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0
<공략자들 250화>
물의 마을처럼 계획적인 도시화를 거치지 않았다지만, 시작의 마을은 충분히 아름다운 도시였다.
동양 특유의 전통적인 양식의 건물이 서 있기도 하고, 반대로 최신식 건물들이 섞여 있기도 했다.
골목골목 굽이치는 거리들은 언뜻 미로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시작의 마을은 옛날의 그런 모습들을 모조리 잃어버렸다.
콰아앙! 콰아앙!
땅의 마을 중심부.
온갖 폭발음이 몰아치며, 몬스터의 거체가 벽면에 처박혔다.
“으으! 끝이 없어!”
이창훈이 비명을 지르며 외쳤다.
벌써 열흘째 땅의 돌을 통한 공격이 이어지고 있었다.
1차와 2차 몬스터 웨이브를 연상시키는, 수없이 많은 몬스터들의 공격에 모두가 지치고 피곤한 상태였다.
“야, 야! 곱린아! 농땡이 피지 말고 준비해!”
아무리 이창훈의 몬스터들이 전투에 적합하지 않다지만 그것도 최상층에서나 해당되는 이야기다.
곱린이는 사실상 60층대의 보스 몬스터라면 이창훈의 마력 주입 없이도 상대할 수 있었다.
-캬악!
-크륵!
‘으으! 도망가고 싶다! 그래도…… 여기는 지켜야지!’
이창훈이 현자의 지팡이를 꽉 움켜쥐었다.
이창훈의 뒤에 있는 것은 그다지 대단할 것 없는 건물이었다.
하지만 이 건물에 바로 지하 벙커로 가는 문이 준비되어 있다.
지하 벙커에는 힘을 사용하지 못하는 일반인들, 혹은 공략 층수가 낮은 헌터들이 모여 있었다.
콰앙! 콰앙!
다행히 이곳은 땅의 돌 중심부에서 거리가 조금 떨어져 있었다.
중심부의 헌터들이 처리하지 못한 몬스터들이 이곳으로 다가오면, 그것을 처리하는 게 이창훈의 역할이었다.
‘문제는 그 처리하지 못하는 양이 너무 많아서 그렇지!’
쿠웅-
그 순간이었다.
이창훈은 지축을 울리는 묵직한 진동을 느꼈다.
‘뭐…….’
그 진동의 근원은 땅의 돌이다.
거센 폭발음이 이어지지도 않고, 그저 꽤 거리가 있는 이곳까지 이어지는 묵직한 진동만이 왔을 뿐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콰아아아아아아아!
새하얀 백색 기둥이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
‘저건 형님의 마력이다!’
눈이 부실 정도로 새하얀 마력의 빛.
하지만 어째서일까.
그 빛이 너무나 불길해 보였다.
* * *
인한의 무릎이 꺾였다.
멍한 눈빛으로 정면을 바라보는 인한이 입술을 잘근 씹었다.
“어느 정도 강해졌을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인한의 입에서 쿨럭, 하고 낮은 기침 소리가 흘러나왔다.
인한이 입가의 피를 스윽 닦으며 다시 한번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군.”
“…….”
인한의 앞에 나체의 사내가 서 있었다.
레오 뒤보아.
아니, 투귀 블러드 워커.
이 모든 사태의 주범이자, 동시에 모든 걸 끝낼 수 있는 열쇠를 가진 자.
땅의 돌을 통해 쏟아져 나오는 몬스터를 처리하던 중, 갑자기 나타난 레오가 인한에게 검을 휘둘렀다.
그 때문에 반응이 늦어지며 인한은 어쩔 수 없이 공격을 허용해 버렸다.
“그런데 칼침 한 방 놓고 끝이야? 내가 그렇게 얕보였나?”
인한이 목을 뚝뚝 꺾으며 말했다.
방금 전, 레오는 인한의 복부에 칼을 박아 넣었다고 공격을 멈췄다. 고작 그 정도(?) 상처는 금세 회복할 걸 레오라면 알 텐데 말이다.
인한이 눈가를 찌푸렸다.
“죽어도 주둥이만 물 위에 둥둥 뜰 놈이라고 생각했는데…… 한 번 죽고 나니 좀 조용해진 건가?”
“…….”
레오는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예전의 레오는 그 수다쟁이인 성격 때문에 몇 번이나 인한에게 정보를 내주곤 했었다.
한데 그런 그가 이렇게까지 말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게 수상했다.
과연 저 침묵의 의미는 그저 조심스럽기 때문인가, 그도 아니면 어떤 모종의 이유가 있는 것인가.
‘아니, 자아를 상실했다. 눈빛을 보면 알아.’
인한이 자세를 잡았다.
레오가 부활한 이유, 블러드 워커가 된 경위 등을 알아내고 싶어서 계속 말을 걸었지만 아무래도 그건 힘들 듯했다.
“인한아!”
“연합장님!”
사방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한이 레오의 움직임을 경계하며 천천히 말했다.
“이놈은 내가 처리할 테니까 나머지를 부탁드립니다. 이걸로 끝을 냅시다!”
지금 땅의 돌에서 나온 몬스터들의 수는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많았다.
하지만 그 몬스터와 함께 등장한 것이 레오 뒤보아다.
이번 웨이브가 마지막이라는 건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쾅!
선공은 인한이었다.
마치 공간을 바꿔치기라도 한 듯 레오의 앞에 등장한 인한이 그대로 주먹을 휘둘렀다.
카가각!
레오의 검이 고무처럼 크게 휘었다.
이어지는 제 2격, 아래에서 올려치는 레프트 어퍼컷이 이어졌다.
쾅!
정타로 틀어박힌 공격에 레오의 몸이 붕 떠서 지면에 처박혔다.
비틀비틀 일어나는 레오의 턱이 잔뜩 뭉개졌지만.
“그래, 그래야 레오 뒤보아지.”
그 턱은 곧 꿈틀대며 제 모습을 되찾았다.
콰앙! 콰앙!
폭음이 울려 퍼졌다.
수십 가지의 원형 구현이 동시에 전개되고, 박철환을 통해 얻게 된 공간 마법과 용언, 정령술이 모조리 펼쳐졌다.
서걱! 서걱!
레오는 무표정인 채로 인한에게 맞섰다.
인한이 펼친 그 모든 공격을 가볍게 쳐 낸다.
막아 낼 수 없는 건 그냥 얻어맞고, 팔다리가 날아간 채로 마력을 이용해 접근한 다음 검을 찔러 넣었다.
‘7단계!’
레오의 검에 무지막지한 거력이 숨어 있었다.
확실히 피했다고 생각한 순간, 검의 주위 마나가 순식간에 오러로 전환되며 인한을 두드렸다.
“하압!”
하지만 고통에는 익숙하다.
내상이 일어났지만 순식간에 회복한 인한이 정면으로 발을 뻗었다.
쾅!
지축이 흔들리며 레오의 균형이 무너졌다.
펼친 것은 마극포.
정면을 잠식하는 세 기운의 균열이 거친 폭발로 이어졌고…….
서걱-
자신의 몸을 자해하는 레오의 검술로도 결코 휘둘러질 수 없는 각도에서 검이 날아와, 인한의 몸을 사선으로 베었다.
‘이 멍청한!’
레오가 공격을 성공했지만, 멍청한 행동이다.
당장의 마극포를 막을 수는 있었겠지만, 무리한 각도로 검을 펼친 탓에 더 큰 공격을 허용하는 결과가 됐다.
콰아앙!
폭음과 함께 레오의 몸이 공처럼 지면에 처박혔다 튕겨져 올라왔다.
‘으윽!’
인한이 눈가를 찌푸렸다.
마력계에 미약한 내상이 있었다.
말 그대로 미약한 정도지만, 언제 전투가 끝날지 몰랐다. 바로 내상을 치료해야 했다.
인한은 뒤로 몸을 날려 거리를 두며 상처를 치료했다.
‘대체 이건 뭐지?’
쾅!
레오가 땅을 박차며 검을 휘둘러 왔다.
인한은 그 검을 상대하며 정체 모를 위화감을 느꼈다.
콰앙! 콰앙!
인한의 몸이 쭉쭉 밀려 나갔다.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공격들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마구잡이잖아?’
애당초 레오의 전투 기술이 검술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닌, 본능적인 움직임이기는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지금 레오는 검을 휘두른다기보다, 검에 휘둘리는 모습이었다.
일격, 일격을 전력으로 휘두르다 보니 검에 몸이 딸려 갔다.
어느 정도 경지에 도달하면 전투는 본능적인 부분보다는, 복잡한 수 싸움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레오는 그냥 되는대로 생각 없이 무기를 휘둘렀다.
‘크윽! 그런데 이 무지막지한 힘은 대체 뭐야!’
마력이 아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붉은 기운이 레오에게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며 인한의 힘을 밀어붙였다.
그 익숙하지 않은 힘 탓에 인한이 뒤로 밀려갔다.
하지만.
“그동안 내가 널 상대하기 힘들었던 건 네놈의 기술 때문이지, 절대 네놈의 힘 때문이 아니었다!”
힘에 휘둘리며 본능적으로 검을 휘두르는 건, 과격하게 말하자면 짐승이나 다를 바 없다.
그리고 고작 짐승에 인한은 지지 않는다.
콰앙!
휘둘러지는 검을 받아 내고, 몸을 반 바퀴 회전하며 그 회전력으로 주먹을 내지른다.
레오의 균형이 무너지자, 득달같이 따라붙어 연타를 쏟아 냈다.
반격을 해 오면 그대로 카운터다.
쾅!
데몰리션 킥.
레오의 허벅지에 작렬한 발 기술에 레오의 하체가 무너져 내렸다.
‘마무리다!’
인한이 주먹을 길게 끌어당겼다.
극파.
인한의 주먹이 작렬하고, 백색 마력의 기둥이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빛의 기둥이 소멸하자, 주변 광경이 그대로 드러났다.
쓰러진 것은…… 인한이었다.
“컥!”
또 한 번 꺾인 무릎.
인한의 등에서 피가 쏟아져 내렸다.
인한이 뒤편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이동민.”
전투의 왕의 껍질이 되었던 사내다.
그가 인한의 후방에서 암습했다.
‘어디 다른 곳에 있을 줄 알았는데…….’
과거 그와의 전투 이후, 인한은 죽은 그의 시체를 근처에 묻어 놓았다.
데스 파티와의 일이 끝나면 적절한 절차를 거쳐 장례를 치러 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돌아갔을 때 이동민의 시체는 없었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것이 지금 이 순간이었다.
우웅!
레오가 흙더미를 뚫고 모습을 드러냈다.
말 그대로 흙더미를 통과한 것이다. 레오의 몸이 귀신처럼 흐릿하게 공기 중에 번져 있었다.
인한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대체 어떻게?”
이동민이 방해했다지만 공격 자체는 적중했다.
지금 공격은 아무리 레오라도 먼지도 남지 않고 사라졌을 공격이었다.
그런데 레오가 살아 있다.
거기다 묘한 기척을 내뿜으며.
“설마!”
그 모습을 인한이 모를 리가 없다.
펜데게니아.
모든 물리 공격을 통과시키던 놈의 힘이다.
멍하니 이동민을 바라보던 레오가 갑자기 손을 뻗었다. 그러자 이동민의 육신이 무너져 내리며 레오에게 빨려 들어갔다.
‘대체……!’
그게 끝이 아니었다.
레오를 중심으로 검은색 입자가 울컥울컥 쏟아져 나왔다.
그 검은색 입자는 가공할 독기(毒氣)를 뿜어냈다.
거기다…….
-키엑!
-캬락!
그 독기가 닿은 지면과 공기에서 기형적인 몬스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건…… 92층의 데리안.’
92층 보스 몬스터.
존재하는 것만으로 독을 쏟아 내며, 내뱉는 숨에는 수십 마리의 보스급 몬스터를 만들어 내는 존재.
베면 벨수록 그 피에서 강한 몬스터가 생성되고, 상처를 입힐수록 더 강한 독기를 뿜어내는 놈이었다.
‘저 자식…… 설마 90층 구간의 몬스터까지!’
그게 끝이 아니었다.
레오가 천천히 검을 들어 자세를 잡았다.
스르릉!
검을 쥐는 자세에 위험한 기세가 서렸다.
지금까지의 레오라고는 볼 수 없는 정갈한 자세.
그리고 그걸 본 순간, 인한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인한이 고개를 획 돌리며 주위를 향해 외쳤다..
“다들 도망가!”
마력을 이용해 퍼뜨린 소리가 사방으로 번져 나갔다.
“응?”
“지금 무슨…….”
“인한이?”
인한이 벌떡 일어서며 황급히 마력을 끌어 올렸다.
“빨리 도망가! 이 자리에서 벗어나라!”
콰아아아아아!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레오의 기세가 순식간에 증폭됐다.
레오의 검에 담긴 묘한 기척.
인한이 그걸 모를 수가 없었다.
‘극파다!’
힘의 총량에서 밀렸으나 기술에서는 이겼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이동민을 흡수한 레오가 인한의 기술을 완벽히 재현해 내고 있었다.
거기다 그 검에 느껴지는 힘은 90층 구간에서 보였던 몬스터들의 것이다.
유기체든 무기체든 모조리 몬스터로 변환시켜 버리는 힘.
저 기술이 뻗어 나간 순간, 이 일대는 오염될 것이다.
‘제기랄!’
인한도 주먹을 끌어당겼다.
여기서 저 힘이 터지면 재앙이 일어난다.
레오를 막아야 한다.
꾸웅-
낮은 진동이 퍼져 나가고.
인한과 레오의 힘이 부딪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