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3
<공략자들 233화>
‘먼저 한 대 맞았군.’
73층 데스 파티의 주둔지.
박철환은 끊임없이 들려오는 소식을 들으며 쓴 표정을 지었다.
해태 길드는 이쪽이 반응하기도 전에 힘을 모아 바로 몰아쳤다.
이토록 바로 공격을 퍼부을 수 있었다는 건,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는 의미였기에 더욱 이가 갈렸다.
‘프락치는 물론이고 외부에서 관찰도 하고 있었겠군. 교묘한 놈.’
하지만 이건 이정환의 방식이 아니다.
아니, 애초에 지금의 해태 길드는 그의 기억 속 어떤 경우와도 달랐다.
‘자만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군.’
계획이 하나둘 계속해서 뒤틀린다.
‘오염된 씨앗’을 통해 몇몇 거대 길드를 이끄는 길드장들의 맹목적인 믿음을 끌어오고, 그것을 통해 검은 탑 전체를 통솔한다.
그것이 원래의 계획이었는데…….
‘애초에 오염된 씨앗을 사용한 시점에서 최악의 상황이었거늘.’
오염된 씨앗은 상대의 자아를 제약하고 이성을 뭉개는 결과를 초래한다.
일단 ‘지혜의 왕’에게 충성을 받치게 되겠지만, 그 충성이 예비 사도인 자신에게 옮겨 가는 과정에서 자아의 붕괴가 시작된다.
아무리 길어도 5년이면 자아를 상실하기 때문에 사용하기 제일 꺼려하는 방법이었다.
그런데 그걸 사용해서 3년 만에 해태 길드를 무너뜨릴 무대를 기껏 만들었더니, 전부 뒤집어져 버렸다.
“충분하다.”
이동민.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가 충분하단 것인지 이해하기도 전에 이동민의 모습이 공간에 녹아들 듯 사라졌다.
한동안 그걸 보고 있던 박철환이 먼 곳을 바라보았다.
“이제 나도 움직여야겠군.”
* * *
검은 탑 곳곳에서 비슷한 일이 전개됐다.
이정환은 용검 길드의 길드장과 마주 서 있었다.
그때쯤, 이정환이 드루이드의 인형을 들고 보고를 받았다.
-여기는 정리됐어요, 정환.
아나스타샤였다.
그녀가 맡은 것은 북유럽계 길드 ‘바이킹’.
2팀과 함께 힘을 합친 그들은 바이킹을 쳤다.
“약속한 대로 어쌔신 길드가 가로막고 있던 히든 던전은 양보해 드리도록 하지요.”
“고맙군. 괜찮은 거래였네.”
시마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승전보를 들었으나, 이정환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오히려 잔뜩 굳은 채 진중함을 유지했다.
‘어차피 탑의 외부에는 알려지지 않겠지. 증언만으로는 힘을 발휘하지 못해.’
선제공격을 하기로 결정 난 직후, 해태 길드는 정보가 새기 전에 바로 움직였다.
이왕 먼저 공격하기로 결정한 것, 이정환은 여지를 주지 않고 적들에게 몰아쳤다.
박철환이 무언가 수를 쓰기 전에, 놈들이 힘을 합치기 전에.
미리 수면 아래에서 준비해 뒀던 패를 있는 힘껏 사용하여 휘둘렀다.
‘하지만…… 결국 데스 파티가 남아 있어.’
대체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의 집합소.
그들이 남아 있다면 이번 전쟁은 해태 길드의 승리로 끝날 수 없다.
‘불길해.’
이정환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리 그래도 거의 하루가 넘게 탑 전역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그런데 정작 본진인 데스 파티가 움직이지 않는다니?
‘대체…….’
* * *
검은 탑 13층.
인한은 어쌔신 길드와 마주섰다.
인한의 자발적인 지원에 의해서였다.
랭킹 8위, 리암 아미엘이 이끄는 89명으로 이루어진 암살자 클래스의 집단.
반쯤 킬러의 영역에 걸치고 있다고 알려진 그들을 상대로…….
“고작 그 정도 숫자로 이곳에 왔단 말이냐?”
인한, 그리고 공략조 인원 10명 정도만이 따라붙었다.
“여기에 적게 오면 다른 쪽이 훨씬 편리해질 테니까 그렇지.”
“자만이 심하군.”
“과연 그게 정말 자만인지 볼까?”
인한이 빙글 웃으며 주먹을 그러쥐었다.
“자고로 눈앞의 검보다 등 뒤의 검이 무서운 법이지.”
그 말을 한 순간, 리암의 모습과 그 뒤에 늘어서 있던 어쌔신 길드의 모습이 녹아내리듯 허공에 사라졌다.
‘그래, 그럴 줄 알았다. 자고로 싸움은 선빵이 중요한 법이지.’
그리고 그것은 클수록 좋다.
“원형 구현, 붕괴!”
꽈르르르르릉-
인한이 주먹을 확 뻗었다.
느닷없이 전개된 원형 구현.
“크윽! 원형 구현!”
리암도 다급하게 검을 휘둘렀다.
뭉클, 무언가가 피어오르며 인한의 원형 구현에 저항했다.
‘호오! 역시 랭킹 8위라 이건가?’
부족하지만 분명한 원형 구현.
극도의 날카로운 무언가가 구현되고, 인한의 거대한 원형이 그대로 반으로 쩍 갈라졌다.
애초에 마나 스킬 6단계에 도달하지 않으면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보니, 이곳에 있는 사람들의 눈엔 그저 허공에 주먹질하고 칼질한 것으로 보였지만.
콰아아아아아아아!
그들도 곧 뒤이어 터져 나오는 폭풍에 무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공방이 이루어졌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하지만 인한의 원형 구현이 훨씬 더 완성도가 높고, 위력 면에서도 강력했다.
리암이 베어 내긴 했으나 그 여파를 막아 낸 것은 아니었다.
“헉! 대체 은신 마법이 어째서?”
“뭐야? 이건!”
“은신이 사라졌다!”
그리고 모습이 사라졌던 어쌔신 길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놈들, 저거 없으면 오합지졸이다! 쳐!”
“예! 길드장님!”
인한의 외침과 함께 데려왔던 열 명의 공략조가 달려들었다.
“대체 어떻게!”
인한은 경악해 하는 리암을 보며 씨익 웃었다.
어쌔신 길드.
그들은 ‘모종의 방법’으로 몸을 숨기는 것으로 유명한 길드였다.
회귀 전에도 어느 시점까지는 아무도 그 정체를 몰랐다.
그러나.
-호오! 이 아이템은 뭐냐?
발터 에스키엘과 부딪힌 후, 그들의 비밀이 밝혀졌다.
그들이 몸을 숨길 수 있었던 건 다름 아닌 리암 아미엘의 특수 스킬인 ‘밤의 장막’.
일정 범위에 있는 존재의 모든 기척과 마력의 잔향을 숨겨 버리는 스킬이었던 것이다.
웬만한 충격으로는 끄떡도 안 하는 그 스킬을 파훼하기 위한 방법은 그다지 많지 않다.
과거에 발터는 어쌔신 길드의 공격을 몸으로 때우며 억지로 달려들어 길드장을 두들겨 패는 것으로 해결했다.
하지만 방법은 언제나 있는 법.
‘원형 구현으로 모조리 날려 버리면 된다!’
인한이 지면을 박찼다.
그 뒤로는 일방적인 전투였다.
아무리 특수 스킬의 보호가 사라졌다지만 명색에 랭커에, 그 랭커가 이끄는 헌터 길드.
어쌔신 길드도 나름대로의 저항을 하며 맞서 왔다.
하지만.
“개량형 마극포.”
콰아아앙!
상대의 힘을 침식해 구조를 분해해 버리는 트리아스 액셀의 힘이 전투를 유리하게 만들었다.
“크윽! 어째서 내 마력이!”
“마력이 말을 안 들어!”
인한은 그다지 다량의 마력을 사용한 것도 아니었으나, 인한과 부딪힌 헌터들은 모조리 마력의 제어를 잃은 채 목숨을 잃었다.
전투 시간은 고작 3시간.
그마저도 1시간 정도는 도망치는 놈들을 생포하는 데 걸린 시간이었다.
“자, 그럼 다음 층은 어디지?”
“웬만한 건 전부 정리된 것 같습니다. 그나마 치열한 건 52층에 이정환 간부님이 있는…….”
“……그놈은 그냥 버려 둬. 고생 좀 해야 해.”
“크흠.”
길드원들 전원 못 들은 척 침음성을 흘렸다.
그때였다.
-인한아! 데스 파티가 움직였다!
“……!”
이정환과 연결된 드루이드의 인형에서 연락이 왔다.
해태 길드는 그 누구도 대응하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73층 땅의 돌 근처에 숨겨져 있을 눈에 신경 쓰며 소규모로 땅의 돌을 통해 움직이기까지 했다.
동맹을 움직일 때는 오로지 비밀 회선과 드루이드의 인형을 이용했고, 2팀과 3팀과 4팀 전원 아주 교묘하게 이동했다.
이 모든 계책은 이정환의 머릿속에서 나왔다.
냉정해지기로 마음먹은 이정환의 계략과 용병술은 그야말로 하늘에 닿아 있었다.
결과는 결국 승리.
전부는 아니었지만, 데스 파티를 통해 불온한 움직임을 보였던 길드 중 가장 굵직한 전력을 지닌 길드 다섯 곳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결국 데스 파티가 살아 있으면 모든 게 끝이다!’
-73층에서 모습을 감춘 게 보였다. 단체로 이동하고 있어. 지금 태호 형님 쪽으로 이동한 모양이다!
“몇 층이야!”
-67층이다! 북서쪽 세 갈래 길! 기억나지?
“알았어! 바로 따라붙을게!”
인한은 힐끗 밑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밧줄에 묶인 채 혼절해 있는 어쌔신 길드의 길드원들이 보였다.
길드장인 리암 또한 묶여 있었다.
“이놈들 데리고 이동할 시간이 없다. 일단 리암과 몇 명만 데리고 1층으로 가 있어.”
“예? 길드장님은요?”
“내가 67층에 붙을게. 움직여라!”
“아, 네!”
인한이 땅을 박찼다.
문득, 가슴에서부터 차오른 뜨거운 열기가 전신으로 번지는 걸 느꼈다.
‘박철환과 또 한 번 부딪치는 건가.’
놈은 얼마나 강해져 있을 것인가.
적어도, 원형 구현에 있어서 인한은 결코 그에게 뒤지지 않는다.
다수의 원형 구현을 사용한다고 해서 압도적으로 강해지는 건 아니다.
한 번에 사용할 수 있는 원형 구현은 한 번뿐이고, 기껏해야 이목을 속여서 한 방 날리는 정도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질 것 같진 않다.
승률은 절반.
인한의 예상은 그랬다.
빠르게 마을로 도착한 인한은 땅의 돌 앞에 섰다.
그러나.
오싹!
“……!”
전신에 도는 한기.
땅의 돌을 작동시키려는 순간 이질적인 기운이 전신을 휘감는 걸 느꼈다.
‘이건……!’
왜 하필 지금이란 말인가.
인한은 이 기운을 알고 있다.
‘전귀다!’
후욱!
무지막지한 위력의 힘이 하늘에서 느껴졌다.
하늘을 바라본 인한의 눈이 맹렬히 떨렸다.
그곳에서.
운석이, 떨어지고 있다.
콰가가가가가!
대기가 갈라지고, 구름이 밀려나며 거대한 구멍이 생긴다.
하늘이 그늘에 가려진다.
그 크기가 거대하기에 느리게 떨어지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 속도가 얼마나 빠를지는 굳이 고민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바였다.
“꺄아아악! 저게 뭐야!”
“어, 어떻게! 저게 대체!”
하늘을 바라본 마을의 헌터들이 놀랐다.
이곳은 13층.
하층답게 수많은 헌터들이 있는 곳이다.
이대로 떨어진다면 족히 수백의 헌터가 목숨을 잃는다!
“제기랄!”
인한이 마력을 있는 대로 끌어 올렸다.
위이이이이이잉!
순식간에 최고조로 증폭된 마력이 원형 구현으로 이어졌다.
부수는 것은 파편이 튈 우려가 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속도를 줄여서 지면에 안착시켜야 한다.
쿠우우우우-
인한은 운석의 궤도에 공간 제어를 펼쳤다.
하지만 끝부분에 닿은 순간, 인한은 무지막지한 중량감에 신음을 흘렸다.
‘큭! 이거 그냥 돌덩어리가 아니었나!’
운석에 마력이 가득 담겨져 있었다.
돌덩어리 전체를 감싼 무지막지한 양의 마력이 운석 자체의 위력을 배가시켰다.
‘하지만 잘됐어! 그럼 방법이 있다!’
인한이 원형 구현을 해제했다.
그리고 숨을 훅 내쉬며 지면을 박참과 동시에 트리아스 액셀을 전개했다.
“리버스 스트림!”
우우우우우웅!
무극인, 그 열두 가지 기술 중 하나.
정면으로 뻗은 두 팔이 원을 그리며 회전한다.
그 직후.
꾸득! 콰아아앙!
운석의 위력을 증가시키고자 운석을 감싼 마력이 반대로 운석의 표면을 깎아 들어가기 시작했다.
말이 깎아 들어가는 것이지, 사실상 맹렬한 속도로 분쇄하고 있다.
그 현상을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인한의 힘!
‘이대로 크기를 줄인 다음 마을에서 떨어진 곳에 원형 구현으로 날려 버린다!’
인한이 이를 악문 채 힘을 있는 대로 끌어모았다.
하지만 잊고 있던 게 있었다.
“말했잖아, 넌 내 꺼라고.”
여성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전쟁의 왕, 아테리너스.
아니, 그 목소리를 내고 있는 사내, 이동민이었다.
부웅!
이동민의 검이 휘둘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