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4
<공략자들 254화>
검은 탑 100층.
“……대체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단 말인가.”
라스틴은 의자에 앉은 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이럴 수는 없다. 모든 차원을, 돌아다니며 그런 자는 없었다. 블러드 워커 프로젝트는…… 최후의 보루였다. 껍질의 제목도 나쁘지 않았어. 그런데 어째서, 대체 어째서…….”
현재 또 하나의 변수가 80층 구간을 맹렬히 공략 중이다. 얼마 지나지 않으면 90층에 도달할 건 명백했다.
그리고 그들을 막아야 할 90층은 텅텅 비어 버렸다.
“그건 절대 깰 수 있는 종류가 아니다. 애초에 그것들은…… 마왕들을 상대하기 위해 만든 존재들이었거늘.”
기형적인 생김새, 도저히 생명체나 지성을 가진 존재라 볼 수 없이 편향된 힘.
라스틴에 의해 만들어진 그들은 처음부터 목적이 분명했다.
“이제…… 올 것인가.”
100층.
계약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90층에도 몬스터가 있긴 하지만, 고작해야 보스 몬스터를 만들다 실패한 모조품에 불과했다.
라스틴은 그의 조악한 의자에 앉아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의 눈이 천문의 한 부분을 향했다.
[봉인을 해제하시겠습니까?]
* * *
92층 보스 몬스터 데리안의 공략 방법은 물이다.
놈이 강한 이유는 피부에 맴도는 검은 입자 탓이다.
그 검은 입자는 공기보다 가볍고, 그러면서도 데리안의 통제를 받기에 자유자재로 움직인다.
검은 입자는 마력이나 속성력에는 내성을 가지고 있고, 불이나 바람에는 영향도 없다.
그 때문에 나온 공략법이 바로 물이다.
마력으로 만들어 낸 물이어선 안 되며, 어떤 가공도 해선 안 된다.
그것도 흰수염고래 정도의 크기를 가진 데리안의 거체를 모조리 휩쓸어 버릴 수 있을 정도의 양이어야 한다.
해일이 일어나는 바다도 아닌 이상에야 그 정도의 물을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그런데 그런 물이 있다.
다름 아닌 5층에.
콰아아아아아!
[클리터 대폭포]
물이 쏟아지는 소리만으로도 귀가 떨어질 듯한 이곳.
해일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물의 양.
“태호 형님이 끌고 오고 있단다! 바로 시작해!”
클리터 대폭포를 향해 손을 뻗으며, 인한은 나지막하게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군. 그런 거였나.’
콰아아아앙!
폭음과 함께 데리안이 나타났다.
인한은 곧장 워디나를 이용해, 쏟아지는 물의 방향을 아주 조금 틀었다.
‘대정령사 클리터라는 게 나였던 거야.’
-크어어어어어어엉!
개와 호랑이의 울음소리를 합친 듯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가공할 수압에 의해 데리안은 이리저리 튕겨져 나갔고, 검은 입자는 모조리 물에 휩쓸려 어딘가로 날아갔다.
쾅!
인한이 데리안 앞에 훅 떨어졌다.
검은 입자를 모조리 잃어버린 데리안은 인한 혼자서도 처리할 수 있을 정도로 약해져 있었다.
우우우우웅-
극한까지 치솟은 트리아스 액셀이 그대로 데리안의 몸을 분쇄했다.
인한은 몸을 돌려 길드원들을 향해 다가갔다.
91층의 캘러미티 그래스호퍼는 영적인 것이든 마력적인 것이든 모조리 먹어 치우는 존재다.
그건 지구의 사막 메뚜기 떼처럼 탐욕적인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인한은 이정환에게 말했다.
“캘러미티 그래스호퍼는 사실상 이렇게 넓은 지역에서는 최강이라 할 수 있어. 펜데게니아 와는 다른 경우지. 이미 엄청나게 증식했을 거다.”
“그럼 더 많아지기 전에…….”
“한번 실험해 볼 게 있다. 데리안이나 펜데게니아는 너무 위험한 데다 공략이 간단해서 넘어갔지만…… 나머지는 해 볼 만할 것 같아.”
“뭐?”
“이놈들이라고…… 서로 싸우지 않으리란 법은 없잖아?”
인간이 나타나지 않는 이상 몬스터들은 저마다의 생태계 속에서 일정한 먹이사슬을 만들며 살아간다.
이이제이(以夷制夷).
그렇다면 몬스터를 사용해 몬스터를 쓰러뜨릴 수는 없는 것인가 하는 의문에서 시작된 생각이었다.
인한은 5층의 북쪽 숲으로 향했다. 아니, 분명 숲이었을 그곳은 황무지가 되어 있었다.
북쪽 숲에는 거뭇거뭇한 생물체가 바글바글 모여 있었다.
“……흙까지 먹는 거야?”
인한의 옆에 따라왔던 이정환이 질린 표정을 지었다.
북쪽 숲을 황무지로 만든 건 다름 아닌 캘러미티 그래스호퍼였다.
나무나 돌덩이들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고, 지면은 황폐화되어 있었다.
그마저도 먹어 치우는 바람에 곳곳에 크레이터가 생성되어 있었다.
“쟤네들은 모조리 먹어 치워. 하물며 마나까지. 마나 농도가 느껴지지 않아? 거기다 먹을 게 없으면 소리까지 먹어 치우지. 아직 흙이라도 있으니까 빛은 먹어 치우지 않은 모양이지만…….”
“……!”
그제야 이정환은 저토록 많은 생명체가 움직이고 있는데 아무런 소리가 들려오지 않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럼 시작하자.”
인한은 적당히 거리가 떨어진 곳에서 정체 모를 상자를 꺼냈다.
철퍽!
그것은 짐승의 사체였다.
새빨간 피가 뚝뚝 떨어지는 고기를 지면에 올려놓은 인한과 이정환이 거리를 벌리며 일정 거리마다 고깃덩어리를 지면에 던져 놓았다.
“아무런 기척이 없는데?”
한동안 그런 짓을 반복하던 이정환이 물었다.
인한이 고개를 저었다.
“오고 있어.”
인한이 턱짓을 했다.
그러자 이정환의 표정에 경악이 서렸다.
아무런 소리도, 일말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물며 보이지조차 않았다.
그러나 뭔가 이상하다는 게 느껴졌다.
자세히 보니 허공에 구멍이 뻥 뚫려 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로 메뚜기의 형상이 조금씩 보였다.
“저건 완전 블랙홀이잖아!”
“그래도 블랙홀처럼 완벽하게 빛을 먹진 못하니까 조금씩 보이잖아?”
“90층은 정말 말도 안 되는 구간이었군!”
그 구멍이 맹렬한 속도로 인한과 이정환을 향해 접근하고 있었다.
“약속된 방향으로 달려! 우릴 발견했으면 충분해! 순간 이동을 사용해야 한다!”
“알았다!”
이정환이 달리는 각도를 틀었다.
그 순간, 캘러미티 그래스호퍼의 일부가 틀어져 이정환을 노렸다.
‘적당한 거리에서 순간 이동을 쓰면…… 두 몬스터가 부딪힐지도 모른다. 만약 힘을 합치면 그때야말로 성가시게 되지만…….’
본능적으로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한이 향하는 곳에 있는 몬스터, 샌드 타이푼은 캘러미티 그래스호퍼와 비슷한 성질의 몬스터다.
둘이 부딪치면 누가 더 빨리 먹히냐의 싸움이 될 것이다.
이정환이 향하는 곳에는 97층의 카르나가 있는 곳이다.
접근을 불허하는 열기를 휘감은, 그야말로 태양을 연상시키는 몬스터다.
그쪽은 카르나의 열기마저 캘러미티 그래스호퍼가 먹느냐, 카르나가 전부 태워 버리느냐가 될 것이다.
쿠우우우웅! 쿠우우우웅!
그때쯤 인한의 정면에서부터 육중한 소음이 울려 퍼졌다.
폭포가 쏟아지는 것 같기도, 지진이 일어나는 것 같기도 한 소리였다.
‘지금이다.’
인한은 곧장 마력을 전개했다.
우웅-
박철환에게 얻은, 그 전에는 분명 클라우드가 지니고 있었을 마법.
공간 마법이 펼쳐졌다.
화악!
인한의 몸이 공간에 스며들 듯 사라졌다.
용언까지 합쳐진 공간 도약을 통해 인한은 상공 수백 미터까지 상승했다.
갑작스레 목표를 잃은 캘러미티 그래스호퍼는 멈춰 선 채 주변 자연을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그 순간, 필연적으로 샌드 타이푼과 부딪치게 됐고.
콰가가가가가!
폭음과 함께, 인한의 예상대로 두 재앙의 전투가 시작됐다.
‘됐다.’
인한의 실험은 성공했다.
인간이 있다면 인간을 공격하지만, 캘러미티 그래스호퍼는 당장 눈앞에 있는 몬스터를 먹어 치웠다.
사실상 오랜 시간 증식해 온 캘러미티 그래스호퍼를 막을 수 있는 몬스터는 어디에도 없었다.
해태 길드는 비슷한 방식으로 90층 구간의 보스 몬스터를 모조리 유인해 캘러미티 그래스호퍼와 부딪치게 만들었다.
“일단 처리를 할 수 있는 건 좋다지만…… 저것들은 어떻게 할 생각이야?”
소리와 빛마저 먹어 치우는 괴물.
나머지 몬스터를 전부 처리한다 한들 캘러미티 그래스호퍼가 남아 있는 이상 결과는 같다.
“지금부터 지켜보면 된다.”
99층의 몬스터, 절대 죽지 않는 재생의 괴물 피닉스마저 먹어치운 캘러미티 그래스호퍼는 5층 필드 북쪽과 서쪽 구역을 모조리 뒤덮을 정도로 많아졌다.
그때 인한이 캘러미티 그래스호퍼를 향해 마법을 발동시켰다.
‘아공간 생성.’
오래전 클라우드의 함정에 빠졌던 마법.
공간 장악의 원형 구현과 용언, 거기다 클라우드의 마법까지 합세하며, 캘러미티 그래스호퍼가 반응하기도 전에 아공간으로 날려 버렸다.
“어디로 날려 버린 거야?”
“아공간이야.”
“……아공간에 날려도 어차피 풀릴 거잖아. 풀리고 나면 다시 쏟아져 나오는 거 아니야?”
“이제 보면 되겠지.”
인한은 아공간을 곧장 풀어 버렸다.
투둑!
그 순간, 허공에서 나타난 건 다른 캘러미티 그래스호퍼에 비해 두 배 정도 더 커다래진 몬스터 한 마리였다.
“어? 그 많던 숫자가?”
그게 시작이었다.
덩치가 큰 캘러미티 그래스호퍼는 동족을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다른 캘러미티 그래스호퍼도 갑자기 동족을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그 이후부터는 간단했다.
서로가 서로를 먹어 치우던 놈들은 몇 분이 채 지나지 않아서 숫자가 빠르게 줄어들어 갔다.
“어떻게 한 거야?”
“놈들은 먹을 게 떨어지면 동족상잔을 시작한다. 그때까지는 동족을 먹어도 된다는 걸 모르는 거지. 일단 알고 나면 그때부터는 끝나. 놈들은 서로가 서로를 먹어 치우다 결국 자멸할 거다.”
인한은 그저 기다렸다.
마지막에 남은 것은 거대한 캘러미티 그래스호퍼 두 마리.
놈들은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다가 결국 두 개의 사체만 남긴 채 쓰러졌다.
인한의 말대로였다.
그렇게 90층 구간의 몬스터는, 단 하루 만에 인한에 의해 공략되었다.
* * *
5층의 정리가 끝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해태 길드는 휴식을 취했다.
인한은 아무런 생각 없이 잠에만 빠져 살았다.
그러다 얼마 후, 이창훈의 부모님에게서 연락이 왔다.
-곧 창훈이의 49제인데 길드원들과 참석해 줄 수 있겠나?
해외에 있든, 국내에 있든 상관없이 모든 공략조가 집합했다.
이창훈은 선산에 묻혔다.
볕 잘 들고 터도 좋은 위치였다. 한강의 지류에 이어지는 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
제대로 형식을 갖춘 제사는 아니었다.
그저 이창훈이 좋아하는 음식 몇 개를 가져다 놓고 묵념을 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봉분을 바라보며, 인한은 입을 꾹 닫았다.
이창훈이 없는 해태 길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아니, 이제 더 이상 이창훈이 없다는 사실을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세상은 여전히 돌아갔다.
이창훈이 없어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다 해도, 여전히 차근차근 쳇바퀴 굴러가듯 움직였다.
인한이 봉분의 풀을 쓸었다.
이창훈과의 모든 기억이 하나둘 지나갔다.
기억에 남는 것은 큼지막한 사건들이 아니었다.
이창훈의 술버릇, 말투, 이상한 취미나 가끔 했던 농담과 헛소리…….
그런 사소한 것들이 남아 눈앞에 아른거렸다.
“오랜만일세. 장례식 때는 정말 고마웠네. 우리 꼴통 아들이 좋은 사람들을 곁에 둔 걸 알았지. 그러니 가는 길이 그리 외롭진 않았을 게야.”
“……죄송합니다.”
인한은 그렇게 답했다.
이창훈을 살리지 못한 것은 인한이었다.
그렇게 동료를 지키겠다고 해 놓고, 결국 인한은 지키지 못했다.
“사실 이렇게 바쁜 와중에 참석해 달라고 부탁한 이유는, 창훈이의 유서 때문일세.”
“유서 말씀이십니까?”
이정환이 물었다.
이창훈의 장례식 때는 별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유서에 그런 내용이 적혀 있었네. 만약 해태 길드가 별다른 활동을 안 하면 그때 전해 달라고. 평소처럼 계속 움직인다면 굳이 전해 주지 말라고. 그리고 뉴스를 받네. 자네…… 활동을 멈춘 모양이더군.”
“…….”
인한이 말없이 유서를 받아 들었다.
[이 편지를 형님이 읽으실 때쯤엔, 이미 제가 죽었단 말이겠죠?]
“…….”
이창훈의 평소 말투 그대로의 문체에 인한이 입을 꾹 다물었다.
‘자식…… 하여간 악필이라니까…….’
[아, 오글거려. 이런 거 쓰려니까 정말 기분 이상하네요. 겁나 어색해요 이런 거 쓰면 또 재수 옴 붙어서 진짜 안 좋은 일 일어날지도 모르는 거 아닙니까?]
이창훈이 쓴 글이 100퍼센트 맞다.
인한이 힘없이 피식 웃었다.
유서에는 구구절절 긴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공략조 한 명 한 명의 이름이 모조리 적혀 있었고, 그들에게 전하는 짧은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긴 말 안 할게요. 또 이 귀찮은 성격 가지신 형님들과 누님들을 제가 잘 알죠. 저 죽으면 이상한 죄책감이나 무기력함에 빠져서 탑 안 오르실 것도 압니다.]
글은 마지막에 닿았다.
[그러니까 귀찮게 하지 말고 얼른 끝내 버리십시오. 말해 주셨잖아요. 솔직히 우리 아니면 누가 탑을 끝냅니까? 우리뿐이에요. 해태 길드가 끝내야죠. 솔직히 저 없어도 다들 잘할 거잖아요. 후딱 끝내 버리고 비싼 양주 한 병 사 들고 인사나 오십쇼.]
“망할 놈.”
임태호가 혀를 차며 고개를 획 돌렸다. 이정환이 쓰게 웃으며 임태호의 등에 손을 얹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형님.]
그걸로 끝이었다.
인한이 유서를 곱게 접으며 긴 숨을 내쉬었다.
하여간 끝까지 성가신 놈이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놈이기도 했다.
이창훈이 없어도 잘할 거라고?
아니다. 이창훈은 길드의 누구보다 큰 버팀목이었다.
‘건방진 자식. 이런 거 쓴 줄 알았으면 한 방 아프게 때려 줬을 텐데.’
인한이 슬프게 웃었다.
인한이 봉분을 바라보았다.
‘그럼…… 잘 자고.’
인한이 몸을 돌렸다.
‘금방 끝내고 비싼 양주 사 들고 오마.’
인한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리고 그날.
[6차 몬스터 웨이브가 시작됩니다.]
[몬스터 웨이브 카운트다운 : 45일]
또 한 번의 재앙이 검은 탑에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