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2
<공략자들 242화>
수첩에는 75층 공략에 대해 적혀 있었다.
[75층의 공략은 없다. 다른 숨겨진 길도, 쓰러뜨릴 수 있는 방법도 없다. 오직…….]
이 공략법은 인한도 아주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짐꾼조는 이 주사를 맞은 후에 전력으로 도망친다. 공략조는 그 사이에 메인 던전으로 직행하도록!”
75층행이 결정된 직후였다.
당시 데스 파티의 짐꾼조에 있던 인한은 이상한 주사를 하나씩 나눠 받았다.
말이 좋아 짐꾼조지, 노예나 마찬가지였다.
박철환은 각종 이유로 사람들의 약점을 붙잡고 그들을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이 주사는 뭡니까……?”
“고작 노예 새끼 주제에 무슨 질문이야! 그냥 시키는 대로나 해!”
주사를 맞은 후에야 그게 뭔지 알 수 있었다.
그 주사는 마나 리프트였다.
1급 마약이자, 제조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처벌을 받는 물건이었으나 데스 파티에서 그런 걸 신경 쓸 리가 없었다.
“우욱!”
거기다 단순한 마나 리프트가 아니었다.
마약 특유의 황홀감은커녕, 달궈진 쇳물이 전신을 타고 돌아다니는 듯한 감각이 들었다.
위력을 높이기 위해 온갖 위험한 약물을 들이부은, 개량된 마나 리프트였던 것이다.
인한은 이를 악물었다.
‘미끼구나. 우리가 미끼 역할을 해내게끔 마나 리프트를 먹인 거야.’
불사족들을 끌어당기기 위한 미끼.
불사족들의 입장에서도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것을 사냥하는 편이 더 수월하기 때문에 대다수가 미끼에게 따라붙었다.
박철환은 불사족들이 접근해 올 때마다 짐꾼조를 한 명씩 내보냈다.
마력이 증폭된 짐꾼조의 인원들은 미친 듯이 달리며 불사족들에게서 도주했다.
하지만 인한은 도망치는 것보다 숨는 걸 선택했다.
그게 인한의 목숨을 구해 주었고, 다행히 본대에 합류해서 76층으로 향할 수 있었다.
‘이 방법은 안 된다.’
누군가를 희생하거나 미끼로 쓴다니, 말도 안 되는 방법이었다.
이건 해태 길드의 방법이 아니다.
분명 그럴 터였다.
“어? 그거 좋은데?”
인한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이정환을 바라보았다.
“뭐?”
“아, 물론 마나 리프트나 길드원을 미끼로 쓴다는 소린 아니야.”
“그럼 뭔데?”
“네가 있잖아.”
“……?”
인한은 문득 오한을 느꼈다.
“너 불사족들한테 맞으면 죽냐?”
“죽고 말고를 따진다면…… 안 죽겠지?”
이제는 보스 몬스터가 펼치는 스킬을 정면에서 얻어맞더라도 상처 하나 안 나는 게 인한이었다.
거기다 레오의 씨앗을 흡수한 이후에는 어느 정도의 중상도 빠르게 재생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럼 네가 미끼하면 되겠네. 뭐가 문제야? 그동안 우리는 보스존으로 갈게.”
“진심이야……?”
“응? 진심이고 말고 할 게 있어? 네가 제격이잖아?”
인한이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그때 간부들이 한마디씩 말을 이었다.
“오호, 그거 좋은 생각 아니냐?”
“그러고 보니 형님 정도 몸빵이면 그냥 아주 미끼로는 제격인 거 같은데요?”
“흐음, 자신을 희생한다라. 본받아야겠군요!”
임태호와 이창훈과 겐지였다.
“역시 권왕이십니다. 그 불굴의 육체로 해태 길드에게 몰아치는 풍파를 막아 내시는 거로군요.”
신규 간부인 조나단 최는 숫제 눈물마저 흘리는 것 같았다.
“…….”
다만 리셴은 묵묵히 귀를 기울인 채 딱히 의견을 내지 않았다.
그때, 아나스타샤와 이소영이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안 됩니다! 인한을 또 위험하게 둘 생각이에요?”
“동감! 우씨! 진짜 우리 길드 남자들 이럴 겁니까? 인한 씨! 가지 마요!”
인한이 이소영과 아나스타샤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소영 씨! 아나 씨! 역시 두 분밖에…….’
그때 이정환이 입을 열었다.
“그럼 달리 방법이 있습니까?”
“그, 그건!”
“제가 볼 때는 이게 가장 좋은 방법 같은데요? 거기다 위험하다니요. 얘, 최인한이에요.”
“그, 저…….”
이소영과 아나스타샤는 우물쭈물하다 자리에 다시 앉아버렸다.
‘아니! 거기서 말을 멈추면!’
결국 두 사람까지 이정환의 제안에 납득하고 말았다.
이소영과 아나스타샤가 미안하다는 듯 인한과 눈을 마주쳤지만, 인한은 허망한 표정으로 하늘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 그럼 호위라도 붙이도록 하죠. 인한 씨 혼자는 너무해요.”
이소영이 다급히 그런 말을 했다.
그러자 이정환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호위를요? 누구요? 얘한테요?”
“…….”
그랬다.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해태 길드에서 가장 지킬 필요가 없는 게 다름 아닌 길드장인 인한이었다.
“그럼 그렇게 하는 걸로. 인한이 너는 어그로 잘 끌어 주고.”
“……그래, 알았다.”
인한이 궁시렁대며 대답했다.
* * *
공략이 시작됐다.
길드원들보다 10분 정도 일찍 75층에 도착한 인한은 땅의 돌 앞에서 마력을 폭발시키며 큰 소리로 소리쳤다.
“여기다! 이쪽이다!”
-크르?
-무슨 소리지? 낯선 마력의 흐름이구나…….
불사족들이 사방팔방에서 모여드는 게 느껴졌다.
놈들은 살아 있으나 살아 있지 않은 존재.
때문에 인한 정도의 생명력과 넘치는 마력에 끌리기 시작한 것이다.
-크아아아!
-잡아라! 죽여라! 먹어라!
‘됐어!’
계획대로 근처 불사족들이 인한에게 달라붙었다.
인한은 짧은 전투를 벌인 후 적당한 거리를 벌리며 달려 나갔다.
-크어어! 살아 있는 인간!
주위 불사족들이 소란을 듣고는 인한에게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에 인한은 곧바로 드루이드의 인형을 켰다.
“됐어! 땅의 돌 근처는 된 거 같다!”
-알았어! 진입할게!
인한의 연락을 받은 해태 길드가 75층에 진입했다.
미리 명령해 둔 대로 임태호가 정면에서 길드를 이끌었다.
-적당히 떨어졌으면 다시 합류해! 이쪽에 하나둘씩 붙기 시작한다!
“알았다!”
인한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 순간.
‘원형 구현, 분쇄.’
자신을 따라오던 십수 마리의 불사족들이 허공에서 폭사했다.
조각조각 난 불사족들의 파편은 아주 느릿느릿 재생하고 있었다.
인한은 바로 마력으로 몸을 숨기고 해태 길드의 본진에 붙었다.
공략조를 노리는 근처의 불사족들을 모조리 끌고 도망치고, 거기서 일단 떨쳐 낸 후 다시 끌고 도망치고…….
이 일련의 과정이 반복됐다.
‘으으! 내가 왜 이런 짓을!’
아무리 인한이라도 몇 시간 동안 계속해서 움직이니 엄청난 마력이 소모됐다.
그렇게 75층 중반부에 이르렀을 때, 안전지대를 발견한 해태 길드는 잠시 이동을 멈췄고, 인한도 드디어 쉴 수 있었다.
녹초가 되어서 돌아오자마자 땅바닥에 드러누운 인한에게 이정환이 말했다.
“그래도 다행이네. 메인 던전까지의 거리가 멀지 않아서.”
참 얄미운 말이었다.
“……그래.”
‘그래 뭐 어쩔 수 없으니…….’
자신만 죽어라 고생하면 길드원들은 수월하게 공략을 진행할 수 있으니, 이게 효율적인 방법이란 것을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인한은 그렇게 생각하며 마력 회복에 전력을 다했다.
우적! 우적!
인한이 인벤토리에서 한 뿌리에 몇천만 원씩 하는 마력초들과 영약들을 뭉텅이로 입에 집어넣었다.
무분별한 약초 섭취는 중독 현상으로 이어지지만, 인한에게는 해당 사항 없었다.
“아, 실수로 독초 씹었다.”
이제 극독에 노출돼도 따끔한 느낌 정도만 났다.
그런 인한을 보며 이정환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차피 하루 쉴 건데 왜 그렇게 급하게 회복해?”
분명 효과는 좋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 작업이었다.
인한 정도라면 휴식을 취하면 금세 회복할 테니까 말이다.
“바로 나갈 거니까 그런다. 으으! 이거 엄청 쓰네.”
삼처럼 생긴 식물의 이파리를 질겅질겅 씹어 삼킨 인한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얼마나 쉬었다고 나가는 거야?”
“한 시간이면 충분히 쉬었지. 마력도 7, 80퍼센트 정도 회복됐고…… 그동안 나는 꼭 해야 할 일이 있다. 조심할 테니까 걱정 말고 있어.”
“누가 널 걱정하겠냐. 아무도 안 할걸?”
“…….”
역시 알게 모르게 따돌림을 당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인한이 궁시렁대며 안전지대를 빠져나왔다.
* * *
75층에서 열쇠가 필요할 만한 곳이라면 짐작 가는 데가 있었다.
첫 번째는 보스존.
불사왕도 나름 이름에 왕이 붙기 때문인지 궁전에 있었다.
그 궁전을 뒤져 보면 열쇠를 사용할 자리가 나올지도 몰랐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이쪽……이었던 거 같은데.’
유적이다.
메인 던전으로 가는 길에서는 다소 떨어져 있는 곳에 위치한 이곳엔 무너진 유적이 존재했다.
과거 마나 리프트를 마시고 숨어 있을 때, 인한은 이 유적을 발견했다.
쉽게 발견할 수 없는 유적인 데다 워낙 규모가 작아서 다시 찾기도 힘들었다.
‘보스존은 아닐 거 같다. 뭐라고 설명할 순 없지만…… 왠지 그 유적인 것만 같아.’
유적에는 몬스터가 접근해 오지 않는 것이 보통이지만, 불사족들은 인간형인 경우가 대다수이기 때문인지, 종종 유적에 가까이 가곤 했었다.
‘일단 하나 찾았군.’
곳곳에 크고 작은 유적이 존재했다.
그러나 유적의 형태가 기억 속의 것과 다소 달랐다.
인한은 다음 유적을 찾아 나섰다.
그렇게 안전지대에서 몇 시간이 지났을 무렵.
“허억, 허억…….”
몇 번의 전투를 반복한 인한은 꽤 지쳐 있었다.
그냥 찾기만 하는 건 심심하다고 생각해서 무극인과 트리아스 액셀의 운용을 하며 나아갔기 때문이었다.
‘이건 좀 힘든데.’
마력량도 아슬아슬하고, 지치기도 지쳤다.
거기다 아무리 조절했다 한들 트리아스 액셀과 무극인은 임팩트가 상당했다.
마력의 빛과 소음을 들은 근방의 불사족들이 모조리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크어어…….
-우매한…….
-그 생명을…….
언뜻 봐도 수백에 가까워 보이는 생명체들.
길드원들이 인한을 봤다면 분명 욕지거리를 했을 것이다.
수련하겠다고 말벌이 있는 벌집을 모조리 건드리고 다닌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인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도망치자.’
쓰러뜨릴 수 있는 놈들이라면 모를까.
이대로 계속 불사족들을 데리고 다니다간 필드 전체의 몬스터가 달려들지도 몰랐다.
쾅!
생각하기가 무섭게 인한의 몸이 앞으로 쭉 뻗어 나갔다.
지면에 발이 닿을 때마다 폭발하듯 뒤쪽으로 흙무더기가 튀어 올랐다.
‘물론 도망가기 전에 큰 거 한 방!’
인한이 손을 쭉 뻗은 순간.
쿠우우우-
폭발의 원형이 구현됐다.
거센 폭음과 함께 따라오던 수백 마리의 불사족들이 모조리 풍선처럼 터져 버렸다.
사방으로 튀는 육편이 붉은 세계를 더욱 붉게 물들였다.
“어?”
미친 듯이 달리던 인한이 순간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우뚝 멈춰 섰다.
워낙 엄청난 속도였기 때문인지, 관성 때문에 숲의 나무와 땅에 박힌 암석들을 상당히 부서뜨린 후에야 멈출 수 있었다.
‘이건…….’
인한의 눈에 담긴 것은 유적이었다.
그다지 규모가 크지 않은, 그러나 무너지기 전에는 상당한 규모가 있었을 것 같은 유적.
‘이거다!’
인한이 눈을 반짝 빛내며 유적으로 다가갔다.
보면 볼수록 그의 기억에 있는 유적과 똑같았다.
인한이 유적 안쪽으로 들어섰다.
드문드문 아직 무너지지 않은 석벽이 있는 유적이었다.
안에는 기둥을 박는 구멍이나 다 무너지고 발 부분만 남은 석상 등이 있었다.
‘……안 좋은 추억이네. 내가 분명 여기서 땅굴을 파고 숨었나.’
인한이 한숨을 푹 내쉬며 석상의 뒤편으로 돌았다.
그리고 인한의 움직임이 우뚝 멈춰 섰다.
“이게…… 어째서……?”
인한이 멍한 눈으로 지면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회귀 전, 인한이 땅굴을 파고 숨었을 때의 구멍이 그대로 뚫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