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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략자들-236화 (236/266)

# 236

<공략자들 236화>

왕으로 등극한 자에게만 주어지는 왕의 증거, 레갈리아.

그것은 어떠한 사물일 수도 있으며, 형체를 가지지 못한 어떠한 힘일 수도 있다.

그러나 확실한 건, 레갈리아가 절대적인 왕의 힘을 대변하는 상징물이라는 것이다.

-싸움을 멈추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인한은 또다시 아주 먼 옛날의 기억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인간이 아닌 드래곤이 했던 말.

그의 말은 언제나 힘이 넘쳤고, 굳센 신념으로 가득했다.

-상대를 쓰러뜨리는 것, 내가 압도적인 힘을 가지는 것……. 방법이야 많지만, 원천적으로 싸움이 끝나는 건 아니다. 그저, 잠시 멈췄을 뿐.

그러면서 드래곤은 말했다.

-그렇다면 만약 내가 절대 싸우지 않는다면? 누군가 싸움을 걸고 싶어도, 먹히지 않는다면? 애초에 싸움이란 건 양쪽이 부딪혀야 성립되는 것 아닌가? 나와 내 의지가 향하는 모두가 싸우지 않게 된다면?

전투의 왕, 그의 레갈리아는 공간 그 자체였다.

어떤 것도 침범할 수 없는 절대적인 영역.

그는 자신의 의지가 향하는 곳이라면, 마법도, 오러도, 정령술도, 하물며 원형 구현조차 침범할 수 없는 공간을 생성할 수 있었다.

기억 속 장면이 빠르게 전환됐다.

전쟁이 있었다.

죽여도 죽지 않는 물체, 스치는 것만으로도 죽음에 이르는 사람, 무엇이든 먹어 치우는 괴수…….

수많은 절망이 동시에 아발론으로 쏟아져 나왔고, 그 최전선에는 언제나 그가 있었다.

-난 네놈은 못 믿겠다만, 아리아의 선택은 믿을 수 있다.

그와 마주 선 순간이었다.

그는 지쳐 있었다.

갑옷과 같은 비늘이 다 뜯겨 있었고, 하늘을 가릴 듯했던 날개는 여기저기 찢어져 있었으며, 우람한 뿔은 한쪽이 부러져 있었다.

-네 말에 따르겠다. 결코 잊지 않으마. 억겁의 시간 속에서, 어떤 곳에 있든,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든. 내가 나 자신을 잊고, 네가 이 모든 걸 잊어버린 채 머나먼 곳에 있더라도…… 나만은 잊지 않겠다.

약속이었다.

한 존재와…… 그 존재를 이용할 수밖에 없는 잔인한 한 사람과의 약속.

그리고 지금, 그 약속이 성취되려 하고 있다.

* * *

‘헉!’

인한이 눈을 번쩍 떴다.

잠시 의식이 끊겨 있었다.

무언가에 얻어맞아 허공에 날아오른 것까지만 기억이 났다.

그 이후의 일은 의식이 끊겨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대신 다른 것이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방금 그건?’

선명하게 떠오른 기억들.

붉은 비늘의 드래곤과 나누었던 대화였다.

하지만, 그 기억을 되짚을 여유가 인한에게는 없었다.

‘지금은 그런 거에 신경 쓸 때가 아니야!’

인한이 다급히 몸을 틀어 지면에 착지했다.

아니, 착지하려는 순간.

비틀!

그대로 낙법 자세를 취할 새도 없이 지면에 처박혔다.

“꼴사납군.”

상대의 기운이 움직이는 걸 알기도 전에, 인한은 자신의 육체가 통제를 벗어나는 걸 느꼈다.

‘커흑! 숨이……!’

숨을 쉬고자 입을 벌리려 했지만, 목과 코가 닫힌 채 열리지 않았다.

몸을 일으키려고도 했지만, 팔다리가 아예 움직이질 않았다.

“네 의지는 소용이 없다. 이곳에선 내가 뜻하는 것만이 그대로 이루어질 테니.”

이동민이 한쪽만 남은 인간 형태의 눈동자를 빛내자, 그의 몸에 있던 상처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치료나 재생 같은 게 아니었다.

말 그대로 사라진 것이었다.

“그대로 죽어라.”

이동민이 나직이 말했다.

인한은 몸을 버둥거리는 것조차 허락받지 못한 채 눈을 부릅떴다.

‘이런 거였나?’

뭔가 아니다 싶었다.

전투의 왕의 레갈리아는 분명 특정 공간에서의 절대적인 장악력이었다.

언뜻 들으면 상당히 섬뜩한 힘이었겠으나, 그의 힘은 어디까지나 싸움이 멈추길 원하는 상냥한 마음에서 시작되었다.

‘정령술로 산소를…….’

슬슬 산소 결핍으로 정신이 아득해지자, 인한은 실리암을 통해 체내에 산소를 공급하고자 했다.

하지만.

“쓸데없는 짓이다.”

이동민은 그마저도 눈치챘다.

-주인이여! 힘이 움직이지 않는다!

‘큭!’

이동민은 인한의 기운마저 통제했다.

‘방법이 없어…….’

죽음이 코앞까지 다가온 걸 느낀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그러나…… 취할 수 있는 수 역시 없었다.

* * *

검은 탑 100층.

사방이 순백인 공간에서 라스틴이 허공에 주먹을 휘둘렀다.

콰릉-

한 줄기 뇌성이 울려 퍼지고, 공간 그 자체가 흔들렸다.

“또! 또! 또인가!”

그 목소리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줄기줄기 거무튀튀한 기운을 흘리던 라스틴이 으득, 이를 갈았다.

“이제는 숨길 마음조차 없다, 이거군! 가증스러운 찬탈자들!”

지금껏 탑에 오류를 가져온 것을 분석해 본 결과, 그것이 왕들이 자신들의 힘을 일부 심어 둔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최하위 위계의 존재들을 100층까지 오르게 하여 라스틴이 계약을 어기게 할 셈인 게 분명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라스틴을 영원히 소유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걸 깨달은 라스틴은 왕들처럼 탑에 간접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왕들이 계약 내용의 변경을 요청해 왔고, 그들이 탑에 개입함에 따라 변종 몬스터들을 포함한 각종 사건이 발생했다.

‘거기까진 좋았다. 그런데…….’

그 이후부터 문제였다.

왕들과 부딪힌 오류들의 갑작스러운 성장이 시작된 것이다.

아니, 애초에 오류로 분류되었을 때부터 강한 존재들이, 왕이라는 시련 앞에서 더욱 성장하게 된 것이었다.

‘그것도 가만히 내버려 두고 있었거늘…… 감히 직접 개입해?’

라스틴은 탑에 느껴지는 왕의 기운을 감지했다.

그저 힘의 일부에 불과한 게 아니었다.

레갈리아뿐 아니라 실제 왕만이 가질 수 있는 압도적인 힘이 느껴졌다.

“그런데…… 이마저도 계약을 어긴 게 아니란 말인가!”

그가 왕들의 유희를 위해 탑을 맡았을 무렵 나눈 계약에는 조건이 있었다.

왕들은 탑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

세부적인 문장은 달랐지만, 분명 라스틴은 왕과 그런 계약을 나눴다.

천문은 절대적이다.

그리고 그 천문으로 이루어진 계약도 절대적인 법.

거기까지 생각한 라스틴이 멈칫했다.

‘아니? 정말 그런가?’

라스틴이 눈가를 찌푸렸다.

과연 정말 그런가?

천문이 어째서 절대적이란 말인가?

애초에 천문이란 건 누가, 어떻게, 왜 만든 것일까?

“큭! 크윽!”

그 순간, 라스틴은 격렬한 두통을 느끼며 땅바닥에 쓰러졌다.

“크아아악!”

한동안 고통을 느끼던 그는 눈을 번쩍 뜨고는 껌뻑였다.

“뭐지? 내가 왜 땅바닥에 누워 있는 거지? 난 방금 전까지 뭘 생각하고 있었던 거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선 그는 멍한 눈동자로 의아함을 표했다.

“큭! 그건 그렇고…… 이 가증스러운 찬탈자들, 네놈들이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움직이면 될 뿐이다.”

라스틴이 고개를 획 돌려 한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인한과 이동민의 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 * *

아니다.

방법은 있었다.

‘나에게도 레갈리아가 있었어.’

무관의 제왕, 시작과 끝의 왕.

아리아의 레갈리아, 극멸기.

티끌만큼에 불과하지만, 인한은 어느 정도 극멸기를 제어할 수 있게 됐다.

발동하는 것만으로도 위험하기 짝이 없는 짓이었으나, 지금은 찬물 더운물 가릴 때가 아니었다.

“흐읍!”

인한은 그대로 극멸기를 일으켰다.

마력을 일으키는 것과 달리, 극멸기는 어떤 과정이나 생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의지가 향하고, 의식이 닿은 순간, 내면에 있는 극멸기가 저절로 반응해 흘러나온다.

위이이이이이이잉!

수만 마리의 벌 떼가 움직이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극멸기 특유의 굉음이 사위를 잠식하며 울컥 울컥 뻗어 나간다.

‘됐다!’

순식간에 육신의 통제가 되찾아졌다.

무슨 메커니즘인지 알 수 없으나, 극멸기가 먹힌 것만은 분명했다.

‘윽?’

하지만 단순히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위이이이이잉!

분면 최근 들어 제어가 가능했을 극멸기가 저절로 생성되며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크윽!’

극멸기는 닿는 모든 것을 소멸시키는 힘이다.

거기에 닿은 것은 공기도, 마나도, 하물며 인한 자신조차 사라지게 된다.

‘이, 이게 대체!’

마치 캔버스에 새하얀 물감을 뿌려 대듯, 사방이 새하얗게 물들기 시작했다.

애써 제어를 해 보고자 집중을 했지만,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힘의 방출이 조금 늦춰졌을 뿐 극멸기는 여전히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 순간.

‘갑자기 왜?’

극멸기가 저절로 사방으로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일정한 방향성을 갖고 인한과 이동민을 감쌌다.

“크으으으윽!”

“아, 아아악!”

인한과 이동민이 동시에 비명을 토해 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인한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뭐가 일어난 거지?’

극멸기에 휩쓸렸다.

마나마저 소멸시키는 힘에 휩쓸렸으니,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을 터.

‘움직이잖아?’

그런데 죽기는커녕 온몸이 잘 움직였다.

그뿐 아니라 제대로 체내의 기운이 움직여서 육신을 회복시켰다.

-아리아의 후계자여.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누구…….”

-이쪽이다.

목소리는 위에서 들려왔다.

눈을 돌리자, 그곳에는 한 마리의 드래곤이 서 있었다.

-날 기억하는가.

“……그래, 기억해.”

전투의 왕.

일곱 명의 왕 중 하나.

가장 용맹했으며, 가장 강직했던 자.

-나의 이름은 뭐지?

“넌 이름이 하나가 아니잖아?”

-……정말 기억하는 것인가.

그의 표정에는 짙은 감정이 절로 묻어났다.

“하지만 어떻게? 난 분명 이동민과 싸우고 있었을 텐데?”

-아직 거기까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인가…… 그래, 어쩔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르겠군.

“……?”

드래곤이 인한을 내려다보았다.

-기나긴 시간이었다. 수십 년 같기도, 수천 년 같기도, 혹은 하루인 것 같기도 했다. 아무것도 없는 허무 속에서 그저, 난 너를 기다려 왔다.

“대체…….”

-기어코 모든 걸 잊은 채 허무의 일부가 되었을 때, 네가 한 약속처럼 극멸기로써 나를 깨웠다. 너는 역시…… 약속을 어기지 않았어.

횡설수설, 알 수 없는 말을 내뱉는 드래곤이다.

그가 천천히 발을 뻗었다.

그 거대한 발톱 위에 인한의 손바닥만 한 크기의 상자가 있었다.

인한이 조심스레 그 상자를 받자.

-이로써…… 모든 약속을 이행했다.

드래곤이 긴 숨을 토해 냈다.

힘없이 떨리는 그 목소리는 도저히 오만하고 자신감 넘치기로 유명한 용족의 것이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잠깐! 무슨 소릴 하는 거냐! 설명을 해 줘!”

-시간이 없다. 라스틴, 그 녀석이 이곳으로 올 것이니.

“뭐? 그게 대체 누구기에?”

-100층의 주인, 포도주의 왕, 가여운 나의 친우. 그는 너를 죽이고 말 것이다. 네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내가?”

드래곤은 가만히 인한을 바라보았다.

천천히, 세상을 가득 채웠던 새하얀 기운이 무너져 내렸다.

‘설마 이게 극멸기였나?’

그제야 인한은 새하얀 공간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드래곤은 마지막 말을 내뱉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얼마 남지 않았구나. 그대가 하는 여행의 세월도.

“……?”

-나는 네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나…… 너와 함께했던 시절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던 것 같구나. 이제 나는 마지막 약속을 이행하겠다.

터엉-

그 말을 끝으로, 다시금 인한이 지면에 털썩 쓰러졌다.

그 와중에 드러난 것은 이동민의 모습.

그러나 지금까지 살기를 뿌려 대거나 어딘가 멍해 보이던 인상이 아니었다.

‘놈이다!’

그 육체의 주도권을 잡고 있는 것이 누구인지는 눈빛으로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럼, 잘 가라.”

육체는 이동민이었으나, 말하는 것은 지금까지 위에서 말을 하던 드래곤이었다.

그가 인한을 향해 손을 뻗자, 인한의 몸이 무언가에 얻어맞은 듯 훨훨 날아 지면에 처박혔다.

“안 돼……!”

큰 충격도 아니었으나, 갑자기 의식이 흐릿해져 갔다.

정신을 잃어 가며, 인한은 이동민이 있을 곳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 손은 아무것도 잡지 못한 채 힘없이 지면으로 떨어졌다.

콰아아아아앙!

무언가가 허공에서부터 날아와 지축에 내리꽂혔다.

이동민이 굳은 표정으로 폭음이 울려 퍼진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있는 것은 나체의 사내.

그에게는 수십 개의 뿔이 머리에 왕관처럼 솟아 있었다.

“…….”

그는 레오였다.

그러나 레오의 목소리는 다른 누구도 아닌, 100층의 주인, 라스틴이었다.

그를 보는 이동민의 입에서 안타까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아, 가련한 나의 동지여, 나에게 안식을 가져오는 전달자여. 네게 죽는다면, 그 또한 나쁘지 않을 것이다.”

레오는 말없이 이동민을 응시했다.

그런 그를 보며, 이동민이 말을 이었다.

“마지막으로…… 네가 만든 포도주가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그의 말이 끝나자, 레오가 뚜벅뚜벅 걸어왔다.

이동민은 일말의 저항도 하지 않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쾌청한 하늘.

아름다우나, 저것은 거짓된 하늘이다.

많은 기억들이 스쳐 지나간다.

‘이젠 네가 약속을 지킬 차례다, 아리아의 후계자.’

푸욱-

섬뜩한 소음이 울려 퍼졌다.

레오의 검이 이동민의 몸을 관통한 것이다.

“아, 나의 죽음이 오고 있구나.”

이동민, 아니, 전투의 왕은 그 말과 함께 지그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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