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2
<공략자들 262화>
라스틴의 형체가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끼아아아악!
한순간, 그의 몸에서 정체불명의 물체가 떨어져 나왔다.
반투명한 회색빛의 물체는 귀곡성을 터뜨리며 하늘을 날아다녔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지금까지의 라스틴에게서 느낄 수 없었던 수도 없이 많은 이질적인 기척이 느껴졌다.
“이 탑에서 이루어진 모든 건 내가 디자인하고 내가 만들어 냈다.”
쿵! 콰앙!
찰나에 휘둘러진 공격.
공략조 탱커 3조가 측면으로 돌며 공격을 막았다.
-끼아아악!
그러나 그 공격은 물리적인 것이 아니었다.
한순간, 동공이 풀리며 축 늘어지는 길드원들.
그 위로 거무튀튀한 안개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새끼들아! 정신 차려라!”
콰아아앙!
전위에서 자유자재로 움직이고 있는 임태호가 그 안개를 막아 냈다.
마력을 담은 외침에 길드원들이 화들짝 깨어났다.
‘지금 그건 사령 계열 몬스터의 피어…… 거기다 그다음 안개와 같은 공격은 흑암의 도시에서 봤던 것과 같다!’
인한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걸 본 라스틴이 조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네놈들 인간은 사령 계열의 몬스터가 쥐약이었지, 아마?”
상위 존재들은 태생적으로 정신 방벽이란 것을 타고난다. 그러나 최하위 위계의 존재인 인간은 그런 것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네크로 실드! 퍼팩트 월!”
조나단 최.
해태 길드는 그 대비가 되어 있었다.
순식간에 길드 전원에게 마력의 방벽이 씌워졌다.
“호오, 그래도 100층에 올 정도는 된다 이거로구나. 그럼 이건 어떻지?”
쾅! 콰가가가강!
손을 휙 휘저은 순간 허공에 수십 가지의 마법진이 떠올랐다.
헬 파이어, 영구동토, 삭풍격, 어스 스톰.
불, 물, 바람, 흙 속성의 최상위 마법.
하나하나가 자연재해나 마찬가지인 공격이었다.
“큭!”
과연 불완전하긴 하지만 왕의 자리에 있는 초월자라는 걸까.
검은 탑에서 최고 등급의 마법사도 저 중 하나를 쓰려면 몇 십 초의 영창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데 라스틴은 동시에 네 가지를, 그것도 영창 하나 없이 마력을 일으킨 것만으로 행하고 있었다.
“나눠진다! 2번 형태로! 인한아, 너는 위력을!”
“알았다!”
이정환의 구두 명령이 귀에 닿기 전에 천문으로 시야 한구석에 문자가 떠올랐다.
속성력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마법은 아니나, 인한도 정령술을 통해 속성의 힘을 다룰 수 있다.
후발제인(後發制人)의 묘리다. 위력이 강하지만 효과의 한계가 뚜렷한 라스틴의 마법은 그만큼 카운터를 치기 쉬웠다.
콰아아아앙!
각 속성의 상극이 되는 정령술이 뻗어 나갔다.
‘큭!’
인한이 입술을 잘근 씹었다.
힘의 격차가 너무 큰 탓에 아무리 카운터를 쳤다고 해도 모두 막을 수 없었다.
인한의 힘은 중도에 흩어지고 말았다.
“영창 완료했습니다!”
“바로 이어서 해!”
“네!”
그러나 이곳에 있는 것은 인한뿐이 아니다.
인한의 속성력이 힘을 다하고 흩어졌을 때, 뒤편에서 거대한 마력이 날아들었고.
콰아아아앙-
거대한 폭발과 함께 라스틴의 마법을 모조리 무효화시켰다.
“흥.”
라스틴은 낮게 코웃음 쳤다.
자신의 공격이 모두 막혔음에도 별로 감흥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안 좋다.’
인한이 이를 악물었다.
포도주의 왕 라스틴.
다른 곳이라면 모를까.
적어도 라스틴에 의해 만들어진 공간인 이곳에서 라스틴의 힘은 한없이 무한대에 가깝다.
거기다 라스틴은 검은 탑에 있는 수많은 차원의 수많은 힘들이 무지막지한 위력으로 다루고 있었다.
일진일퇴. 분명 어느 쪽의 우위를 가리기 힘든 공방의 교환이었으나, 이대로 가면 패색이 짙은 건 한계가 있는 해태 길드였다.
그때였다.
“불쾌하군.”
퉁!
원거리를 고수하던 라스틴이 인한의 코앞까지 접근해 왔다.
‘큭!’
인한이 급하게 몸을 날려 전권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라스틴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다급해하는 인한을 보며, 비릿한 조소를 머금을 뿐이었다.
“생각을 바꿨다. 시간을 끌어서 완벽한 승리를 거머쥐고자 했는데 말이야…… 잘못 생각하군 있었군. 승리, 패배, 이런 것들은 급이 맞는 존재들끼리나 사용하는 건데 말이야. 네놈들과 같은 버러지들에게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군.”
콰아아아아앙-
라스틴이 뒤늦게 마력을 휘둘렀다.
마법이나 오러로 전환되지 않은, 순수한 마력의 덩어리가 해태 길드의 탱커와 인한을 후려쳤다.
“크아아악!”
일격.
단 일격만에 전열이 붕괴했다.
“인정하마. 네놈들은 분명 어떤 위계의 어떤 차원에서도 이루지 못한 업적을 해냈다.”
쿠르르르-
무너진 진형을 뚫고 라스틴이 너무나 간단하게 길드의 중앙으로 파고들었다.
그야말로 적진의 중앙에 빠진 상황.
이대로 모든 공격을 쏟아부으면 될 터였다.
하지만.
“막아!”
이정환이 황급히 외쳤다.
그 순간 라스틴의 몸의 윤곽이 일그러졌다.
과도한 양의 마력이 집중되며 빛이 굴절된 것이었다.
‘안 돼! 저게 지금 터져 버리면……!’
근처에 있는 아나스타샤와 리셴이 빠르게 날아들었다. 한 박자 늦게 임태호도 뒤따라와서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라스틴은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그래 봤자 네놈들은 최하위 위계의, 그리고 고작 내가 만든 유희에서 힘을 키웠을 뿐인 장기짝에 불과하다!”
“모두 충격에 대비해!”
이정환이 다급히 외친 바로 그 순간.
콰아아아아아앙!
마력의 폭풍이 진형을 휩쓸었다.
길드원 전원이 사방팔방으로 튕겨져 나갔다.
“크윽! 하, 하지만 칼침 한 방 먹였다!”
임태호가 비틀대며 외쳤다.
그 외침에 라스틴이 또 한 번 비웃었다.
“이것 말인가?”
어깻죽지에서 등 뒤로 쭉 그어진 사선의 상처.
쩍 벌어진 상처 부위에서 피가 주륵 흘러나왔다.
“이 탑에서 네놈들이 가장 많이 본 능력이 있을 텐데?”
하지만 곧, 그 상처는 바느질이라도 하는 것처럼 빠르게 이어 붙었다.
임태호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 * *
지혜의 왕은 오연한 표정으로 지면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거구의 근육질 사내, 발터 에스키엘이 처참한 모습으로 쓰러져 있었다.
“……이해할 수가 없군.”
그러나 지혜의 왕의 상태도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
순백의 깃털에 자잘한 상처가 엿보였다. 깃털의 색이 하얀 만큼, 새빨간 피의 색이 더 크게 느껴졌다.
“결국 도망쳤고 말이야.”
지혜의 왕의 새빨간 눈이 가늘어졌다.
발터가 전력으로 지혜의 왕에게 달려들고 있을 때, 아테리너스는 몸을 움직일 정도의 체력을 회복해서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그래 봤자 조그마한 세계니 금방 찾을 게 분명하지만, 약간이나마 시간이 지체된 게 성가셨다.
“몇 번이나…… 치명타를 날렸을 텐데…….”
그때, 발터가 꿈틀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당장 쓰러지고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처이건만 가공할 투지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왕은 왕만이 죽일 수 있다. 네가 도달한 기적과 같은 힘은 분명 대단한 것이지만, 그래 봤자 씨앗 하나 보유하지 못한 최하위 위계의 존재에 불과하다.”
지혜의 왕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마저도 나의 상태가 완벽하지 않았기에 시간을 끌 수 있었을 뿐.”
“어딜 가는 거냐! 아직 안 끝났다!”
“…….”
발터의 외침에 그를 무심히 바라본 지혜의 왕이 곧 몸을 날렸다.
허공으로 치솟은 지혜의 왕의 육체는 시간을 되돌리기라도 하듯 순식간에 회복되었다.
구름이 없는 곳.
별들을 바라볼 수 있을 정도의 높이에 자리를 잡은 지혜의 왕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왕들은 몸을 숨기고 힘을 합쳐 생존을 도모할 심산이었던 것 같지만, 그야말로 무의미한 발악에 불과하다.
테라포밍을 진행한 건 다름 아닌 그였다. 그리고 현재 그의 감각은 이 세계의 곳곳에 뻗어 있었다.
왕들이 아무리 자신들을 숨긴다 한들, 금세 찾을 수 있었다.
우우우웅!
그 순간, 지혜의 왕의 전신에 극광을 연상시키는 빛이 몰려들었다.
지혜의 왕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야말로 부조리하군. 세계여, 이럴 때만 그렇게 일을 열심히 한단 말이냐?’
화악!
지혜의 왕이 날개를 펼치자 그 빛은 순식간에 밀려났다.
곧, 지혜의 왕은 각 왕들의 기척을 발견했다.
그대로 낙하를 시작한 지혜의 왕의 모습이 어느새 사람의 그것과 비슷하게 변해 갔다.
‘드디어 본체의 적응이 끝났나.’
아름답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남성의 모습.
백색의 머리카락과 백옥과 같은 피부, 그리고 그 두 가지 때문에 더욱 도드라지는 새빨간 눈동자.
신장이 2미터에 달하는 그 모습은 지극히 완벽한 육체를 가지고 있었다.
펄럭!
등 뒤에 뻗은 네 쌍의 날개는 신성함까지 느껴졌다.
신의 사도, 천사가 있다면 모두가 이 사내를 연상시킬 것이다.
곧, 지혜의 왕은 북극에 도달했다.
그곳에는 미동조차 하지 않고 망연히 얼음에 처박혀 있는 사내가 있었다.
“……왔군.”
시초의 왕.
그가 흐릿한 눈동자로 지혜의 왕을 올려다보았다.
“정말 치밀한 계획이었다. 대체 얼마나 긴 시간을…… 몇 천, 몇 만 년의 세월 동안 준비한 것이지……?”
시초의 왕이 지혜의 왕을 올려다보았다.
“그게 중요한가?”
“중요하지. 나의 입장에선 너무나 억울하지 않겠나.”
“…….”
“그래, 네놈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아발론이라는 풍요롭고 안정된 세계에서 불완전하게 분화되어, 어쩔 수 없이 그 세계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고통받아야 했던 우리들을…… 네가 이해할 리가 없지.”
“…….”
“병마의 왕도, 폭식의 왕도, 악마의 왕도…… 그들 모두가 꿈꿔 왔던 건 그저, 삶이었다. 병균과 극독의 세계도 아니고, 기아에 허덕일 수밖에 없는 세계도 아니고, 불과 죽음이 가득한 세계도 아닌…… 그저, 평범한 삶.”
시초의 왕의 세계는 아무것도 없었다.
허허벌판의 우주. 오직 빛과 어둠만이 있는 곳.
세계의 중심에는 세계의 원정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본래라면 세계를 구성하고, 규칙을 만들고, 생명체를 움직여야 할 물건이었다.
그러나 오류를 일으킨 세계의 원정이 만들어 낸 건 초열(焦熱)과 극한(極寒)뿐이었다.
밤이 되면 모든 생명들이 세계의 원정을 향해 추위를 피하고자 다가갔고, 낮이 되면 열기를 피하고자 도망갔다.
음식, 공기, 자연 같은 건 애초부터 없었다.
소모되어야 할 힘이 소모되지 못한 세계의 원정은 그 세계의 주민들에게 막대한 에너지를 공급하며 죽음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 세계.
그런 말도 안 되는 세계 속에서 시초의 왕은 살아왔다.
“난…… 아니, 우린 그저…… 이 세계의 피해자일 뿐이다.”
그런 세계에서 살아가던 이들에게, 지혜의 왕은 아발론이라는 세계를 약속하며 달콤한 말로 유혹했다.
“그래, 세계는 잘못됐다.”
지혜의 왕이 뚜벅뚜벅 시초의 왕에게 다가갔다.
그 순간.
푸욱-
지혜의 왕의 손이 시초의 왕의 심장부를 꿰뚫었다.
“쿨럭.”
낮은 기침.
시초의 왕의 심장에서 흐른 피가 지혜의 왕의 전신을 적셨다.
“너무 많은 세계를 분화시킨 아발론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고, 세계로서의 위계마저 흔들렸지.”
“쿨럭. 크륵!”
“그러니…… 이건 모든 걸 되돌리는 일이다. 이 모든 일은 결국, 태초의 세계에서부터 시작된 세계의 실수였으니. 그 실수를 내가 되돌릴 것이다.”
시초의 왕의 시체가 가루로 변하며 북극의 눈바람에 흩날렸다.
지혜의 왕이 다시금 날개를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