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7
<공략자들 247화>
검은 탑 74층.
필드 자체가 하늘에 떠 있는 섬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일까.
멈추지 않고 필드를 나아가던 레오도 발을 멈추고 멍하니 섬의 끝자락을 바라보고 있었다.
-크륵? 키에에엑!
하늘을 날아다니는 괴수, 그리핀이 레오를 바라보며 흠칫 놀라했다.
공격을 해야 하는 건지, 말아야 하는 건지 한참을 고민하던 그리핀이었으나.
-키에에에!
레오와 눈을 마주친 순간, 공포에 떨며 도망치는 것을 택했다.
뿌득!
그러는 와중에도 레오의 까만 머리카락 위에는 새로운 뿔이 돋아나고 있었다.
이제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숫자가 된 뿔이 불길한 핏빛을 흘려 댔다.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키에에에!
-캬아아악!
-뿌륵! 뿌르륵!
족히 수십에 달하는 그리핀들이 레오의 앞에 나타났다.
퍼덕이는 날갯짓에 돌풍이 휘몰아치고, 그리핀들의 울음소리가 하늘섬 가득 울려 퍼졌다.
-키에에!
그들의 대장격으로 보이는 그리핀이 늠름하게 울음을 터뜨리자, 허공에 수백 개의 마법진이 떠올라 레오를 겨눴다.
-크륵! 키엑!
그리핀들이 마법을 방출했다.
족히 작은 산 하나는 날려 버릴 수 있을 법한 마법 수백 개가 레오 한 명에게 쏟아졌다.
-뿌륵?
자욱하게 피어오른 먼지.
누가 봐도 레오는 죽었을 게 분명했다.
마법의 융단 폭격이 끝나고, 처음 레오에게서 도망갔던 그리핀이 눈을 부릅뜬 채 레오가 서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푸르르!
그리고 곧 무언가 이상하단 걸 깨달았다.
주위에서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았다.
자욱하게 피어오른 먼지구름 너머로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화악!
그리핀은 다급하게 바람 마법으로 시야를 가리는 모든 걸 밀어냈다.
그리고 곧 그리핀의 눈에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보였다.
하늘에 떠 있던 그리핀의 동료들이 모조리 힘을 잃고 추락하고 있었다.
“…….”
그 순간 레오가 갑자기 손을 뻗었다.
울컥울컥-
피 안개와 같은 붉은 기운이 뻗어 나와, 추락하는 그리핀들을 휘감기 시작했다.
화악!
그 붉은 기운이 사라졌을 때, 추락하던 그리핀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레오가 다시 한번 손을 뻗었다.
그리고 레오의 손에서 또다시 붉은 기운이 뻗어 나와, 사방을 잠식했다.
직후, 그 붉은 기운이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며 뭉치기 시작했다.
-키에에에!
-크르르르!
붉은 기운에 휩싸였던 그리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신이 핏빛으로 물든 듯한 붉은 신체의 그리핀들이 펄럭이며 레오의 주위를 맴돌았다.
레오의 시선이 마지막 남은 그리핀 한 마리에게 향했다.
-키에엑!
그리핀이 다급히 몸을 돌려 달아나려 했다.
하지만, 붉은 기운은 그리핀을 놓아주지 않았다.
붉은 기운은 게걸스럽게 마지막 그리핀마저 삼켜 버렸다.
* * *
결국 해태 길드는 75층을 다시 한번 클리어하게 되었다.
압도적인 인한의 무위에 힘입어, 75층은 순식간에 클리어됐다.
인한은 3차 클래스 업그레이드의 퀘스트 클리어 천문을 보고는 아주 오랜만에 사용자 정보창을 켰다.
[사용자 정보]
이름 : 최인한
종족 : 인간
레벨 : Lv.999
타이틀 : 시작하는 자(A+), 언데드 학살자(A), ……천무(S)
클래스 : ??
[스테이터스]
힘 : 9999
민첩 : 9999
체력 : 9999
지능 : 9999
마력 : 9999
속성력 : 9999
[스킬]
<액티브 스킬>
1. [트@#$ 셀 !#@$]
2. [무!#@$$]
……
‘흐음…….’
인한은 자신의 스테이터스 창을 보며 긴 숨을 내쉬었다.
정보창이 사실상 제 역할을 상실했다.
모든 스테이터스와 레벨이 9로 도배되어 있었다.
하물며 클래스창에는 물음표만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인한은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하긴, 이제 이런 건 의미가 없지.’
스테이터스창의 표기는 분명 한계가 없다는 의미일 게 분명했다.
레벨도 마찬가지며, 클래스도 의미를 상실했다.
현재 인한의 육체는 한계가 없다.
그리고…… 굳이 육체의 발전에 의미를 부여할 이유도 없었다.
‘무극인과 트리아스 액셀은 역시 이렇게 됐군.’
인한은 스킬창을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예전에야 몰랐지만 지금은 알 수 있었다.
천문이란 아카식 레코드의 정보를 가시적으로 볼 수 있게 하는 기술이다.
그렇기에 천문으로 보는 것은 진리이며, 언제나 정확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때때로 드러났던 천문의 부족한 점도 그런 맥락에서 발생한다.
아카식 레코드에 접속하고, 자신의 의지를 세계에 덧칠할 수 있는 자, 즉 볼카누스나 왕들과 같은 초월자에게는 의미가 없는 것이다.
‘천문은 옛 왕들의 유산을 파악하지 못해. 아니, 정확히는 왕들이 볼 수 있게끔 만들어 둔 것밖에 파악하지 못하지.’
그 좋은 예가 퀘스트 [왕의 선택]이었다.
인한에게 앞길을 가르쳐 주는 왕의 선택은, 아리아에 의해 만들어진 것임에도 천문으로서 드러났다.
반대로 무극인과 트리아스 액셀.
애초에 세계의 규칙조차 비틀어 낸 트리아스 액셀을, 불완전한 현재의 왕이 만들어 낸 기술인 천문이 파악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마찬가지로 인한과 볼카누스에 의해 만들어진 무극인도 그랬다.
“야! 가자! 다음 층이다!”
아무리 정보창이 의미가 없어졌다 한들, 그것은 인한에게만 해당되는 일이었다.
3차 클래스 획득을 성공적으로 이뤄 낸 길드원들은 눈에 띄게 기도가 달라져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있었던 전투의 흔적을 생각하면…… 투왕 길드는 선행하고 있는 거로군.’
대체 어떤 방식으로 불사족의 지옥을 뚫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성공하긴 한 모양이었다.
“다음 층으로 간다!”
이정환이 외쳤다.
해태 길드는 76층으로 진입했다.
검은 탑 77층, 78층.
3차 클래스 업그레이드와 박철환의 공략집을 바탕으로, 해태 길드는 빠르게 던전을 클리어해 갔다.
“내가 공략에 아예 빠지든가, 개입 횟수를 줄이도록 하자.”
필드 진입 중 인한이 이정환에게 말했다.
“그래, 그렇게 해라.”
“설명도 안 듣고 이해한 거야?”
“네가 너무 많은 걸 하면 길드원 개개인은 성장할 수 없어. 공략조는 너의 원맨쇼를 위한 들러리들이 아니니까.”
이정환의 말이 맞았다.
그렇게 바로 포메이션에 미세한 조정이 이어졌다.
물론, 인한이 힘을 줄인다고 해 봐야 그동안과 별반 다를 건 없었다.
아무리 인한이라도 상층 구간에는 전력을 다해야 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저 인한이 그동안 열을 해내던 것에서 아홉을 해내는 쪽으로 영향력을 줄인 것이었다.
“너는 무지막지하게 강하지만, 해태 길드도 강해. 점점 네 비중을 줄여 갈 거야. 우리끼리도 충분히 가능하거든.”
그 말에 인한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검은 탑 80층.
투왕 길드는 현재 79층의 보스존을 공략 중이었다.
고작 1층, 아니, 분명 이번에 클리어할 테니 거의 차이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매 층 매 층이 점점 더 극악의 난이도로 다가오고 있었으나, 해태 길드는 차근차근 앞으로 나아갔다.
“자, 그럼 휴식!”
80층 땅의 돌을 활성화시킨 해태 길드는 휴식을 취했다.
길드원들은 저마다 긴장을 풀고 땅바닥에 주저앉았고, 간부들은 대련을 시작했다.
그리고 인한도 수련을 시작했다.
“후우…….”
조용한 곳에 정좌한 인한이 긴 숨을 내쉬었다.
75층에서의 사건 이후로 인한의 수련 방식은 상당 부분 달라졌다.
그동안 인한의 수련이 격렬하게 무극인을 펼치거나 마력에 깊숙이 파고들어 가는 것이었다면, 지금은 차분히 자리에 앉은 채 명상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제 육체적인 부분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천무를 얻은 이후 인한은 무극인에 대해 완전한 이해를 하게 됐다.
유일하게 남은 것은 극파.
하지만 극파는 어떤 동작이나 특유의 마력 운용을 요구하는 기술이 아니라, 순전히 깨달음의 영역에 있는 기술이었다.
지금의 인한에게 필요한 건 격렬한 움직임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침잠하는 것이었다.
“나는 하나의 세계다. 그리고 나라는 사람은 세계의 일부이기도 하다.”
인한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것은 트리아스 액셀 7단계로 인한을 이끌어 준 깨달음.
마나란 세계 그 자체를 이루는 힘.
그리고 인한은 그 세계의 일원임과 동시에, 인한이라는 세계의 주인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인한 체내의 마력이 모조리 체외로 뿜어져 나갔다.
자신의 기운과 세계의 기운의 구분이 무의미해지며, 마나에 대해 깨닫게 되었다.
보통 마력을 익힌 헌터를 그릇에 비유하는데, 그렇다면 현재 인한은 밑바닥이 없는 항아리와 같았다.
굳이 마력을 담지 않아도, 인한의 체내로 마나라는 물이 아무런 저항 없이 들락날락하기 때문이었다.
인한이 숨을 길게 내쉬고는 손을 허공에 휘저었다.
그 순간, 마력이 꾹꾹 뭉치더니 새싹이 되고, 순식간에 성장해 나무가 되었다.
직후 나무가 우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변화하더니 불이 되고, 불이 순식간에 변화하더니 물이 되었다.
정령술이 아니다.
인한은 마력을 통해 온갖 물질과 현상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내게 마력량은 의미가 없군.’
원한다면 세계의 모든 마나가 인한에게 힘을 준다.
‘하지만 아직 멀었어. 여전히 나는 마나를 마력으로 변환시켜야 하니까.’
마나와 세계,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다지만 8단계라는 새로운 벽이 인한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벽 뒤에 뭐가 있는지, 어떤 것인지는 짐작할 수 있지만 벽을 허물 방법이 없었다.
‘탑 코어. 거기에 답이 있다.’
천무의 패시브 스킬, 관조를 발동시킨 인한은 자신의 마력계를 탐색했다.
한계에 달한 힘을 보유하게 된 인한이었으나, 멈추거나 쉴 것 같은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 * *
“제길…….”
검은 탑 100층, 천문을 바라보던 라스틴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
“벌써 80층이란 말인가?”
지금껏 어떤 세계도 80층에 이 정도 속도로 도달한 적이 없었다.
거기다 어째서인지 도전자들의 힘 또한 전에 없이 강력하다.
“이대로라면 100층까지 올지도 모르겠어.”
라스틴은 90층을 ‘클리어할 수 없는’ 던전으로 만들어 뒀다.
강하고 약하고를 떠나서, 전 차원을 돌아다니며 만난 기이하고도 괴이한 힘들을 모아 만들어 낸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알 수 없다. 전혀 알 수 없어…….’
라스틴은 최인한의 천문을 띄워 놓고 이를 바득 갈았다.
인한의 천문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오류가 생성된 상태였다.
‘말도 안 되는 힘이야. 대체 어떤 왕들이 이런 괴물을 만들어 냈단 말인가!’
라스틴이 주먹을 꽉 쥐었다.
지금껏 수도 없이 많은 차원을 여행하며 상상도 못했던 상황이었다.
‘……어차피 계약을 어긴 건 놈들이 먼저였다. 나는 그저 이 게임의 제작자로서 적절한 개입을 하는 것일 뿐.’
라스틴이 눈을 빛내고는 천문을 조작하기 시작했다.
그날.
검은 탑에 있는 모든 헌터들의 시야에 한 가지 천문이 떠올랐다.
[월드 퀘스트가 주어집니다.]
[퀘스트를 받아들이시겠습니까?]
[Y]
[퀘스트를 받아들였습니다.]
[4차 클래스 업그레이드]
[난이도 : S]
[투귀(鬪鬼) 블러드 워커가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월드 퀘스트가 완료되기 전까지 탑의 외부로 나갈 수 없습니다.]
[블러드 워커는 층을 이동할 수 있습니다.]
검은 탑 74층을 오르고 있던 한 길드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 천문 뭐지?”
“투귀 블러드 워커……?”
“어? 야야, 저거 뭐야. 저거!”
“나체잖아……?”
“어이! 거기 누구…… 어어, 자, 잠깐! 으아아악!”
콰아아아앙!
폭음이 울려 퍼지고, 사람이 육편이 되어 흩날렸다.
그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레오, 그리고…….
-크르그!
-카락!
-크르르!
수백, 수천에 달하는 핏빛으로 물들어 있는 몬스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