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략자들-239화 (239/266)

# 239

<공략자들 239화>

죽음의 끝에서 사내가 눈을 뜬 곳은 아발론이라 불리는 세계였다.

그곳에서 사내는 네 쌍의 날개를 가진 새를 만났다.

그 새는 사내에게 세계의 진실에 대해 말해 주었다.

사내는 분노했다.

고작 ‘어떤 존재들’의 유희를 위해 세계가 멸망했다는 사실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리고.

100층을 오른다 한들, 검은 탑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에서, 더 큰 절망을 맛보았다.

그러나 그때 네 쌍의 날개를 가진 새가 말했다.

“너는 그 세계를 지키고 싶은 것이냐?”

사내는 생각했다.

세계를 지키고 싶은가?

그렇지 않다.

이미 세계는 멸망했기 때문이다.

“네가 보고 있는 것은 결국 세계의 일면에 불과하지.”

알 수 없는 말.

새는 다시 말을 이었다.

“다시 한번 묻겠다. 세계를 지키고 싶은 것이냐?”

세계를 지키고 싶을까.

사내는 그런 거창한 꿈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지키고 싶은 건 동료들이었다.

별 볼 일 없는 그였지만, 그는 그의 곁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했다.

동료, 가족, 그리고…… 사랑하는 그녀.

그가 지키고 싶은 건, 사람들이었다.

“오래 전부터 너를 지켜봐 왔다. 너는 참 재밌는 사람이더군. 시험에 통과하면 네게 힘을 내려 주지. ……그 힘이 과연 축복일지 저주일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야.”

네 쌍의 날개를 지닌 새는 자신을 지혜의 왕이라 칭했다.

그는 사내에게 미래를 보여 주었다.

탑이 사라지고.

동료들이 살아 있고.

세계가 온전한, 그야말로 그가 꿈꾸던 세계를.

그런 것을 보여 준 이상, 사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계약의 수락뿐이었다.

계약을 한 후, 사내는 지혜의 왕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다시 살아났다.

정확히 지혜의 왕을 다시 만났던 곳에서.

똑같은 말을 하려는 지혜의 왕에게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따졌다.

지혜의 왕은 흥미롭다는 표정을 하며 중얼거렸다.

“역시 계약을 받아들인 모양이군. 그럼 간단한 시험을 시작해 볼까. 시험에 성공하면, 너는 네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간단하다고 말했지만, 지혜의 왕의 시험은 상상을 초월했다.

아발론에 있는 위대한 제국의 멸망.

아란 제국이라 했던가.

인족을 삼대종족 중 하나로 격상시킨 영웅이 세운 불굴의 제국이 바로 아란이었고, 홀로 제국을 무너뜨리기에 사내의 힘은 너무나도 미약했다.

몇 번이고 실패를 반복했다.

수십 번의 죽음 끝에, 사내는 모든 걸 포기하고 아발론에서의 삶을 받아들였다.

아내를 받아들이고, 결혼을 하며 작은 왕국에서 기사 노릇을 했다.

그리고 천수를 누리고 잠에 들 듯 죽음을 맞이했을 때, 그는 다시 한번 과거로 돌아가 있었다.

지혜의 왕의 시험에 포기라는 것이 없었다. 주어진 항목은 오직 성공뿐이었다.

사내는 죽고 또 죽었다.

끝내 아란 제국의 수도가 멸망했을 때, 어째서인지 사내는 영웅이 되어 있었다.

제국과 적대하던 국가에서는 그를 이세계의 영웅으로 추앙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사내는 왕들이 내려 준 구원자이며, 제국에 멸망을 가져온 신의 사도였다.

“만족스럽군.”

그 말과 함께 감았던 눈을 떴을 때, 사내는 검은 탑의 튜토리얼 존에서 정신을 차렸다.

세계는 아직 멸망하지 않은 그때 그 모습이었다.

사내는 다시 탑을 오르기 시작했다.

1회 차, 사내와 동료들은 10층에서 처참하게 공략을 실패했다.

말도 안 되는 실수였다.

몬스터의 패턴을 잊어버리고 있어 벌어진 일이었다.

그 탓에 다섯이 죽고 열 명이 중상을 입었다.

사내는 머리를 다쳐, 식물인간인 상태로 생을 연명하다 죽었다.

10회 차, 사내는 자신이 알고 있는 미래를 세상에 알렸다.

헌터들의 수준을 높이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사업체를 세우고, 온갖 탑의 문물을 세상에 널리 퍼뜨렸다.

23회 차, 정보는 공개되어선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멍청한 헌터들에게 미래는 없다.

그러니 그가 그들을 이끌어야 했다.

50회 차, 그는 자살을 결심했다.

근거는 없었지만 자기 자신의 손에 의해 죽는다면 회귀는 일어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칼은 깔끔하고도 예리하게 목의 경동맥에 파고들었다.

즉사였다.

55회 차, 사내는 자살을 반복했다.

분명 회귀에도 횟수가 있을 게 분명했다. 언젠가 모든 게 끝나리라.

100회 차,

결국 답은 하나였다. 탑을 오르는 것.

123회 차, 사내는 매 층마다 모두를 지키고 살리며 오르는 것은 비효율적이란 것을 깨달았다.

어차피 다시 찾아올 시간대에서 그들은 부활한다.

동료들이 눈앞에서 몬스터들에게 사지가 찢겼다.

사내는 자신의 연인을 보스 몬스터에게 던져 주었다.

게걸스럽게 연인을 먹어 치우는 몬스터의 등 뒤로 다가가 마지막 일격을 날렸다.

130회 차, 50층까지 오른 후에야 알게 됐다.

그의 동료들의 재능은 평범하다. 능력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사람들이 필요했다.

201회 차, 10층의 3차 몬스터 웨이브는 일어나야만 했다.

누가 얼마나 죽든 상관없다. 어차피 이것도 지나가는 회차에 불과하다.

3차 몬스터 웨이브를 통해 인류는 또 한 번 검은 탑에 대해 경각심을 갖게 되어야 했다.

몇 번째 죽음인지 셀 수 없게 됐을 무렵, 사내는 많은 것을 깨닫게 됐다.

10층의 3차 몬스터 웨이브는 일어나야 한다는 것.

해태 길드는 무너져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밖에 많은 일들을 말이다.

100층까지 오르기 위해선 일정한 규칙이 필요하다.

몇 번이고 죽고, 몇 번이고 반복하며 사내는 그 규칙을 깨달았다.

그 외의 수많은 비밀들과 세계의 진실들도 알게 됐다.

이번에야말로, 이번 생에서야말로.

사내는, 아니, 박철환은 자신이 세계를 구원해 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앞에 장애물이 나타났다.

최인한.

그가 회귀자라는 것을 알기까지 제법 시간이 걸렸다.

몇몇 징후는 있었지만, 그동안 ‘그런 경우’는 제법 있었기에 신경이 쓰이지는 않았다.

최인한이란 남자는 꽤나 특이한 인물로서, 그동안 그의 예상에서 벗어난 움직임을 많이 보였다.

튜토리얼 존 클리어도, 해태 채널도, 10층 공략과 자이언트라 불린 것도 이미 ‘몇 번’이고 있었던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와는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최인한은 정체 모를 힘의 인도에 따라 맹렬히 성장해, 그의 계획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미꾸라지와 같은 존재였다.

크게 신경 쓰지 않은 게 화가 되었다.

그의 존재를 생각하면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

고작 운 좋게 기회를 잡았다고 모든 걸 해내려는 자만에 빠진 자.

오래전…… 자기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자.

“그러니, 그 악연을 끝내겠다.”

지금의 자신은 옳다.

이 방법만이 모든 걸 끝내는 길이다.

그러니, 최인한을 죽이겠다.

이것은 최인한이란 한 사내와의 싸움임과 동시에, 과거의 나약한 자신에게 보내는 마지막 이별 인사였다.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서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았다.

주먹과 부딪히는 검격.

대화 백 마디보다, 그 한 번의 충돌이 더 많은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었다.

그 검격에는 음흉함도, 치밀함도, 분노나 자만도 없었다.

느껴지는 것은 숨이 막힐 듯한 처절함뿐이었다.

‘네가 무슨 삶을 살아왔는지, 알 것 같군.’

박철환에 대한 복수심, 분노도 어느 순간 희미해졌다.

부딪히는 일합, 일합마다 서로에 대한 이해가 깊어져간다.

검격에 느껴지는 애처로울 정도의 처절함, 그 이면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너는 나의 이야기를 듣고 있을까.’

카아앙!

인한의 팔뚝에서 피가 튀어 올랐다.

변칙을 넘어서 어떤 상황에도 능히 대응하는 검격이다.

대체 어떤 수라장을 거쳐 왔기에 이런 검술을 펼칠 수 있단 말인가.

지금 박철환이 펼치는 것은 레오도, 리셴도, 임태호나 겐지도 결코 따라할 수 없는 검술이었다.

콰아아아앙-

트리아스 액셀과 같은 트리아스 액셀의 기운이 부딪혔다.

세계가 무너지는 듯한 착각마저 느껴지는 소음이 흘러나왔다.

“큭!”

박철환의 입에서 핏줄기가 흘렀다.

힘의 총량은 인한이 앞서고 있다.

하지만 수 싸움에서는 박철환이 앞서고 있다.

오십 대 오십.

놀라울 정도의 백중세(伯仲勢).

콰앙!

사방에 퍼져 나간 힘의 여파에, 인한과 박철환을 제외한 모두의 힘이 일순간 무너졌다.

“어어! 이게 무슨?”

“마법이……!”

오러, 마법, 정령술, 하물며 주술까지.

두 트리아스 액셀의 충돌에 의한 여파는 모든 힘의 구조를 무너뜨렸다.

“많이 발전했군!”

인한이 외쳤다.

트리아스 액셀의 세 가지 힘을 합치는 것에는 약한 모습을 보였던 박철환이었다.

하지만 지금 박철환의 검에 서려 있는 것은 완전한 세 힘의 융합이었다.

꾸웅!

묵직한 무언가가 내려앉는 것이 느껴지고, 거센 힘의 소용돌이가 인한을 휩쓸었다.

이 검에 마주 설 수 있는 것은 오직 두 가지뿐이다.

왕들처럼 오러, 마법, 정령술로 가공되지 않은 순수한 마나의 응집체로 막아 내는 방법.

혹은 똑같은 트리아스 액셀로 막아 내는 방법뿐이다.

그 외의 방법은 트리아스 액셀에 의해 철저히 분쇄되어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내가 할 소리다.”

씹어내듯 뱉어 낸 박철환의 한 마디에 이어 또 한 번의 충돌로 이어졌다.

콰앙!

인한이 리버스 스트림을 전개했다.

광선포처럼 떨어져 오는 수십 수백의 검격을 모조리 빗겨 갔다.

박철환이 눈을 빛냈다.

‘이놈은 완전한 상태가 아니다.’

만약 정상 상태의 인한이었다면 몸으로 모든 공격을 버텨 냈을 것이다.

거기다 힘의 흐름을 보니, 애초에 저 기술은 방어에만 목적을 둔 것이 아니라 방어 후 반격이 이어져야 하는 것 같다.

즉, 전투의 왕과의 싸움에서 모종의 손해를 본 게 확실했다.

‘그렇다면 몰아칠 뿐! 승기는 내게 있다!’

박철환의 검격이 또 한 번 가속했다.

그에 맞춰 인한의 공격도 한 템포 빠르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격렬한 폭음이 오고 가고, 주위에서 볼 수 있는 것은 터져 나오는 힘의 여파와 새하얀 빛과 새파란 빛의 충돌뿐이었다.

사방팔방을 날아다니며 부딪치는 두 빛무리를 눈으로 쫓을 수 있는 존재는 이곳에 아무도 없었다.

‘후우…….’

맞서는 주먹.

받아치는 검격.

두 가지가 마주치며 하나의 고리를 만든다.

똑같은 힘, 똑같은 목표, 똑같은 꿈.

똑 닮은 두 재능 없는 평범한 사내들.

인한은 박철환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맞다. 인한의 몸 상태는 분명 그다지 좋지 않다.

전투의 왕과의 싸움에서 인한은 분명 큰 손해를 보았다.

하지만 이 순간에 도달해선, 그런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떨쳐 내는 힘도, 부딪히는 기세도 우열을 가릴 수 없다.

이 하늘 아래, 이토록 자신과 비슷한 존재가 어디 있을까.

이토록 자신의 모든 걸 쏟아부을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분명 완벽을 기한 상태가 아님에도, 인한은 자기가 가진 모든 걸 완벽히 펼쳐 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촤악!

인한의 등에서 피가 솟구치고, 박철환의 어깨뼈가 주저앉았다.

‘그러나…… 너는 분명 틀렸다.’

소리가 사라진다.

모든 색과 빛이 사라진다.

부딪히는 두 트리아스 액셀의 힘.

좌중의 전투는 이미 그친 상태였다.

터져 나오는 가공할 힘의 폭풍에 누구도 제 몸을 가누지 못했다.

‘안 돼! 인정할 수 없다!’

박철환의 검이 휘둘러졌다.

인한의 상태는 분명 좋지 않다.

그런데도 검이 중간 중간 뚝뚝 끊겨간다.

어째서일까.

그때 박철환의 표정이 확 변했다.

인한의 눈이다. 검의 흐름을 모조리 파악하는 눈이 인한에게 있었다.

‘천무! 그것을 어째서 네가……!’

콰아앙!

밀린 것은 박철환이었다.

검을 지면에 푹 박으며 피를 왈칵 토해 냈다.

“어째서…… 어째서……!”

“…….”

“너 따위가 어째서 자꾸 앞을 가로막는단 말이냐! 넌 아무것도 몰라! 그렇게 해선 결국 또 한 번 멸망이 다가올 뿐이다! 실패! 또 실패만이 있단 말이야!”

거의 비명에 가까운 외침이었다.

인한은 천천히 박철환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다 해도, 너는 틀렸다.”

후우웅-

인한의 전신에서 새하얀 기운이 올올이 풀려나온다.

끝 모를 듯 치솟은 힘의 폭풍이 주먹에 서린다.

이를 꽉 깨문 박철환의 검에도 세상을 양단할 힘이 말려들었다.

“나는 틀리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 옳다. 이 방법, 이 방법뿐이 없다! 고작 한 번의 운을 붙잡은 주제에 그따위 헛소리를 지껄이지 마라!”

후웅!

한순간.

땅을 박찬 둘이 부딪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