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 막내는 원샷원킬-2화 (3/224)

#2화

이안.

민혁이 그 이름을 들음과 동시에 눈 앞에 펼쳐진 것은.

‘야, 내가 누군지 알아?’

이 몸뚱이의 주인이 살아온 생애.

‘술 가져와, 술!’

‘얼마면 돼? 이 정도면 되겠어?’

탐식, 나태, 욕망.

절제와 금욕을 국가로부터 강요당한 민혁과는 정반대의 삶이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졌다.

‘검? 그 힘든 걸 뭐하러 익혀? 너나 많이 하세요.’

‘제발 그 책 좀 가져오지 마. 토할 거 같으니까.’

원하는 것은 취하고, 원치 않는 것은 버린다.

욕망에 충실했던 한 인간의 이십 년 인생이 민혁의 머릿속 기억창고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슈우우

끊임없이 돌아가던 인생의 상영이 끝났다. 동시에 하얘졌던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뭐, 뭐야?”

순간, 민혁은 혼란에 빠졌다.

지구의 NIS 요원 강민혁의 기억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기억이 제멋대로 뇌리에 쑤셔 박혀 있었으니까.

‘우선은 기억을 더듬어보자.’

생전 처음 겪는 일.

하지만, 알아내야 했다.

민혁은 머릿속에 새롭게 자리 잡은 기억을 하나둘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정리라도 잘 되어있으니 망정이지.’

자신의 기억이 아니기 때문일까.

민혁은 마치 도서관의 책처럼 머릿속 책장에 꽂힌 기억들을 재빨리 훑어 나갔다.

곧.

“이건….“

한참 동안 기억을 뒤적거리던 민혁은 이 몸의 내력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이름은 이안 아슈타르. 연합공국의 기둥 중 하나인 아슈타르 공작가의 막내.

그리고….

‘뭐야?’

이안의 사인을 확인한 민혁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몸의 원래 주인인 이안 아슈타르의 사인은.

‘이 돼지 새끼, 그냥 자다가 죽었잖아?’

다름 아닌 수면무호흡증.

말 그대로 자다가 죽어버린 게 아닌가.

‘너무 위험해.’

민혁으로선 참으로 곤란한 일이었다.

죽은 사람 처지에서야 고통 없이 편하게 갔으니 별문제야 없겠지만.

‘난 두 번 죽기 싫다고.’

그리고, 민혁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선.

‘일단 건강부터.’

그러지 않고선 앞으로의 남은 수명이 너무 불투명했으니까.

전 주인이 맞은 참혹한 최후가 이를 증명했다.

하지만.

“후, 후후.”

하지만 정작 민혁의 입에선 실소가 흘러나왔다.

거울 속 돼지의 입꼬리가 우스꽝스럽게 올라갔다.

‘이런 식으로 자유를 찾을 줄이야.’

국가로부터 채워진 목줄은 죽음과 함께 사라졌고, 남은 것은 자유로워진 영혼과 비만하지만 새로운 몸뚱이뿐.

‘이안 아슈타르.’

새 삶을 사는 데에 그 정도면 충분했다.

그때.

“공자님, 괜찮으신 겁니까?”

바로 등 뒤에서 들려온 중후한 목소리.

이안은 본능적으로 몸을 돌리며 재빨리 몸을 뒤로 뺐다.

하지만.

‘크윽?’

이안은 자신의 새로운 몸을 너무 과대평가했다.

쿠당탕!

이안의 빈약한 근육은 살찐 몸뚱이가 만들어내는 관성을 견딜 수 없었다.

미처 그 사실을 떠올리지 못한 결과는 처참했다.

와장창!

몸을 채 틀기도 전, 바닥에 구른 이안은 뒤에 있던 거울에 몸을 처박았다.

볼썽사납게 나뒹군 이안의 옷 위로 깨진 유리가 쏟아졌다. 몇몇 조각들이 스쳐 지나간 피부에 붉은 실선이 그어졌다.

“끙….”

온몸이 욱신거리는 고통을 참으며 이안은 상대를 올려다봤다.

“고, 공자님, 도대체 이게 무슨…”

허리춤에 검을 찬 채 안타까운 표정을 지은 노인.

얼굴과 피부의 자글자글한 주름이 노인이 살아온 세월을 짐작케 했지만.

‘호오?’

이안은 노인의 옷 안에 숨겨진 탄탄한 육체를 눈치채곤 놀랐다.

‘전투에 최적화된 육체야. 못해도 수십 년은 단련했겠는데.’

감탄한 그는 잠시 머릿속 기억창고의 기억을 뒤져보곤, 노인의 이름을 힘겹게 내뱉었다.

“도노반 경?”

“네?”

이안의 부름에 노인의 눈이 놀란 듯 치켜떠졌다.

‘젠장.’

이안은 자신이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돼지 새끼는 자기 호위기사 이름도 못 외워?’

이안이 발붙인 대륙, 아스텔리아는 마치 중세나 근대 유럽과 유사한 신분제를 가지고 있었다.

눈앞의 노인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호위기사.

얼마나 멍청한 녀석이면 자기 호위기사의 이름까지 잊어버린단 말인가.

수습해야 했다.

“미안, 내가 착각했나 본데. 이름을 다시 알려주겠어?”

이안은 눈앞의 노기사에게 순순히 사과했다.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두 번의 실패를 막기 위한 일이었으므로.

하지만.

“예?”

이안의 사과를 들은 도노반의 표정은 더욱 이상해졌다.

“왜?”

“아, 아닙니다, 공자님. 그보다 시간이 늦었습니다. 서둘러 영성의 홀로 가셔야…”

의아해진 이안이 묻자 도노반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려왔다.

기사의 말에, 이안은 영성의 홀에 대한 정보를 떠올렸다.

‘대 마족병기, 페르소나를 수여 받을 자들이 일주일 동안 모여 대기하는 곳.’

그리고 오늘은 사흘째가 되는 날.

“알았어. 지금 갈게.”

도노반의 말을 이해한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끙차.”

욱신거리는 몸을 간신히 일으킨 이안은 셔츠에 묻은 유리 조각들을 대충 털어낸 다음.

“젠장, 이거 왜 이렇게 안 맞아?”

문 옆에 널브러져 있는 자신의 검을 낑낑대며 허리에 찼다.

끼익

“그럼, 방 정리를 좀 부탁할게.”

검집을 묶는 띠가 살려 달라 비명을 질러댔지만, 이안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도노반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안 아슈타르. 이게 내 새로운 삶이다.’

평생을 이곳에서 살 거라면, 이계의 귀족이라는 새로운 신분에 적응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도노반은 고개를 갸웃했다.

“저, 그러면 이번엔 제가 같이 가지 않아도…”

“그게 무슨 소리야? 영성의 홀에는 호위를 데려가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닌가?”

도노반의 말에 이안은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노기사를 바라봤다.

‘영성의 홀은 페르소나를 받을 사람들에게만 입장을 허가하는 것이 원칙.’

그 사실을 기억해낸 이안은 굳이 도노반을 데려갈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아, 아닙니다, 공자님. 아슈타르의 뜻대로.”

뭐라 말을 이어나가려던 도노반은 말을 멈추고 예를 취했다.

이안은 대강 고개를 까딱인 다음 문을 나섰다.

곧, 도노반은 텅 빈 방에 홀로 남겨졌다.

홀로 남은 그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경?”

근 십 년 동안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말.

작은 주군의 말을 곱씹던 노기사의 표정이 묘해졌다.

***

‘더워.’

땀에 젖어가는 셔츠를 내려다보며 이안은 인상을 찡그렸다.

‘무슨 물먹은 솜도 아니고.’

단련이라고는 평생 해본 적 없는 육중한 몸에서 땀이 비 오듯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고작 삼 분을 걸었을 뿐인데.

‘빌어먹을 몸뚱이.’

이안은 이 몸의 전 주인을 생각하며 이를 갈았다.

단언컨대, 이안의 전생을 통틀어 몸 상태가 이렇게 좋지 않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북에서라면 모를까… 아냐.’

전생을 떠올려보던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북에서 삼 주 동안 풀뿌리만 캐 먹으며 인민군의 추적을 피하던 때에도 지금보단 체력이 좋았으니까.

‘빨리 방법을 찾아야겠어.’

안 그러면 제 명에 죽지 못하리라.

이안은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릴 것 같은 육중한 몸을 끌고서 영성의 홀까지 도달했다.

“허억, 허억.”

억지로 상체를 세운 이안은 바닥에 쓰러지지 않으려 애썼다.

모든 힘을 이동에 쏟아 부은 다리가 부들부들 떨려왔다.

“젠장, 허억.”

숨을 헐떡이던 이안은 이를 악물고 다리에 힘을 주었다.

‘여기서 쓰러지면 안 돼.’

이곳은 자격을 인정받은 일곱 공작가의 자제들이 한 데 모이는 곳.

이안이 된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았지만, 자신과 비슷한 연배의 꼬맹이들 앞에서 추태를 부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때.

“뭐야, 돼지잖아?”

최대한 허리를 편 채 간신히 숨을 고르던 이안의 귓가에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저절로, 이안의 고개가 목소리의 방향을 향해 돌아갔다.

“허, 그래도 지가 돼진 줄은 아나 봐? 일말의 양심은 있는 돼지였네.”

구리로 빚은 것 같은 근육질의 몸뚱이를 가진 흑발의 사내.

말을 연상케 하는 자글자글한 근육이 사내의 팔과 다리를 따라 오밀조밀하게 배치되어있었다.

‘제법 단련한 몸이야.’

이안은 상대의 잘 벼려진 육체에 순수하게 감탄했다.

곧.

‘발렌 게인워드.’

그의 머릿속에 상대에 대한 정보가 프로필처럼 떠올랐다.

‘박투술의 정점에 달했다고 전해지는 폭권공의 자식.’

상대의 출신은 연합공국의 일곱 기둥 중 하나.

이안과는 거의 동격의 상대였지만.

“어이, 돼지. 할아범은 어디로 갔냐? 먹이 찾으러 갔나 보지?”

하지만 발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안을 바라보는 놈의 눈빛은 경멸로 가득 차 있었으니까.

‘놈들뿐만이 아냐.’

분위기를 파악한 이안의 기분이 조금 나빠졌다.

홀 안에서 이안을 유심히 지켜보던 다른 자격자들의 눈 또한 녀석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으니까.

‘어쩐지, 내가 너무 쉽게 생각했어.’

그제야 이안은 도노반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비루먹은 몸뚱이의 전 주인은.

‘호위기사 없인 나오지도 못할 수준이었다, 이거지? 나약한 놈.’

상황을 파악한 이안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몸뚱이를 만든 녀석이 제대로 된 투쟁심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지.’

최선을 다해 그를 지켜주는 노기사와 살생을 금하는 규정 덕택에 몸은 보존했던 모양이었지만, 멸시의 눈초리까지 피하기엔 부족했으리라.

“왜 말이 없어? 돼지라서 사람 말을 잊어먹기라도 한 건가? 엉?”

그렇지 않았다면, 감히 자신의 면전에서 이런 모욕을 줄 생각을 할 리는 없을 테니까.

‘보자 보자 하니까.’

민혁은 이 상황이 맘에 들지 않았다.

“야, 깜둥이.”

예의를 갖출 필요는 없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예의가 아니라 상대에게 밀리지 않을 기세.

“뭐, 뭐?”

“귓구멍이 막혔냐? 너 말이야, 너. 까만 놈.”

놀란 발렌이 말을 더듬기 시작하자 이안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귀 파는 시늉을 했다.

‘저 자식이 미쳤나?’

순간, 발렌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운동이라고는 숨쉬기도 안 해봤을 것 같은 돼지가, 자신이 눈만 부라려도 고개를 숙이던 버러지가.

‘감히, 나를 모욕해?’

받아들일 수 없었다.

몇 마디 되지도 않는 말에 발렌의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그리고.

‘좋아.’

그게 바로 이안이 바라는 것.

“이, 이 돼지 자식이….”

씩씩거리며 분을 참지 못하던 발렌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후회하게 해주마.’

아까운 오러를 낭비할 생각은 없었지만, 저 무례한 돼지를 내버려 둘 생각도 없었다.

그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뭐야?’

발렌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직면했다.

파앗

온 힘을 다해 도약한 돼지, 이안이 발렌을 향해 정면으로 달려들고 있었으니까.

‘기회는 단 한 번.’

뒤뚱거리며 달리는 이안의 머릿속엔, 이미 상대를 요리할 레시피가 적혀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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