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4
<공략자들 244화>
“지금부터 준비를 할 생각이야.”
인한이었다.
“천천히 준비해야 해. 나는 상당히 눈치가 없거든.”
어조는 평탄했지만, 표정에서 결연함이 묻어났다.
‘뭘 준비한다는 거지?’
그런 질문을 하는 자기 자신에게 대답이라도 하듯, 기억 속의 인한이 입을 열었다.
“내가 잘못된 길을 걷지 않도록. 큰 위협이 닥쳤을 때, 그 앞을 지켜 낼 최소한의 준비가 되도록.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라지는 것들이 있을 수도 있고, 혹은 그들에 의해 없어질 것도 있겠지. 하지만…… 나는 알아. 많은 것들이 남아 있을 거야.”
인한은 홀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앞에는 다섯 존재들이 서 있었다.
인한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자.
인한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자.
저마다 다른 종족과 생각을 가진 자들이었지만, 그들은 한 명도 빼놓지 않고 인한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힘들 거야. 정말, 정말로…….”
아리아가 말했다.
언제나 미소를 잊지 않는 그녀의 표정이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그런 표정 짓지 마. 힘들기는 너도 마찬가지니까. 나는 그저 내가 하고 싶어서 그런 거니까.”
인한의 말에 아리아가 고개를 푹 숙였다.
머리카락만 만지작대는 그녀를 보고 한 번 피식 웃은 인한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착각하고 있었다.
그토록 많은 우연과 안배는 어째서 준비될 수 있었던 것일까.
이 세상에 우연은 없다.
오직 쌓아 올린 필연들이 겹쳐 이루어진 현상만이 있을 뿐이다.
1층 시작의 신전에서부터 시작된 이 모든 사건들.
아니, 어쩌면 모든 것이 시작된 아리아의 무덤을 발견했던 때부터 시작된 것일지도 모르는 일들.
그 모든 것을 우연, 혹은 아리아의 안배라고만 생각해 왔다.
‘아아…….’
인한의 입에서 깊은 탄식을 흘렸다.
하나둘, 그저 우연으로 치부하고 넘겼거나, 이해할 수 없었던 일들의 해답이 머릿속에 명확하게 떠올랐다.
인한을 아리아의 무덤에 빠뜨린 정체불명의 사내.
5층 왕가의 비도에 있었던 빛의 수호자와 씨앗.
천천히 익숙해지게끔, 오랜 시간 마력원 깊은 곳에서 느껴왔던 극멸기의 흔적.
레오의 코어 스톤에 준비되어 있던 인한의 접속 권한.
고대 정령 실리암과의 만남.
묘한 끌림을 느꼈던 용왕의 이빨.
생명이 위험할 때나, 정신적 한계에 도달할 때 인한을 붙잡아 줬던 아리아의 도움.
지금껏 계속해 도움을 주고 있는 위그라노아의 존재.
그 수많은 영약 중에서 얻게 된 엘릭서와 아무리 방어구라 한들 공격적 성능이 거의 없다시피 했던 오리하르콘 슈트.
넬레바나의 드반이 가지고 있었던, 무려 병마의 왕을 봉인할 수 있는 아이템.
요정왕과 용왕과의 만남.
전투의 왕과, 그가 가지고 있었던 진실의 열쇠.
‘그것들은 전부…….’
어떻게 상황에 알맞게 그런 것들이 준비될 수 있었을까.
마치, 인한이 앞으로 어떤 미래를 맞이하고 어떤 경험을 할지 아는 것처럼, 그 모든 것들이 인한의 앞에 마련되어 있었다.
‘내가 준비한 거였어.’
두 번째 착각.
과거의 자신이 아발론에 갔던 게 아니다.
지금의 인한이, 앞에 닥칠 모든 위협을 알고 있는 자기 자신이 아발론으로 향했던 것이다.
‘이 모든 안배들은 내가 준비한 것이었다.’
눈을 가리고 있던 휘장이 걷어진 기분이다.
모든 전쟁이 끝날 무렵.
아발론은 세계의 말단에서부터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누군가’에 의해 동시다발적으로 열려 버린 차원의 균열을 통해 지금의 왕이자 이세계의 존재들이 쏟아져 나왔다.
왕이라고 해서 전투에 특화된 존재인 것은 아니었다.
유일하게 전투의 왕만이 전쟁에 특화된 힘을 보유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자연스레 괴이하고 압도적인 힘을 가진 이세계의 존재들은 아발론을 점령해 갔다.
‘아발론에는 용왕과 요정왕이 있었지만…….’
세계의 수호자와 같은 두 존재가 있었으나, 그들은 아발론을 위협하는 차원의 균열을 막는 데 전력을 다해야만 했다.
이 모든 일을 꾸며 낸 ‘누군가’는 이세계의 존재들을 규합해 세계의 주권을 빼앗고자 했다.
그 모든 일의 끝자락에 있는 것은, 비단 아발론에 국한된 것이 아닌 모든 세계의 종말이었다.
그렇기에 아리아는 인한을 준비했다.
그릇되고 어그러질 세계의 균형을 바로잡아 줄 하나의 열쇠.
모든 일이 준비되고, 마지막 준비만이 남았을 무렵.
아리아는 자신의 왕의 자격을 인한에게 물려주려 했다.
그녀는 왕으로서의 모든 힘을 포기하고, 인한에게 그것을 이식했다.
그러나 한번 왕은 영원한 왕이다.
아무리 힘을 잃었다 한들 아리아는 여전히 세계로부터 왕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렇기에 인한이 그녀를 극멸기로 소멸시켰다.
아리아의 힘을 모조리 품고 있던 인한은, 아직 왕으로서의 자신을 증명하지 못했음에도 그렇게 불완전하게나마 왕이 된 것이었다.
‘하지만 시간대가 맞지 않아. 대체, 어떻게…….’
분명 아발론에서의 전쟁 직후, 검은 탑이 수많은 차원에 등장하고, 마지막에 지구에 도착하는 순서로 모든 일이 진행되어져 왔다.
그렇다면 어떻게 인한의 기억을 설명할 수 있을까.
현재의 자기 자신이 가장 과거라 할 수 있는 아발론으로 향했고, 그 아발론에서 현재의 자신을 위한 안배를 준비하였다.
과거, 현재, 미래의 순서가 맞지 않는다.
마치, 세 시간대의 인한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과 같았다.
‘아니, 그래, 그렇군. 이곳이 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한은 그조차 금세 이해했다.
애초에 시간대가 맞을 필요가 없었다.
검은 탑.
시공을 초월한 왕의 보물.
탑은 왕만이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기물이었다.
아직 불완전하기는 하나, 인한 또한 왕으로서 인식되고 있는 존재였다.
아리아와 인한은 검은 탑을 이용했다.
탑은 현재와 과거, 그리고 미래를 이어 주는 쐐기와 같은 통로였던 것이다.
‘그랬구나. 그랬던 거였어…….’
인한이 숨을 길게 내뱉었다.
어느새 땅바닥에 누워 있는 인한은 어둠 속에서 멍하니 허공만을 바라보는 상태였다.
‘내가, 오직 내가 모든 일의 열쇠였던 거야.’
* * *
“재밌는 일이지.”
시초의 왕이 말했다.
“나도 깜빡 속을 뻔했단 말이지? 어째서 우리는 네 말에 거역할 수 없는 걸까. 어째서 오래전부터 너를 우리의 수장으로 생각하고 있던 걸까.”
“…….”
지혜의 왕은 그저 시초의 왕을 바라볼 뿐이었다.
“대체 너의 계획은 무엇일까. 검은 탑을 통해 흩어진 세계의 정수를 모조리 끌어모아, 무너져 가는 아발론을 완벽한 세계로 만든다? 에이, 너무 성실한 목표잖아?”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계속 들어 봐. 자, 그래서 내가 생각해 본 거야. 아, 생각이랑 좀 다른가? 내 자신의 기억을 모조리 스캔해서 기록했어.”
“……그런 짓을 하면 자아가 붕괴되었을 텐데.”
“음, 실제로 그렇게 됐지. 사실 근 1천 년 정도의 기억이 날아가 버렸어. 한동안은 숨 쉬는 거나 손발을 움직이는 법도 몰라서 고생했다니까? 한동안 갓난 애기처럼 에베베- 하면서 지냈지, 큭큭!”
“미쳤군.”
“뭐, 그래도 자아라는 게 1천 년 정도 있으면 다시 만들어지던데? 난 그래서 이 마법을 사용했단 기억 외에는 과거의 나와는 다른 존재라 이 말씀. 단 하나 확실한 건, 내 기억을 스캔하고 남은 기록뿐이란 거지.”
거대한 괴조, 지혜의 왕 특징인 붉은 눈이 더욱 짙어졌다.
그건 일종의 자살이나 마찬가지였다.
과거의 자신을 죽이고, 현재의 자신에게 그 기록만을 남긴다.
과연 그 기록을 읽는 현재의 자신이 과거의 자신을 자기 자신으로 받아들일까?
아니다. 오히려 더욱 이질감만 느낄 것이다.
소설책 속에 자신의 이름이 나온다고 그걸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할 사람은 없다.
“그 기록을 읽고 알 수 있었지. 너는 예전의 일곱 왕 중 하나였어. 우리들과 접촉해 아발론을 꿈꾸게끔 주입시키고, 끝내는 차원의 균열을 통해 아발론을 침략하게 한 것도 너였고, 우리를 불완전한 왕으로 만든 후에 자기 마음대로 다루게 하게끔 한 것도 너였어.”
지혜의 왕은 말이 없었다.
드래곤의 모습을 하고 있는 시초의 왕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착오가 있었지. 바로 너도 불완전하게 왕이 되며 기억을 잃은 것. 배반자인 데다 자격 박탈까지 당했으니까! 킥킥!”
시초의 왕은 지혜의 왕을 놀리듯 혓바닥을 낼름 내밀었다.
“검은 탑이 무언가 중요한 걸 알고, 검은 탑이 계획의 모든 거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다뤄야 할지 알 수 없었지. 그래서 넌 검은 탑의 사용법을 알아야 했어.”
“…….”
“너는 원래 한 가지 일로 몇 가지 결과를 내는 걸 좋아하지. 그래서 유희라는 이름으로 라스틴에게 차원을 방황하게 하고, 온 차원의 정수를 수집한 거야. 그 과정에서 라스틴을 관찰하는 것과 씨앗과 사도를 통한 일의 진행까지 했지.”
“재밌군. 더 말해 보아라.”
“흐음, 의외로 침착하네? 네 그 침착한 표정이 일그러지는 걸 보고 싶었던 건데 말이야.”
시초의 왕이 말을 이었다.
“뭐 좋아. 네가 하고 싶은 것도 알아냈어. 아발론 정상화, 아발론을 향한 흐름 집중. 하지만 이 ‘테라포밍’을 보면 알 수 있지. 너는 그 작업의 끝을 굳이 아발론에 할 생각이 없어. 왜냐? 아발론은 이미 수많은 존재의 손을 탄 곳이니까.”
“그렇군.”
“옛 왕들, 현재의 왕들, 용왕과 요정왕까지…… 이미 무너질 대로 무너진 위태로운 세계인 데다, 용량이 너무 넘쳐 나니까 말이야.”
시초의 왕이 옆에 있는 에테르 크리스탈, 혹은 에테르 코어라 불리는 물건을 툭툭 건드렸다.
“그래서 네가 선택한 건 테라포밍. 최하위 위계…… 아니, 이렇게 말하는 게 옳겠지. ‘세계의 백업 파일’이자 어떤 존재의 손때를 타지 않은 지구에 아발론을 지구에 강림시킬 생각인 거야.”
“용케 거기까지 알아냈군.”
“하지만 너는 과연 그 세계를 우리와 공유할까? 아니지, 아니야. 너는 왕을 모조리 죽일 생각이야. 그치?”
“맞다. 이 모든 일은 결국 내가 오직 하나뿐인 세계의 왕이 되기 위한 작업이었다. 그 일에 고작 일꾼에 불과했던 너희들을 끌어들일 이유가 없지.”
지혜의 왕은 덤덤하게 말했다.
시초의 왕이 씨익 웃으며 무언가 말하려는 순간, 지혜의 왕이 말을 가로챘다.
“이 세계가 아발론과 합쳐지는 순간, 차원을 넘은 여파로 저쪽에 있었던 왕들은 빈사 상태가 된다. 그러나 나는 이 세계에서 유희용 육체로 힘을 축적한 상태다. 저쪽과 합쳐지는 순간 이 육체는 본체에 수렴될 것이고,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진 나는 왕들을 모조리 죽일 수 있을 것이다.”
시초의 왕의 표정이 꿈틀댔다.
어째서 지혜의 왕이 그토록 숨기고 있었던 계획을 직접 말하고 있는가.
“왕들을 죽이고 힘을 갈취함으로써 나는 오히려 더욱 큰 힘을 갖게 되겠지. 남아 있는 마왕들이야 간단하지. 씨앗과 사도는 그걸 위한 거니까.”
지혜의 왕이 성큼 다가갔다.
“어어, 왜 그러냐? 너, 나는 살려 준다며?”
“이미 여기까지 알아냈다면 이용 가치는 떨어졌으니까.”
“큭큭! 그렇단 거지?”
화악!
시초의 왕이 에테르 크리스탈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 순간, 공간이 일그러지며 무형의 기운이 지혜의 왕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쉬워서 어떻게 하지? 그럴 줄 알고 내가 준비를 끝냈는데! 네 계획을 가로채서 미안하지만, 내가 바로 이 세계의 왕이 될 것이다! 하하하! 하……?”
시초의 왕이 허망한 표정으로 지혜의 왕을 바라보았다.
지금쯤 유희용 육체가 부서져야 했을 지혜의 왕이 그대로 서 있었다.
“이미 나는 이것의 사용법을 깨우쳤다. 네 그 조잡한 방법 따위, 진작 파악한 상태였다.”
“대, 대체 언제……!”
“아발론에서 기다려라. 네놈들의 죽음을, 그리고 나의 강림을.”
푸욱! 콰드드득!
어둠만이 가득한 허공.
한 마리 드래곤의 피륙과 혈액이 사방에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