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9
<공략자들 219화>
51층 공략이 끝나고, 52층 공략에 애를 먹고 있을 무렵.
인한의 명령에 의해 공략조가 잠시 공략을 멈추고 개개인의 성장을 위해 수련하던 중이었다.
인한을 따로 불러낸 이정환이 말을 꺼냈다.
“전귀 길드, 단순히 무시할 만한 일이 아니야.”
“나도 들어서 알고 있어.”
“엄청난 속도야. 기껏해야 20층 언저리에서 활동하던 헌터들이 순식간에 35층까지 치고 올라왔어. 최근에 중위권의 길드와 한 번 부딪힌 모양인데…….”
“부딪혔다고?”
전귀 길드는 신생 길드로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모으고 있다.
해태 길드, 데스 파티, 그리고 전귀 길드.
이들이 현재 삼대 세력으로 여겨지고 있는 실정이다.
“40층까지 공략한 길드였어. 2차 클래스 업그레이드까지 완료한 실력자들 중의 실력자였지. 그런데 상대도 안 됐다. 힘으로 찍어 눌렀어. 더 웃긴 건, 사상자가 없다는 점이야.”
“……!”
30층 구간과 40층 구간의 차이는 단순히 숫자로 따질 만한 것이 아니다.
힘의 척도를 판단하는 기준은 여러 가지가 있다.
스테이터스, 스킬, 클래스, 장비 등등.
그러나 무엇보다 신뢰도가 높은 건 역시 공략한 층의 높이다.
5층과 10층의 차이는 그다지 크지 않다.
하지만 10층과 15층의 차이는 크며, 20층과 25층의 차이는 더욱 크다.
검은 탑은 각 층의 앞자리가 바뀔 때마다 그 난이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진다.
하물며 40층에서 2차 클래스 업그레이드를 했을 헌터들과 그렇지 않은 헌터들이라면?
평범한 경우를 생각해 보면, 숫자가 몇 배나 차이가 나지 않는 이상 2차 클래스 업그레이드를 못한 자들이 떨어질 게 분명하다.
‘대체 전쟁의 왕이 무슨 짓을 한 거지?’
단순히 씨앗을 가졌다고 이토록 강해질 수는 없다.
씨앗은 말 그대로 힘을 개화하기 위한 재능에 불과하다.
그 재능을 개화하는 것에는 노력이라는 영양소가 필요하다.
그리고 노력은 당연히 시간이 따르는 법이다.
그런데 전귀 길드 소속, 소위 각성자라 불리는 자들은 그런 시간 같은 건 깡그리 무시한 채 괴물 같은 속도로 탑을 오르고 있다.
과거, 인한보다도 빠른 속도로.
-재밌어, 아주 재밌어.
아테리너스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인한이 표정을 구긴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뭐야? 뭘 하려고?”
“만나 볼 생각이다.”
“누굴? 전귀 길드를?”
“그래.”
“잘 생각해라, 인한아. 그들이 전쟁의 왕의 계약자들이란 건 우리밖에 몰라. 일반인들 입장에서 그들은 그냥 평범한 헌터들에 불과해. 그것도 무지막지하게 강한.”
“그래서?”
“거기에 네가 나선다면…… 치고 올라오는 사람들 무서워하는 치졸한 사람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을 거야.”
“그렇군. 그런데 말이야…….”
“……?”
“대놓고 나랑 적대시하는 놈의 힘을 받은 조직이 있는데, 이대로 내버려 둬?”
“…….”
생각해 보니 그것도 그랬다.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던 이정환에게 인한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일단 한번 보자고. 어떤 놈들인지.”
* * *
전귀 길드는 36층을 공략 중이었다.
온갖 벌레들과 정체 모를 생명체들이 그들을 향해 달려들었으나, 그들은 거리낌 없이 전진, 또 전진했다.
때때로 오러가 터져 나왔고, 마법과 정령술이 폭발하기도 했다.
“정면.”
“알아.”
“뒤에도…….”
“…….”
그들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들은 한 몸이 된 것처럼 움직였다.
단순히 손발이 잘 맞는 정도가 아니었다.
서로가 본 걸 동시에 본다.
후방을 보던 길드원이 전방의 적의 존재를 알아채고, 정찰 나갔던 길드원이 보고하지 않았음에도 전원이 상황을 이해했다.
그리고 어느 시점이 지났을 때, 그들은 서로가 느낀 걸 동시에 느끼기 시작했다.
그때부턴 대화도 사라졌다.
감각, 감정을 넘어 정신까지도 공유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움직임에 빈틈은 없었다.
213명의 전귀 길드원은 한 마음 한 뜻이었다.
그런 그들의 앞에.
턱!
한 사내가 나타났다.
그의 이름은…….
“너희가 그 각성자인가 뭔가 하는 놈들이냐?”
발터 에스키엘.
인류 최강이라 불리는 남자였다.
검은 탑 출현 이후 단 한 번도 떨어진 적 없는 부동의 1위.
전 세계의 국가 기관과 수많은 헌터 길드에서 그를 찾아 헤맸지만, 그는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로 유명했다.
얼굴이나 인상착의, 특징과 전투 방식 등은 제법 알려졌지만, 그마저도 사실이 확인되지 않은 것들투성이었다.
오히려 킬러로 유명한 레오가 더 많이 알려졌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에 대해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었으니.
그는 강하다는 사람이 있다면 무작정 찾아가 싸움을 건다는 점이었다.
상위 랭커 대부분이 그와 부딪힌 적이 있었고, 굳이 랭커가 아니더라도 조금 특이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진 자의 앞에는 언제나 그가 나타났다.
언젠가, 랭킹 10위의 헌터이자 유명 영화배우로도 유명한 니콜라스 라이언이 인터뷰한 내용에 그가 언급된 적이 있었다.
-그자는 싸움에 미친 놈이야!
메인 던전 공략 중, 다짜고짜 이름을 물어보더니 주먹을 휘둘러 왔다는 모양이다.
당시에 니콜라스는 중상을 입고 있었는데, 그럼 자기도 상처를 입으면 공평하다며 주먹으로 자기 자신의 한쪽 팔과 다리뼈를 분지르는 자해를 하면서까지 싸움을 걸었다고 했다.
그런 그가 전귀 길드 앞에 나타난 건,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213명 전원이 눈가를 찌푸렸다.
동시에 이루어진 그 모습에 발터가 호오, 하고 낮게 감탄성을 내뱉었다.
“네놈들, 전원이 한 명이고 한 명이 전원이군?”
그러자 전귀 길드 전원이 동시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에게는 자기 자신들의 상태에 대한 자각이 없었다.
그마저도 눈치챈 것인지, 발터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귀찮게 얘기하고 그런 건 내 취향이 아니다. 너희들은 나보다 약하고 층수도 낮지만, 숫자가 많으니 공평하겠군.”
말을 마치자마자 발터가 다짜고짜 주먹을 날려 왔다.
분명 단순한 주먹이었는데…….
콰아아아아아-!
광선이 터져 나왔다.
“크으으으!”
그 공격을 간신히 막아 낸 전귀 길드 전원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대화 한 마디 없이 전귀 길드는 전투태세에 돌입했다.
“사나이 된 자, 자고로 크게 놀아야 하는 법!”
발터가 갑자기 옆으로 손을 쭉 뻗더니 집채만 한 암석을 끌어안았다.
쿠구구구!
지축이 흔들리며 지면이 뒤집어졌다.
5층짜리 빌라 정도 크기의 돌덩이가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흐압!”
그 돌을 향해 발터가 뛰어오르고.
한 줄기 외침과 함께, 발터가 암석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콰가가가가!
돌의 파편이 오러를 머금고 지면으로 쏟아졌다.
말이 좋아 파편이지, 하나하나가 농구공만 한 크기였다.
거기에 휘감긴 오러가 전귀 길드를 향해 쏟아지자 폭격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 발생했다.
“호오! 너희 같은 놈들은 처음이다! 재밌군!”
하지만 전귀 길드는 그 공격을 막아 냈다.
누가 어떤 파편을 막아야 하는지에 대한 사전 동의도 없이 곧바로 움직인 것이다.
복잡하게 이리저리 뒤섞이며 움직이는데, 그 누구도 부딪히고 다치는 경우가 없었다.
투웅!
발터가 지면을 박차며 달려들었다.
흙더미가 뒤편으로 후두두 튀어올랐다.
어느새 전귀 길드의 코앞까지 다다른 발터가 주먹을 휘둘렀다.
콰아아앙!
그건 그야말로 포탄이었다.
주먹 끝에 집중된 오러가 폭발을 일으키며 사방을 휩쓸었다.
가를 찌푸린 전귀 길드의 몇 명이 폭발을 향해 몸을 날렸다.
뿌드드득!
살과 뼈가 우그러지는 섬뜩한 소리.
세 명의 길드원이 몸을 날려 공격을 막아 낸 것이다.
“전체를 위해 소수가 희생했다, 이거냐? 역시 재밌는 놈들이군!”
발터가 눈을 부릅뜨며 미소를 지었다.
평범한 사람의 입장에선 소름 돋기 그지없는 일이었건만, 발터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쾅! 쾅! 콰앙!
발터가 주먹을 휘두르며 전귀 길드의 중앙으로 파고들었다.
수없이 많은 오러와 마법, 정령술까지 쏟아졌으나 발터의 몸에는 상처 하나 없었다.
그가 몸에 걸치고 있던 장비들만이 허무하게 내구도를 다하고 지면에 떨어졌을 뿐이었다.
발터가 주먹을 쭉 끌어당겼다 지면을 향해 내리쳤다.
“디스트로이 타이푼!”
콰아아아!
그 순간, 발터를 중심으로 오러의 폭풍이 일어나 주위를 휩쓸었다.
언제나 함께 붙어 있던 전귀 길드 전원이 뿔뿔이 흩어지며 사방으로 튕겨져 나갔다.
“어디, 서로 떨어져 있는 상황에서는 어떻게 대응하나 볼까?”
발터가 날아가지 않고 지면에 검을 박은 채 버티고 있는 자에게 돌려차기를 뻗었다.
뻐어어엉!
뻗어 나간 발차기가 공성추와 같았다.
오러가 화악 퍼지며 가공할 뇌성을 터뜨린다.
우우웅!
그 순간, 발차기의 궤도에 집약된 바람과 실드 마법이 서렸다.
그 모든 게 발차기의 위력을 줄였다.
풍선 수백 개가 동시에 터지는 소리와 함께 전귀 길드원이 발터의 발차기에 얻어맞아 날아갔다.
“전방위에서 시선을 공유하는 건가. 자잘한 일을 하더라도 컴퓨터처럼 병렬해서 계산을 하는군. 전원이 하나가 아니라, 전원이 하나로 연결된 것이었군!”
콰앙!
발터가 주먹을 정면으로 뻗었다.
무지막지한 일격은 대포를 연상시켰다.
단순한 정권지르기에 불과했으나 작은 동산 하나는 그대로 소멸시켜 버릴 정도의 위력이 뿜어져 나왔다.
터어엉! 터어엉!
전귀 길드원들이 낙엽처럼 튕겨져 나갔다.
그러나.
푸욱-
뒤편에서 울리는 소름 돋는 소리.
발터는 등에서 격통을 느꼈다.
“호오. 다 다른 성향이라 이거냐? 저놈들은 나름 정면대결을 선호하는데…… 네놈들은 암습을 선호하고…… 이거 정말 알면 알수록 의아하군. 대체 누가 무슨 의도로 네놈들을 만든 걸까?”
꽈아앙!
말을 하면서도 쉴 새 없이 공서추와 같은 위력의 주먹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졌다.
뒤에 암습을 가했던 길드원이 지면에 처박혔다.
발터는 등에 박힌 검을 분지르고는 잡아 뽑아 버렸다.
한동안 줄줄 피가 흘러나왔지만 이내 출혈이 멈췄다.
“너희들은 재밌어. 놈을 잡기 전의 전초전으로 아주 딱이야.”
발터가 씨익 웃으며 달려들었다.
* * *
아발론의 일곱 왕좌.
전쟁의 왕의 왕좌에 앉아 있는 아테리너스가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정중앙에 있는 수정구를 바라보았다.
“저건 또 뭐야?”
느껴지는 바로는 씨앗도 없고 특별히 다른 힘도 없다.
있는 거라고는 오로지 오러뿐이다.
그런데 강하다.
아니, 그 말로는 부족할 만큼 무지막지하게 강하다.
-그자군.
그때 그의 옆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병마의 왕. 검은 입자가 뭉게뭉게 뭉쳐 있는 존재.
아테리너스가 눈가를 찌푸리자, 병마의 왕이 말을 보탰다.
-나를 역소환시킨 자 중 하나. 나의 독과 병마에 저항한 존재.
“흥흥, 역시 저 세계는 재밌다니까.”
아테리너스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역시 너는 미쳤다.
“음? 뭐가?”
-왕의 파편을 한데 모아 놓고, 병렬 연산을 하는 방법을 만들어 냈지.
“응응, 그런데?”
-너는…… 왕을 만들어 낼 생각인가?
아테리너스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새빨간 그녀의 입술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정답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