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6
<공략자들 226화>
검은 탑 59층, 태고의 숲.
흔하디흔한 숲 형태의 필드지만, 지형지물이 저절로 움직이며 길을 잃게 만드는 미로와 같다는 점에서 까다로운 곳이었다.
거기다 몬스터가 아닌 숲의 생물 대부분이 독을 지니고 있고, 환각 계열의 저주마저 사용했다.
실수로 나뭇가지에 스쳐도 중독되는, 웃기지도 않는 일이 발생하는 곳이었다.
밤이 깊어지자 해태 길드는 동굴 형태의 안전지대에 자리를 잡고 휴식을 취했다.
인한이 벽에 등을 기댄 채 책을 읽고 있을 때, 이창훈이 다가왔다.
“웬일로 독서를 하고 계십니까?”
인한의 손에 쥐어 있는 것은 [슈페르 아스트라]였다.
“왕의 금고에서 얻은 스킬북인데. 익힐 수가 없어서 말이야. 그래서 이해는 안 되지만 뭐라도 있을까 싶어서 일단 꾹 참고 읽고 있어.”
“크! 하긴 형님이 무슨 독섭니까. 역시 탑이랑 관련된 건 줄 알았습니다.”
“이 자식이?”
“야, 인한아. 대련 좀…… 어? 뭐 읽고 있는 거냐?”
아이템을 바꾼 뒤로 상당한 자신감이 붙은 임태호가 대련을 신청하러 왔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한 번 보실래요? 대충 설명하자면, 그냥 비급 같은 겁니다.”
“비급?! 줘 봐라! 한 번 보자!”
자신을 무협 소설 매니아라고 자랑했던 임태호답게, 비급이란 말에 눈을 반짝였다.
인한이 임태호에게 책을 넘겼다.
적혀 있는 문자는 지구의 것이 아니었지만, 대충 어떤 맥락인지는 읽을 수 있었다.
씨앗을 가진 인한만이 가능한 줄 알았는데 그렇지만도 않았다.않은 듯했다.
‘뭐, 그렇게 읽어도 소용없지. 어차피 헛소리만 가득한데.’
인한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임태호를 보고 있었다.
-검을 들어 태산을 베어라.
-하나에서 둘, 둘에서 셋이 되고, 셋은 네 개로 나뉘며…….
이런 문장들에서 대체 뭘 얻어야 하는지, 인한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아!”
그런데, 임태호의 반응이 이상했다.
책장을 넘기며 때때로 탄성을 지르기도, 표정을 찌푸리기도 하더니, 이내 갑자기 넋이 나간 것처럼 허공을 바라보며 멍하니 있었다.
‘뭐야? 뭔데!’
인한의 미간이 찌푸려질 때쯤.
콰아아아!
갑자기 마력의 폭풍이 몰아쳤다.
임태호가 슈페르 아스트라를 툭 떨어뜨리더니,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평범한 사람 눈에는 그냥 허공에 손짓 발짓 해 대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무술을 익힌 사람의 눈에는 그 움직임이 다르게 보였다.
‘검술을 펼치고 있잖아?’
손에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다 뿐이지, 임태호는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아니, 뭘 봤는데 갑자기 저래?’
갑자기 왜 저러는지는 고민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깨달음이다.
때때로 거짓말처럼 찾아오는 일순간의 영감, 각성, 대오(大悟).
그것이 임태호에게 찾아온 것이다.
인한이 영문을 몰라 하고 있을 때.
“뭐예요, 무슨 일입니까?”
그들을 유심히 바라보던 겐지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이창훈이 땅에 떨어져 있는 책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걸 보더니 갑자기 저러시던데요?”
“저게 뭐기에……?”
임태호의 깨달음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겐지가 조심히 임태호의 발치에 떨어져 있는 책을 오러로 끌어왔다.
책을 펼친 겐지는…….
“아!”
갑자기 탄성을 내지르며 임태호와 같은 노선을 밟기 시작했다.
인한의 표정이 구겨졌다.
툭!
또다시 떨어지는 슈페르 아스트라.
갑자기 겐지도 맨손으로 허공에 손을 휘적이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에요, 인한?”
주위 경계를 서고 돌아온 아나스타샤가 눈을 반짝 빛냈다.
인한이 아나스타샤를 빤히 바라보았다.
“왜 그래요?”
인한이 탐탁찮은 표정으로 말없이 슈페르 아스트라를 내밀었다.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갸웃하며 책을 펼쳤고.
그리고.
“아!”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다행히도 아나스타샤는 꼴사납게 몸을 움직이기보다는 좌선한 채 생각에 잠겼다.
그 셋의 모습을 보던 인한이 이를 바득 갈았다.
‘왜 이런 데서 소외감 느끼게 만드는 건데! 난 아무것도 못 느꼈단 말이다!’
이번에는 아나스타샤의 앞에 고이 놓여 있는 책을 가로챈 인한이 활짝 펼쳤다.
-돌을 베는 것은 때로 계란이 될 수 있다.
‘뭔 소린데!’
완전, 전혀, 절대, 하나도 모르겠다.
대체 이 정체 모를 문장에서 뭘 얻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때.
“후우…… 비급이라. 그야말로 맞는 표현이구나. 대체 이토록 고절한 무리(武理)를 이해한 자는 누구란 말인가. 대단하다, 정말로 대단해.”
평소에도 짐승과 같이 거친 기세를 뿜어내던 임태호가 은은한 기세를 흘렸다.
두 눈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고, 느껴져 오는 마력의 흐름도 정제되어 있었다.
“동감입니다. 그야말로 천상의 무도(武道)였습니다. 만약 이 세상에 무신(武神)이 존재한다면 이 서적을 만들어 낸 존재겠지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하아…… 화살로 태양을 쏘라니……. 정말 대단해.”
서로 어처구니없는 대화를 나누는 셋을 보며 인한의 표정이 기괴하게 뒤틀렸다.
‘이거, 혹시 신종 따돌림 방식인가?’
인한은 진지하게 그런 생각을 하고 말았다.
“아아, 그 구절 말씀이시군요. 혹시 ‘학처럼 날면 꼬꾸라진다.’라는 구절은 어떠십니까?”
“아아! 그건 설마 이거 아닌가요?”
휘익! 콰앙!
겐지의 말에 아나스타샤가 오러를 휘둘렀다.
갑자기 쭉쭉 뻗어 나간 채찍과 같은 오러가 허공을 두드렸고, 산탄총처럼 확 퍼지더니 숲에 오러의 총탄을 쏘아 냈다.
‘설마 5단계?’
인한이 흠칫 놀라며 아나스타샤의 마력을 살폈다.
분명하다.
아나스타샤는 마나 스킬 5단계를 이룬 것이었다.
“하하! 5단계를 이루신 겁니까? 그런 방식도 있었군요! 저는 당연히 ‘나무처럼 우뚝 선 한 자루의 검’과 이어지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생각도 가능하겠네요?”
“크, 너희들 참 잘 아는구나. 그럼 이건 어때 보이냐?”
임태호, 겐지, 아나스타샤가 옹기종기 모여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대고 있었다.
때때로 오러가 터져 나오는데, 분명 뭔가 달라진 운용을 보이고 있음에도 뭐가 다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인한이 소외감을 이기지 못하고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니, 대체 그게 무슨 소립니까?”
“아, 인한 님? 뭐가 말씀이십니까?”
“나무처럼 우뚝 선 한 자루의 검이 뭡니까, 대체!”
“아니 그걸…… 말로 설명할 수 있나. 으음, 딱 모르시나요? 이건데, 이거.”
겐지가 오러를 이끌어 위에서 아래로 휘둘렀다.
검사가 아닌 인한은 알 수 없지만, 만약 인한이 저걸 막는다고 가정하면, 상당히 까다로울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게 대체 뭔데!’
아나스타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어 왔다.
“설마 인한 씨는 아무것도 못 얻으신 건가요? 저는 당연히 이 무리를 모두 이해하셔서 아무런 변화가 없으신 줄로 알았는데…….”
“그래, 나도 그런 줄 알았다만?”
임태호도 의아한 듯 인한을 바라보았다.
“아니, 애초에 이걸 보고 뭘 얻을 수나 있습니까?”
“그게 딱! 하더니 빡 하고, 퍽! 하고 오는 거 아니냐? 머리 한쪽이 간질간질하다가 뻥! 뚫리는 건데…….”
“하아…… 그 기분이란. 무아지경 속에서 나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아아! 그건 그야말로 쾌감에 가까운 것이지요.”
또다시 저들끼리 대화하기 시작했다.
인한이 표정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그러고는 슈페르 아스트라를 손에 쥔 채 몸을 획 돌려 멀어졌다.
그 옆에 이창훈이 따라 붙었다.
“우와, 형님. 지금 저 사람들, 깨달음 얻은 거죠? 그쵸?”
“……그래, 그래 보인다.”
“그런데 형님은 왜 아무것도 못 얻으신 겁니까?”
“저 양반들이 이상한 거라고! 애초에 이런 걸 읽고 뭘 얻는다는 게 비정상이야!”
인한이 발작이라도 하듯 몸을 부르르 떨자, 이창훈이 고개를 갸웃하며 책을 받아 펼쳤다.
그리고.
“어……!”
“설마 이 자식! 너도냐!”
“헤헤! 농담입니다.”
“…….”
“흐음, 근데 뭔가 알 것도 같은데…… 형님, 이거 잠시만 빌려주시면…….”
인한의 표정이 걸레처럼 구겨졌다.
“꺼져! 안 줄 거야!”
“아, 왜요!”
책을 끌어안은 인한이 구석으로 갔다. 그러고는 활짝 펼친 채 문자를 읽어 갔다.
-사실, 존재는 어떤 상황 하에서 비존재일 수도 있다.
인한이 책을 확 집어 던졌다.
“아니, 대체 뭔데!”
* * *
-탑 코어를 열게. 거기에 세계의 모든 게 담겨져 있으니.
최근, 인한이 하는 수련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 번째는 무극인의 수련.
위력은 뛰어나나 리바운드가 심한 마극포, 혹은 아직 수련이 부족해 펼치지 못하는 나머지 무극인에 대한 정리를 하고 있었다.
두 번째는 내면을 관조하는 것이었다.
인한의 마력계는 마력로와 마력원에만 있지 않다.
혈관계, 골격계, 신경계 등등 전신이 마력을 운용하는 하나의 기관이다.
볼카누스에 의해 정령술과 용언을 운용하는 방식을 익히면서, 남들과는 조금 다른 육신으로 바뀐 것이다.
‘탑 코어라…….’
그리고 인한은 마력을 운용하며 언더 코어와 미드 코어에 집중했다.
그러고 보면 볼카누스도 탑 코어에 대해 언급했었고, 이번에는 그렉까지 입에 담았었다.
세계의 모든 게 담겨져 있다는 탑 코어.
대체 그건 무엇이란 말인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단 말이지.’
애초에 언더 코어와 미드 코어의 존재는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탑 코어에 대해서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
‘대충 뇌일 거라고만 생각하는데…….’
굳이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언더 코어가 단전, 미드 코어가 심장이라면, 나머지 하나의 기관은 뇌 쪽에 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뇌의 마력계를 아무리 탐색해도 마력원으로 사용할 수 있을 법한 게 보이질 않았다.
그렇다고 뇌가 아니라고 생각하기엔, 다른 위치엔 더더욱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후우.”
모두가 안전지대에서 휴식을 취하며 잠든 시각.
인한은 홀로 수련을 계속했다.
세 번째는 다름 아닌 원형 구현의 다양화였다.
그렉에게서 얻은 깨달음을 구체화시키는 과정이었다.
‘역시 힘들긴 하다니까.’
말로야 쉽지, 다수의 원형 구현을 이뤄 내는 건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인한의 원형 구현 자체가 응용하기 쉬운 종류였기 때문에 그나마 몇 가지 변주가 가능했다.
한동안 홀로 수련을 끝낸 인한은 기상 시간까지 3시간 정도가 남았을 때 비척비척 자리에 누워 눈을 감았다.
‘박철환의 데스 파티도 움직이기 시작했고…… 최근에 잠잠한 전귀 길드의 행방도 궁금해. 아직 나타나지 않은 왕들도 있고……. 충분히 강해지긴 했다지만 우리가 60층대와 70층대…… 과연 뚫을 수 있을까?’
너무 많은 요인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수련에 박차를 가하는 건지도 몰랐다.
강함을 원했다.
강해져야 한다.
그래야 나 자신을, 자신의 것을 지킬 수 있을 테니까.
어느새 드문드문 생각이 끊겨 가고, 인한은 긴 한숨과 함께 꿈속에 빠졌다.
* * *
최근, 검은 탑의 헌터들 사이에서 뒤숭숭한 소문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 나체의 살인마 말하는 거지?”
“아, 너도 알고 있나?”
“머리에 뿔이 있다던데? 사람 모습을 한 몬스터래!”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사람처럼 생긴 거지?”
“이번에는 독기 팀도 당한 거 같던데?”
최근 들어 필드를 나간 헌터 팀의 실종 소식이 이어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1층에서 활동하는 사람들 위주였는데, 어느 순간 점점 높아지더니 최근에는 30층 언저리에서 소식이 들려왔다.
“몬스터가 맞긴 해? 킬러의 짓이 아닐까?”
“킬러라……. 하지만 최근에 굵직한 킬러들 다 주춤하잖아?”
1층의 주점에서 나오는 최근의 화제는 모두 그 정체불명의 살인마에게 쏠려 있었다.
그 무렵, 또 한 번의 소식이 들려왔다.
30층을 오르던 40인 남짓의 헌터 팀, 토르의 시체가 필드에서 발견됐다는 소식이었다.
사람들은 모두가 그 주범으로 정체불명의 살인마를 지목했다.
나체의 사내는 멍하니 시체의 위에 앉아 있었다.
손에 들려 있는 검을 바라보다 획 던져 버린 사내는 쓰러져 있는 시체들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한 번 갸웃한 사내는 비척비척 일어나 다시 걸음을 옮겼다.
뚝! 우드득!
그의 머리에 왕관처럼 솟아 있는 수정처럼 생긴 뿔에서 소름 돋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직후, 사내의 머리에 얹어져 있는 뿔의 수가 늘어나 있었다.
사내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는 시선을 한 곳에 멈춘 채, 그저 멍하니 위쪽만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