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1
<공략자들 261화>
[100층 라스틴의 방에 입장하시겠습니까?]
[100층의 검은 탑의 최상층입니다.]
[보스존의 입장은 파티장이 정할 수 있습니다.]
[Y / N]
과거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문자가 나오던 천문이었는데, 이제는 읽을 수 있다.
“어어? 이거…….”
그러나 씨앗이 없는 자는 읽을 수 없는 법.
여기저기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인한은 그런 길드원들을 다독였다.
“미리 말했잖아. 다들 긴장 풀어.”
“네, 넵!”
[100층 보스 포도주의 마왕 라스틴의 방에 입장하셨습니다.]
짙은 기시감이 일어난다.
데스 파티 시절, 이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의 기억.
‘그때와는 다르다.’
인한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리고.
“길드장님, 저쪽!”
그때 한 길드원이 정면을 가리켰다.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그곳에 있는 건 사람이었다. 반듯하게 다려진 시커먼 정장에 새하얀 와이셔츠를 입은 사내.
몬스터의 증거인 ‘뿔’이 없는 존재.
‘100층의 보스, 라스틴…….’
거대한 의자에 앉아 있던 라스틴이 천천히 해태 길드를 향해 걸어왔다.
“하등한 것들.”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목소리.
그 얼굴을 본 순간, 인한은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고 말았다.
기억 속, 그 라스틴의 얼굴이 맞다.
그와 관련된 기억들이 하나둘 떠오른다.
인한을 싫어했지만, 동시에 인정하기는 한 사내.
술을 사랑하고, 노래를 사랑하고, 문화를 사랑하고, 생명을 사랑한 사내.
그 사내가 수많은 차원의 수많은 생명을 무너뜨리고, 지금은 인한의 앞에서 살기를 피워 올리고 있다.
타락한 친우를 앞에 둔 인한의 눈이 낮게 가라앉았다.
‘이제 끝내자.’
쿵!
지면을 통해 진동이 울려왔다.
인한이 외쳤다.
“준비한 대로!”
“예!”
“예!”
과거, 데스 파티 시절과는 다르다.
피나는 노력이 있었고, 철저한 준비를 했다.
“네놈들이 무엇을 하든지, 결국 쓸모없는 발악이다.”
쿵!
또 한 번의 울림.
라스틴이 다가올 때마다 울리는 진동.
진동이 울렸다.
길드가 있는 쪽으로 걸어오면서, 라스틴이 오른팔을 옆으로 털었다.
울컥울컥, 검은색 안개가 쏟아져 나왔다.
‘재밌군.’
인한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똑같은 대사, 똑같은 모습.
그러나 그때와 인한은 다르다.
슈욱!
한순간,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라스틴의 모습이 사라졌다.
이어, 커다란 폭음이 울려 퍼졌다.
콰아아아아앙!
과거, 이 순간, 데스 파티의 수많은 인물들이 죽음을 맞이했다.
코앞에 날아들던 죽어 버린 동료들과 동료들의 육편을 확실히 기억한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이 정도라면 발터의 주먹보다 가볍다고!”
인한이 라스틴의 앞에 서 있다.
그의 속도를 따라가서 공격을 막아 낸 것이다.
아니, 단순 인한만 따라붙은 것이 아니다.
“버프! 늦는다! 빨리 서둘러!”
“매즈 준비 완료!”
“근거리 공격조! 달려들어라!”
해태 길드의 전원이 한 마리의 생명체처럼 움직인다.
인한의 전신에 수많은 버프 스킬이 따라붙고, 라스틴의 전신에 수많은 디버프 스킬이 내려왔다.
위잉!
인한의 전신에 휘감긴 청색의 불꽃.
이정환의 빛의 수호자 스킬이다.
그 불꽃 아래에 있는 인한의 능력치는 무려 5배가 넘게 상승된다.
“네 이놈들……!”
라스틴이 분노하며 주먹을 휘둘렀다.
검은 기운이 인한을 후려친다.
‘즉사의 저주가 아니다!’
마나를 마력으로 변환시킨 힘, 즉 7단계에 해당하는 공능이었다.
‘그 정도라면 나 혼자서라도 충분해!’
인한이 주먹을 휘둘렀다.
뻐엉-
가죽 북이 터지는 듯한 소리.
허공에 파문이 일어나며 트리아스 액셀이 라스틴의 마력을 밀어냈다.
라스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전환!”
인한의 외침에 임태호와 겐지가 뛰쳐나왔다.
“오케이! 가자! 뺀질아!”
“뺀질이 아닙니다! 겐지입니다!”
겐지와 임태호가 원형 구현을 개방했다.
거대화, 검화.
순식간에 공간이 거대한 검과 오러로 이루어진 검들로 가득 차오른다.
라스틴이 그것을 막고자 손을 뻗었다.
콰앙!
겐지와 임태호가 발한 것은 작은 마을 하나는 소멸시켜 버릴 수 있을 정도의 힘이었으나, 라스틴은 간단하게 그것을 막아 냈다.
하지만 그 공격을 막는 동안 짧은 틈과 시간이 걸렸으니.
“이 날파리 같은 것들!”
라스틴이 임태호와 겐지에게 반격을 하려 했으나, 둘은 미련 없이 전열에서 이탈했다.
그리고 그 뒤에 인한이 등장했다.
끌어당긴 주먹에 막대한 마력이 휘감긴다.
트리아스 액셀.
세 개의 힘의 고리가 얽히고설키며 맹렬히 회전했다.
“극파!”
발하는 힘에 세상이 밝게 물든다.
콰아아아앙!
기어코 라스틴의 복부에 주먹이 파고들었다.
손발이 맞는 정도가 아니다. 마치 마음이 통하기라도 하듯, 전원이 동시에 생각하고 동시에 움직였다.
“크흑!”
백색 공간의 구석에 처박힌 라스틴.
인한의 눈빛이 번쩍였다.
‘먹혔다!’
라스틴의 몸이 튕겨져 나갔다.
그제야 실감했다. 라스틴은 무적이 아니다.
발터, 박철환, 레오와 마찬가지로 그도 한 명의 생명체이며, 쓰러뜨릴 수 있는 존재에 불과하다.
그때였다.
라스틴이 비척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 하찮은 버러지들이…….”
콰아앙!
라스틴이 분노를 터뜨리자, 마나가 그에 호응하며 폭발을 일으켰다.
그의 몸에서 불길한 기운이 울컥울컥 솟아올랐다.
“기어코 봉인을 풀게 만드는구나!”
오싹!
해태 길드 전원의 등골에 오한을 느꼈다.
라스틴의 존재감이 무지막지하게 증폭되기 시작한다.
‘왕의 기운이……!’
전귀에게서 경험한 적 있는 힘의 질.
옛 왕의 힘이었다.
스스로 억제한 것인지, 아니면 무언가에 의해 억제되었던 것인지, 한순간 라스틴의 힘이 솟구치는 게 확연히 느껴졌다.
라스틴이 손을 치켜들었다.
분명 마력의 유동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모든 길드원들이 느꼈다.
무언가가, 온다고.
“모여라!”
인한이 큰 소리로 외쳤다.
그 말에 정신을 차린 길드원들이 모조리 모여들어 한데 뭉쳤다.
“죽어라, 우매한 존재들이여! 내가 바로 네놈들의 죽음이다.”
라스틴이 손을 내리그었다.
바로 그 순간, 인한의 손이 품으로 향하고, 곧이어 품속에서 아이템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잊지 않았겠지!”
인한이 외쳤다.
“이건, 네놈이 이름 붙인 거니까!”
샛별의 포옹.
무적의 방패가 펼쳐졌다.
쿠우우우우웅-
반투명한 흑색의 막이 해태 길드를 휘감았다.
마력이 터졌을 때처럼 거친 폭음이나 파괴는 일어나지 않았다. 바람 한 점 없는, 정적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쩌적-
반투명한 막에 금이 그어졌다.
‘무언가’에 의해 그어진 그 금은 점점 크기를 불려 가더니, 막 전체로까지 번겨 갔다.
“제발……!”
이정환이 중얼거렸다.
긴장한 이정환에 비해, 인한은 태연한 표정이었다.
믿고 있었다.
이것은 미래를 위해 준비한 친우들의 선물이다.
막아 내지 못할 리는 없다!
콰아앙!
그 순간, 샛별의 포옹이 튕겨져 나가며 막이 깨져 버렸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아무런 일도 없었다.
손을 휘둘렀던 라스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대체 어떻게! 그것이 무엇이기에 나의 힘을 품고 있는 거지!”
인한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기억나지 않나 보지? 라스틴?”
“뭣……!”
인한이 앞으로 한 발자국 뻗었다.
흔들리는 라스틴의 눈동자를 직시하며, 인한이 피식 웃었다.
“내가 네놈들의 죽음이다? 지금 우리가 죽었나? 참 넌 예전부터 오글거리는 대사를 좋아했단 말이지?”
“이, 이이이!”
“자, 2차전이다. 제대로 시작해 보자고!”
* * *
인류 최강의 사나이, 발터 에스키엘.
아니, 이제는 ‘전’ 인류 최강의 사나이라 불려야 할 사내인 발터 에스키엘은 언제나처럼 오연한 표정으로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에 쓰러져 있는 나체의 미녀가 들어왔다.
“네놈의 기운은 익숙하군. 전귀에게서 느꼈던 것과 같아.”
“오, 윽. 너, 너는 걔잖아? 네가 왜 여기에?”
“그야, 이곳은 내가 출입하는 탑의 입구였기 때문이지.”
“그, 그렇구나. 그거야 아무래도 괜찮아. 너, 나랑 계약할래?”
나체의 미녀.
그녀의 이름은 아테리너스, 전쟁의 왕이었다.
발터가 고개를 돌려 주위를 바라보았다.
울창했던 산속은 운석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황폐화되어 있었다.
“계, 계약하자니까……?”
아테리너스의 상태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눈에 띄는 외상은 없으나, 그녀를 휘감고 있는 힘이 안정되지 못하고 흔들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아테리너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아아, 설마 벌써부터 나라고? 조금 준비하고 힘을 되찾을 생각이었는데…… 에잇, 재미없게!”
아테리너스의 시선이 허공으로 향했다.
그곳에 네 쌍의 날개를 지닌 괴조가 떨어지고 있었다.
“전쟁의 왕이여.”
지혜의 왕이 입을 열었다.
그의 힘은 다른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 왕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막대했다.
날갯짓 한 번에 저절로 마나가 유동치고, 공기가 일그러질 정도였다.
“네 힘을 가져가겠다.”
“아아, 한 번만 봐주면 안 돼? 나한테 계획이 있단 말이야. 딱 1시간만 주면 어느 정도 회복하고 도망칠 수 있었는데…… 으으, 너, 너! 너 나랑 계약하자니까? 나 좀 도망치게 해 줘!”
발터가 코웃음을 쳤다.
발터를 바라보던 지혜의 왕이 물었다.
“방해할 텐가?”
“설마.”
“……특이하군. 우리를 보고 아무런 감상이 들지 않는가?”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지혜의 왕은 다시 시선을 돌려 쓰러져 있는 아테리너스에게 다가갔다.
그 순간.
콰아아앙-
지혜의 왕의 측면에서 마력의 폭발이 일어났다.
발터가 씨익 미소를 지으며 주먹을 뻗고 있었다.
“하지만! 네놈이랑 싸우는 건 재밌을 거 같군! 그냥 방해하겠다!”
그것은 순전한 운이었다.
발터의 앞에 아테리너스가 소환된 것도, 그 아테리너스를 처리하고자 지혜의 왕이 찾아온 것도.
그러나 발터 에스키엘이란 남자는 언제나 변수를 만들어 내는 존재.
지혜의 왕의 계획에 끼어든 또 하나의 변수였다.
* * *
“뭐……? 2차전? 크, 큭큭큭!”
라스틴이 낮게 웃었다.
“이 우매한 것들. 네놈들의 세계가 지금 어떤 상황인 지도 모르고 죽음 그 자체인 나에게 달려드는 꼴이라니! 그야말로 부나방과 같지 않은가!”
“뭐?”
“그래, 보여 줄까? 네놈들이 100층의 문을 연 것으로 톱니바퀴가 움직였으니!”
화악!
해태 길드의 앞에 홀로그램과 같은 영상이 떠올랐다.
그러자 모든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세계의 수많은 변화가.
“설마 몬스터 웨이브가?!”
“큭큭! 몬스터 웨이브? 이게 그렇게 간단한 일 같은가? 보아하니 지혜의 왕은 그 세계를 온전한 하나의 세계로 만들 셈인 거 같군. 지금 이 지구의 위계는 태초의 세계와 같아졌다!”
“지, 지금 저놈 뭐라는 거야? 말이 갑자기 안 들렸는데?”
씨앗을 보유하지 않은 존재들은 듣지 못했다.
그러나 인한, 이정환, 세릴은 그 말소리를 알아들었다.
세계의 이면, 그 속에 숨겨진 비밀의 이야기들.
‘말도 안 돼……!’
“놈이 탑에 나를 처박아 놓은 것은 이러기 위함이었군. 크하하! 놈은 왕들을 모조리 죽이고 그 힘을 흡수할 샘이다. 그다음은 마왕이 되겠지! 저놈은 세계 그 자체가 될 것이다! 나나, 네놈들이나 결국 끝에 남은 건 파멸뿐!”
인한의 눈이 흔들렸다.
라스틴이 이를 빠득 갈며 말했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 내가 하는 건 그저 화풀이에 불과하다. 죽어라, 버러지 같은 것들아. 네놈들이 벌여 놓은 저주스러운 일에 절망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