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략자들-240화 (240/266)

# 240

<공략자들 240화>

박철환은 알고 있다.

그는 악당이다.

자신이 옳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것이 선하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이 길밖에 없다.

왕에게 힘을 구걸하고, 영원히 시간을 반복하며, 바늘의 구멍만큼이나 좁은 확률을 만들어 내는 방법은, 그의 길뿐이었다.

현실은 소설이나 영화처럼 간단하지 않았다.

과거로 회귀할 수 있다 한들, 여전히 인간은 총과 칼에 맞으면 죽고 얻어맞으면 아픈 건 똑같았다.

이야기 속 주인공들처럼 모두가 행복한 결말을 맞이할 순 없다.

박철환도 안다.

그는 길을 잘못 들었다.

흔히 나오는 내용이다.

처음에는 영웅 행세를 하다가 현실에 부딪혀 악당이 된다는 이야기.

그도 처음에는 인한과 같았다.

동료들과 함께 탑을 올랐다.

누구도 놓치지 않고, 누구도 포기하지 않은 채, 힘들고 고단한 작업이지만 꿋꿋이 버티며 오르고 올랐다.

그러나 너무 많은 것을 잃어 왔고, 너무 많은 죽음을 겪어 왔다.

그러다 언제부턴가, 내면의 무언가가 부서지고 말았다.

어쩌면 처음 죽었을 때부터, 어쩌면 자살했을 때부터, 어쩌면 동료를 내던졌을 때부터, 어쩌면…….

그렇다.

어쩌면 탑에 처음 올랐을 때부터, 박철환은 망가지게 된지도 모른다.

‘안다. 나도 내가 그릇된 것을.’

박철환의 눈에 섬뜩한 살기가 맴돌았다.

그는 언제나 뒷일을 생각하는 자였다.

그의 목표는 눈앞에 있는 상대도, 현재 올라야 하는 층도 아닌, 저 아득히 멀리 느껴지는 100층의 보스였으니까.

그러나 지금만큼은 아니다.

지금 이 순간, 이 공간에서.

박철환은 오직 인한만을 바라보았다.

우우우우우우웅!

청색 빛이 터져 나오며, 검의 표면을 얇게 덮었다.

‘내 수많은 삶 속, 내가 연마하고 또 연마해 온 일검(一劍).’

이것이 박철환의 전부이다.

박철환은 그 검을 치켜들고, 그대로 내리쳤다.

인한은 모른다.

무엇이 옳은 건지, 무엇이 잘못된 건지.

지금 가는 길이 맞는 건지, 아니면 돌아가야 하는 건지.

왕, 마왕, 와발론, 검은 탑…….

수많은 이 세계의 비밀들 속에서 인한은 오직 오늘 하루를 위하여 살아왔다.

인한은 아무것도 모른다.

그래서 마음이 시키는 대로 갔다.

그는 딱히 사람들이 칭송하는 것처럼 그다지 강한 사람도 아니고, 재능이 있다거나 뛰어난 사람도 아니다.

감정에 휘둘리기도 하고,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지 않기도 하고, 일관성 없이 행동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게 인한이다.

인한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이 필요했다.

인한이 부족한 만큼, 그의 동료들이 채워 주기 때문이다.

인한도 알고 있다.

인한이 오롯이 자기 자신의 힘으로 이룬 것은 많지 않다.

아리아, 왕의 권세, 넬레바나, 루한, 볼카누스, 동료들…….

인한을 이루는 것은 인한의 것이 아닌, 다른 누군가로부터 받은 것들투성이다.

‘그러니까 이 일권(一拳)은 그들이 만들어 준 것이다.’

지금껏, 인한이라는 한 사람이 그려 왔던 수많은 이야기들.

그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염원이 담겨 있다.

후욱!

인한의 주먹이 뻗어 나갔다.

소음은 없었다.

터져 나온 섬광에 의해 한순간 모든 게 소멸됐다.

섬뜩한 폭발음도, 터져 나오는 돌풍도, 세계에 가득한 수많은 색들도.

‘아아…….’

누군가 감탄성을 내려 했다. 그러나 소리가 되지 못한 채 입가에 맴돌 뿐이었다.

데스 파티와 해태 길드 간의 전투는 그친 지 오래.

청광과 백광에 물든 세계 속에서 모두가 멍하니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후욱!

그 빛의 팽창이 그쳤을 때, 한순간 소멸됐던 것들이 제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처음 돌아온 것은 색이다.

하얗거나 파랗게 채색되어 있던 세상이 제 모습을 되찾기 시작했다.

땅의 색, 벽의 색…… 이윽고 모든 게 제자리를 찾았다.

그러자 다음으로…….

콰아아아아아아아아!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전투에선 필연적으로 소음이 따르기 때문에 헌터들은 습관적으로 마력으로 귀를 보호한다.

그러나 그 마력의 방벽마저도 뚫고 들어올 정도의 소음이 울려 퍼졌다.

개중에는 귀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자도 있었다.

우웅-

소음이 가신 뒤, 좌중에는 침묵만이 남았다.

바람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적막 속, 한 줄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나만 묻지.”

“…….”

“너는 네가 옳다고 생각하나?”

박철환이었다.

온몸이 땀과 자잘한 상처로 가득했지만, 그다지 큰 문제는 없어 보이는 박철환이 물었다.

반면, 그의 앞에 있는 인한은 그다지 상태가 좋지 않았다.

등과 팔뚝의 오리하르콘 슈트가 찢어져 있었고, 입가에는 각혈의 흔적이 뚜렷했다.

인한이 대답했다.

“이미…… 너는 알 텐데.”

수십, 어쩌면 수백에 달하는 합을 겨뤘다.

그 부딪힘 속, 나눴던 수많은 대화에 과연 설명이 필요할까.

“그래, 그렇군…….”

박철환의 목소리는 어딘가 힘이 없어 보였다.

자조적인 미소를 지은 박철환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쿠웅-

세계를 짊어지려 한 사내의 쓰러짐은 땅이 울리는 듯했다.

지금껏 수많은 강적을 넘어뜨려 왔던 인한이지만, 이토록 큰 울음소리는 처음 들어 보는 것이었다.

“오히려 잘됐어. 너는…… 가능할지도 모르겠군.”

“…….”

“왕은 왕만이 죽일 수 있다. 나는…… 그렇지 못했기에…… 쿨럭!”

박철환의 입에서 피가 울컥 솟아 나왔다.

인한이 저도 모르게 박철환에게 다가갔다.

“트리아스…… 액셀에서 답을 찾고자 했다. 하지만…… 그래, 이것도 운명일지 모르겠군. 너라면…… 마왕의 힘을 가지고 있는 너라면…… 라스틴을 쓰러뜨릴 수 있을 것이다.”

박철환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인한은 몸을 낮추고 박철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너라면…… 90층까지는 금방 가겠지. 하지만 알아야 할 게 있다. 90층을…… 조심해라. 블러드 워커는…….”

박철환이 숨을 헐떡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블러드 워커는…… 라스틴에게 얽매여 있는 존재에게서 나온다. 아인족을 봉쇄한 건 그 때문이었다. 이미 늦었겠지만…… 이미 탑의 어딘가에서 블러드 워커가…….”

블러드 워커.

수십 명의 랭커를 참살했던 90층의 악몽.

“이걸…… 받아라.”

박철환이 허공에 손을 휘젓자, 땅바닥에 가죽 장정의 작은 수첩이 툭 떨어졌다.

“공, 공략…… 허억! 허억!”

“공략에 대해 적힌 거냐?”

“……그래.”

인한은 박철환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적이며, 복수의 대상이고, 죽여야 할 상대였던 자.

그러나 동시에, 같은 목표를 가진 동료이기도 했다.

“더 전할 말은?”

“…….”

박철환에게 대답은 없었다.

인한이 손을 들었다.

어떻게 됐든, 끝은 보아야 하는 법이었다.

그의 죽음은 인한이 거둬야 하는 업보였다.

인한은 씨앗이 있을 가슴팍을 향해 인한이 손을 뻗었고.

그 순간.

탁!

박철환이 인한의 팔목을 움켜쥐었다.

“마지막……이다.”

모든 걸 물려주는 척하며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려는 것이었나.

인한이 흠칫 놀라며 팔을 빼려는 순간.

우우웅!

팔의 마력계로부터 가공할 에너지의 침투를 느꼈다.

트리아스 액셀이다.

박철환이 자신의 잔여 마력을 모조리 전달하는 것이었다.

마치 원래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인한의 트리아스 액셀과 박철환의 트리아스 액셀은 금세 합쳐졌다.

힘의 총량이 순식간에 늘어난다.

“…….”

그 과정이 끝났을 때, 박철환은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운 좋은 놈.’

박철환의 눈이 흔들렸다.

‘운 좋게 마왕의 씨앗을 얻고…… 운 좋게 회귀를 하며 힘을 얻어 왔고…… 네가 아는 그 공략에 대한 지식도 결국 내게서 나온 거다. 네가 강해질 수 있었던 것도, 탑을 오를 수 있었던 것도 결국…….’

맞는 말이었다.

애초에 ‘원래의 세계’에서는 100층은커녕 상층까지도 오르지 못했다.

그의 희생을 알고 있기에 인한은 탑을 오를 수 있었다.

‘후후, 의미 없군.’

끝에 도달해서야 박철환은 미소를 지었다.

문득, 동료들이 마중을 나왔으면 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젠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았지만, 염치도 없는 염원인 건 알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인한이 가슴으로 손을 뻗는 게 느껴졌다.

‘자, 이제 끝이로군.’

우우우웅!

빛무리 정도에 불과했던 다른 자들의 씨앗에 비해, 박철환의 것은 태양마저 연상시키는 빛을 토해 냈다.

예비 사도의 개화한 씨앗은 이토록 거대한 힘을 품은 것일까.

‘이건 흡수하지 못해.’

이미 개화한 것이었기에 흡수하면 안 된다.

이걸 받아들이는 순간 지혜의 왕과의 계약이 성립될 것이기 때문이다.

인한은 극멸기를 일으켰다.

타닥! 화르륵!

순식간에 씨앗이 소멸됐다.

박철환은 어느새 눈에 초점이 사라져 있었다.

박철환이 죽은 곳에는 주인을 잃은 구원의 검과 아이템 일부가 떨어져 있었다.

그걸 내려다보던 인한의 몸이 비틀거렸다.

“쿨럭.”

낮은 기침 소리와 함께 입가에 피가 흘렀다.

인한이 그대로 지면에 쓰러지려던 순간이었다.

“인한 씨!”

어느새 옆에 따라붙은 이소영과 아나스타샤가 한쪽 팔씩 잡으며 인한의 몸을 지탱했다.

“소영 씨……? 아나 씨……?”

“수고했어요. 조금 쉬세요.”

“그럼…… 부탁드립니다.”

인한은 그 말을 끝으로 의식을 잃었다.

데스 파티 길드원들의 표정에 좌절감이 생겼다.

그들의 기세는 꺾인 지 오래였다.

스르릉!

어디선가 섬뜩한 쇳소리가 흘러나왔다.

“저런 멋있는 걸 보여 줬는데 우리도 끝내야겠지? 뭐, 동화처럼 여기서 보내 주겠다 같은 말을 바란 거라면 엿이나 처먹으라고 말해 주마.”

임태호였다.

그가 대검을 임재창에게 겨누며 말했다.

그것을 시작으로, 전투가 시작됐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 전투는, 해태 길드의 승리였다.

생각보다 사후 처리는 간단했다.

데스 파티 측의 사상자와 부상자를 포함해 생포한 사람들은 해태 길드에서 맡았다.

데스 파티의 간부들은 모두 죽었고, 길드원들은 마력계를 폐쇄하는 것으로 끝냈다.

그 외에 해태 길드를 적대했던 길드들과 아직 살아 있는 길드장들은, 비싼 합의금과 마력계를 폐쇄하는 것으로 끝을 냈다.

연달은 대주주의 죽음과 악재가 겹친 ‘매지션즈’는 주식이 바닥을 쳤다.

거기다 발행했던 어음들이 갑작스레 밀려들며, 사실상 망해 가고 있었다.

어음을 막고자 이사회에서는 물의 마을의 권리와 사업체를 싼 값에 유대계 미국인 갑부에게 팔았으나 돈이 부족해서, 결과적으로 망할 게 분명하다는 관측이었다.

그리고…….

“뭐?”

“데스 파티의 재산과 매지션즈는 이제 우리 거다. 인수 끝냈어.”

“아니, 어떻게?”

“물의 마을 인수한 게 우리거든. 유대계 미국인 갑부도 명의만 빌린 거고, 나중에 다시 해태 길드의 이름으로 사들일 거다. 주식 떨어뜨린 것도 내가 한 거고, 어음들도 내가 한 작업이다. 사업체 등등 다 산 것도 내가 한 거고.”

“아니, 뭔…….”

알고 보니 그 모든 게 이정환의 계산이었다.

“만약 우리가 졌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랬어?”

“애초에 박철환이 살아 있거나 데스 파티가 망하지 않았으면 하지도 못했을 거였다.”

몸이 망가질 대로 망가진 인한은 그날 이후 일주일째 병실에서 지내고 있었다.

누워 있던 인한은 허, 하고 나지막한 탄성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 아직 끝이 아닌데.”

“응? 뭐 더 있어?”

“우리 시가총액 3조 돌파해서, 그거 알려 주려고.”

“뭐……? 우리 아직 4천억 정도 아니었어?”

“그거야 60층 언저리 오를 때고, 사업 규모를 얼마나 넓혔는데 아직 그 정도겠냐? 우리 브랜드 이미지랑 규모 엄청나. 요식업, 각석 및 마력 산업, 부산물부터, 연구소에서 새로운 마력 엔진 개발에도 성공했고…….”

인한이 휘둥그레 뜬 눈을 껌뻑였다.

4조, 4조라고 한다.

억 단위도 경악스러운데, 조 단위로 바뀌어 있었다.

“허허.”

졸지에 재벌 그룹 회장이 된 인한이 낮게 웃으며 병실 창문을 바라보았다.

* * *

“소멸됐군.”

지혜의 왕이 문득 중얼거리자, 듣고 있던 시초의 왕이 눈을 깜빡였다.

“뭐?”

“소멸됐다. 나의 예비 사도가.”

“풉! 뭐 믿을 만한 놈한테 맡겨 둔다 그러지 않았냐?”

“이러나저러나 최하위 위계의 하찮은 존재에 불과했단 것이겠지.”

“그러면 어떻게 하냐? 그놈 마왕의 씨앗 있잖아? 그대로 성장하게 두면 우리가 죽이지 못하는 거 아니야?”

“죽이지 못하면…… 또다시 힘을 뺏어서 리시피르가 만든 결계에 처넣을 뿐이다.”

시초의 왕이 빙글빙글 몸을 돌리며 씨익 웃었다.

“뭐, 사실 너는 죽일 수 있는 거 아니야?”

“무슨 소리지?”

“그야…… 아직 넌 마왕의 레갈리아도 가지고 있잖아? 전 왕이시자, 현 왕까지 하고 계시는 지혜의 왕 씨?”

시초의 왕에게 지혜의 왕이 차가운 눈빛을 보냈다.

시초의 왕이 피식 웃으며 그 눈빛을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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