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8
<공략자들 248화>
이정환이 굳은 표정으로 인한에게 다가왔다.
“확인됐다. 천문의 말은 사실이야.”
“…….”
돌연 떠오른 4차 클래스 업그레이드 알람.
인한은 가슴 언저리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불안감을 느꼈다.
‘그때와 똑같다. 하지만 어째서? 원래라면 분명 90층 구간에 들어갈 때 발생하는 퀘스트인데?’
블러드 워커 퇴치 퀘스트.
그게 벌써 발생한 것이다.
[블러드 워커는 90층 이후에 등장.]
[블러드 워커는 탑의 원주민에서 발생하며, 여의치 않는 상황일 때는 몬스터에게서 나타나기도 한다.]
[매번 힘의 성질이 바뀌었으나, 매번 극한의 난이도다.]
박철환의 수첩을 뒤져 봤지만, 별의별 내용이 다 적혀 있는 그의 수첩에도 이번 사태와 관련된 내용은 없었다.
박철환의 경험 속에서도 80층 구간에서 블러드 워커가 등장한 적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때의 블러드 워커가 지금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생각한다면…….’
재앙이다.
당시에도 최상위 랭커 수십 명이 목숨을 잃었다.
‘아니,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지금 시대의 헌터들은 그때보다 훨씬 강해졌어.’
인한이 눈을 빛냈다.
말 그대로 그때와 지금은 헌터들의 수준이 다르다.
검은 탑 초창기부터 익히기 시작한 마나 스킬과 인한이 밝힌 기초적인 정보 덕에 성장이 촉진되었다.
‘하지만 이전과 같다는 확신은…… 없지.’
생각을 정리한 인한은 이정환을 통해 필드에 나가 있는 2팀부터 4팀까지를 1층에 집결시켰다.
공략조 또한 필드 탐색을 멈추고 시작의 마을로 돌아왔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월드 퀘스트가 뭔데!”
“지금 바로 나가야 한단 말이야! 중요한 미팅이 있는데……!”
1층은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땅의 돌을 붙잡고 미친 듯이 발동시키고 있는 헌터와 일반인들이 여기저기 뒤엉켜 패닉을 일으키고 있었다.
“난리 났군.”
임태호가 굳은 표정으로 한마디 내뱉었다.
“……일단 빌딩으로 가죠.”
1층 시작의 마을에 있는 해태 길드의 건물.
해태 길드의 네 개의 팀이 세미나실에 모였다.
웅성거리는 와중에 강단에 선 인한이 입을 열었다.
대략적인 상황과 투귀 블러드 워커의 정체 등에 대한 정보가 오고 갔다.
“일단 상황 파악이 될 때까지 1층 시작의 마을에서 지내기로 한다. 의견 있는 사람은 가감 없이 말해 주길 바란다. ……의견이 없으면 일단 해산하도록 하지.”
강단에서 내려온 인한은 간부들과 따로 자리를 가졌다.
침중한 표정의 이정환이 입을 열었다.
“나쁜 소식과 더 나쁜 소식이 있다.”
“……이쯤 되니까 네가 새로운 소식을 전하는 게 무서워진다. 어떻게 매번 나쁜 소식투성이냐?”
인한이 농담조로 타박했지만 이정환의 표정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이정환이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레오가 살아 있다.”
“……!”
“뭣!”
“레, 레오가?”
좌중의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레오 뒤보아.
그 이름은 여전히 해태 길드에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몇 번이나 모습을 드러낸 모양이다. 망령들도 처음에는 비슷한 사람일 거라 여겼는데, 각 층에서 몇 번이나 목격됐다. 이건 증거다.”
이정환이 태블릿PC를 회의실 테이블 위에 올렸다.
“……레오가 맞군.”
임태호가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검을 휘두르고 사내.
사진이 흔들려서 흐릿하긴 하지만 분명 레오였다.
“하지만 어떻게? 분명 시체는 우리가 처리했지 않았냐.”
“혹시 몰라서 태운 잿더미도 한데 모아 상자에 넣어 뒀죠.”
이창훈이 말을 받았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아나스타샤가 조심스레 조나단 최를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언데드일 가능성은 없나요?”
“불가능합니다. 언데드는 시체가 있어야 합니다. 레오는 애초에 시체라고 말할 수 있는 게 남아 있지 않았구요. 거기다 언데드치고는 너무 깨끗해요.”
그때, 사진을 넘기던 이창훈이 갑자기 소리쳤다.
“어라? 어, 어어어! 이, 이거!”
“뭔데 그래?”
“이거 좀 보세요. 이거 각석 아니에요?”
인한이 이창훈이 확대한 사진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분명히 각석이 솟아 있었다.
“킁! 살아 있는 것도 안 믿기는데, 각석? 이거 합성 아니냐? 그 새끼들이 우리한테 정보 팔려고?”
임태호가 과격한 추측을 내놓았다.
하지만 인한은 고개를 저었다.
망령들의 정보는 언제나 확실하다.
앞뒤 일을 이해할 수 없으나, 레오가 살아 있고 그의 머리에 뿔이 돋아 있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래서, 더 나쁜 소식은 뭔데.”
인한이 이정환을 바라보았다.
이정환은 말없이 사진을 넘겼다.
곧 영상 하나가 나왔다.
이정환은 영상을 재생하며 입을 열었다.
“그 레오가…… 블러드 워커다.”
그 말에, 모두의 눈이 커졌다.
* * *
검은 탑 74층.
해태 길드의 공략법에 따라 비공선을 제작하던 상위권의 헌터 길드 토르.
영상은 정찰 중인 토르의 길드원의 액션 캠에서 나온 것이었다.
-하 씨, 지대가 높아서 그런가 숨차 죽겠다.
-산소가 희박한 거 같지 않냐?
-그건 그렇고, 아까 그 천문 대체 뭐야?
-일단 본대로 복귀하자. 이야기를 들어 보자고.
콰아앙!
그때, 갑자기 폭음이 울려 퍼졌다.
연이어 들려오는 폭음과 그 뒤를 잇는 짐승의 울음소리.
-무슨 일이지? 이, 일단 뛰어!
화면이 크게 흔들렸다.
빠르게 복귀한 정찰조의 눈에 길드가 주둔지를 설치해 둔 곳의 전경이 들어왔다.
-저, 저게 대체…….
수백, 수천에 달하는 몬스터들이 토르 길드를 덮치고 있었다.
-저건 49층에 나오는…… 저건 50층의 베히모스잖아?
몬스터의 종류는 절대 74층에 등장하는 게 아니었다.
-대체 몬스터들이 왜…… 으, 으악!
콰드득!
동료 한 명이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넘어졌다.
그의 등 뒤에는 핏빛으로 물들어 있는 중형견만 한 설치류가 매달려 있었다.
67층에서 등장하는 몬스터, 몬스터 래트였다.
-도, 도망가…….
-히, 히이익!
액션캠이 다시금 맹렬히 흔들렸다.
힐끗 고개를 돌린 그의 눈에 다시금 참상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 참상 속, 나체의 남성이 몬스터들에 둘러싸인 채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도망치던 헌터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머리 위에 저게 대체 무슨 글자가…… 투귀…… 블러드 워커……?
영상은 거기까지였다.
천운이 따른 것인지 사내는 살아남았지만, 토르 길드는 전멸했다.
“……대체 이건.”
겐지가 나직한 신음을 흘렸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우울해졌다.
“…….”
임태호가 말없이 이창훈과 눈을 마주쳤다.
이창훈이 고개를 저었다.
“저런 몬스터들 다 사역하는 게 말이나 될 것 같습니까? 제가 안 되는 게 아니라 누구나 안 됩니다.”
“보시면 알겠지만 네크로맨서의 개입도 없었습니다.”
이창훈과 조나단 최가 연달아 대답했다.
인한이 이를 악물었다.
‘이게 설마 블러드 워커의 능력이라고?’
그렇다면, 상황은 그야말로 최악이다.
회귀 전 블러드 워커는 그저 강할 뿐인 존재였다.
그 무지막지한 강함으로 온갖 헌터들을 사냥하고 다녔지만, 특수 능력을 보유하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수를 셀 수 없이 많은 몬스터의 군단이 레오의 뒤를 따르고 있다.
‘저 정도의 몬스터가 한 번에 몰아치면…….’
그렇게 되면 아무리 인한이라도 위험하다.
최상위 계층의 보스 몬스터 수십 마리, 중층과 하층의 보스 몬스터 수십 마리, 셀 수 없이 많은 일반 몬스터까지.
“이건 진짜 말도 안 되는데…….”
이창훈은 영상을 다시 재생하며 눈가를 찌푸리고 있었다.
그걸 바라보던 인한이 급하게 영상을 멈췄다.
“잠깐.”
“예? 왜요?”
“뒤로 조금만 돌려 봐. 아니, 조금 더 앞으로. 그래, 거기. 영상은 확대가 안 되나?”
“당연히 되죠.”
이창훈이 인한에게 태블릿 PC를 넘겼다.
인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어째서 이자가 여기에?’
레오의 옆에 있는 자를 바라보는 인한의 표정이 전에 없이 일그러졌다.
‘……이동민.’
그곳에 있는 건 전투의 왕을 몸에 담았던 사내, 이동민이었다.
회의 끝에 조금 위험하더라도 한 번 직접 눈으로 정찰하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현재 70층인 모양이다. 천천히 내려오면서 눈에 보이는 헌터는 모조리 사냥하고 있어.”
첫째 날 밤이 찾아왔다.
일단 해태 길드의 빌딩을 임시 주거 공간으로 만들었다.
사실 1층에는 일반인들을 위한 호텔이 다수 존재하지만,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길드원 전원이 모여 있기로 했다.
다들 휴식을 취하려고 눕긴 누웠지만, 잠이 올 리 만무했다.
“끄응…….”
이창훈이 비척거리며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런데 그가 한동안 시간이 지나도 들어오질 않자, 인한도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여기서 뭐 하냐?”
“아, 형님.”
이창훈은 건물 옥상 난간에 기대 서 있었다.
상당히 야심한 시각임에도 옥상 아래에 반짝이는 불빛으로 가득했다.
“아니, 그냥 뭐…… 기분이 싱숭생숭하네요.”
“그래?”
“뭐 그렇죠. 아시다시피 제가 또 겁 엄청 많지 않습니까, 크흐흐.”
인한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예? 뭐가 아닌데요?”
“너 겁 없다고. 겁이 많았으면 내가 데리고 다니지도 않았겠지.”
이창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흐흐, 제가 대단하긴 합니다.”
평소답지 않은 이창훈의 모습에 인한이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냐?”
“예? 아뇨, 뭐 무슨 일이긴요.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제가 쓸모없다는 생각. 솔직히 최근에는 제가 활약 못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냐?”
“아, 예예. 저도 알아요. 저도 저에게 알맞은 자리가 있는 거. 그런데 동료들 보고 있으니까 기분이 좀 그래요. 다들 자기 몸 던지면서 위험한 일 하는데 저는 뒤에서 혼자 있으니까.”
“네 덕에 우리 길드원들이 지금까지 큰 피해 없이 진행할 수 있었던 거야.”
그건 맞는 말이다.
이창훈의 몬스터들은 전투력이 낮은 대신 수많은 일을 해낼 수 있다.
해독약 제조, 탐색, 정찰, 함정 해제, 구출, 응급 치료…….
전투를 제외한 모든 분야에서 이창훈은 수십 명이 할 일을 해내고 있었다.
그 증거로, 이창훈은 최상위 랭커 중 하나였다.
“흐흐, 그렇게 말하니까 기분은 좋네요. 어휴, 추워라. 들어갑시다, 형님.”
간부들 중에 가장 마력 스테이터스가 높은 이창훈이기에 추위를 느낄 리는 없었다.
그러니 그냥 해 본 말이 분명했다.
그런 이창훈의 마음이 느껴져, 인한도 피식 웃으며 그 뒤를 따랐다.
그때였다.
쿠르르르르릉-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지면이 맹렬히 흔들렸다.
“뭐, 뭐야?”
쿠르르릉!
진동이 점점 가까워져 온다.
아니, 이젠 지진 정도가 아니다.
이건…….
콰아아아아앙!
거친 폭발음이 마을의 중심부에서 터져 나왔다.
“이건……!”
마력의 폭발이다.
대기의 마나가 불길하게 흔들린다.
인한이 눈을 돌려 폭발음이 들린 쪽을 바라보았다.
‘저쪽은 땅의 돌?’
인한이 눈에 마력을 집중시키며 상황을 살폈다.
1층 시작의 마을.
동양계 헌터들이 다수 존재하는 이곳에.
-크르르르!
-캬악! 크륵!
-크어어어!
가늠할 수 없는 수의 몬스터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