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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략자들-257화 (257/266)

# 257

<공략자들 257화>

“……대체 왜 거기에 서 있는 거지?”

인한이 앞에 나서서 발터와 마주섰다.

발터는 팔짱을 낀 채 오만한 자세로 인한을 내려다보았다.

“오래 걸렸군. 한참을 기다렸다.”

“……어째서?”

“네놈과 싸우기 위해서. 지금의 너라면, 그리고 지금의 나라면 내가 원하던 것을 이룰 수 있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한시가 급한 상황.

인한은 대꾸하지 않은 채 앞으로 한 발자국 뻗었다.

“그곳에서 비켜라. 아무리 너라 한들 우리 전체를 막아설 수는 없을 거다.”

“후후, 과연 그럴까?”

발터의 눈빛이 변했다.

그 눈을 보고 인한의 뒤쪽에 서 있던 길드원들이 움찔했다.

백수십 명의 인원을 앞에 두고도 결코 밀리지 않는 기파.

막강한 위압감에 미동치 않은 것은 간부들 정도였다.

그때.

“내 목숨.”

발터가 돌연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툭 쳤다.

인한의 눈초리가 꿈틀댔다.

“네놈들 서른, 그리고 이틀의 시간.”

오연한 자세로 해태 길드를 가리키는 발터 에스키엘.

느닷없는 그 말에 의미를 깨달은 순간, 인한의 표정이 전에 없이 굳어졌다.

“이런 미친놈…… 대체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냐!”

“아무런 이유도 없다. 그저 때가 됐을 뿐. 나는 네놈과 싸우고 싶다.”

발터의 눈이 빛났다.

“그러나 아무리 나라 한들 굳이 이런 쓸모없는 데 목숨을 던지고 싶지는 않다.”

“……?”

“지나가라, 해태 길드. 내가 원하는 건 너 하나다. 최인한.”

발터가 인한을 바라보았다.

인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슨 수작이지?”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네놈의 모든 걸 보고 싶을 뿐이다. 나는 이 싸움이 방해받는 걸 원치 않는다.”

인한이 발터를 지그시 응시했다.

‘이 녀석…….’

싸움의 승패를 가늠해 보았다.

질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길 수 있을 것 같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제야 깨달았다. 발터는 마나 스킬 7단계에 도달했다.

하지만 과연 그뿐인 것인가.

그 발터다. 무언가를 가지고 있을 게 분명했다.

만약 인한이 필사적으로 발터를 막아 낸다 해도, 놈이 목숨을 버릴 것을 작정하고 해태 길드에 달려들면 누구도 막아 내기 힘들 게 분명했다.

거기다…… 여기서 시간을 버리거나 전력을 떨어뜨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위쪽에 있을 투왕 길드와 부딪힐 가능성도 있다.

고민 끝에 인한이 입을 열었다.

“한 가지 약속해라. 이 싸움은 우리에서 끝낸다. 네놈의 길드원들이 우리 길드원들을 건드리지 말아야 할 거다. 계약을 할 거다. 동의하나?”

[사용자 ‘최인한’이 계약을 신청했습니다.]

[계약의 내용은…….]

천문을 대충 훑어본 발터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한 가지 추가하지. 네놈의 길드도 이 싸움을 방해해선 안 될 거다.”

“……알았다. 추가하지.”

“그럼 동의하겠다.”

화악!

한 줄기 빛무리가 터져 나와 발터와 인한을 휘감았다.

“인한아!”

이정환이 당황하며 인한을 불렀다.

인한이 이정환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어쩔 수 없다. 시간이 없어.”

움직이지 않고 머뭇대던 길드원들을 바라보며, 인한이 말했다.

“부탁한다. 99층에서 보자.”

“…….”

이정환이 그제야 이를 악물고는 길드원들을 이끌고 91층 보스존으로 향했다.

모두가 사라진 직후.

발터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이 순간을 얼마나 고대해 왔는지, 너는 모를 것이다. 박철환, 레오, 전귀…… 수많은 강자들이 있었으나 결국 남은 것은 너 하나. 나는 이렇게 될 것을 예상했다. 너야말로 내가 기다려 왔던 하나다.”

“…….”

발터가 투지를 드높였다.

“네 모든 걸 보여 봐라. 그렇게 하기 위해 어울리지도 않는 수작을 부려야 했으니까.”

“수작?”

이 상황을 말하는 것일까.

하지만 그렇다기엔 말투가 묘하게 이상했다.

“아, 그렇군. 이걸 알려 줘야 했어.”

“……?”

“나는 길드를 해산시켰다. 사실상 투왕 길드는 이제 길드가 아니다. 애초에 이러기 위해 그들이 따라다니는 걸 허락했었으니까.”

인한의 눈이 점점 커다래졌다.

“계약의 내용은 내 길드원들이 건드리지 않는 것이겠지. 하지만 길드는 이미 해체되었다. ‘전’ 투왕 길드가 해태 길드에게 전투를 건다 한들, 그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그게 무슨……!”

“자! 무대가 준비되었다. 몬스터 웨이브의 시간은 차차 다가오고 있다. 그리고 날 쓰러뜨리지 않으면 네놈의 길드원들은 어떻게 될지 모르지. 세계와 동료. 둘 모두가 인질이다! 네놈의 모든 걸 쏟아 내 보아라!”

발터가 지면을 박차며 인한에게 달려들었다.

* * *

검은 탑 92층.

이정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투왕 길드…… 설마.’

정면, 투왕 길드의 무리가 보였다.

그들은 언제라도 달려들 듯 불길한 기세를 드높이고 있었다.

이정환이 눈가를 찌푸리며 말했다.

“전투 준비. 놈들은…… 우리와 싸울 겁니다.”

“뭣이? 분명 인한이가 계약을……!”

임태호가 당황해하며 외쳤다.

“계약의 내용을 말장난으로 틀어 버린 겁니다. 투왕 길드는 애초에 우리를 보내 줄 생각이 없었어요.”

“그럼 지금 당장 돌아가야 한다! 인한이를 도와야 해!”

“계약 내용을 아시잖습니까.”

“……!”

멀리서 투왕 길드가 빠른 속도로 접근해 온다.

진형이고 뭐고 없는, 제멋대로인 돌진이었다.

그중에 선두에서 달려오는 이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 어디 한번 검은 탑 최고의 길드와 부딪혀 볼까!”

이정환이 다급히 외쳤다.

“B 포메이션!”

인한이 없을 때를 대비해 만들어진 진형.

길드원들이 빠르게 움직이며 자리를 잡았다.

그 직후.

콰아아앙!

두 길드가 격돌했다.

* * *

발터를 뚫어야 한다.

해태 길드가 투왕 길드에게 밀릴 거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지만, 단 한 명도 다치지 않고 이길 거라는 낙천적인 생각도 하지 않는다.

한 명 한 명이 가족 같은 사람들이다. 이창훈 때의 슬픔을 또 겪을 수는 없다.

“이 비겁한 자식!”

접근해 오는 발터를 향해 인한이 주먹을 휘둘렀다.

첫 공격은 언제나처럼 파공탄이었다.

단순 원거리 견제로 보기에는 너무나 막강한 위력.

발터가 발을 멈추고 파공탄을 하나하나 허공에서 격추시켰다.

인한은 그때를 노려 곧장 공간 마법과 용언을 이용, 발터의 움직임을 제한시켰다.

‘마극포!’

초장부터 무극인 최강의 파괴력을 가진 기술을 준비한 것이었다.

트리아스 액셀의 조화가 붕괴하며 사방을 휩쓰는 극강의 힘을 자아냈다.

“흠!”

발터가 주먹을 크게 끌어당기며 그대로 뻗었다.

그 주먹에 막강한 오러가 실린다. 그야말로 세상을 물들일 정도의 섬광이었다.

하지만.

‘……됐다!’

인한의 눈이 빛났다.

박철환과 달리, 발터는 트리아스 액셀의 효과를 모른다.

모든 힘의 구조를 무너뜨리는 힘.

그 힘에 발터의 오러가 순식간에 흩어지며 순식간에 마나로 환원될 터.

발터는 마극포를 피해야만 했다!

그러나 상황은 인한의 예상처럼 흐르지 않았다.

콰아아아앙!

한순간 발터의 마력이 일곱 가지의 빛을 토해 내며 마극포의 힘과 함께 소멸됐다.

인한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뭐?”

“상당히 놀란 모양이군.”

발터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 힘, 나는 이미 한번 겪어 보았지. 박철환이었다. 놈의 기운은 내 마력을 산산조각 내더군. 지금 바로 네가 의도한 것처럼 말이지.”

발터가 앞으로 한 발자국 뻗었다.

그 묵직한 일보에 또 한 번 막강한 기세가 번져 갔다.

“그 힘은 상대의 힘의 구조를 파고들어 무너뜨리는 것. 그렇다면 애초에 그 구조라는 걸 없애면 될 뿐이다.”

그게 무슨 얼토당토않는 소리란 말인가.

지금 발터가 말하는 것은 수학에서 계산식을 모조리 없애 버리겠다는 말이나 똑같다. 계산을 위한 기호도 순서도 없는데 답을 도출한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소리다!

“나의 마력은 구조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것이 될 수도, 어떤 것도 되지 않을 수도 있지. 그러니 네 그 힘의 유일한 적수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받아들이기도 이해하기도 힘든 이야기였으나, 실제로 발터는 불가능한 일을 인한에게 보여 주고 있었다.

“내게 그 얘기를 해 주는 이유가 뭐지?”

“그거야, 그래야지만…….”

발터가 툭툭 발로 지면을 두드렸다.

“공평해야 하지 않겠나!”

후웅! 콰앙!

지면을 박찬 발터가 순식간에 접근하며 주먹을 휘둘렀다.

두 팔을 교차시킴으로 그 공격을 막아 냈다.

전에 경험해 본 적 없던 육중한 무게감. 순간적으로 마력로에 침투하는 발터의 오러는 무시무시했다.

‘제길! 이 괴물 같은 놈!’

어찌 됐든 상관없다. 의아해할 시간에 받아들이는 편이 낫다.

그리고 인한은 트리아스 액셀을 믿는다.

인간의 영웅과 용과 요정의 왕이 만들어 낸 희대의 기술을!

쾅! 쾅! 쾅!

주먹이 부딪치고, 또다시 부딪힌다.

용언, 정령술, 공간 마법 등의 자잘한 수법으로 이득을 보려는 생각은 접었다.

온전한 트리아스 액셀이 아닌 이상 발터에게 일말의 피해도 입힐 수 없다.

쾅! 쩌엉-

발터와 인한의 주먹이 맞부딪힐 때마다 일곱 개의 빛과 새하얀 빛이 허공에 파문을 일으키며 터져 나갔다.

인한이 입술을 잘근 씹었다.

지금껏 이런 적수는 없었다.

이미 자신만의 것을 완성했음에도, 발터의 움직임에선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들이 엿보였다.

부딪치는 일격 일격마다 새로운 깨달음의 장이다.

“큭!”

“컥!”

우득! 드득!

서로 주고받은 일격에 육체의 빗장이 무너져 내렸다.

최상위 던전의 보스 몬스터조차 상처 입히지 못했던 두 권사의 불굴의 육체에서 막대한 출혈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순간에 불과할 뿐.

순식간에 회복한 그 둘은 다시금 땅을 박차며 충돌했다.

“하압!”

콰아!

발터도 마찬가지였다.

발터가 갖지 못한 것을 인한이 가지고 있다. 발터 또한 인한에게서 자신의 부족함을 확인한다.

“크하하! 이거다! 내가 바라 마지않았던 것은!”

팔다리가 부러지고, 전신의 가죽이 찢어지며 피가 배어나오고 있음에도 발터는 광기에 찬웃음을 터뜨렸다.

순간적으로 기세에 밀린 인한이 공격을 멈췄고, 발터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품으로 파고들었다.

쭉 끌어당기는 주먹.

공성추와 같은 일격이 인한의 복부, 간장을 타격했다.

‘커흑!’

리버스 스트림을 전개했으나 반격은 고사하고 막아 내지도 못했다.

트리아스 액셀의 방벽을 모조리 뚫고 충격이 체내까지 파고들었다.

무지막지한 힘을 가졌음에도 그 기술의 묘리는 그야말로 섬세하고 완숙하기 그지없었다.

“컥!”

콰앙!

그러나 그것은 인한도 마찬가지.

뻗어진 데몰리션 킥과 코로나 임팩트의 연계에 발터의 마력이 모조리 떨어져 나가며, 그대로 안면에 공격을 허용했다.

같은 전투 방식, 같은 힘.

불굴의 육신은 포대이며, 쏘아 내는 것은 세계의 이치에서 벗어난 규격 외의 힘이었으니.

콰아아앙!

충돌할 때마다 세계가 비명을 질러 댔다.

인한은 머릿속에 가득했던 다급함과 수많은 잡념들이 흩어져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움직여야 한다, 혹은 저렇게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조차 없어졌다.

생각을 하기 전에 몸이 움직였고, 몸이 움직이면 저절로 마력로가 따라갔다.

매 찰나마다 인한은 강해져 갔다.

그리고 그것은 발터 또한 마찬가지.

닮은꼴의 두 권사는 서로의 뼈와 살을 깎아 내며 끝없이 성장해 갔다.

“아-!”

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더 이상 성장할 곳이 없다고 여겼건만, 세계는 여전히 넓었으며 배워야 할 것은 산더미와 같다.

모든 것을 완성했다고 여겼던 것은 크나큰 오만.

여기, 또 한 명의 완성된 무인(武人)이 인한의 앞에 서 있다.

후욱! 쾅!

또 한 번 주먹이 부딪혔다.

단숨에 부서지고, 또 단숨에 재생되는 주먹.

과거의 동경이었으며, 현재의 호적수인 사내.

발터와의 전투는 그동안 겪어 왔던 어떤 치열한 전투와도 달랐다.

인정한다.

발터 에스키엘. 이 사내야말로 최강이다.

“크허억…….”

“허억!”

쾅!

서로의 주먹이 동시에 서로의 안면에 틀어박혔다.

두 사내가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둘 모두 이미 한계란 말이 소용없을 정도로 한계를 넘고 있었다.

피 칠갑이 된 인한. 잔뜩 부어오른 얼굴이건만, 형형한 눈빛만큼은 죽지 않았다.

이미 길드나 다른 것에 신경 쓸 심력은 남아 있지 않았다. 몬스터 웨이브나 앞으로의 일도 머릿속에 없었다.

‘지금은 이 사내를 쓰러뜨리는 것만 생각하겠다!’

끝끝내 이어진 것은 별 볼 일 없는 난타전.

마력도 없고, 체력도 없다.

오직 기력과 정신력만으로 서로에게 달려들어 주먹을 휘둘렀다.

쾅! 쾅! 쾅!

피가 튀고 뼈가 부러졌다. 둘 모두 재생은 이어지지 않은 지 오래였다.

쾅!

또 한 번 서로의 공격에 모두 튕겨져 나갔다.

비틀비틀 일어난 인한이 어깨를 들썩이며 주먹을 끌어당겼다.

‘이제…… 이 한 번이 끝이다.’

인한이 주먹을 끌어당겼다.

모든 걸 그 일권에 모았다. 아니, 애초에 이제 기껏해야 한 번 내지를 힘밖에 남지 않았다.

혹사당한 마력계가 비명을 질렀다. 쥐꼬리만 한 마력이 주먹 끝에 응집됐다.

볼품없는 모습에 축 늘어진 사지.

그럼에도 그 자세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세가 서렸다.

“크흐……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발터도 마찬가지.

그의 주먹이 칠색의 찬란한 빛을 뿜어냈다.

다음 순간.

발터와 인한이 충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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