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1
<공략자들 221화>
해태 길드의 수련은 다소 거칠다.
아니, 다소라고 하기에는 너무 진지할 정도로 대련이 진행되고 있었다.
“커흐윽!”
리셴이 복부를 얻어맞아 허공에 붕 떠올랐다.
“크하하! 아직 백 년은 멀었다!”
그를 상대하고 있는 건 임태호였다.
임태호는 대검 대신 두께 30센티미터 정도 되는 나무 몽둥이를 들고 있었다.
진검이든 목검이든 오러를 감고 있는 탓에 리셴이 받은 충격은 상당했다.
그걸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고 있던 이창훈이 몸서리를 치며 중얼거렸다.
“으으, 저 형님은 적당히란 걸 모른다니까.”
지금 이들이 있는 곳은 58층, 흑암의 도시 레프렐이었다.
레프렐은 검은 탑에서 숲 필드 다음으로 흔히 볼 수 있는 유적지 형태의 층이었다.
다만 다른 층과는 달리, 해가 떠 있을 시간임에도 어둡다는 점이 이곳의 특징이었다.
흑암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밤낮을 가리지 않는 어둠이 지금도 우중충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해태 길드는 그런 레프렐 필드를 차근차근 진행해 나가던 참이었다.
그러다 휴식 겸 멈춰 선 안전지대가 때마침 대련장이었는데, 임태호가 리셴을 불러낸 것이었다.
“허윽, 컥.”
충격이 내장까지 닿았는지 위액을 게워 내던 리셴이었으나, 곧 숨을 고르며 다시 몸을 일으켰다.
만약 오러로 복부를 강화하지 않았으면 내장이 터졌을 지도 몰랐을 일격이었지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눈을 빛냈다.
“다시 한 번 부탁드리지요.”
“오호! 역시 마음에 든다니까!”
부웅! 콰앙!
한 줄기 폭발음이 레프렐에 울려 퍼졌다.
리셴은 마나 스킬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다.
한 번 보는 것만으로 상대의 마력 운용을 모조리 베껴 버릴 수 있을 정도였다.
다만, 검술적인 부분에서의 숙련도가 심각하게 낮았다.
기초 검술과 기본적인 동작은 탄탄히 다져져 있지만, 응용 기술과 고급 기술이 부족했다.
‘뭐…… 그것도 얼마 안 있으면 해결될 것 같다만.’
임태호야 검술보다는 야성을 기반으로 한 싸움이니 제외하더라도, 해태 길드에는 겐지나 아나스타샤처럼 뛰어난 정통파 검사들이 있었다.
그 덕에 리셴의 검술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다.
‘그래도 슬슬 말려야겠지.’
임태호의 눈이 위험하다.
눈이 번들거리면서 묘하게 빛나고 있는데, 누가 보면 살기라고 오해할 법한 기운이 스멀스멀 흘러나오고 있었다.
“자, 자, 거기까지 하세요. 곧 있으면 도착입니다. 그리고 쉬라니까 왜 대련입니까?”
인한이 중재하자 리셴이 오러를 갈무리했다.
임태호도 조금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었지만 군말 없이 지시에 따랐다.
-크어어어…….
레프렐은 언데드형 몬스터가 주를 이루는 곳이었고, 대부분 강한 물리 내성과 마법 내성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다 레프렐에서 언데드형 몬스터는 추가 효과를 얻게 된다.
레프렐의 몬스터들은 족히 60층 초중반대에 있는 몬스터들의 힘을 보여 주었다.
“크으압!”
콰앙!
선두에 선 임태호의 일격에 스켈레톤 나이트가 무더기로 무너졌다.
레프렐은 몬스터가 좀 과하게 강하다 뿐이지, 어두컴컴한 것을 제외하면 딱히 극한의 자연환경인 건 아니다.
그렇다 보니 필드 진행이 딱히 어려움 없이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어느 덧 메인 던전의 입구.
메인 던전 ‘무너진 성곽’으로 입장하려던 임태호를 인한이 멈춰 세웠다.
“뭐야?”
“이쪽이 아닙니다.”
당연히 메인 던전으로 들어가는 줄 알고 있던 임태호가 고개를 갸웃하며 인한을 따라갔다.
메인 던전을 타고 방향을 튼 인한은 외성(外城)의 구석에 있는 공동묘지로 향했다.
-으어어…….
-크르르!
공동묘지답게 엄청난 수의 몬스터들이 우글거렸다.
뒤따라오던 임태호가 탄성을 질렀다.
“오호, 이런 꿀 사냥터가 다 있었잖아?”
수련도 좋지만, 역시 헌터가 성장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몬스터를 잡는 일이다.
거기다 몬스터들이 한 공간에 모여 있으면, 큰 기술을 연발해서 녹여 버리면 되기 때문에 귀찮은 일도 없다.
“다들 집중!”
인한의 외침에 모두 시선을 집중했다.
“이제부터 저 몬스터들을 한 마리도 빠짐없이 ‘제압’한다!”
“……예?”
“뭐라고?”
“죽이면 안 된다! 절대! 뇌랑 심장은 남긴 채 쓰러뜨린다!”
“……!”
인한의 말도 안 되는 명령에 다들 고개를 갸웃했지만, 다른 이도 아닌 인한의 말이었기에 길드원들은 일단 따르기 시작했다.
그때 인한이 길드원 중 한 명을 불러 세웠다.
“아, 잠깐. 조나단, 당신은 마력을 아껴요.”
“예?”
신입 중 하나인 네크로맨서 조나단이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껏 레브렐 공략의 주축이 되었던 건 조나단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언데드에게 사용하는 매즈 계열의 마법은 평소보다 훨씬 더 큰 위력을 발휘했다.
“소환 마법 가능하죠?”
“예? 뭘 원하시는 겁니까?”
“지금 소환 가능한 최상위 언데드는 뭡니까?”
“예? 으음, 스켈레톤 드레이크 정도라면…….”
“스켈레톤류는 안됩니다. 좀비나 구울, 아귀(餓鬼)류면 좋겠는데…… 일단 격은 높은데 약한 언데드 없습니까?”
“여, 역시 대영웅 최인한 님…… 네크로맨서에 대해서도 모르는 게 없으시군요!”
조나단이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곧 그가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아귀왕이 딱입니다. 아귀는 최하위 언데드고, 아귀왕은 다른 아귀랑 별다를 거 없는데도 격이 상당히 높은 편이죠.”
“잘됐네요. 그럼 그걸로 부탁드립니다. 소환 뒤에 제어를 풀 수도 있습니까?”
“예? 아, 예 그거야 물론…….”
네크로맨서는 몬스터 테이머와 다르게 소환한 언데드를 역소환하지 않고 제어를 풀게 되면, 바로 몬스터화 되어 주위를 공격한다.
인한은 그걸 말한 것이었다.
“그런데 왜 그런 부탁을 하시는 겁니까?”
“설명은 나중에 하겠습니다. 곧 해가 질 테고, 우린 그 전에 끝내야 하니까요.”
인한이 땅을 박찼다.
레프렐의 밤은 무섭다.
안 그래도 밤이 되면 모든 몬스터의 전반적인 능력치가 상승하는데, 언데드이기 때문에 그 효과가 더욱 상승한다.
거기다 레프렐 특유의 언데드 대상 버프 효과 때문에 사실상 60층 중후반의 몬스터 정도의 힘을 보여 준다.
‘원래는 한 마리 남겨서 해 보려고 한 건데…… 네크로맨서가 있어서 다행이군.’
인한이 눈을 빛내며 공동묘지로 진입했다.
콰앙! 콰앙!
폭음이 울려 퍼질 때마다 죽지 않은 언데드들이 지면에 굴러다녔다.
“으아악! 곱린이 이 자식, 뭐 하는 거야! 왜 이리로 데려와! 꺼져! 꺼지라고!”
-키히히!
얼마 지나지 않아, 공동묘지는 팔다리가 잘렸거나 반신이 끊어진 언데드들의 천국이 되어 버렸다.
“조나단, 지금 소환해 주십쇼.”
“예!”
마력을 자아내고 있던 조나단이 공동묘지를 향해 아귀왕을 소환했다.
-크어어어…….
신장이 5미터 정도 되는 인간형 언데드.
불에 그을린 듯 일그러진 피부엔 체모가 하나도 없었고, 자주색이 섞인 살색을 띠었다.
눈, 코, 귀 모든 게 뭉개져 있었고, 오직 커다란 입만이 얼굴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데 인한이 알 수 없는 명령을 내렸다.
“제어 푸세요.”
“예, 예? 그럼 아귀가 언데드들 다 잡아먹습니다!”
아귀의 특징은 무엇이든 먹을수록 강해진다는 점이다.
하지만 일단 먹고 나서 소화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고, 소화되더라도 다른 언데드들과 달리 특수 능력 하나 없는 잡몹에 불과했다.
그러나 뭐든지 예외가 가득한 탑에서, 굳이 위험천만하게 몬스터를 성장시킬 필요는 없었다.
“하세요. 괜찮으니까.”
“으으, 알겠습니다!”
인한의 명령에 아귀왕을 제어하던 조나단의 마력이 풀려 버렸다.
-크어어어!
아귀왕은 미친 듯이 언데드들을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1시간여가 흘렀을 무렵.
우우웅!
갑작스레 레프렐의 어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 어어?”
어둠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아귀왕을 향해서였다.
아귀왕에게 어둠이 흡수된 순간.
[스페셜 던전 ‘해방된 레프렐’의 입장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스페셜 던전 ‘해방된 레프렐’에 입장하셨습니다.]
[보스 몬스터 ‘흑암의 주인’이 탄생했습니다.]
한 줄기 천문이 떠올랐다.
아귀왕의 모습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몸통에 정체 모를 뼈 갑옷이 씌워지고, 아무것도 없었던 얼굴에 눈과 코위 귀가 만들어졌다.
-날 부른 이는 누구인가.
아귀왕, 아니, 흑암의 주인이 시퍼런 안광을 토해 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원래라면 약속된 클리셰처럼 뭔가 대화를 주고받고 놀라고 하는 과정이 있을 테지만.
‘별로 대단한 얘기를 해 주는 것도 아니야.’
이미 한 번 겪어 본 인한에게는 귀찮은 과정일 뿐이었다.
인한이 길드원들에게 고개를 돌리고는 말했다.
“저거 때려잡아요!”
* * *
레프렐 전역에 가득한 어둠은 사실, 오래전 한 제국의 군주가 불로불사를 얻기 위해 악마와 계약한 일의 여파였다.
악마는 불로불사의 조건으로 도시 그 자체를 원했는데, 군주는 아무런 생각 없이 그 조건을 받았다.
그러나 악마가 준 불로불사로 인해 군주는 언데드가 되었다. 그것도 형체조차 없이 의식만 존재하는 ‘안개’ 형태의 언데드가.
그것이 바로 흑암의 정체였다.
그리고 군주, 아니, 흑암은 자신의 격에 걸맞은 육체를 찾아 끊임없이 도시를 헤매게 되어 버렸다.
-우매한 인간들이여, 내 이야기를…….
“매즈 걸겠습니다! 지속시간 30초!”
“1팀 마법 준비 완료됐습니다!”
“2팀 완료!”
“3팀!”
물론 그런 구구절절한 이야기는 해태 길드원들에게 하등 쓸모없었다.
일단 정면에 적이 나타난 게 중요했다. 그것도 일반 몬스터도 아니고 보스 몬스터였다.
딱 봐도 고급스러운 아이템을 칭칭 두르고 있는 몬스터!
-크아악! 이런 비겁한! 대체 이 육신은 왜 이리 약하단 말인가……!
흑암의 주인에게 날아간 오러의 폭풍에 몸의 일부분이 후두두 떨어졌다.
원래라면 더 성가신 적이었을 테지만, 기습이 먹힌 데다, 그 육체의 본질은 다름 아닌 아귀왕이었다.
격은 높은데 특별히 강하지도 않은 몬스터.
기세를 잡은 해태 길드에게 거리낄 건 없었다.
쿠웅-
[보스 몬스터 ‘흑암의 주인’을 처치했습니다.]
결국 흑암의 주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지면에 쓰러졌다.
‘이제 <시작하는 자>는 쓸모없게 됐군.’
혼자서 다니지 않는 데다, 레벨업 포인트가 별로 소용이 없을 정도로 기본 스테이터스들이 높아졌다.
거기다 50층을 지나면서 던전 경험치 획득량도 소용없게 됐다.
“일단 빠르게 움직여야 합니다! 1팀, 2팀은 부산물 정리 하고, 나머지는 메인 던전으로! 정환아, 인솔 부탁해. 드루이드의 인형으로 알려 줄게.”
“알았어!”
인한의 외침과 함께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인한은 이동하기 전에 빠르게 흑암의 주인의 시체로 향했다.
한동안 거대한 망토를 걷어 내고 여기저기를 뒤지던 인한이 작은 단검을 발견하고는 꺼내 들었다.
[왕가의 단검]
주륵!
인한은 그 단검으로 흑암의 주인의 살점을 조금 떼어 낸 후 땅을 박찼다.
“다들 빠르게 움직이자!”
인한이 향하는 방향은 메인 던전을 향해서였다.
길드원 전원이 빠르게 인한에게 따라붙었다.
의아해하던 이소영이 인한의 옆에 다가오며 물었다.
“왜 그렇게 서둘러요? 그것보다 메인 던전은 갑자기 왜요?”
“흑암의 주인 리젠 시간이 딱 12시간입니다. 처리하려면 한참 걸려요.”
“처리? 뭘 처리해요?”
“보면 알 겁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길드원들 전원이 레브렐에 찾아온 변화에 눈치챘다.
그토록 강하고 빠르게 움직이던 몬스터들의 수준이 급격히 낮아진 것이다.
“이건 꿀이다!”
임태호가 당장에라도 달려들 듯이 검을 치켜들었지만, 인한이 제지했다.
“지금은 저런 잡몹 사냥할 때가 아닙니다.”
메인 던전, 무너진 성곽.
던전 내부도 마찬가지였다.
흑암이 사라진 후에 언데드들의 움직임이 상당히 느려졌다.
앞을 가로막는 몬스터만 처리하며 나아가던 해태 길드.
인한은 보스존을 앞두고 갑자기 길을 틀었다.
“어디로 가세요?”
이창훈이 번뜩 물어 왔다.
인한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보물 창고!”
인한이 향한 곳은 던전의 지하였다.
무너진 성곽에 있는 ‘대예배당’이라는 곳에 들어간 인한은 중앙 끝자락에 있는 단상 위에 올라섰다.
단상은 벽돌로 되어 있었는데, 약간 칸이 남는 건지 달그락거렸다. 언뜻 봤으면 부실 공사, 혹은 풍화되었다고 오해했겠지만…….
‘이건 퍼즐이다.’
인한은 쪼그려 앉아 벽돌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오래전 학교 앞에서 칸 하나가 비어져 있는 그림 맞추기 퍼즐 같은 원리였다.
벽돌을 이리저리 밀어내자, 곧 정중앙에 작은 틈이 생겨났다.
딱, 단검이 들어갈 법한 틈새였다.
푸욱!
인한이 흑암의 주인에게서 뺏은 단검을 그곳에 찔러 넣고, 열쇠를 돌리듯 시계 방향으로 돌렸다.
그러자.
쿠구구구구!
거친 진동과 함께 갑자기 대예배당 구석구석의 벽면과 기둥에 장식된 석상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인한이 서 있던 곳의 벽돌이 탁탁 접히며 밀려났다.
나타난 것은 섬세하게 세공되어 있는 황금색 원판.
“워, 워 저게 뭐야!”
-선택을 받지 아니한 자는…….
석상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길드원들이 흠칫 놀라며 주변을 경계했다.
그때쯤 합류한 1팀과 2팀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의아해했다.
인한은 역시 이번에도 끝까지 듣지 않고 흑암의 주인의 살점을 획 던졌다.
-고귀한 피로써 궁전의 문이 열렸도다…….
가장 중앙에 있는 대천사의 석상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스페셜 던전 ‘황금의 궁전’의 입장 조건을 충족하셨습니다.]
[스페셜 던전 ‘황금의 궁전’에 입장하시겠습니까?]
[Y / N]
인한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입장한다.”
화아아악!
그 대답을 한순간.
해태 길드원 전원은 전혀 색다른 공간에 내던져 졌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황금으로 치장되어 있는 공간에.
[스페셜 던전 ‘황금의 궁전’에 입장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