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3
<공략자들 223화>
지구의 동양인과 서양인의 특색을 조금씩 가지고 있는 듯한 외모였다.
짧게 잘려 있는 해질녘 하늘처럼 부드러운 토파즈색 머리카락과 다소 검은색에 가까운 갈색 눈동자.
그는 서양인처럼 눈이 크고 코가 오뚝했지만, 입술은 동양인처럼 작았다.
키는 인한보다 조금 작은 정도였음에도 근육이 무척 발달되어 있어서 상당한 위압감을 전해 주고 있었다.
그렉은 팔짱을 낀 채 거만한 자세와 능청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나 그게 전혀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카리스마, 아우라, 혹은 관록이라 해야 할까.
그렉에게선 그런 게 느껴졌다.
‘아란 제국의 초대 황제? 거기다 내 사형?’
인한이 경악한 채로 아무 말도 못하고 있을 때.
또다시 말문을 연 것은 그렉이었다.
“그 장갑도 그렇고, 특유의 강맹한 기운도 그렇고. 딱 볼카누스, 그 양반의 제자로군?”
“그걸 어떻게?”
사내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했다.
“말했잖냐, 사형이라고. 아니, 흠, 사형은 아닌가? 더 정확히 말하면 사숙(師叔) 정도가 좋겠군.”
“그게 대체…….”
그러다 문득, 인한은 사내에게서 자신과 근본을 같이하는 힘을 느꼈다.
그건 다름 아닌 극체술이었다.
다른 어떤 마나 스킬에서도 느껴지지 않는 특유의 단단함이 절로 느껴져 왔다.
“오랜만에 운용해 보았군. 이제 답이 됐나?”
“설마 당신이 마나 스킬의 창시자였습니까?”
“그렇게 불렸던 시기도 있었지.”
최초의 오러 유저, 그렉 아이언.
볼카누스가 평하길, 그렉 아이언은 인류의 영웅이라 했다.
대륙의 패권은커녕 종의 생존마저 위협받던 시절.
새로운 힘의 체계를 만들어 인족이라는 종을 하나로 규합하고, 용족과 요정족과 더불어 삼대종족 중 하나로 만든 것이 다름 아닌 그였다.
“최초의 오러 유저? 아니…… 음, 하긴 오러를 처음 발현한 건 내가 맞군. 마나 스킬 자체는 계속해서 발전해 왔었지만, 희대의 천재인 나의 손에서 빛을 발한 건 맞으니! 음하하!”
가슴을 쭉 내밀며 자랑스럽다는 듯 말하는 사내.
어떤 반응을 해 줘야 할지 모르겠어서, 인한은 그냥 어색하게 힘 빠진 웃음만 지었다.
그러다 흠칫 놀랐다.
“지금 제 생각을 읽으신 겁니까?”
“아아, 이런. 저도 모르게 읽었군. 미안하네. 설마 내 핏줄 외의 첫 방문자가 동문의, 그것도 인간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해서 말이지.”
그렉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사과를 해 왔다.
인한은 그런 그렉에게서 볼카누스나 루한과 비슷한 인상을 받았다.
어딘지 세상의 굴레에서 조금 비켜 간 듯한 느낌.
단순히 밑바닥을 알 수 없을 정도의 힘을 가졌기 때문이 아닌, 풍기는 인상 자체가 그러했다.
인한은 긴 숨을 한 번 내쉬고 몸의 긴장을 풀었다.
“음? 상당히 적응이 빠르구먼?”
“아, 예, 뭐.”
황금의 궁전의 제한 시간이라든지 수호자라든지 하는 걱정은 접어 뒀다.
어차피 또 이 공간도 시공간이 뒤틀려 있거나 할 게 뻔했다.
‘이런 걸 한두 번 겪어 봐야지. 이젠 놀랍지도 않다.’
그런 생각을 하는 인한을 보며, 그렉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피식 웃었다.
어딜 어떻게 봐도 의미심장하게 느껴지는 미소였다.
“거기에 마법진을 새겨 놓은 것은…… 음, 뭐랄까. 인간으로서의 본능과 같았던 거지. 무언가를 남기고 싶어 하는 본능 말이야.”
사방이 백색으로 가득하던 공간이 어느새 넓은 들판에 시냇물이 흐르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곳으로 변해 있었다.
멋들어진 정자(亭子) 위에 앉은 그렉이 말을 시작했다.
“다른 그 두 양반과 다르게 나는 딱히 트리아스 액셀을 익힌 후에 별로 달라질 게 없었거든. 제자를 들여 나머지 두 양반이 키운 제자랑 싸우게 하고 싶지도 않았고 말이지. 아니, 머리가 어떻게 된 것 아닌가? 트리아스 액셀을 익힐 수 있는 재능을 가진 제자면 어르고 달래 줘도 모자란데 서로 싸우게 하라니…….”
“…….”
인한은 굳이 답하지 않았다.
“애초에 최초의 제국을 세워 황제 취급도 받고 있었고. 그래서 ‘이왕 이렇게 된 거, 나도 후인(後人)에게 나의 것을 물려주자!’라는 생각에서 해 둔 장치였네. 뭐…… 가끔 후손들이 난처한 일이 생기면 찾아오기도 했지. 그런데 설마 이미 트리아스 액셀을 익힌 데다 용왕의 제자까지 된 사람이 들어오다니 말이야.”
그의 한마디 한마디에 유구한 세월을 살아온 흔적이 묻어 있었다.
인한이 입을 꾹 닫은 채 조용하게 있자, 그렉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시인들의 노래처럼 영생도 그다지 나쁜 일은 아닌데 말이야. 흐음…… 아무리 설명해도 인간은 이해할 수 없을 걸세.”
“당신도 인간이 아닙니까?”
“물론 나는 인간이지. 자네가 보기에는 내가 세상에서 한 발자국, 아니, 조금 많이 벗어나 보일 수도 있겠군. 하지만 나는 영생을 사는 존재는 아니라네. 수호자? 수문장? 아니면 관리자 정도도 괜찮겠군.”
“관리자…… 말입니까?”
“그렇다네. 나나 루한, 볼카누스는 왕의 직책을 받지는 못했으나 스스로 초월자가 된 존재로, 세계로부터 모종의 일을 부여받았다네.”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었다.
“자네들이 세계를 관측하고, 이해하는 것은 아주 일부분에 불과해. 아카식 레코드에 닿아 있는 자네라면 어느 정도는 이해하겠지?”
“아카식 레코드? 그게 무엇입니까?”
“아, 용어가 나 때랑은 좀 다른가? 하지만 그건 분명 그렇게 불렸을 텐데?”
“……?”
“으음, 역시 보는 편이 좋겠지. 아카식 레코드란 이걸 말하는 걸세.”
그렉이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그 순간.
쩌적-
무언가가 잘리고, 부서지고, 깨졌다.
원형 구현이었다.
자신의 심상을 통해 세계의 근원에 접속해, 절대적인 관념을 끌어오는 것.
‘하지만 이게 가능하다고? 자신의 심상은 하나에 불과한 거잖아. 어떻게 이토록 많은 원형 구현을……?’
인한이 알기로, 원형 구현은 한 사람당 단 하나다.
레오는 베는 것, 박철환은 분해하는 것, 인한은 지켜 내는 것이었다.
인한이 아무리 원형 구현을 수련한다 한들 레오처럼 벨 수도, 박철환처럼 분해할 수도 없다.
그런데 지금 그렉은 수많은 원형을 단숨에 구현해 냈다.
“세계의 근원이라. 좋은 표현이군. 그런데 아카식 레코드가 정확한 표현이라네.”
인한도 아카식 레코드에 대한 건 알고 있다.
정확한 건 모르지만, 소설이나 게임 속에서 세계의 모든 정보를 저장한 도서관, 혹은 기록 저장고 정도로 표현하는 걸 들어 본 적이 있다.
“외계(外界)라고 표현하기도 하지. 우리가 인지하는 세계는 우주의 일부분에 불과해. 이 세계의 수많은 기록물들이 쌓여 있는 곳, 혹은 그것. 절대적인 원형과 개념과 관념만이 존재하는 그걸 아카식 레코드라 불렀다네.”
“아카식 레코드…….”
“자네는 천문을 사용하고 있을 테지? 맞나?”
“네, 맞습니다.”
“그건 아카식 레코드의 방식을 차용한 것이야. 누군가가 만들어 낸 것이지.”
“이걸 만들었단 말씀이십니까?”
“그렇다네.”
인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인한은 그저 닿은 후, 그곳에서 어떤 것을 끌어오는 것만으로도 오랜 고련을 필요로 했다.
그런데 하나의 체계를 만들어 낸 자는 대체 어떤 존재란 말인가.
‘그러고 보면…….’
그동안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절대적이라고 생각했던 천문의 허점들, 또한 볼카누스와 있었던 대화와 경험들.
-천문, 클래스, 스킬…… 그렇게 너무 많은 것에 매달리지 말거라.
볼카누스의 공간에서는 천문이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자네의 세계에선 이걸 원형 구현이라 하는 모양이군. 뭐, 적절하긴 해. 하지만 어째서 하나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그야 자신의 심상은 하나이니까…….”
“심상이 하나다? 그건 누가 정한 건데?”
“예?”
심상, 마음의 형태.
과거와 현재의 수많은 경험이 축적되어 만들어진, 가면이나 콤플렉스나 어두운 면 같은 걸 다 관통하는 진정한 나 자신.
그게 여러 개라 할 수 있을까.
“당연한 거 아닌가? 전제 자체가 잘못되어 있는 모양이군.”
“예?”
“어째서 마음의 형태가 일정할 수 있지? 사람의 경험이란 한두 가지가 아니고, 당연히 사람의 내면이란 지극히 유동적이지. 자네는 사람이 확 바뀌는 경험을 해 보지 않았나?”
“…….”
40층.
모든 동료들이 눈앞에서 깨어날 수 없는 잠에 빠졌을 때.
그때를 떠올린 인한의 표정이 침울해지자, 그렉이 다시 말했다.
“자네는 접근법부터가 틀려먹은 것 같군. 잘 생각해 봐. 자네의 심상은 대충 이런 거겠지?”
후욱! 퍼엉!
그렉이 허공에 어떠한 원형을 구현했다.
사실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단순한 오러의 파동에 불과한 듯 보였지만, 원형 구현을 이룬 인한의 눈에는 그것이 ‘벤다’라는 원형이 구현된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퍼엉!
그렉이 얇은 막을 전개하고, 거기에 미리 전개해 두었던 원형을 부딪치는 것으로 소멸시켰다.
인한의 원형 구현과 똑같았다.
“그럼 이건 어떨까?”
또 한 번 하나의 원형 구현이 이루어졌다.
‘저건…….’
박철환의 원형 구현이다.
모든 걸 분해해 버리는 힘.
대체 박철환의 심상에는 무엇이 있기에 이런 원형을 구현하는 것일까.
인한의 생각이 다른 곳으로 이어지는 걸 알고 그렉이 눈가를 살짝 찌푸렸다.
“에헤이, 집중해서 보라고.”
콰앙!
다음 순간, 거대한 힘이 휘둘러지며 원형 구현을 폭사시켜 버렸다.
뭐라고 표현할 수는 없지만, 대충 생각건대 분쇄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알겠나?”
“예? 뭘 말씀이십니까?”
“……모르겠어? 크흠, 진짜 자네는 재능이 없군. 보통 이런 거 보면 딱 느낌 오면서 아! 하고는 각성하는 게 보통 아닌가?”
으득, 인한이 저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미안하게 됐지만 인한은 그런 재능 뻥뻥 터지는 괴물이 아니었다.
그런 인한을 보는 그렉의 눈이 가늘어졌다.
“흐음, 요컨대 그런 거지.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다. 한마디로 생각의 차이란 거야. 모든 걸 죽이고 싶은데 꼭 베기만 해야 할까? 아니지. 찔러도 되고, 분해해도 되고, 부숴도 되는 거 아닌가?”
“……!”
맞는 말이다.
“뭐 이런 거 저런 거 다 중요하지 않고, 요는 얽매이면 안 된다는 거지. 아카식 레코드에 접속하는 그 느낌을 몸에 익히란 말이야.”
“감사합니다, 정말…….”
인한이 눈을 빛냈다.
그렉은 별것 아닌 것처럼 말했지만,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값진 가르침이었다.
“뭐 나야 말 몇 마디 했을 뿐이니 그렇게 고마워하진 않아도 되네. 사제에게 이 정도쯤이야, 음하하하!”
“…….”
인한은 의외로 인류의 영웅이란 사람은 자아도취가 심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음? 자네, 꽤 무례하구만? 물론 관대한 나는 용서해 줄 테지만.”
“…….”
인한은 입을 꾹 다물고 생각을 지웠다.
그렉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뭐, 밖에 있는 물건이야 어차피 이젠 주인도 없으니 다 가져가도 되고. 사랑스러운 사제에게 선물 하나 준 셈 치지. 무려…… 세계의 명운을 짊어지고 있는 자이니 말이야.”
인한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언제까지나 능청스러운 말투였던 그렉이 묘하게 가라앉은 말을 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인한의 목적과 정체를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때였다.
쿠웅!
육중한 울림이 공간을 울렸다.
그렉이 난처한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크, 이런. 저도 모르게 흥이 나서 가르침을 주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군. 사실은 더 많은 얘기를 하고 싶었는데 말이야.”
“예?”
“시간이 다 끝났다는 소리일세. 뭐…… 그래도 아리아 님이 그리는 그림을 보았으니 만족스럽긴 하군.”
그렉이 천천히 다가왔다.
쿠웅!
또 한 번 공간을 뒤흔드는 울림.
그렉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다가와 인한의 가슴을 툭 밀었다.
“마지막 조언. 굉장히 큰 손해를 받는 대서비스. 원래 이런 거 알려 주면 안 되는데, 손해를 감수한 한마디일세. 탑 코어를 열게. 거기에 세계의 모든 게 담겨져 있으니.”
그리고.
“허으억?”
인한이 번뜩 정신을 차렸다.
눈을 떴을 때, 인한은 왕의 금고 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