다.
아무런 병장의 도움 없이, 무형의 오러를 발톱의 형태로 유형화시키는 게인하드 공작가의 비전.
‘끝이야.’
이안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 순백의 발톱에 닿는 순간, 비계로 가득 찬 자신의 몸뚱이는 단숨에 육편으로 변해버리리라.
“죽인다…”
영성의 홀에서 살인은 금기 중의 금기였지만, 상대는 이미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저벅저벅
피에 굶주린 호랑이가 천천히, 한 걸음씩 실실 웃는 이안을 향해 다가갔다.
“죽어… 죽어!”
쐐애액
이윽고, 녀석이 왼팔의 발톱을 쓰러진 이안에게 휘둘렀다.
‘젠장, 이럴 거면 왜 다시 살아난 거야?’
죽음을 직감한 이안이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때.
피잉!
빛살.
세 줄기의 빛살이 발렌과 이안 사이를 갈랐다.
‘어?’
순간, 발렌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갑자기 없던 자비심이 생긴 것이 아니라, 빛살들이 가지고 있는 흉험한 기세 때문이었다.
파앗
그의 몸이 재빨리 뒤로 젖혀졌다. 그 사이로 빛살이 파공성과 함께 발렌의 가슴 앞을 스쳐 지나갔다.
쩌저적
“무, 무슨 화살이…”
화살이 꽂힌 벽에 커다란 금이 간 것을 두 눈으로 본 놈의 눈이 커졌다.
그것은 이안도 마찬가지.
‘저게, 화살이라고?’
인간의 힘으로는, 아니 기계의 힘으로 장전하는 석궁이라도 저만한 파괴력을 낼 수는 없다.
‘중기관총 정도는 가져와야겠는데?’
화살의 위력을 가늠해보던 이안의 고개가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향해 돌아갔다.
그 시선의 끝에 나타난 것은.
“여기가 어딘지 잊은 거야?”
활을 쥔 은발의 소녀.
“짐승처럼 냄새나게 부비적대지 말고 저리 꺼지지 그래?”
머리색을 닮은 그녀의 은색 눈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기억창고를 뒤져본 이안은 곧 그녀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알리아 이그드라실.’
심안공이 지키는 요정의 땅, 이그드라실의 공녀.
‘그리고, 다음 세대의 신궁(神弓).’
이 자리에 모인 일곱의 자격자 중에서도 수위에 뽑힐 만큼의 실력자.
‘덕분에 목숨은 건졌지만.’
이안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이안은 영혼 없는 고깃덩이가 되었을 터.
그러니, 이안에게 저 은발의 요정족 소녀는 새 생명을 던져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이익…”
요정이 자신을 보고 비웃기 시작하자, 발렌은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하지만.
‘물러나고 있어.’
표정과 달리, 그의 몸은 한 걸음씩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여기 모인 자격자 중에서도 하위권에 가까운 발렌에게, 감히 차기 신궁에게 대항할 깜냥 따위가 존재할 리 없지 않은가.
‘살았다.’
분위기상, 당장 죽을 위기를 넘긴 것은 분명해 보였다.
그렇다면.
‘일단 회복부터.’
털썩
긴장을 풀어버린 이안은 그대로 자리에 쓰러져 기절했다.
***
“다니엘.”
기절한 이안을 잠시 바라본 알리아는 구석에서 두꺼운 책을 넘기던 청년을 불러 세웠다.
“이 돼지 좀 치료해 봐. 영성의 홀에서 송장을 치울 수는 없잖아?”
“허, 차기 신궁께서 돼지한테 관심이 있는 줄은 미처 몰랐군. 잡신들도 놀라 자빠지겠어.”
성광공의 아들, 다니엘이 비아냥거렸다.
그 말에 알리아는 어깨를 으쓱였다.
“돼지인 줄 알았는데, 이빨은 사자더라고.”
말을 마친 알리아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이안을 바라봤다.
‘제법인데?’
스윽
그녀의 혀가 요정의 메마른 입술을 적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