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5
<공략자들 245화>
폭사하는 시초의 왕을 바라본 지혜의 왕이 낮게 혀를 찼다.
“쓸데없이 눈치가 좋아서 명을 재촉했군. 멍청한 것. 분에 찬 욕심은 부리는 것이 아니다.”
지혜의 왕은 천천히 에테르 크리스탈에 다가가 손을 얹었다.
한동안 집중하며 작업을 진행하던 그가 다시 한번 짜증이 섞인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역시 작업 속도가 월등히 떨어지는 건가.”
시초의 왕의 마법 실력은 누구보다 뛰어났다.
아니, 뛰어났다고 말하기는 그렇다.
그는 무엇을 하든 ‘최초의 방법’을 만들어 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같은 작업을 하더라도 더욱 효율이 좋고 뛰어난, 누구도 예상치 못한 새로운 절차를 만들어 냈다.
그렇기에 시초의 왕.
에테르 크리스탈이라는, 땅의 마왕에 의해 만들어진 검은 탑 작동 장치를 만지기에는 그만한 인물이 없었다.
“계속 계획이 어그러지는군.”
박철환은 죽었고, 시초의 왕은 반기를 들었다.
지혜의 왕은 혀를 차고는 에테르 크리스탈에 손을 얹었다.
[테라포밍 진행률 : 73.0083퍼센트]
[테라포밍 진행률 : 73.0087퍼센트]
……
끝에 다다라서 멍청한 짓을 하기는 했지만, 시초의 왕의 알아낸 것은 사실이었다.
지혜의 왕은 아발론을 이 세계에 강림하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선 사소한 부분까지 이어야 한다.
아무리 지구가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만들어진, 세계의 백업이라고 하더라도 문제는 있다.
지구에는 마나가 존재하지 않았다.
마나는 생명체뿐 아니라 세계 그 자체의 구조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아발론과 지구는 다른 점이 많았다.
그 차이에 대한 조정이 필수였다.
거기다 수많은 세계의 정수들도 그저 가지고 있다고 바로 세계를 정상화시킬 수 있는 게 아니다.
각 차원별로 차이점과 공통점을 파악하고, 그것을 적용시키지 않으면 안 됐다.
그건 그야말로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것에 버금가는 작업이었다.
‘상관없지. 어차피 얼마 남지 않았다.’
그 순간이었다.
지혜의 왕의 움직임이 우뚝 멈춰 섰다.
‘이건……?’
왕의 기운이다.
정확히는, 마왕의 기운!
‘어떻게? 분명 아테리너스가 한 그 바보짓은 실패로 돌아갔을 텐데?’
전투의 왕의 기운이 아니었다.
과거의 기억을 일정 부분 강탈당한 지혜의 왕이었으나, 이 기운만큼은 확실히 기억한다.
‘아리아? 어떻게…… 설마 그 마왕의 씨앗이 사도화되었다는 것인가? 아니, 이게 고작 사도 정도일 리가 없다. 기어코 왕좌와 레갈리아 둘 모두를 획득했군!’
지혜의 왕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쾅!
지혜의 왕이 에테르 크리스탈을 후려쳤다.
거친 폭음이 공간에 번져 갔다.
‘박철환, 네 이 녀석…… 역시 믿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지혜의 왕은 일그러졌던 얼굴을 펴고는 긴 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쩌면 이렇게 될 줄 알았을지도 모르겠군.”
지혜의 왕은 평소와 같은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래 봤자 불완전한 왕일 뿐. 왕좌와 레갈리아를 얻었다 한들, 정작 중요한 왕으로서의 증명은 이루지 못했다.”
그랬다.
왕의 힘을 가지고 있더라도, 세계에게 자기 자신을 증명하지 못하면 그것은 완전한 왕이라 할 수 없다.
“후후, 왕으로서의 증명을 이뤘다 한들 그다음은 어떻게 할 생각이지? 새롭게 찾아올 세계에서 나는 세계 그 자체가 될 텐데 말이야.”
지혜의 왕이 에테르 크리스탈을 조작하기 시작했다.
“아리아, 너는 언제나 잘못됐다. 아발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건 나뿐이다.”
나직이 중얼거리며, 지혜의 왕의 눈이 다시 한번 빛났다.
* * *
어느새 아리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 익숙한 집도, 집 앞의 풍경도 없었다.
인한이 눈을 뜬 것은 어둠 속에서였다.
[퀘스트를 성공적으로 완료했습니다.]
[보상이 주어집니다.]
[왕의 왕좌]
기억을 모두 소화했기 때문인지 6차 퀘스트까지 완료되었다.
그리고 그것과 동시에 마치 풍선에 바람이 빠지듯, 인한의 전신에 가득하던 힘이 외부로 빠져나갔다.
일반인이 보면 압도당하고, 헌터가 보아도 숨을 죽일 수밖에 없을 것만 같던 인한의 기세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야말로 일반인이나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흘러나오는 기파도 평탄하기 그지없었으며, 어떠한 위압감이나 힘도 느껴지지 않았다.
모든 힘을 잃은 것일까.
아니다. 오히려 힘을 품을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트리아스 액셀 <7단계>]
인한이 허공에 손을 저었다.
그 순간, 마나가 저절로 마력으로 변화하며 사방을 환히 밝혔다.
불의 정령술이 아니었다. 그저 마나를 마력으로 전환해 빛을 일으킨 것이었다.
‘이게 7단계…….’
어떤 깨달음이나 힘의 증폭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할 수 있는 것들이 확연히 느껴진다.
이 세계의 모든 마나가 인한의 힘이었다.
[왕의 선택 (7/10)]
[난이도 : EX]
[성공조건 : 왕의 재보를 획득하시오]
[실패조건 : 죽음]
[상세설명 : 없음]
[보상 : 왕의 선물]
또다시 떠오른 퀘스트.
애초에 반대를 할 수조차 없는 것도 이젠 익숙하다.
“…….”
머리가 멍했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인한은 한동안 가만히 서서 허공을 바라보았다.
‘나는 대체 뭐지?’
일련의 과정을 통해 찾아온 것은 당황스러움이었다.
‘나는 내가 맞는 것인가.’
많은 것을 알게 되었지만, 동시에 많은 것을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인한의 목표는 탑과 관련된 모든 일을 끝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걸 위한 방법을 알 수 없었고, 막연히 100층을 끝내기 위해 탑을 올랐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더 크고 더 버거운 일이 펼쳐져 있었다.
복잡한 머릿속에 떠오른 진실들에 짓눌릴 것만 같았다.
인한은 그다지 대단한 사람이 아니다.
할 수 있는 것을 해 왔고, 나름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해 왔다.
세계를 짊어지려 한 박철환과는 다른, 그야말로 평범한 사람이다.
‘어째서 나일까.’
그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을 때, 대답이 돌아왔다.
-그야, 너뿐이니까.
아리아였다.
기억 속의 장면일 뿐이건만, 그녀의 장난기 가득한 미성이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내가 트리아스 액셀을 익힐 수 있는 신체를 가졌기 때문에? 싸울 줄 아는 사람이라서?’
-아니야. 매번 힘들어서 쓰러지고, 포기도 하고, 말도 바꾸고 선택도 확실히 못하지만…… 하지만 사람다우니까. 너는 사람답지 않은 길을 선택하지 않을 테니까.
인한이 입을 꾹 다물었다.
사람답다. 칭찬인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한, 묘한 말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너는 너니까. 너여야만 했으니까.
인한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나는 나다.
지금까지 그래 왔다.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
단지 그 크기가 커졌을 뿐이다.
인한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를 믿고 모든 걸 맡겨 줬던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인한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우우웅-
고여 있는 바람이 움직이는 소리가 대형 몬스터의 울음소리처럼 들렸다.
그 정도로 커다란 공간이었다.
곳곳에 석상이나 조각들이 가득했고, 예술은 하나도 모르는 인한조차 감탄성을 낼 정도로 아름다운 구조의 건축물이 존재했다.
고대의 신전을 연상케 하는 모습이었다.
인한은 천천히 안쪽으로 들어섰다.
위이잉! 철커덕!
기관이 맞아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거대한 문이 하늘로부터 떨어져 인한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건…… 이렇게 푸는 거였지.’
인한이 손을 쭉 뻗어 문의 중앙에 손을 얹었다.
그 순간, 마나가 순식간에 마력으로 변환되며 틈과 틈 사이로 파고들었다.
철컥, 철컥, 무언가가 맞아 떨어지는 소음이 들리고, 순식간에 문이 좌우로 열렸다.
그 뒤로 몇 번이나 그와 같은 일이 발생했다.
그럴 때마다.
-우리가 당신에게 남겨 줄 수 있는 것은 그다지 큰 게 아니랍니다.
기억이 떠올랐다.
이번 문에서 떠오른 기억은 생명의 왕의 기억.
-오오? 주위를 차갑게 식혀 주는 바람 생성기라? 에어콩? 아니, 에어컨이라고? 오호, 그것도 재밌겠구만? 아, 그리고 내가 진짜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니까 잘 사용해 주게.
대장장이이자 드워프의 수장이었던 땅의 왕의 기억.
그렇게 많은 기억들이 차례로 떠올랐다.
‘친구들.’
그들은 인한의 친구였다.
비록 그들 중 인한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었다지만, 인한은 그들을 친구로 여겼다.
곧, 인한이 모든 문을 열었을 때, 작은 공간이 펼쳐졌다.
시설의 규모에 비해 유난히 좁은 그곳에는 딱 세 개의 물건이 놓여 있었다.
“이건가……?”
[생명의 원정]
[땅의 목소리]
[샛별의 포옹]
저마다 생김새도 다르고 풍기는 기운도 다른 아이템들이었다.
하물며 이름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된 천문도 떠오르지 않았다.
‘역시 그랬군. 마왕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들은 특정한 권한이나 사용법이 따로 있다. 애초에 현재 세계의 주인인 왕들과는 다른 법칙을 사용하는 거였어. 그렇기에 왕의 권세도 발동되지 않았던 거야.’
지금까지 왕의 권세가 적용되지 않은 경우가 몇 차례나 있었다.
그 가장 대표적인 예가 무한의 금고였다.
인한은 첫 번째 아이템인 ‘생명의 원정’을 손에 쥐었다.
생명의 원정은 밝은 녹색의 빛에 휩싸여 있는, 어린아이 주먹 크기의 아이템이었다.
‘이건 먹는 거야.’
인한이 원정을 삼켰다.
그 순간, 전신에 시원한 기운이 번져 갔다.
[마력에 특성을 부여합니다.]
[재생]
[치유]
…….
수없이 많은 천문이 떠올랐다.
몸을 회복하거나 강화시키는 종류의 특성투성이.
말 그대로 생명력과 관련된 힘이었다.
‘이제 진짜 불사신이나 다름없겠군.’
인한이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몸이니만큼 알 수 있었다.
레오처럼 죽더라도 부활하는 건 아니겠지만, 심장과 뇌만 살아 있다면 인한은 죽지 않을 것이다.
‘다음은…….’
땅의 목소리.
작은 크기의 외안경이었다.
한쪽 눈에 외안경을 착용한 순간, 인한은 시야가 변화하는 걸 느꼈다.
‘이건…….’
인한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보고 싶은 모든 걸 볼 수 있다.
마력의 흐름, 마법의 구조, 석상이나 공기의 질이나 자기 자신의 육체 상태까지.
이 안경을 통해 담는 모든 걸 의지에 따라 볼 수 있다.
‘이건…… 정환이에게 줘야겠어.’
인한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 전국을 바라보며 모든 걸 파악하는 이정환에게 있을 때 힘을 발휘할 것이다.
다음으로는 샛별의 포옹.
그것은 작은 원반이었다.
은색 바탕에 금색 도금이 되어 있는 형태.
‘방패다.’
인한이 그 원반에 마력을 주입했다.
그 순간.
와아아아아아앙!
거센 소리와 함께 투명한 막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주입한 마력의 힘에 따라 반구형으로 모든 걸 막아 내는 방어막이 형성된 것이다.
그야말로 신물이라 할 수 있는 세 가지 아이템이었다.
인한은 생명의 원정을 제외한 아이템을 인벤토리에 넣었다.
[퀘스트를 성공적으로 완료했습니다.]
[보상이 주어집니다.]
[왕의 선물]
[왕의 선택 (8/10)]
[난이도 : EX]
[성공조건 : 라스틴을 쓰러뜨리시오.]
[실패조건 : 죽음]
[상세설명 : 없음]
[보상 : 세계의 허락]
사방에서 밝은 빛이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