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략자들-218화 (218/266)

# 218

<공략자들 218화>

코어 스톤 외에는 어둠 외에 아무것도 없는 정체불명의 공간.

드래곤의 형상을 하고 있는 시초의 왕과 네 겹의 날개를 가진 괴조의 형상을 한 지혜의 왕이 눈가를 찌푸렸다.

“뭘 한 거지?”

한동안 생각에 잠겼던 지혜의 왕이 눈가를 찌푸리고는 대답했다.

“가만히 때를 기다리라고 그렇게 말했거늘.”

“언제는 네 말을 들었던가? 흐흐!”

시초의 왕이 웃음을 터뜨렸다.

종족 특성상 표정을 잘 알아보기 힘든 게 드래곤이다.

하지만 그의 미소는 확연히 능글맞다 느껴질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잠깐 기다려라.”

잠시 하던 작업을 멈춘 지혜의 왕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지혜의 왕이 눈가를 찌푸렸다.

“미쳤군.”

“뭘 한 건데?”

“그놈, 자신이 가졌던 마왕의 왕좌 일부를 쪼개고 쪼개서 씨앗과 함께 계약 조건으로 세상에 풀었다. 그리고…… 하! 드워프도 관여한 모양이군. 계약을 하기 위해 드워프의 무구(武具)와 요정족 특유의 권능을 조건으로 내밀었다.”

“무구와 권능은 그렇다 치고, 마왕의 왕좌? 그럼…… 전투의 왕?”

“그래.”

시초의 왕이 고개를 저었다.

“히야, 그놈 어지간히 미친 짓을 벌였네. 뒷감당은 어떻게 하려고 그러지?”

“뒷감당을 생각했다면 애초에 일을 벌이지도 않았겠지. 역소환된 이후 정보를 요청했을 때 이상하다 생각했건만…… 설마 이런 짓을 벌일 생각이었을 줄이야.”

“재밌어, 재밌어. 흐흐!”

낄낄대며 웃는 시초의 왕을 한심한 눈길로 쳐다보던 지혜의 왕이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작업을 계속하지. 오히려 이 세계의 총량이 커진다면 우리에겐 좋은 일이다. 동기화 작업에 도움이 될 테니.”

“그런데 말이야, 지금 우리가 하는 거 가능하기는 해?”

“뭐가 말이지?”

“성공한다 해도 라스틴이 방해할 게 분명하잖아.”

“그 일은 상관없다. 놈은 계약을 어기게 될 테니까.”

“흐음? 그럴 거라고 확신하는 투네?”

“안배를 해 뒀으니까. 이 세계의 원주민들은 100층에 닿을 것이다.”

“흐흐, 너도 악취미라니까. 이 세계 사람들은 100층에 닿으면 모든 게 끝나는 줄 알고 있을 텐데 말이야. 네 계약자도 그렇지 않나?”

시초의 왕이 꼬리를 흔들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지혜의 왕이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뻗었다.

그리고 홀연히 천문 몇 가지가 공간에 떠올랐다.

[레갈리아가 인식되었습니다.]

[접속 코드가 인식되었습니다.]

[코어 스톤에 접속합니다.]

[아카식 레코드에 접속합니다.]

……

[테라포밍 진행률 : 13퍼센트]

* * *

격변의 날.

왕들이 자신의 ‘유희용 육체’라는 것을 통해 이 세계에 찾아온 날.

인한은 그날의 진상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놈들은 자신이 움직이거나 자신의 씨앗 보유자를 통해 정보를 얻는 것으로 ‘마왕의 씨앗’을 찾고자 했다.

그리고 놈들이 미친 영향으로 인해 때때로 탑에서 변종 몬스터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인한은 자기 자신이 마왕의 씨앗을 보유하고 있을 거라는 점과 분명 이정환도 그러리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전쟁의 왕, 병마의 왕, 폭식의 왕.

무려 세 번의 전투를 통해 모두 역소환시켰다.

그러나 폭식의 왕과의 전투 이후, 왕들은 인한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 뒤로 박철환이 보여 준 정체불명의 ‘왕의 힘’을 제외하면, 왕과 관련된 것이 드러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

인한은 이미 한 번 느껴 본 적 있는 전쟁의 왕의 기운을 너무나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51층부터는 다들 휴식을 취한 후 며칠 뒤에 다시 진행하도록 한다!”

다급한 인한의 말에 길드원들 모두가 의아했다.

51층이 공략된 직후에 말했다면 모를까, 아직 낮인 데다 차근차근 필드를 나아가고 있던 중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길드원 전원은 의문 하나 제기하지 않고 조용히 탑 밖으로 나갔다.

해태 길드에 있는 씨앗 보유자들만이 나가지 않고 사무실에 모였다.

이정환이 표정을 굳혔다.

“이게 무슨 일이지? 설마 또 격변의 날 같은 게 일어나는 거야?”

격변의 날, 수많은 헌터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와 비슷한 일이 또 발생하면 얼마나 많은 피해가 일어날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사무실에 있는 이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어렸다.

‘아니야. 조금 느낌이 이상해.’

인한이 눈가를 찌푸렸다.

이번에 느껴진 건 전쟁의 왕의 기운뿐이었다.

인한은 아직도 그 소름 돋는 집착을 기억하고 있다.

소멸하면서까지 인한을 향해 계약을 들이밀었던 여인.

“일단…… 상황을 조금 지켜봐야 할 것 같다. 내 생각엔 그 정도로 큰일은 아닌 것 같아.”

“그래? 네가 그렇다면야…….”

이정환이 말끝을 흐린 순간이었다.

“……?”

이정환과 인한, 세릴이 모두 흠칫 놀라며 해태 길드의 사무실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씨앗 보유자 특유의 기운.

‘어떻게?’

인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아무리 씨앗을 보유하고 있더라도 그걸 감지하는 건 백사장에서 바늘 찾기나 마찬가지다.

인한 정도 되면 어느 정도 감지할 수는 있지만, 그것도 모호한 정도로만 느껴질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수십, 수백에 달하는 기운.

백사장의 바늘도 한 뭉텅이가 놓여 있다면 찾을 수밖에 없다.

“뭐지? 대체 어떻게?”

씨앗 보유자의 수는 전 세계를 뒤져도 결코 많지 않다.

그런데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사람들에게서 씨앗의 기운이 느껴졌다.

인한이 바로 뛰쳐나갔다.

시작의 마을의 길거리로 나온 순간, 더욱 확실해졌다.

사방에서 불길한 기운이 느껴진다.

인한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단순히 씨앗 정도가 아니야!’

근거리에서 감지한 후에야 알 수 있었다.

이건 씨앗 따위가 아니었다.

힘의 크기나 질은 낮지만, 분명한 왕의 기운.

이곳에 수십 수백의 왕들이 걸어 다니고 있다.

뒤이어 뛰쳐나온 이정환과 세릴의 낯빛도 딱딱하게 굳어졌다.

‘대체 어떻게?’

인한이 당황해하고 있을 때였다.

왕의 기운을 품고 있는 자들 전원이 돌연 우뚝 멈춰 섰다.

우웅!

직후, 그들에게서 갑자기 마력이 흘러나와 주위를 잠식했다.

반구의 형태로 번진 마력의 장막이 주위에 내려앉아, 다른 이들과 인한을 떨어뜨려 놓았다.

인한을 가두거나 그에게 해를 끼치려는 행위가 아니었다.

마력의 장막 안쪽으로 초대받지 않은 사람이 접근하는 걸 제한하기 위해 펼쳐진 것이었다.

“…….”

인한이 굳은 표정으로 스무 명에 가까운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저마다 다른 복장, 다른 인종의 사람들.

그들이 마치 목각 인형이 움직이듯, 뚝뚝 끊기는 어색한 움직임으로 인한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갑자기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야.”

수십 명의 사람의 수십 개의 입에서 동시에 똑같은 말이 흘러나오는 목소리 또한 같았다.

인한은 언젠가 들었던 목소리에 입술을 깨물었다.

“전쟁의 왕…….”

“너, 마왕이랑 계약한 거였다며? 연기 진짜 잘하던데. 나는 당연히 씨앗이 없는 줄 알았잖아. 박수를 쳐 주고 싶어.”

짝! 짝! 짝!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손뼉을 쳤다.

“뭘 하려는 거지?”

“말했잖아. 난 한번 갖고자 한 건 놓치지 않아. 난 널 갖고 싶어.”

“거절한다. 절대 그럴 일은 없을 테니까.”

그러자 인한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빛이 기이하게 빛났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뭘 오해하고 있나 보군. 이런 놈들 수백 명이 달려들어도 나한테 흠집조차 낼 수 없을 거다.”

인한의 말에도 사람들은 그저 재미있다는 듯한 표정으로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러다 웃음소리가 뚝 멈추더니 이번에는 각기 다른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말했잖아, 난 한번 노린 건 놓치지 않아.”

“무슨 일이 벌어질지. 정말로 기대 돼.”

“재밌어. 아주 재밌어.”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위를 막아서던 마력의 장막이 흩어지며 사라졌다.

“응? 뭐야?”

“방금 뭐지?”

주위 사람들, 그리고 왕의 기운을 품은 자들.

모두가 의아해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본 인한과 이정환만이 눈가를 찌푸린 채 정색했다.

* * *

검은 탑 1층, 히든 던전 고대인의 도피처.

이제는 대다수의 헌터들이 관심도 주지 않는 던전인 고대인의 도피처는, 사실상 필드에 가까운 취급을 받고 있었다.

기껏해야 플러들이나 들락날락하는 곳.

플러들의 입장에서도 운 좋게 각석을 얻는 게 아니라면 돈도 많이 벌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런 고대인의 도피처 입구.

몬스터 오크의 앞에 네 명의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래도 뭐…… 요즘에는 많이들 안 오니까 괜찮겠지.”

플러들은 보통 혼자서 다니는 경우가 많지만, 이렇듯 모여서 팀을 이룬 채 자신들의 수준보다 낮은 던전에 들어가는 경우도 있었다.

이 팀의 사실상 팀장을 맡고 있는 김 씨는 헛기침을 몇 번 하는 것으로 팀원들을 집중시켰다.

“에…… 조금 조심해서 하도록 하고, 내가 몇 번 들어가 봤으니까 앞에 설 것이고…… 그리고…….”

구구절절 이어지는 설명.

그렇게 말하는 김 씨나, 듣는 팀원들에게는 그저 형식적인 절차일 뿐이었다.

위험하다는 생각은 그들의 머릿속에 전혀 들어 있지 않았다.

곧 그들은 던전에 들어섰다.

그리고 당연하다면 당연하달까.

충분히 조심했지만 팀은 몬스터의 역공을 받아 뿔뿔이 흩어져 고립되고 말았다.

김 씨가 자책하며 땅바닥을 펑펑 두드렸다.

‘아이고! 내가 조심을 했어야 하는 건데…… 그 녀석은 어떻게 한다. 아이고!’

하필 팀에는 소년 가장이 있었다.

어지간한 알바보다 플러 일이 시급이 좋다는 말에 속아 사채업자들에 의해 강제로 헌터가 된 17살 소년.

실력도 실력이지만, 워낙 겁이 많아서 전투는 물론 도망치는 것도 못하는 아이였다.

그때였다.

-크륵?

몬스터 세 마리가 접근해 왔다.

좀비 두 마리와 스켈레톤 병사.

‘크, 크, 큰일……!’

후다닥 일어난 김 씨가 도망가려 했지만, 하필이면 그 순간 돌부리에 걸려 땅바닥에 철퍼덕 넘어지고 말았다.

-크르르!

그때를 노리며 좀비가 땅을 박찼다.

‘아, 안 돼!’

콰아아앙!

그 순간, 거친 폭발음과 함께 세 마리의 몬스터가 동시에 튕겨 나갔다.

“뭐, 뭐시여…….”

덜덜 떨던 김 씨가 고개를 들었을 때.

17살짜리 겁쟁이 소년이 검을 든 채 김 씨를 바라보았다.

“너, 너, 어, 어떻게?”

절로 말이 떨렸다.

소년은 대답하지 않고 좀비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뭐, 뭔 놈의 눈빛이!’

콰앙! 콰앙!

소년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폭음이 울려 퍼졌다.

그것은 도저히 1층에서 허덕이던 겁쟁이 헌터의 힘이 아니었다.

어엿한 한 명의 헌터.

그것도 믿을 수 없이 강한 힘을 가진 사람의 힘이었다.

그런 일이 탑 전역에서 발생했다.

고립된 후 갑자기 강해져 돌아온 헌터.

선임 헌터의 밑에서 배우던 후임 헌터가 대련 중 갑자기 선임 헌터를 때려눕힌 일.

어중이떠중이의 랭커였으나 갑작스레 중위권까지 상승한 자.

한두 명이 아니었다.

깨달음과 기연은 검은 탑에서 그다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일이었으나, 그 수가 수백 명을 넘어가자 다들 경악했다.

옛 신화 속 전투의 신이 강림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들은 규격 외의 전투력을 보여 주기 시작했다.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은 그들을 각성자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각성자가 등장한 지 3개월이 되던 날.

전귀(戰鬼)라 불리는 각성자의 연합이 탄생했다.

0